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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시피씨의 결혼 ㅣ 서문문고 178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지음 / 서문당 / 1975년 5월
평점 :
간만에 아주 훌륭한 희곡 두 작품을 읽었다. 아직도 감동의 여운이 남아 가슴이 울렁울렁 거린다.
지난번 <뒤렌마트 희곡선>을 통해 처음 접하게 된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희곡이다. 역시 그는 이번에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난데없이 작품보다 먼저 나오는 김창활님의 해설에 희곡에 관한 재미있는 설명이 있어 먼저 몇 자 옮겨본다.
p.5 ‘시골 학생은 소설을 읽고 도시 학생은 희곡을 읽는다‘라는 속설이 있다. 속설이니만큼 거기에다 무슨 의의를 붙여 본다든가, 척도로 삼으려 한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스러운 생각이긴 하겠지만 희곡 문학의 일면을 적절히 묘사한 재미있는 표현이라고 하겠다. 희곡 작품에는 소설에서보다 비평의식(批評意識)이 강하고, 긴장미가 앞선다. 그것은 아마도 두세 시간 내외에 승부를가려야 하는 희곡 문학의 외적 조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작가는 필요 없는 군더더기나 시간을 끄는 설명 같은 것을 깨끗하게 추려 버릴 수 있어야 극작가가 될 수 있다.
미시시피씨의 결혼
시작부터 한 사람이 총살을 당한다. 충격완화장치라나? 그리고 미시시피라는 한 검사가 최근 미망인이 된 아나스타샤를 찾아온다. 테이블 위의 커피 두 잔. 이 극의 중요한 무대 장치다. 검사는 아나스타샤가 남편을 독이 든 각설탕으로 살해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아내가 되어 죄값을 치르라고. 자신도 아내를 독살했으니 함께 치르겠다고. 대신 자신이 사형선고를 내리는 이들을 함께 지켜봐야 한다며 도덕적인 징역을 살아낼 것을 요구한다. 누구나 자신만의 신념을 가지고 형리이고자 하나 재물이 될 뿐인 반복되는 충돌의 역사. 그 안에서 언제나 이득만을 꽤하는 권력자들. 거기 기이한 막장극이 버무려져 우스꽝스럽고 철학적인 희극이 완성된다.
p.98
위벨로에: 이 바보 같은 양반에게 내가 지금 잔인한 짓을 하는구나. 흙으로 빚은 거인, 이런 사람한테 진실을 말하다니. 여자를 자기 작품 때문에 사랑하다니! 당신은 인간이 이룩해 놓은 일이 거짓이란 것을 모르오? 당신의사랑은 너무 무력하고, 당신의 법률은 너무 맹목적이란 말이오. 보시오, 나는 이 여자가 정직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불행하기 때문에 사랑해, 되찾은 양으로서가 아니라, 길을 잃은 양으로서 사랑한단 말이오.
로물루스 대제
망해가고 있는 서로마 황제 이야기. 게르만족이 쳐들어오고 있다는 긴급한 소식을 가지고 이틀 밤낯을 잠도 자지 않고 달려온 부하에게 황제는 전갈도 듣지 않고 우선 푹 좀 자 두라고 한다. 황제는 심지어 초라한 음식을 먹고 오로지 자신이 매일 먹는 달걀을 위해 양계장에 가장 신경쓰는 듯 보인다. 조상들의 흉상은 돈이 없어 헐값에 매일같이 팔아치우고 부하들에게 줄 급여도 없어 자기 월계관의 잎으로 대신 충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두 개 남음) 게다가 재무장관이 금고를 가지고 도망갔음에도 오히려 도망간 그의 안위를 걱정한다.이 황제는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p.136
로물루스(황제): 재무장관을 불러라
피라무스: 국가의 금고도 가지고 도망갔사옵니다.
로물루스(황제): 왜? 그 속에는 아무것도 들은 게 없을 텐데.
아킬레스: 그런 식으로 국가재정의 파탄을 감추려 했다 하옵니다.
로물루스(황제): 똑똑한 사람이로다. 무릇 큰 스캔들을 감추려 하는 사람은 자그마한 스캔들을 따로 하나 연출하는 게 상책이지. 그에게 조국의 수호자란 칭호를 주도록 해야겠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에 대한 비판의식이란 어쩌면 누구나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만의 상상력을 발휘해 그속에 비판의식을 마음껏 쏟아내 전혀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무나 쉽게 할 수 없는 것. 뒤렌마트는 한바탕 소동극을 통해 무거울 수도 있는 시대에 관한 문제의식을 관객이 심심풀이 땅콩먹듯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든다. 얼마나 소화시킬지는 각자의 몫이겠지만 곱씹을 수록(재독) 더 많은 맛과 향이 블랙코미디와 풍자, 철학으로 진하게 올라와 풍미를 더하는 것은 분명하다.
레아: 조국을 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사랑하면 안 된다는 건가요, 아버님?
로물루스(황제): 안 되지. 보다 인간을 사랑해야 한다. 자기 조국에 대해선 무엇보다도 회의적이어야 하는 거야. 조국이라는 것보다 더 쉽게 살인자가 되는 건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