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혼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2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로가 서로에게 별이 되는 거리

그 막막한 우주에서 '너'를 사랑하는 일

배명훈이 선보이는 새로운 차원의 스페이스 오페라

SF소설을 읽으며 배명훈 이라는 작가의 이름을 알게 된지는 꽤 됐지만 그의 작품을 제대로 읽은 것은 작년 <미래과거시제>라는 책이 처음이었다. 읽고나서 어찌나 놀랐던지. SF소설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주는 이런 작품세계를 이제야 읽게되다니 싶어서.

지난번에 읽은 책이 단편집이라 이번엔 장편을 읽기로 하곤 어찌나 기대가 되던지 ㅎㅎㅎ. (장편 이라기엔 짧지만 그래도 책 한권에 한 작품인 책이니까 장편으로 부르기로;;;;)

아, 이래서 UES(지표면연합)나 궤도연합군 사령부가 나 같은 우주 출신을 경계하는 거구나?

그렇다고 내가 그 사람들을 이해하게 된 건 아니야. 왜 우리는 서로의 우주를 배우려 하지 않을까? 지금처럼 손쉽게 상대방의 우주로 날아갈 수 있게 된 시절이 또 언제 있었다고?

그 생각을 하면 나는 지금도 웃음이 나. 너를 만나러 지구에 갔을 때 내가 지구 중력을 견디지 못해서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고 반쯤 기어다녔던 일 말이야. (p. 14)

서간문 형식으로 쓰여진 이 소설은 우주군 장교로 우주함대에서 살고 있는 '나'가 지구에 살고 있는 연인 '너'에게 보내는 편지이자 고백이자 일기이다.

지구인이지만 아마도 우주선에서 나고 자라 무중력 상태에서의 생활이 더 자연스러운 '나'는 지구에서 나고 자라 중력이 없다는 것에 적응하지 못하는 '너'를 비롯한 지구인들과의 차이에 대해, 다양한 상황속에네 내내 그렇게 '나'와 '너'의 차이에 대해 내내 생각하게 된다. 가장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서로에게 서로는 '외계인' 같았달까.

"자네가 반란군 사령관이라면서?"

"그건 그냥 장난이었는데요"

"그럴 만도 해. 감찰군 사령관은 함대를 무슨 해병대쯤으로 생각하더라고. 아, 그러게 자꾸 우주선을 배라고 부르지 말자니까. 함대라는 말도 쓰지 말고"

"함대가 해병인가요? 해병이 뭐죠?"

"아무튼 우리가 해병은 아니니까"

"그럼 뭔데요?"

"공군이지. 당연히" (p. 24, 26)

함대 작전 장교 모임 이름으로 '반란군'이란 사교 모임에서 사령관인 '나'는 감찰군에게 그 모임에 대한 사유서를 제출해야 했다. '그냥 만나서 술이나 퍼마시는 모임'에 트집을 잡는다고 '나'는 기분이 상했지만, 그럴만도 한 상황이었다. 바야흐로 30여년에 걸친 우주함대의 전쟁준비가 완료되었고 '예언'에서 언급된 '적'이 나타날 시기가 다가왔던 것이다. 더구나 지구에서 '감찰군'이 대거 파견되어 오면서 내부적으로도 혼란과 예민이 증폭되고 있었다.

아무튼 이런 소설적 상황들보다도 '해병'과 '공군'에 대한 작가의 설명이 무척 재미있었다. 우주선을 배로 보느냐 비행기로 보느냐에 대한 관점도. ㅎㅎㅎ

내 인생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금쪽같은 휴가를 받자마자 170시간을 날아가서 40시간 동안 너와 함께한 다음 다시 180시간을 날아서 복귀하려는 나에게, 후회되지 않느냐고 네가 물었지. 후회하지 않아. 한 번 더 휴가가 생긴대도 또 그렇게 할거야.

"보고 싶었어"하고 내가 너에게 말했을 때, "나도"하고 네가 나에게 대답해주기까지 단 1초도 걸리지 않았던 그 순간을, 나는 행복이라고 기억해. 사랑한다는 너의 말에 단 한 순간도 망설임 없이 대답해도 너에게 닿는 데 17분44초가 걸리고 그 말에 대한 너의 대답이 돌아오는 데 또 다시 17분 44초가 더 걸리는 지금의 이 거리를 두고 내가 가장 숨 막히는 게 뭔지 아니? 그건 대답이 돌아오기 전 까지의 그 긴 시간 동안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갑갑함이야. (p. 35~36)

우주 함대가 우주 전쟁을 벌이는 이 때에도 가장 빠른 속도는 광속이었고, 광속으로 간다해도 우주적 먼 거리는 서로에게 기다림의 시간을 갖게 했다. 하지만 멀리 떨어져 있을 때만 소통이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옆에 붙어 있을 때에도 소통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너는 달랐지. 내가 하는 말을 자꾸만 못 알아듣는 거야.

"알아들었다니까, 나도 사랑한다고"

"아니, 그런 게 아니고"

"뭘 확인하고 싶은 건데? 심장이라도 꺼내달라는 거야?"

그렇게 말하는 너를 한참이나 말없이 바라봤어. 그때는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리기만 했지만, 그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결국 이런 거였어. 그냥 사라하는 게 아니고, 내가 날아온 거리만큼, 그 지긋지긋한 우주 공간만큼 사랑하는 거라고. 그래서 너를 한자리에 매어두고 싶다고. 하지만 그 말은 할 수 없었어. 정말로 너를 매어두는 게 옳은 일인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 부분이 애매했지. 그래서 말할 수가 없었어. 그건 버글러의 모순을 해결한다고 전달될 수 있는 게 아니었어. 영혼에 관한 문제였으니까. (p. 37)

새삼 이 책의 제목이 생각나는 부분이었다. 이 책의 제목은 <청혼> 이고 그래서인지 자꾸 두 연인 간의 소통과 감정에 대해 초점을 두고 읽게 되는데, 사실 이 작품의 재미는 그보다 '우주 전쟁'이었고 이 작품의 핵심은 서로 다른 두 진영간의 입장차이 라고 할 수 있었다.

저들의 정체가 뭐고 어디에서 왔으며 또 무슨 목적으로 우리를 공격하는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지만, 다음에 나타났을 때 저들이 뭘 노릴지는 대강 알고 있었거든. 그래, 우리 함대 말이야. 적어도 어디서 싸우게 될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었다는 거지. (p. 55)

정체모를 적들이 불시에 나타나 공격하는 상대는 '나'가 속한 함대의 대장 '데 나다 장군' 이었다. 그들은 왜 어떤 목적으로?

어쨌든 전해내려오는 '예언서'의 내용과 몇가지가 맞아떨어지면서 감찰대는 더욱 '데 나다 장군'을 주목하고 있었다. 사교모임 반란군이 아니라 진짜 반란군의 수괴로서.

그건 정말 현실감 없는 싸움이었어. 소리라도 들렸으면 좀 달랐을 텐데, 우주에는 대기가 없어서 밖에서 아무리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도 이 안은 그저 고요하기만 해. 아무 예고도 없이, 별 긴장감도 느끼지 못한 채, 나도 모르게 삶과 죽음이 갈리는 거야. 중간 과정도 없이 그냥 사라지는 사람들. 마지막 변론도, 죽음을 피하려는 몸부림도, 정의의 칼을 받으리라는 외침도, 전부 생략된 채 신속하게 진행되는 최후의 즉결심판. (p. 64)

우주선과 우주선의 무기와 전술과 우주전쟁의 직접적 교전 등에 관한 서술을 읽다보면 우주적 정적이 느껴지면서 엄청난 전쟁인데도 굉장히 고요하게 읽혀지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야말로 잔혹하도록 아름다운 광경이었어. 빛을 나르는 악마들의 무도회처럼' (p. 65) 잔혹 과 아름다움, 빛과 악마 등 서로 안 어울리는 요소들이 한 문장으로 묶여 있듯 그렇게 전쟁과 고요는 함께 느껴진다. 그렇다고 우주가 고요한가? 라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에, 핵무기가 처음 만들어지던 무렵에 말이야. 누군가가 그런 생각을 했어. 궤도에 인공위성을 띄워놓고 거기에서 방사선 같은 걸 검출하게 하면 지상에서 발생한 핵폭발의 흔적을 바로바로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그러면 어느 나라에서 어떤 규모로 핵실험을 하는지 곧바로 알 수 있지 않겠어? 그 생각이 받아들여져서, 마침내 인공위성을 띄우게 됐어. 그런데 그 인공위성이 가동되고 첫 관측 결과가 지상에 있는 기지로 전송된 순간 사람들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대. 여기저기 너무 많은 곳에서 핵폭발 신호가 감지됐거든. 벌써 핵전쟁이라도 일어난 듯 어지러운 신호가 말이야. 알고 보니 그 신호는 대부분 우주 저편에서 날아온 거였대. 우주 어디에선가는 늘 끊임없이 대폭발이 일어나니까. 어떤 건 수백억 년 전부터 날아온 거고, 또 어떤 건 몇십만 년을 날아온 거였겠지. (p. 87)

책속에 나오는 우주의 이야기들이 신선하고 재미있긴 하지만 저자가 뒤에 작가의 말에서 말했듯 이 책을 과학책으로 읽으면 곤란하다. 하지만 그래도 책을 읽는 내내 감탄하곤 했다. 우주가 이렇다고? 하면서. 이렇게 우주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고 적응해가고 있지만, 우주전쟁은 점점 더 미궁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혹시 지금 적 함대 뒤쪽에 중력렌즈가 있었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p. 107)

"그게 뭐죠? 설마 다른 차원으로 통하는 문이라도 있었다는 건가요?" (p. 108)

한 가지는 분명했어. 그 방향으로 날아가던 적 함대가 갑자기 자취를 감췄다는 사실. (p. 109)

SF소설이고 우주전쟁 이야기이긴 하나 마냥 공상적이고 상상적이기만 한 소설이 아니라 무척 현실적으로 읽혀지는 소설이라 그런지, 블랙홀을 통한 이동이라든가 타임슬립이라든가 평행세계라든가 하는 (지금으로선) 너무 비현실적인 설정도 없이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지는 적 함대에 대한 과학적 추정도 무척 현실적으로 읽혀졌다. 하지만 이게 또 재밌는 것이 이러한 과학적 추정이 소설 속 예언서와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는 설정이다. 동시에 또 재밌는 것이 그렇게 과학과 비과학을 왔다갔다하면서 연인의 감정까지도 자연스레 연결된다는 점이다.

거기에 너의 중력장이 남아 있었어. 다른 사람에게는 작용하지 않는, 내 눈에만 보이는 중력장이.

너는 모르겠지. 그런 건 없다고 말할지도 몰라. 하지만 함대에서 생활하면서 나는 지구 출신과 나 같은 우주 태생 사이에 가로놓인 넘을 수 없는 장벽을 수도 없이 봐왔어. 그건 말이야, 사소해 보여서 더 본질적인 그런 차이야. (p. 115)

'나'와 '너'의 차이, 지구 출신과 우주 태생 사이에 '중력'을 바탕으로 한 사소하지만 본질적인 차이는 감찰단과 우주함대의 입장차이 그리고 아군과 적군의 차이와도 닮아 있었다. 여튼, 그러는 사이 적에 대한 새로운 가설이 등장하는데..

"예언서에는 다른 차원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우주의 저편이라고"

"그렇지, 그렇게 믿어왔지. 물론 그걸 모르는 게 아니야. 우리 때는 예언서를 외우게 했으니까. 그런데 UES에 새롭게 떠오르는 가설은 말이야. 그 너머에 있는 게 우주 저편이 아니라는 거야"

"그럼......?"

"시간의 저편, 말하자면 저 함대는 다른 차원에서 온 게 아니라 다른 시간에서 왔다는 거지" (p. 123)

같은 함선, 같은 무기, 같은 전술 ... 적들은 누구일까? 외계인일까 아닐까? 아니, 적군이긴 한 걸까?

마지막 교전 이후, '나'는 중요한 결심을 하게 된다.

곧 궤도연합군 조사단이 여기로 올 거야. 아니, 조사단이 아니라 조사군이라더군. 그리고 진실이 아닌 진실 하나를 만들어낼 거야. 반란군 사령관 데 나다에 관한 이야기. 그래도 너만은 끝까지 나를 믿어줘야 해. 사람들이 우리를 뭐라고 부르든 말이야. (p. 149)

'인류가 만들어낸 첫 번째 우주 함대가 깨부수려 했던 건 외계에서 날아온 정체 모를 함대가 아니라 지구 출신과 우주 태생, 그 두 인류 사이에 놓인 까마득한 거리의 장벽이었으니까' (p. 150) '나'는 지구출신 감찰단장 보다 우주태생 데 나다 장군의 생각을 더 잘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면 결혼하자고 말할 생각이었어. (p. 152)' 그걸 아는 장군은 '나'를 마지막 교전 때 다른 함선에 옮겨 타게 했다. 그러니 '나'는 더욱 이렇게 그냥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주 저편에서 너의 별이 되어줄게 (p. 154)' 라고 '너'에게 마지막 안녕을 적어 보낼 수밖에 없었다...

2013년에 이 책이 출간됐을 때는 작가의 말을 따로 넣지 않았다. 많은 독자가 사랑하게 된 책의 마지막 문장은 나에게도 마음에 드는 표현이어서, 그 뒤에는 아무 말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그사이 1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으므로, 이 개정판에는 나만 기억하는 발표 당시의 맥락에 관한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p. 155) -작가의 말 中-

무척이나 신선하게 읽은 소설이었는데 이 책이 십년 전의 작품이었다니~! '작가의 말'을 생략하는 이유가 마지막 문장 때문일 수도 있었구나! 개정판으로 이번에 새로 내면서 거의 모든 문장을 다시 쓰는 정도로 표현을 고쳐 썼다는데, 처음의 작품이 어땠을 지 궁금해졌다. 시간을 따로 내어 언젠가 꼭 초판본으로 찾아 읽어봐야 겠다.

여하튼 소설에서도 그러했듯 작가의 말에서 중요한건, 맥락에 대한 두 입장에 대한 '차이' 였다. 이 작품 발표 당시 문학잡지에 글을 발표하는 SF작가에 대한 평이 그렇게 상반되었었다니...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나는 '순문학을 주로 다루는 잡지의 주목받는 지면에 우주 전쟁 이야기를 실을 수 있는 소설가'같은 것이었는데, 그 우주 전쟁 이야기가 바로 이 작품 <청혼>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두 개의 문학장 사이에 놓은 '라그랑주 포인트'에서 처음 발표되었다. 어느 쪽 문학장에서도 충분히 이해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p. 156)' 작가의 말이 작품해설은 아니었지만 이번의 경우 '해설'에 들어맞는 내용들이었다. '작가의 말'을 읽으면서도 신기했던건, 순수 문학과 SF 문학 사이에서의 '차이'를 이런 작품으로 소설적으로 형상화낼 수 있는 작가의 작가적 능력이었다. 그 작가적 능력을 발휘해 소설의 마지막 문장 만큼이나 작가의 말 마지막 문장도 훌륭했는데... '함대가 나아갈 우주를 채우는 건 어느 시대 어느 공간에 속해 있을지 알 수 없는 새 독자들의 몫이다. (p. 162)'

ps. <미래과거시제> 라는 책도 표지가 소설들의 내용을 함축적이면서 온전히 다 담고 있어서 신선했는데 이번 책도 그랬다. 표지가 참으로 작품의 내용과 잘 어울려서 그또한 참 좋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혼종의 나라 - 왜 우리는 분열하고 뒤섞이며 확장하는가
문소영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왜 우리는 분열하고 뒤섞이며 확장하는가

돈, 손절과 리셋, 반지성주의, 하이브리드 한류, 신개념 전통, 일상의 마이크로 정치, 포스트 코로나와 인공지능

7개의 키워드로 바라본 이상하고 아름다운 한국 문화

즐겨 읽는 신문 칼럼 중에 문소영 기자의 글이 있곤 했다. 주로 미술이나 예술 관련 글을 쓰는 기자인것 같은데 그런 종류의 글이 대부분 소개나 평론에 그치는 것에 비해 문소영 기자의 글은 항상 사회를 바라보고 있어서 신선했다. 책으로 읽는 것은 처음인데 저자의 이력을 보니 그간의 칼럼들이 왜 그랬는지 알것 같았다. 여하튼, 이 책은 '그 칼럼들을 바탕으로 해서 한국의 혼종성이 만들어내는 우리 사회의 현재 모습과 가까운 미래의 빛과 그림자에 대해 말하고 있다. (p. 11)'

한류는 <대장금>부터 <오징어게임>까지, <올드보이>부터 <기생충>까지, H.O.T.부터 방탄소년단과 블랙핑크까지, 엄청나게 성장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을 거쳐오면서 내가 절감하게 된 것은 대한민국에서 본격적으로 혼종화되기 시작한 세대로서의 나의 혼종적 정체성, 그리고 우리 사회의 혼종성이다. '끔찍한 혼종'이란 말이 있듯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혼종이 부정적인 의미로 쓰일 때가 많다. 그러나 페르시아와 로마 같은 모든 제국의 문화는 혼종이었다. 제국의 영향을 받은 문화식민지는 혼종성을 키움으로써 제국과 식민지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문화권력을 전복할 수 있다. (p. 6)

'끔찍한 혼종'이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은 없지만 나도 '단일 민족'이라는 단어가 국가적 자긍심을 품은 단어인것 마냥 교육받은 세대이기에 '혼종'에 대한 부정성은 알게모르게 각인되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저자의 말마따나 역사 속 모든 제국은 제국이 되기까지 혹은 제국이 되었기에 모든 것이 섞여들어간 혼종의 사회였다. 혼종의 긍정성을 찾고 있는 이 책 속 글들은 그래서 다분히 '권력'의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 문화권력도 권력이므로.

이 책은 표지에 적혀 있듯이 7개의 키워드로 글을 분류하고 있다.

돈, 손절과 리셋, 반지성주의, 하이브리드 한류, 신개념 전통, 일상의 마이크로 정치, 포스트 코로나와 인공지능

사실 차례나 소제목들을 보면 책의 내용을 대강 예측할 수 있곤 하는데 이 책은 그렇지 않았다. 키워드를 봐도 차례를 봐도 쉬이 짐작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질문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일까? 그 의견 하나하나를 함께 생각해보는 것이 이 책을 읽는 재미 중 하나가 될 것 같다.

부르디외는 자본이 경제자본 뿐만 아니라 인맥 같은 사회(관계)자본, 그리고 문화자본의 형태를 취할 수 있다고 했다. 문화자본에는 미술작품, 책 같은 문화 오브제와 석박사 학위처럼 제도적으로 인정받은 지식 등이 있다. 뿐만 아니라 교양 수준을 드러내는 말투나 예술에 대한 감식안처럼 몸에 자연스럽게 밴 성향과 기량까지 포함되는데, 이것을 부르디외는 '아비투스'라고 불렀다. (p. 41)

'부자니까 착한거야'라는 <기생충>속의 대사로 시작하는 저자의 글을 읽으며 공감하는 부분이 있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깨닫는 건 저자는 그 '아비투스'를 갖추었기에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글을 쓸수 있다라는 점이다. 서울대학교에서 경제학 학사, 석사, 홍익대학교에서 예술학 석사, 런던대학교에서 문화학 석사를 받고 홍익대학교에서 예술학과 박사 과정 중인 저자의 이력은 그 시간들 동안 저자가 얼마나 문화적 아비투스를 넘치게 향유해 왔는지 알려준다. 향유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렇게 사회비판적으로 의견을 내고 활동을 하는 것에는 박수와 응원의 마음을 보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마음이 어쩔 수 없이 들고 마는 것이다. 나는 그 '아비투스'를 갖출 수 있는 성장과정을 거치지 못했기에... 그렇기에 저자가 느끼는 '혼종'과 내가 느끼는 '혼종'은 다를 수 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손절'은 2018년 즈음부터 인간관계에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지만 원래는 주식용어다. 사람과 관계를 끊을 대 쓰는 단어는 따로 있다. 불교적 단어인 '절연', 유교적 단어인 '의절' 등등. 그런데도 왜 굳이 '손절'을 쓰게 됐을까? '손절'은 경제학적 비용편익분석에 의해 인간관계의 지속과 중단을 결정하는 자본주의적 단어다. 은연중에 인간을 물건 취급, 주식 취금하는 게 아닌지 걱정스러운 부분이다. 하지만 경제학적 의사 결정이 부당한데도 집단의 전통과 관습에 질질 끌어온 인간관계를 단호하게 정리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p. 60)

아하, 손절이 주식용어 였구나! '손절'은 '매몰비용'개념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매몰비용은 이미 지출한 비용으로서 향후 어떤 선택을 해도 회수할 수 없는 비용을 가리킨다. 따라서 어떤 결정을 할때 이미 들어간 매몰비용을 고려하는 것은 비합리적인 것이 된다. (p. 62)' 그러니까 인간관계에서도 과거에 어떤 (감정적, 물질적) 비용이 들어갔을 지라도 그 비용?을 매몰비용이라 치고 회수받을 생각을 버리고 관계를 그냥 끊어버리는 것이 '손절'인 것이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관계를 질질 끄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단절해버리는 것, 그것이 손절 인 것이다. 과거에 소모된 감정적 에너지까지 비용의 범주에 넣어버린 것이다. '우리가 무심코 쓰는 단어에는 그 사회를 지배하는 종교와 철학이 반영되곤 한다. (p. 66)' 인간관계에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단어인 '손절'을 붙이는 것이 자연스러워진 이 시대는 과연 어떤 시대인 것일까?

영국 소설가 H.G.웰스는 무려 120여 년 전에 '타임머신'이란 말을 만들어놨고 지금까지 영화로 만들어지는 <우주전쟁>, <투명인간>등을 쓴 SF거장인데, 그의 천재적인 상상력은 이 단편소설에서도 빛을 발한다. (p. 95)

'로봇3원칙'으로 유명한 SF 거장 아이작 아시모프는 1980년 <뉴스위크>칼럼에서 이렇게 일침했다 '민주주의를 '나의 무지나 너의 지식이나 별 차이 없다'는 것으로 여기는 착각이 미국의 반지성주의를 키워왔다' (p. 108)

웰스의 <눈먼 자들의 나라>를 예시로 반지성주의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는 저자의 글은 SNS와 숏폼이 유행하는 요즘 시대를 떠올리며 더없이 안타깝게 다가오는 주제였다. 반지성주의가 판을 치는 사회를 산다는 것은... 참... 할말하않 이랄까.... 여하튼 SF 작가들은 참 위대하다는 걸 다시한번 깨달았다. ㅎ

혼종적이고 다문화적인 것은 대국의 특징이다. 지금 한국은 경제와 문화에 있어서 역사상 최초로 세계적 대국의 문턱에 와 있다. 하지만 한국인들의 마인드는 아직 대국적이지 못한 것 같다. 외국인들은 '한국은 이미 선진국이자 강대국인데도 약소국인 것처럼 군다'라고 종종 말한다. '희생자 의식 민족주의'에 함몰되어 강대국에게는 선망과 반감이 뒤섞인 자세를, 기타 국가에는 수출 돈벌이 대상이 아니면 무관심인 게 소국 마인드다. (p. 122)

저자는 외국 유학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전공특성상 외국문화를 자주 접해서 그런지 외국인의 시선에서 한국을 바라봤을 때의 아쉬운 점에 깊이 공감하고 있는 듯 보인다. 한국은 혼종 사회인 것은 맞다. 하지만 한국이 강대국인가?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다고 해서 미소중일의 사이에 낀 지정학적 위치가 변한 것도 아닌데 그 권력관계에서 늘 소외되기 일쑤인데 한국이 강대국인가? 선진국인 것까지는 그래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그 선진국이란 타이틀도 왠지 조선시대 족보를 사서 팔자걸음 휘젓고 다니던 허울뿐인 양반모습이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더구나 지금은 민주화를 쟁취한 사회였다고 믿기 어렵게 독재화되고 있는 상황을 보면 더더욱... 한숨만 나오는 것을... 이 상황에 대국의 마인드를 가지라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싶고... 여하튼 저자의 이러한 지적?!은 다음 장 '신개념 전통'에서 더욱 강화된다. 해당 부분은 독자들이 직접 책을 읽어보고 생각해보고 하는 것이 유의미할 것 같다.

'백인'이라는 말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다. 중국 청나라에서는 유럽인을 '얼굴이 붉고 털이 많은 '종족이라 불렀고 서구인이 자신을 '백인'이라 칭한 것도 17~18세기부터이다. 그 직전 시대에 산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보면 당시 서구인은 자신들을 '기독교도', 타민족을 '이교도'로 분류했고, 아프리카계 장군 오셀로를 '무어인'이라고 불렀지 '흑인'이라고 부르지 안핬다. 즉 타자화와 구분짓기는 있었지만, 문화와 지역에 기초했지 인종에 기초하지 않았다. '백인 정체성'연구의 선구자인 미국 저술가 시어도어 앨런은 '백인 발명된 것'이라고 단언했다. (p. 205)

'언어가 사고를 결정짓기까지 하진 않더라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잊지 말자 (p. 209)' 정치적이지 않은 것 같은 일상에선 은근히 자주 혹은 많이 정치적 메세지가 내포되어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도 그렇다. '단일'이라는 착각에 빠져온 우리는 특히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하다. 그렇기에 인종적 혼종 문제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 부정적 메세지를 퍼뜨리곤 한다. 하지만 '인류는 모두 '유색인종'이다. '백인'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p. 210)' 어쩌면 '인종'도 딱히 없다. 인류는 원래 하나의 뿌리에서 오지 않았던가.

챗GPT는 왜 거짓말을 하며 어떻게 이렇게 거짓말을 '잘' 하는 것일까. 한국의 인공지능 기업인 솔트룩스의 이경일 대표의 설명에 따르면 이렇다.

쳇GPT는 학습된 어마어마한 지식과 언어 중에서 특정 단어 다음에 올 가장 자연스럽고 문맥에 맞을 만한 단어를 선택하는 방식으로 글을 만드는데, 확률통계적 선택을 한다. 주사위를 던지는 것과 유사하다. 그래서 똑같은 질문을 해도 답변이 매번 다르다. 이 중에서 인간이 보기에 어떤 답변이 좋은지를 학습하는 것이다. 그 진위는 GPT조차 판별하지 못한다. (p. 254, 255)

포스트코로나시대 급격히 대두된 것중 하나가 쳇GPT일 것이다. 인공지능이니 AI니 하는 이야기가 나올때마다 개인적으로 답답한 부분이 좀 있는데, 왜 그것들에 인간적 도덕성 개념을 덧입히는지 모르겠다는 점이다. '거짓말'이라는 것도 인간 기준이지 GPT는 그냥 확률통계적으로 아웃풋을 내놓을 뿐인것을. 그 얼토당토 않은 아웃풋에 온갖 인간적 개념을 덧붙여서 받아들이는 인간들이 문제인 것이다. '인공'을 신봉하지 말자. 그것도 어차피 사람이 만든 것일 뿐이잖은가.

'우리는 지금 거대한 사회적 도전에 직면해 있다. (p. 267)' 이 시점이 기회일지 위기일지 각자 다른 판단을 내릴 수 있겠지만, 저자는 '혼종'적 문화 측면에서 기대감이 없잖아 있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혼종'적 면면들에 대해 사회문화적 분석은 해볼만한 때가 되었다는 점이다. 저자의 의견이 다양한 논의로 펼쳐지길 기대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생애 한 번쯤 절 여행을 떠난다면
김영택 지음 / 좋은땅 / 202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

대흥사, 선암사, 부석사, 마곡사, 법주사, 봉정사

우리에게 절은 불교도가 아니더라도 문화유산으로서 찾아가보게 되고 자연과 함께 있는 위치적 특성상 어느 정도의 힐링을 하고 오게 되는 그런 곳이 아닐까 싶다. 여행을 즐기진 않지만 역사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절의 그 유구함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절 여행'이라는 제목을 가진 책들에겐 늘 관심이 가곤한다.

삼십여 년 넘는 세월 동안 교육기관에서 근무하다 정년퇴직하고 서예를 쓰고 불교 공부를 했다. (...) 불교 공부를 하며 절을 찾아다니고 싶었다. (...)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현판 글씨가 보이고 오래된 옛 절에 배어 있는 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었다. (p. 4) 개별 사찰에 전해오는 이야기나 전각과 관련된 불교 사상, 현판 및 주련에 대해 알고 싶어 찾아다녔다. 그 과정에서 떠오를 생각들을 덧붙였다. 이 책은 그 즐 거운 여정을 묶은 것이다. (p. 5) -시작하며 中-

이 책은 서예와 불교를 배우는 저자의 여행기인 셈인데, 내가 만약 절여행을 간다면 알아두고 가면 좋을 법한 절여행 상식들이 쏠쏠한 책이기도 하다. 일단 책속에 등장하는 절들이 대중에게 친숙한 큰절들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영축산 통도사, 가야산 해인사, 조계산 송광사, 두륜산 대흥사, 조계산 선암사, 태백산 부석사, 태화산 마곡사, 속리산 법주사, 천등산 봉정사 모두 한번쯤 들어봄 직한 절들이 아니던가.

절이라고 할 때에는 최소한 불·법·승의 삼보가 갖추어져 있는 곳을 말한다. 그러므로 절이란 불교에서 가장 귀중하게 여기는 세 가지 보배를 모신 곳이다. 그래서 모든 절을 대표하여 석가모니 부처님의 정골사리를 봉안한 통도사는 불보를 상징하는 절, 부처님의 가르침인 경전인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해인사는 법보를 상징하는 절, 고려 시대에서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16명의 국사를 배출한 송광사는 승보를 상징하는 절로 지정하였다. (p. 11)

이 책의 챕터는 크게 두 개로, 삼보에 귀의하는 절 과 세계 유산으로 빛나는 절 로 나뉜다. 세 가지 보배를 모신 절들이었구나...통도사, 해인사, 송광사가... 그중에서도 통도사는 '큰 절이자 절 중의 종가집 (p. 12)' 이라고 한다. 아하 통도사가 종가집 같은 절이었구나~

그런데 의문이 좀 드는 구절이 있었다. '통도사는 선원, 강원, 율원을 갖춘 곳이기에 해인사, 송광사, 수덕사와 함께 맨 처음 총림으로 지정되었다. (p. 14)' 라는데, 통도사와 해인사는 보유한 보배가 물성 있는 것이라 그렇다 치자. 송광사의 보배는 결국 스님들이란 건데, 송광사가 비구 스님들의 대표 절이라면 수덕사는 비구니 스님들의 대표 수행처로 알고 있기에, 총림으로 함께 지정될 정도의 인정을 받았음에도 세 가지 보배를 모신 곳으로 송광사와 함께 언급이 되지 않는 것이 좀... 더구나 '비구에게는 250가지, 비구니에게는 348가지의 지켜야 할 계가 있으니 (p. 17)' 라면서 더 많은 계를 지며야 할 비구니 절은 왜 삼보사찰로 치지 않는가... 진신사리의 통도사, 팔만대장경의 해인사, 승보의 송광사와 수덕사 이렇게 해야하지 않을까? 물론 이건 저자의 잘못은 아니다. 불교계에서 그렇게 정리한 것일 테니...

사찰에서 불보살을 모신 곳을 법당이라고 한다. 어떤 부처님을 봉안했느냐에 따라 법당의 이름을 달리 부른다. 석가모니불을 모신 법당을 대웅전, 비로자나불을 모신 곳을 대적광전으로 부르는 식이다. 그런데 부처님을 봉안하지 않은 법당이 있다. 그곳을 적멸보궁이라고 한다. 적멸보궁에는 불상 대신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했다. 진신사리가 바로 부처님이기 때문이다. (p. 19)

적멸보궁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열반 후에 나온 진신사리를 모신 곳이기에 열반을 의역한 '적멸'이란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법당이기에 '전'보다 격을 높여 '궁'이라고 하고 보배로운 곳이라는 뜻을 더해 '보궁'으로 불렀다. (p. 20)

책을 읽다보면 각 절에 대한 정보도 정보지만 사찰에 대한 정보를 얻는 재미가 있었다. 예전에 궁궐관련 책을 읽을 때 궁궐 안의 건물들에 나름의 '급'이 있어서 전당합각재헌루정 이라는 순서로 그 중요함을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다고 했었는데 절에는 건물 최고금의 '전'보다 더 위인 '궁'이라는 새로운 건물명이 있었구나~

'여여'는 [금강경]의 '여여부동'에서 따왔다고 한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한결같이 여여하여 변함이 없다'는 뜻이다. (p. 40)

초기불교, 부파불교, 대승불교 경전이 함께 중국에 들어오자 경전을 번역하고 해설하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체계화시키면서 경전을 단계적으로 구분하였다. 그 결과 우리에게 익숙한 [화엄경]이나 [법화경] 또는 [금강경]을 중심에 놓고 다른 것을 하위 개념으로 파악한 것이다. 이를 교상판석이라고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서로 분별하여 해석한 것이다. 교상판석에 따라 경전을 해석하여 체계를 세우며 중심 경전을 무엇으로 세우느냐에 따라 화엄종·천태종·선종·정토종 등의 종파가 형성되었다. (p. 49)

불교에 대한 이해를 돕는 정보도 쏠쏠하고~

바람이 불어 풍랑이 거칠게 일던 바다에 바람이 그치고 파도가 잔잔해지면 달빛이나 산 등 삼라만상이 그대로 해면에 나타나 그 모습이 마치 바다(海)에 도장(印)을 찍은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을 해인(海印)이라 한다. (p. 50)

뒷간을 해우소라고 최초로 이름을 붙인 사람은 통도사 극락암에 오랫동안 주석했던 경봉스님이다. 그는 6·25전쟁이 끝난 후 극락암의 변소 이름을 새롭게 지었다. 소변을 보는 곳을 휴급소(休急所), 대변을 보는 곳을 해우소(解憂所)라고 개명했다. (...) "휴급소에 가서 급한 마음 쉬어가고 해우소에서 걱정을 버리면 그것이 바로 도를 닦는 거야" (p. 168)

절의 유래나 역사 혹은 관련 인물들의 이야기도 재밌었다.

현판과 주련은 대부분 읽기 어려운 한자로 쓰여 있다. 현판은 전각의 이름이기에 유추해서라도 읽을 수 있지만 주련은 행서체나 초서체로 이해는 고사하고 읽기조차 어렵다. 설사 읽었다 하더라도 뜻을 이해하기가 만만치 않다. 주련은 원래 궁궐이나 양반집 기둥에 걸려 있던 것이었는데 언젠가부터 사찰 전각 기둥에도 걸어 놓기 시작했다. 불교가 전통 민간신앙을 흡수하면서 산신각, 칠성각이 생긴 것처럼 주련도 유교문화가 불교문화 속으로 들어온 것으로 보아도 될 듯싶다. 사찰 주련은 나무판에 불교 시구인 게송을 새겨 사찰의 기둥에 걸어 놓은 것을 말한다. 주련의 내용은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주로 해당 전각과 관련 내용을 쓴다. (p. 70)

저자의 취미가 서예이니만큼 절 이야기 중에서도 현판과 주련에 대한 이야기가 이 책의 중심이다. 현판을 언제 누가 뭐라고 썼는지부터 관련 인물의 이야기 더불어 불교적 사연까지, 절에 가면 흔하게 보던 그 한자들이 알고보면 이런 이야깃거리들을 품고 있었구나 싶어져서 다음에 절에 가게 된다면 안내문을 좀더 세세히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저자가 여행하듯 다닌 절 이야기들이니만큼 사진도 많았는데 송광사 불일암(p. 110) 사진을 보고 궁금점이 생겼다. 서울에 있는 길상사에 가도 똑같은 모습의 전각과 똑같은 (법정 스님이 앉곤 하셨다는) 나무 의자가 있는데 둘이 왜 똑같은 것인지 설명이 없어서;;; 나중에 송광사든 길상사든 다시 가게 되면 좀더 꼼꼼이 살펴봐야 겠다.

의아함이 생긴 사진도 있었다. 대흥사 일지암(p. 141) 사진을 보면 그냥 초가집처럼 보이는데, '<일지암>현판이 걸려 있는 초정(草亭)은 다인들이 뜻을 모아 복원했다. 옛모습을 살리기 위해 여수에 있던 고가의 목재를 가져와 지었다. (p. 140)' 라니... 초정, 결국 초가지붕 정자인건데... 고가의 목재를 가져와 복원했다라... 흠... 굳이?;;; 불교의 정신에도 그닥 적당하지 않은 선택이 아니었을까 싶었다는;;;

여행기이니만큼 읽다보면 가고 싶은 장소들이 종종 생겼는데 그중에서도 부석사에 가보고 싶어졌다. 오래전에 다녀오긴 했었는데 그땐 문화유적지 관람삼아 그 유명한 무량수전만 보고 왔었더랬다. 그런데 부석사에 깃든 사랑이야기가 있었다니. 선묘각과 부석을 보고 싶어졌다. 부석이 '뜬 바위' (p. 197) 그 의미였다는 점도 새삼 재밌고.ㅎ

세계 유산에 등재된 사찰은 양산 영축산 통도사, 해남 두륜산 대흥사, 순천 조계산 선암사, 영주 태백산 부석사, 공주 태화산 마곡사, 보은 속리산 법주사, 안동 천등산 봉정사다. (p. 114)

관세음보살이 있는 곳을 산스크리트어로 포탈라카라고 한다. 포탈라카는 인도 동남쪽 해안가에 있는 산이다. 포탈라카는 한자로 음역하여 보타락가라고 한다. 보타락가가 산이기 때문에 보타락가산으로 부른다. 줄여서 보타산, 낙가산, 낙산 등으로 부른다. 우리나라 4대 관음성지 중 하나인 양양 낙산사 절 이름도 보타락가산을 줄인 낙산에서 따왔다. 보타락가산이 해안가에 있듯이 우리나라 관음성지인 양양 낙산사, 남해 보리암, 여수 향일암, 강화 보문사도 해안가에 있다. (p. 162)

바닷가에 있어 그런가 관음성지들을 다 가보았네?! ㅋㅎㅎ 삼보사찰이라 불리는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까지는 알았는데 세계유산에 등재된 7개의 사찰 중엔 생소한 절 도 있었다.다른 절들은 가봤었는데... 대흥사, 마곡사, 봉정사 는 다음 기회에 가보는 걸로. ㅎㅎ. 그땐 이 책을 들고 가서 현판 하나하나 유심히 들여다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절을 찾아다니며 절에 얽힌 이야기를 읽는 것은 오래된 이야기책을 읽는 것 같다. 절에는 오랜 기간 이곳에서 수행하거나 드나들었던 사람들의 삶과 예술이 짙게 배어 있기 때문이다. 일주문 앞에서부터 시작되는 절 순례는 절의 아름다움과 사람들이 남긴 이야기를 읽는 즐거움에 빠져드는 시간이다. (p. 265)

여행하듯 가볍게 읽히는 이 책은 역사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다른 책들 사이에 쉬어가듯 읽기 좋은 역사이야기책이었다. 책에서 언급되는 절들이 워낙 크고 유명한 한국의 대표절들이다보니 책 제목 처럼 '내 생애 한 번쯤 절 여행을 떠난다면' 이 책속의 절들 중 한 곳이 될것 같기도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욕망으로 읽는 조선고전담 - 역전 흥부, 당찬 춘향, 자존 길동, 꿈의 진실게임, 반전의 우리고전 읽기 내 인생에 지혜를 더하는 시간, 인생명강 시리즈 22
유광수 지음 / 21세기북스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역전 흥부, 당찬 춘향, 자존 길동, 꿈의 진실게임, 반전의 우리고전 읽기

교훈에 갇힌 기존 고전에서 해방되는 능동적 사유의 시간

<문제적 고전 살롱 : 가족 기담> 이라는 책을 통해 저자를 처음 알게 된 이후 팬이 되었다. 그동안 내가 알았던 고전은 제대로 이해된 적이 한번도 없었음을 저자의 책을 통해 배웠다. 이후 읽은 <복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도 좋았다. 전래동화가 고전으로 탈바꿈해 다가오게 만들었다. 이번 책은 우리의 고전 중에서도 대표라 할 만한 4작품에 대한 새로운 가치를 깨닫게 해주었다. 바로, 흥부전, 춘향전, 홍길동전, 구운몽 이다. 흥미유발용으로 스포를 조금 하자면, 흥부는 한탕의 욕망이 있었고 춘향은 열녀라기 보다 자기결정권의 혁명가였으며 홍길동은 영웅이 아니었고 구운몽은 인생무상 이야기가 아니었다 랄까. ㅎㅎㅎ

이 책을 쓴 이유는 내 가슴 속의 흥분을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서다. 박제되다 못해 이젠 화석이 되어버릴 것만 같은 우리 고전을 원래 모습 그대로 복원해, 원래 모습 그대로 우리 가슴 속에 살아 숨 쉬도록 하는 게 목표다. 어쩌면 학교에서 배운 것과 많이 다를지도 모르겠다. [흥부전]은 우애 이야기가 아니고, [춘향전]은 열녀 이갸기가 아니란 것에 놀랄 수도 있다. [홍길동전]의 작가가 과연 허균인지도 고민해볼 문제고, 홍길동이 우리가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른 일을 벌였단 사실을 확인하고 난감할 수도 있다. 게다가 [구운몽]이 일장춘몽 이야기가 아니란 말에 마음이 착잡해질 수도 있다. 고전을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하게 만든 원흉은 그냥 그렇게 '좋고 좋은 착한 이야기예요'라고 넘어간 방조와 무관심이다. 시대적 요청과 우리의 필요에 따라 입맛에 맞게 고전을 불러내 멋대로 박제처럼 만든 게 우리 고전을 어렵고 지루하고 피곤한 짐 덩어리로 전락시켜 버렸다. 그러나 고전은 짊어져야 할 짐도 아니고 시험문제에 어렵게 출제하라고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고전에는 고전다움이 있다. 그 고전다움을 이 책을 통해 하나씩 제대로 풀어볼 생각이다. (p. 10~11) -프롤로그 中-

저자의 책에는 쾌감이 있다. 고리타분함의 대명사라고 할만한 고전이라는 분야를 너무나 재밌어 하며 연구한 사람이기에 전해져오는 진심어린 유쾌함도 있지만 무엇보다 편견을 깨부수는 시원함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전은 후대에 만들어진 이미지다. 아니 우리가 만들어낸 고정관념이다. 원래의 고전은 그렇지 않았다. 저자는 통쾌하게 그 원래다움을 알려준다. 그리고 그 원래다움의 기저에는 '욕망'이 있었다. 인간은 본디 욕망의 동물 아니던가. ㅎㅎㅎ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흥부전]은 우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과 욕심, 현실과 미래, 삶과 비전에 관한 이야기다.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놀부와 흥부, 둘 다 훌륭하기도 하고 둘 다 문제가 많기도 하다'는 점이다. (p. 20)

[흥부전]은 판소리로도 불리고, 널리 읽히며 퍼진 소설이다 보니 다양한 이본이 존재한다. (p. 22)

다양한 이본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만큼 인기가 있었다는 것이기도 하고 정본의 이야기를 확실하게 걸러내기 힘들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흥부전]의 시작은 명확하다. 바로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시고, 형 놀부는 부자로 살고, 동생 흥부는 가난하게 산다는 점이다. 저자는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당대 조선시대의 유산상속제도와 결혼 후 독립해 사는, 당연하지만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지점부터 흥부가 왜 가난해졌는가라는, 흥부의 삶의 태도 그리고 흥부의 아이들은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가 라는 의문등 [흥부전]이 이렇게 재밌었던가?싶을 이야기들이 술술 풀려나온다. 여하튼 알아두시라, 흥부도 놀부 못지 않은 욕망남이었다는 것을.


[흥부전]의 고전다움은 그런 해피엔딩 때문이 아니라 더 깊고 심오한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p. 86)

둘이 똑같다는 것, 반대로 보이지만 둘 다 동일하게 극단적으로 끝을 향해 달려간다는 것이다. 닮은 것을 넘어 거울을 마주한 듯이 둘은 무척이나 동일하다는 사실을 [흥부전]은 냉철하게 지적한다. 그래서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게 있다. (p. 88)

저자는 흥부와 놀부의 새로운 이해를 깨닫게 해준다. 그동안 우리가 너무 선 아니면 악 하는 식으로 이분법적으로 판단해 온 것이 얼마나 오독이고 오해였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흥부전]은 둘 중 한 명을 고르라는 게임이 아니고, 둘 중 한 명처럼 살아야 한다는 교훈서도 아니다. [흥부전]은 놀부 흥부가 보여주는 모습을 통해 단순한 선악 판단을 넘어 두 극단적 삶과 행동, 사고와 가치가 똑같이 문제라는 사실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그리고 그 두 극단 사이에 무수히 많은 모습이 스펙트럽처럼 펼쳐져 있는 게 세상이며, 그 사이 어딘가에 우리 인생이 자리하고 있다고 웅변한다. 흥부 놀부가 우리이고, 그들 삶이 우리 삶이다. (p. 92)' 그렇게 [흥부전]은 인간다움이란 무엇인지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우리 세상은 어떠한지 돌아보게 한다는 저자의 말은 고전이 왜 고전인지 새삼 깨닫게 한다. 고전이 던질 질문에 성실하게 답하는 것이 고전을 고전답게 읽는 길일 것이다.

사실 [춘향전] 이본 중 가장 주목해야 할 이본은 서울에서 유통되던 [남원고사]로, [열녀춘향수절가]보다 적어도 30년가량 먼저 출현했고 분량도 두 배 이상 많고 풍성하다. 무엇보다 돈을 받고 책을 빌려주던 세책점의 세책본이라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읽던 텍스트였다. (p. 106)

[춘향전]이라는 이야기는 '춘향굿'에서 비롯되었고 성춘향은 광복 이후 영화나 드라마에서 고정시키면서 만들어진 것이지 춘향의 성은 없었다. 남원에서는 성춘향이었으나 서울에서는 김춘향이었고 월매가 기녀였기에 기녀의 아이는 성씨가 없는게 당연했다.

저자는 당대의 법과 제도에 대한 설명으로 변학도가 얼마나 억울한 캐릭터인지 이몽룡이 얼마나 대단치 않은지 무엇보다 춘향의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이지 조목조목 설명한다. 읽다보면 아하 오호 헐 하면서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될 그런 합당한 이야기들을 읽고 나면 우리가 알던 [춘향전]은 과연 무엇이었나 싶어질 것이다.

대체 [춘향전]은 왜 이렇게 억지와 무리수를 많이 두었을까? 이유는 현대 막장 드라마의 뺨을 치고도 남을 이런 황당한 이야기에 사람들이 열광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춘향전]의 비밀이 숨어 있다. (p. 125)

[춘향전]의 핵심 가치를 굳이 꼽자면 에로티시즘과 혁명성이라고 할 수 있다. (p. 126)

에로티시즘과 혁명성을 뺀 [춘향전]이 그렇게 고루한 도덕 교과서가 되어버린 [춘향전]이 우리가 아는 그 [춘향전]이다. 춘향은 이몽룡이 와도 그만 안와도 그만 이었으나 자신의 몸은 자신의 뜻대로 라는 혁명적 캐릭터였다. 열녀가 아닌 춘향, 제대로 된 [춘향전]의 가치를 알고 싶다면 원전을 찾아 읽어야 하나? 아니다. 일단, 저자의 이 책을 읽으면 된다. ㅎㅎㅎ

[홍길동전]은 지극히 단순한 이야기라 오해의 여지가 없는데 정작 [흥부전], [춘향전]보다 더 크게 오해하고 있는 작품이다. 가장 큰 이유는 [홍길동전]을 잘못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홍길동이 시대적 요청에 따라 불려나와 영웅으로 만들어졌기에 실제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오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우리가 알고 있는 홍길동은 우리 의도대로 만들어진 영웅이기에 진정한 홍길동의 영웅성을 도리어 훼손하고 있다. (p. 156)

홍길동이 영웅인 것은 맞다. 하지만 어려운 백성을 돕는 의협심 강한 영웅이라기 보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욕망을 실현해낸 자존의 영웅이라는 것이 더 적절하다. 그러나 홍길동의 영웅성을 논하기 전에 더 큰 오해는 최초의 한글소설이냐 아니냐의 문제다. 이 최초의 한글소설이라는 명예 때문에 홍길동이 영웅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기도 했기 때문이다. ' '최초'와 '한글 소설'이 필요했던 당시 시대적 요청이 있었다. 그때 마침 우리 눈앞에 딱 '홍길동전'이 있었다. (p. 157)' 홍길동전은 과연 최초의 한글 소설일까? 아니 그보다 홍길동전의 작가가 허균인 것은 맞을까? 저자가 연구자로서 빛나는 대목이다. 문헌적 근거를 착착 들이대는 것을 보면. ㅎㅎ

전반부의 의로운 홍길동이 후반부의 조금 기이한 홍길동이 되었다는 식의 시각이 많아지면서 불일치성 운운하는 문제가 도드라진 것이다. 말했듯이 불일치성 문제는 없다. 적서 차별, 활빈당 활동, 탐관오리 정치 등의 전분부 사건들부터 엉뚱하게 읽어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하나씩 살펴보겠지만, 홍길동이 빈민을 구휼하고 탐관오리를 징치하는 등의 의로운 행동을 한 것은 맞지만, 그것은 행동에 따른 결과이지 목표가 아니다. 그런 행동의 본질은 욕망에 따른 자기 과시와 정치적 시위에 있다. (p. 185)


[흥부전], [춘향전] 보다도 시대의 영웅적 이미지를 가진 [홍길동전]의 오해를 바로잡는 저자의 설명에 반감을 가지는 독자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홍길동이 영웅이라는 것이 변하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가 그동안 잘못 이해해 왔을 뿐이다. 영웅이 뭐 다 시대적 영웅일 필요 있나? 그렇지 않은 영웅도 영웅은 영웅이다. 모든 고전은 그 고전이 지어졌을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알고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현재적으로만 홍길동을 읽으려 한게 아닐까. 당시 사람들은 홍길동이 '단지 구휼을 하거나 탐관오리를 혼내주고 못된 자들을 무찔러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마음을 이해해주고 자신들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담아낸 진정한 소망을 엄청난 활약을 통해 이루어 냈기 때문 (p. 222)'에 열광했던 것이다. 우리가 홍길동에게 덧씌운 이미지에는 어떤 이유 때문이었을까 생각해볼 일이다.

[구운몽]은 남성 판타지가 아니라 인간 존재 본연에 대한 이야기다. (p. 228)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구운몽]을 쓴 이유가 '어머니의 근심 걱정을 풀어드리고자'한 것인데 '부귀공명이 일장춘몽이다'라는 내용으로 과연 어머니의 근심을 풀어줄 수 있을까? 한번 생각해보라. 효자 아들이 귀양지에서 홀로 늙어가는 어머니를 위로한답시고 하는 말이 "어머니, 부귀공명은 한바탕 꿈같은 거예요. 인생은 덧없어요"라고 말했을까? 그리고 그 말을 듣고 어머니는 위로를 받았을까? 인생이 말짱 꽝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오히려 근심이 더해지지 않았을까? (p. 235)

저자는 [구운몽]에 대해 '우리 민족의 고전' 이고 '동서고금의 소설 중 [구운몽]을 뛰어 넘는 작품이 없으리라 생각한다'(p. 227) 며 [구운몽]이 얼마나 희대의 명저인지 설명한다. 눈앞에 있었다면 아마 입에 거품물 정도로 열심히 열렬하게 설명하는 저자의 모습이 보였을 것 같을 정도로 [구운몽]에 대한 저자의 애정은 각별하다. 그래서인지 나도 저자의 설명을 통해 [구운몽]의 위대함에 감탄하게 되었다. 알면알수록 엄청난 철학서였달까.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어느 욕망을 끝없이 추구해 그 정점에 도달하면 완성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고 전혀 다른 욕망으로 넘어간다는 것이다. 라캉(1901~1981)의 말처럼 욕망은 완전히 충족될 수 없어 여분의 욕망이 남아 인간은 늘 그것을 추구하러 달려간다는 것을 김만중은 17세기에 [구운몽]을 통해 이미 설파해놓았다. (p. 248)

김만중은 대단한 집안의 뛰어난 지식인이었다. 그가 촘촘히 구성해 놓은 프랙탈 구조의 이야기는 속고 속이는 와중에 진정한 깨달음을 숨겨 놓고 있었다. 읽으면 읽을 수록 '[구운몽]의 주제는 인생무상이나 일장춘몽이 결코 아니다. (p. 258)' 라는 저자의 설명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작품 자체가 깨달음에 대해 말하는 '깨달음에 대한 텍스트'이면서 깨달음을 주는 '깨달음의 텍스트'였던 것이다. 김만중은 소설 [구운몽]이라는 묵직한 탄환을 우리에게 날렸다. (p. 271)' 고전의 가치는 이런 것이다. 읽는 이에게 묵직함을 여전히 날릴 수 있는 그런 글.

[구운몽]의 묵직한 깨달음에 대한 설명으로 마무리되는 이 책의 끝에 가면 고전의 가치를 새삼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그동안 식상하다고 여겼던 고전이 사실은 우리가 잘못 알고 있어서 그랬다는 것도. 그러니 고전의 가치를 제대로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이 책과 같은 좋은 선생님과 함께 읽어나가면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배의 법칙 - 충돌하는 국제사회, 재편되는 힘의 질서 서가명강 시리즈 36
이재민 지음 / 21세기북스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충돌하는 국제사회, 재편되는 힘의 질서

서가명강 시리즈 36 인 이 책은 내가 지금까지 읽어봤던 서가명강 책들이 그랬듯 역시 유익한 책이었다.

국내 정세가 혼돈이라 더욱 여유가 없는 시기이긴 하지만 언제부턴가 우리는 우리의 국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국제사회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자연스레 깨달았던 것 같다. 더구나 코로나19를 겪으며 세계는 점점 서로 더 밀접한 관계라는 것을 절감하기도 했다. 국제 사회는 지금 어떠한가? 그 이해를 위한 기본에 국제법이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배웠다. 국제사회도 어려운데 국제법이라고? 헐 하며 손사래를 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생각보다 국제법은 우리의 일상에 이미 너무나 가깝게 너무나 흔하게 들어와 있었다.

휴대폰의 GPS기능은 국제 규범의 결과다. 애플의 아이폰은 국제 규범에 따른 교역으로 우리 손에 왔으며, 우리 스마트폰 역시 국제 규범에 따라 만들어지고 수출된다. 즉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국제 규범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다. 언젠가부터 편의점에서 담배 판매대가 판매자 앞쪽에서 뒤쪽으로 이동했다. 이것 역시 2003년 WHO에서 채택되어 2005년 발표한 담배 규제 협약 때문이다. (p. 212)

국제법이라고 하니까 괜히 어렵게 생각했지 우리의 일상을 기초하는 다양한 규범들은 이미 국제적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무심코 운전을 하고 자연스레 전화를 건다.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다. 기차와 버스를 타고 여행도 하고 맛있는 곳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다닌다. 넷플릭스로 영화를 시청하고 네이버에서 최저가 상품을 검색한다. 이러한 일상은 어떻게 가능해진 걸까? 물론 이를 가능하게 한 기술적 발전이 그 출발점이다. 그다음에는 이를 운용하기 위한 여러 '규범'이 정비되었기 때문이다. (p. 11)

우리의 모든 일상에는 서로 공유하는 규범들이 있고 그 규범들을 공식적으로 명시한 것이 법이라 할때 인터넷을 통해 세계가 연결되는 지금 우리의 일상 규범엔 국제적 규범 즉 국제법이 들어와 있다. 하지만 빨라지는 기술과 변해가는 환경을 따라잡지 못한 국제적 규범들은 여러가지 문제점들을 드러내고 있다. 그 혼돈 속에서 각 나라들은 자국의 이익을 우선으로 하여 각축적을 벌이고 있는바 이 상황에선 역시 힘의 질서가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영향은 특히 국제법의 세계엔 더더욱 미미하다. 그러니 '앞으로 국제사회에서 살아갈 우리 개개인, 특히 젊은 세대가 국제 규범의 중요성을 알고, 이를 적절히 활용하는 데 이 책이 조그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p. 15)'라는 저자의 바람은 바람을 너머 당위에 가깝게 다가온다.

저자는 크게 4챕터로 나누어 국제질서를 국제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해 준다. 신냉전, 디지털 시대, 우주 경쟁 그리고 이 모두를 포함한 국제사회의 전환점 이 그 4개의 키워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2000년대에 들어서서 주요국 간 갈들이 다시 커지며 새로운 진영 대결이 시작되더니, 이제 급기야 '냉전 2.0' 시대가 시작되었다. 바로 신냉전 시대의 개막이다. 냉전 1.0에 비해 냉전2.0은 더 복잡해지고 더 정교해졌다. 그만큼 신냉전은 여러 국가에 많은 고민거리를 안기고 있다. 우리가 지금 미·중 갈등 사이에서 어려운 고민을 계속하는 것도 냉전 1.0보다 훨씬 복잡한 함수를 제시하는 냉전 2.0시대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p. 20)

냉전시대는 끝난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차라리 이념분쟁을 바탕으로 한 미·소 갈등의 냉전 1.0은 간단한 거였다. 신냉전 시대의 이해에는 국제법에 대한 이해가 필수요건이다. 그런데 이 국제법이란 것이 역사를 거슬러봤을때 400년 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만들어진 체제가 여전히 적용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국제사회가 얼마나 급변했는데 현 국제질서도 이 때의 제제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니 문제가 안 생길래야 안 생길 수가 없는 것이다.

2차대전 종식후 세계대전은 없었다지만 여기저기 전쟁은 끊이지 않았다. 그나마 세계대전으로 번지지 않는 것이 국제법 덕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국제 사회는 법률전쟁이 더 뜨겁고 논리 대결이라 해도 힘의 질서는 작용하기 마련인데 한국은 얼마나 국제법을 이해하고 활용하고 있는 걸까... 걱정이다.

넷플릭스와 같이 인터넷으로 콘텐츠를 송출하는 디지털 OTT 기업 혹은 IT 기업들은 어떻게든 세금을 줄이려고 애쓰고 있다. 이들은 이익 대비 세금이 적은 국가 즉, 법인세가 낮은 국가의 법을 따르고자 한다. 넷플릭스의 경우, 미국 본사 외에 세율이 적은 네덜란드에 '넷플릭스 인터내셔널'이라는 법인을 하나 더 두어 네덜란드 법인에서 이용권을 구매해 한국에 되파는 식으로 법인세를 아끼고 있다고 한다. 넷플릭스 뿐만 아니라 구글, 애플과 같은 IT기업들도 법인세율이 낮은 싱가포르나 아일랜드에 세운 법인을 통해 매출을 확인하고 궁극적으로 세금을 덜 내는 방식을 택한다고 보도되괴 있다. 이게 가능한 것은 디지털 시대가 도래했음에도 디지털 활동에 대한 통일된 용어나 정의, 규범이 없기 때문이다. (p. 83)

400년 전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던 당시 디지털 시대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 체제를 바탕으로 한 국제법에 디지털 시대에 대한 규범이 있을리가;;; 강력해진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을 포함한 각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합의를 위한 다양한 시도들은 이어지고 있으나 얼마나 합의될 수 있을까? 그것이 과연 국제법으로 정착되기 까지 얼마나 걸릴까? 그 과정에서 인터넷 강국이라는 한국은 어떤 준비를 하고 있나? '우리의 이익은 우리만이 지킬 수 있다. 디지털 시대는 더욱 그러하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결정되기 때문이다. (p. 114)' 라는 저자의 말 앞에 후덜덜해지는데... 이또한 걱정이네;;;

남극과 북극 역시 우주와 비슷하다. 호기심의 대상이던 지역이 인간의 활동 대상이 되면서 새로운 규범 문제를 안게 되었다. 온난화로 인해 예기치 못했던 새로운 바다를 우리가 만나게 되면서 북극해에 애한 규범을 새로 만드는 것이 지금 시급한 국제적 현안이다. (...) 우주와 남북국을 둘러싸고 법률전쟁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꼭 기억하고 새로운 동향을 주시해야 한다. (p. 168)

이 책을 읽다보면 걱정에 걱정을 더하게 되고 마음이 급해진다. 이렇게 시급한 현안들이 가득한데 국제법 관련 이해와 노력을 한국사회가 얼마나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서다. 저자는 '기존 규범을 발전시키고 새로운 규범을 만들어내는 과정에 우리가 적극 참여해 '메이드 인 코리아'의 블록을 여러 영역에 확산 시키는 것 (...) 이것이 바로 앞으로 우리나라가 전개할 수 있는 건설적이고 법률전쟁적인 접근법이다. (p. 189)' 라면서 조언하고 '국제 규범을 전략적으로 이해하고 활용하는 접근으로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일에 모두가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기를 바란다. (p. 214)' 라며 응원하지만 글쎄... 잘 모르겠다. 한국 사회가 한국의 법전문가들이 그렇게 잘 하고 있을런지...

이 공부를 위해서는 세계사를 공부하고 국제 뉴스를 팔로우업 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또한 이 모든 논의가 이루어지는 의사소통 수단인 영어에 익숙해지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국제법에 관심이 있다면, 점점 국제무대에서 활동하고 싶은 마음이 커질 것이다. 국제무대 혹은 국제기구에서 활동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전문성을 가지는 것이다. (p. 226) 자세한 사항은 외교뷰에서 발행한 국제기구 진출 가이드북을 참조하는 것도 좋다. (p. 227)

앞으로 미래를 만들어갈 젊은 세대가 국제무대에서 활동하는 것에 대해 좀더 많은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내로라하는 똑똑한 학생들이 모두 의대에 몰려갈 것이 아니라 과학에서 국제법에서 이름을 알리고 그렇게 국제사회라는 힘의 질서에 한국의 자리를 좀더 넓혀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