이상하다. 우리는 경제적 발전을 이루지 못한 민족이나 부족들을 미개하다고 생각한다. 인류는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고 거듭되는 과학혁명 덕분에 문명의 발전에는 가속도까지 붙고 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그 발전만큼 우리는 행복한가? 이른바 뒤쳐진 국가들과 민족들, 부족들은 불행한가? 혹시 자본주의 발전의 혜택들에 눈이 멀어 이 거대한 금자탑아래 깔린 이들을 외면하면서도 당연시하고 있지 않은가? 과거에는 재화가 풍족하지 않았지만 자급자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인류는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살 수가 없고 먹을 수도 없다. 긴 시간 노동해야 돈을 벌 수 있고 그 대가는 노동에 비해 부족할 뿐 아니라 대부분의 이익은 극소수에게 돌아간다. 이상하다.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지만 평생 벌어도 집 한채를 마련하기 힘든 세상에 살고 있다. 아프리카에서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기아에 시달리고 분쟁지역은 여전히 국민을 사지로 내몰아 난민을 양산하고 있으며 동남아시아, 동유럽 국가에서는 가난과 결핍때문에 아동성매매와 장기매매로 암흑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과연 이게 발전된 문명의 혜택을 받고 있는 것인가? 혹시 인류는 쇄사슬 없는 자본주의 노예상태에 놓여 있는 건 아닐까?
1996년 로마에서 <유엔식량농업기구>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8억 4천만 명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 <유엔식량농업기구>는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 수가 2015년 무렵이면 반으로 줄어든다고 보았지만, 예상과 달리 그 수는 지난 10년간 8억 5,400만 명으로 늘었고, 그중 8억 2천만 명이 개발도상국에 거주한다. 1996년에는 12억 명이 심각한 식량 부족 사태를 겪었는데, 그 수는 이제 17억 명으로 늘어났고, 주로 아시아와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에서 증가했다. p.406
"세계상위 1% 부자 재산이 나머지 99%보다 많다" | 연합뉴스 (yna.co.kr)
https://www.yna.co.kr/view/AKR20160118069100009
어떤 방송에서 근사하고 큰 집을 지어 시 외곽에 살게된 부부를 보여준다. 한옥과 현대식 건축을 잘 조화시킨 이 멋진 집은 두 사람이 살기에는 규모가 커 보였지만 꽤나 여유롭게 느껴졌다. 남편의 작업실은 마치 창고형 주차장같이 층고도 높고 널찍했는데 내가 놀란것은 배란다 한켠에 자리잡은 아내의 가로 1미터도 안되어 보이는 비좁은 책상이었다. (배란다 딸린 그 방을 아내가 다 사용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녀의 방이었다면 굳이 책상을 좁은 베란다에 내 놓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집이 작고 공간이 부족했다면 어쩔 수 없지만 집이 크고 방도 많은데 사랑하는 아내의 책상은 좁은 베란다 그것도 구석에 초라하게 자리잡았다. 그래 아내가 원했다고 치자. 그정도만 필요하다고 했을 수 있다. (아내는 책 읽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럼 부엌은 어떤지 보자. 아니 사실 볼 필요도 없었다. 내 예상대로 부엌은 비좁은 독서공간에 비해 훨씬 크고 널찍하다. 남편의 작업실을 연상 시킬만큼 컸고 수많은 그릇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분명 아내를 위한 공간으로 의도된 것이고 아내도 만족했을 것이다. 하지만 부엌은 엄연히 노동의 공간이다. 그 두 사람이 알지 못할 뿐.
여성은 주부로서 자신을 가정과 동일시하면서 , 집안일을 강박적일 만큼 완벽하게 해 내려는 성향을 보인다. 집에서는 항상 할 일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을 우리는 모두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여성은 자신을 둘러싼 사방의 벽 너머를 보지 못한다. 주부의 처지란 전자본주의적 노동 양식이며, 그 결과 '여성성'을 부여받는다. 이 때문에 여성은 세계,타인, 전체 노동 구조를 모호하고 , 근본적으로 알려지지도 않았고 알 수도 없으며, 경험한 적 없는 어떤 것으로 여기게 된다. 여성에게 세계, 타인, 전체 노동 구조는 매일 밖에 나가 이것들을 만나는 남편의 어깨 뒤로 비치는 희미한 그림자로 인식될 뿐이다. p.43
가사 노동에 임금을 부여하면 사회에 대대적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일단 여성이 집에서 하는 일을'노동'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주부인 여성이 '집에서 논다'는 말을 듣지 않게 되고, 매일 수십 가지의 노동을 하면서도 금전적 보상을 받지 못해 영원히 사회적 약자로 머무는 상태에서도 벗어난다. p.187<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
가사노동은 당연한 것처럼 고착화되어 자본주의 착취의 근간이 되었다. 부불노동(=무임금 노동)인 가사 노동 없이는 노동자의 재생산 기능은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전쟁터라면 임금 노동자에서 제외된 여성은 전쟁터의 군인에게 할당된 전리품에 불과하다. 전리품이 된 여성을 만족,유지시키기 위해 체제에 순응하는 완벽한 여성을 숭고한 어머니. 현모양처라는 타이틀을 달아 적극 홍보하고 미화,권장하는 것이다. 임신 중단이 여성의 신체에 관한 문제임에도 불법화되고 사회적 감시하에 놓이는 원인은 이런 맥락이다. 그리고 각종 화려한 ‘코르셋‘으로 치장하고 장식할 수 있게 해 착취와 전리품적 기능을 꾸준히 유지시키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사치와 자기만족적 소비,과시적 소비로 인해 스스로가 전리품이고 노예라는 암울한 현실에서 일시적인 만족, 도피가 가능하다. 이것은 자본주의 관점에서 남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본질은 의식, 무의식 속에 바뀌지 않고 유지되기 때문에 어느 지점에서 혼란을 느낄 수 있다. 여기서 분명한 자각으로 가느냐 외면하고 현실에 안주하느냐 양자택일의 기로에 놓인다. 현실 안주는 마치 마약에 중독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헤어나기 힘든 유혹임과 동시에 자존감 저하와 의존적 삶으로 가는 무기력하고 막다른 길이다.
남성의 상품 생산 노동에는 보수가 주어지는반면, 여성의 노동력 생산 및 재생산 노동은 그렇지 않았다. 임금 경제에서 임금없는 노동자가 된다는 것은 여성에게 견딜 수 없는 모순이었다. 이런 차이 때문에 남녀 사이에 위계가 만들어졌다. 주부(당시 이탈리아는 주부 비율이 특히 높았다)는 끊임없이 가족 전체를 재생산하는 노동을 수행하도록 요구되지만, 남성의 부양에 의존해야만 하고, 이 의존 상태가 삶의 모든 선택지들을 방해했다. p.168
그렇게 부불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은 산업화가 일어나면서 여성들에게 고통을 가중시켰다. 일을 하는 여성에게도 부불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은 예외가 아니었다. 산업화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여성들의 의식은 더욱 고양되었고 곳곳에서 부불 가사노동과 여성들의 처우에 관한 투쟁이 일어났다. (이전에도 투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국가와 지역이 달랐지만 투쟁이 가리키는 바는 유사했다. 정치적 권리행사,적절한 임금,교육적 요구, 강제 결혼으로부터의 자유,폭력과 학대에 관한 법적 조치들같은 남자들에게는 당연했지만 여성들에게 배제된 것들이었다. "자본주의적으로 조직된 모든 영역은 가정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 p.43 부불 가사노동의 기반 위에서 노동자에 대한 자본주의의 착취는 계속해서 기능할 수 있었다. 이것 역시 여성의 전리품적 기능이었다. 그로 인해 남성들은 일터에서 세울 수 없는 권위를 가정에서 세울 수 있었고 자본주의 착취행위를 묵인,수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세대가 거듭될 수록 여성들은 이런 착취의 구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가사 도우미가 생겼고, 적절한 임금체계가 갖춰지기 시작한다. 부불 가사노동이 간적접인 방향에서 가치가 매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제3세계 여성은 출신 국가에 남든 혹은 좀 더 선진화된 지역으로 이주하든, 제1세계에 저렴한 재생산 노동력을 더 많이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30 이때 노동력이란 섹스 관광이나 성매매, 가사노동, 육아 혹은 노인 및 병약자 돌봄과 관련된 노동력을말한다. 선진국에 아동을 공급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p.235
하지만 이것도 역시 서서히 거부되기 시작한다. 근본적인 착취구도가 유지되고 고통은 결국 한계에 이르기 때문이다. 결국 해외에서 가사 노동력과 돌봄 노동력을 수입해야 하는 상황이 되고 이것은 이 노동자들의 본거지인 제3세계에 또다른 어려움과 문제를 만들어낸다. 그와 동시에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로의 이행과정에서 국제기구의 적극적인 역할 아래 다국적 기업은 토지와 식량 주권을 빼앗고 자신들의 이익을 축적하며 토양을 오염시켰다. 거주지에서 쫒겨나고 삶의 터전을 빼앗긴 토착민들과 주민들 중에서도 일부는 착취자들이 만든 일자리를 얻기도 했지만 영구적이지도 않았고 자리 자체가 많지도 않았으며 대부분 남성들이 고용되었다.
전통적으로 여성들은 전쟁 체제에서 개별적인 역할을 수행해 왔는데, 이는 산업 경제에서도 수행했던 것들이다. 정치적 관점으로 사회를 분석할 때, 노예제, 인종차별주의,성차별주의 등은 기본적으로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면서 그 재쟁산을 보장하는 수단으로 설명할 수 있다.p.76<성차별주의는 전쟁을 불러온다>
여성과 아이들,노인들은 전쟁이 나거나 유행병이 돌거나 일자리가 부족하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취약 계층이다. 자본화 된 전쟁과 대량 농업,다국적 기업에 의한 토지 착취,식량체계를 약화시키는 유전자 조작,자본주의의 높은이익과 생산성추구는 단기적인 이득만을 추구하는 것으로 장기적으로 볼때 노동력 재계층화를 비롯한 빈부격차를 가중시키고 소수의 부유층과 엘리트만을 위한 세계로 악화된 발전을 가져올 뿐이다. 그 중에서도 토지 사유화,강제수용 이 두가지는 세계 기아의 근본원인이다.
자본주의는 여성을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고 땅을 살아 있는유기체로 인정하지 않는 것을 토대로 발전했다. 여성과 땅 모두 비용이 들지 않는천연자원으로 인식하고, 노동과 식량이라는 상품을 생산하는 기계로 취급했다. p.393
앎은 예민해 지는 것이다. 더 알게 되면 불편한 것들이 눈에 띈다. 불편한 것들이 눈에 띄면 잘못된 관행들, 모순들이 보이고 소외된 사람들, 망가지고 훼손된 자연이 시야에 들어온다.자연,여성,아이들,비슷한 양상으로 착취당하고 비슷한 위기를 맞고 있다. 경제,사회,환경 측면에서 새로운 윤리에 의한 접근, 생태계를 존중하는 새로운 윤리기준과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대안으로 소규모농장,지역경제활성화,개방사육,적정보수 확립을 통한 식랑주권 되찾기가 필요하다. 발전과 진보만이 유일하고 필연적인 미래는 아니다. 소수의 강력한 기득권 세력들의 이익추구와 이에 발맞추는 생명공학의 위험성과 그로인한 자기 재생산,영양다양성등의 위기는 심각한 수준이다. 코로나가 그 증거이자 자연의 반발이고 제동이다. 자본주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반대하는 것은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의 말처럼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런 인식이 다수인 피착취자들 사이에 퍼지면 의문을 갖게 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