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때로 진실임직하지 않다"-니콜라 부알로,<시법>-역자해설 중
※주의:공감능력이 큰 분들,심약한 분들에게는 비추!
잔인한 장면 없이 잔인한 작품이다. 한 사람의 인생을 이렇게 해부하고 그의 몰락을 이렇듯 세밀하게 묘사한 작품을 일찍이 본 적이 없다. 1권에 이어 주인공 제르베즈의 삶을 계속 따라간다. 구두쇠에다 인정머리 없고 사악한 시누이네 로리외 부부의 악행은 변함없이 제르베즈를 시기하고 조롱한다. 그녀의 주위를 멤돌던 전남편 랑티에는 현남편 쿠포와 어느새 죽이 맞아 친구가 되고 결국 기막히게도 세남녀가 한살림을 차리기에 이른다. 전남편 랑티에는 이들 부부곁에서 마치 기생충처럼 제르베즈의 가정을 파탄으로 몰아가며 모조리 먹어치운다. 영화 기생충은 여기에 비하면 순한맛이다. 그녀는 서서히 망가져가며 결국엔 순수한 버팀목이자 사랑이었던 구제마저 등을 돌리게 만든다. 제르베즈는 자신이 두려워하던 죽음을 향해 그렇게 곧장 내달린다.
그가 바느질 도구상과 지물포, 모자 가게 여주인을 차례로 섭렵한다고 해도 그다지 놀랄 게 없었다. 그는 그 모두를 집어삼키고도 남을 만큼 아가리가 큰 남자였기 때문이다. p.228
제르베즈가 살고 있는 구트도르가의 몇몇 가정들과 서민 아파트 주민들의 비참한 생활이 각자의 칙칙한 색깔을 내며 나락으로 떨어지는 제르베즈를 더욱 선명하게 빛낸다. 이른바 유전적 기질이라는 것이 시한폭탄처럼 잠재해 있다가 순간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안전장치가 서서히 빠진 한 가정을 비극으로 치닫게 한다. 에밀 졸라의 자연주의란 이런 것인가. 제목의 '목로주점'이란 곳은 등장하지 않지만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벗어나 들르는 주점들은 고된 노동에 지친 그들의 목을 축여주는 동시에 그들을 쉬이 타락하게 하고 그 가족들까지 파멸로 끌어가고 만다. 타지로 보낸 두 아들의 빈 자리를 채웠던 딸 나나도 영성체를 치른 뒤 공장에서 일하며 돈을 벌게 되지만 얼마 안가 부모가 휩쓸린 파멸의 회오리에 몸을 맡긴다.
무엇보다 슬픈 것은, 애정이며 여타의 감정이 카나리아처럼 새장 밖으로 날아가버렸다는 사실이었다. 그들만의 작은 세계에 남아 있던 부모와 자식 간의 따사로운 정마저 자취를 감추면서 각자자신만의 구석에서 웅크린 채 오들오들 떨어야 했다. 바짝 날이 선 쿠포와 제르베스, 나나 세 사람은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증오가 가득한 눈빛으로 서로를 삼켜버릴 듯 악다구니를 했다. p.155
<목로주점>은 1876년 4월 13일 신문에 연재되면서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의 인기를 뛰어넘는다. 작가 에밀졸라는 <목로주점>의 인기로 궁핍함에서 벗어나 명성과 부를 얻지만 동시에 부르주아나 하층민 모두의 원성을 사고 만다. 작품 서문에서도 그런 대중을 향한 졸라의 결의를 느낄 수 있다.
내가 그리고자 했던 것은 악취를 풍기는 우리 변두리에서 살아가는 한 노동자 가족이 돌이킬 수 없이 전락해가는 과정이다. 알코올중독과 나태함은 가족의 해체와 온갖 추잡함, 바르고 정직한 감정들의 점진적 상실을 야기하며, 종국에는 수치와 죽음을 안겨주고만다. 이것이 바로 내가 보여주고자 하는 작금의 도덕론이다.(중략) 나는 나 자신에 관한 어떤 소문도 반박할 마음이 없다. 다만 시간의 힘과 대중의 양식을 믿으며 부단히 작업해나갈 뿐이다. 차곡차곡 쌓인 근거 없는 헛소문의 무게를 떨쳐내고 마침내 나 자신을 당당히 드러낼 수 있을 때까지.p.9-파리에서 에밀졸라
왜 이런 논란을 일으켰는지 작품을 다 읽고나면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다. 여주인공 제르베즈의 비극은 너무나 사실적이고 입체적이어서 읽으면서 그녀의 고통이 서서히 전이되는 느낌을 받았다. 소설이기 보다는 다큐에 가까운 생생한 목소리라 더욱 여운이 길다. 따뜻한 음식과 노동후 쉴 곳,편히 죽을 자리를 꿈꾸었던 부지런하고 소박했던 아낙의 꿈과 비극을 에밀졸라는 거침없이 낱낱이 해부해 독자앞에 펼쳐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