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혼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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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가 서로에게 별이 되는 거리

그 막막한 우주에서 '너'를 사랑하는 일

배명훈이 선보이는 새로운 차원의 스페이스 오페라

SF소설을 읽으며 배명훈 이라는 작가의 이름을 알게 된지는 꽤 됐지만 그의 작품을 제대로 읽은 것은 작년 <미래과거시제>라는 책이 처음이었다. 읽고나서 어찌나 놀랐던지. SF소설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주는 이런 작품세계를 이제야 읽게되다니 싶어서.

지난번에 읽은 책이 단편집이라 이번엔 장편을 읽기로 하곤 어찌나 기대가 되던지 ㅎㅎㅎ. (장편 이라기엔 짧지만 그래도 책 한권에 한 작품인 책이니까 장편으로 부르기로;;;;)

아, 이래서 UES(지표면연합)나 궤도연합군 사령부가 나 같은 우주 출신을 경계하는 거구나?

그렇다고 내가 그 사람들을 이해하게 된 건 아니야. 왜 우리는 서로의 우주를 배우려 하지 않을까? 지금처럼 손쉽게 상대방의 우주로 날아갈 수 있게 된 시절이 또 언제 있었다고?

그 생각을 하면 나는 지금도 웃음이 나. 너를 만나러 지구에 갔을 때 내가 지구 중력을 견디지 못해서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고 반쯤 기어다녔던 일 말이야. (p. 14)

서간문 형식으로 쓰여진 이 소설은 우주군 장교로 우주함대에서 살고 있는 '나'가 지구에 살고 있는 연인 '너'에게 보내는 편지이자 고백이자 일기이다.

지구인이지만 아마도 우주선에서 나고 자라 무중력 상태에서의 생활이 더 자연스러운 '나'는 지구에서 나고 자라 중력이 없다는 것에 적응하지 못하는 '너'를 비롯한 지구인들과의 차이에 대해, 다양한 상황속에네 내내 그렇게 '나'와 '너'의 차이에 대해 내내 생각하게 된다. 가장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서로에게 서로는 '외계인' 같았달까.

"자네가 반란군 사령관이라면서?"

"그건 그냥 장난이었는데요"

"그럴 만도 해. 감찰군 사령관은 함대를 무슨 해병대쯤으로 생각하더라고. 아, 그러게 자꾸 우주선을 배라고 부르지 말자니까. 함대라는 말도 쓰지 말고"

"함대가 해병인가요? 해병이 뭐죠?"

"아무튼 우리가 해병은 아니니까"

"그럼 뭔데요?"

"공군이지. 당연히" (p. 24, 26)

함대 작전 장교 모임 이름으로 '반란군'이란 사교 모임에서 사령관인 '나'는 감찰군에게 그 모임에 대한 사유서를 제출해야 했다. '그냥 만나서 술이나 퍼마시는 모임'에 트집을 잡는다고 '나'는 기분이 상했지만, 그럴만도 한 상황이었다. 바야흐로 30여년에 걸친 우주함대의 전쟁준비가 완료되었고 '예언'에서 언급된 '적'이 나타날 시기가 다가왔던 것이다. 더구나 지구에서 '감찰군'이 대거 파견되어 오면서 내부적으로도 혼란과 예민이 증폭되고 있었다.

아무튼 이런 소설적 상황들보다도 '해병'과 '공군'에 대한 작가의 설명이 무척 재미있었다. 우주선을 배로 보느냐 비행기로 보느냐에 대한 관점도. ㅎㅎㅎ

내 인생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금쪽같은 휴가를 받자마자 170시간을 날아가서 40시간 동안 너와 함께한 다음 다시 180시간을 날아서 복귀하려는 나에게, 후회되지 않느냐고 네가 물었지. 후회하지 않아. 한 번 더 휴가가 생긴대도 또 그렇게 할거야.

"보고 싶었어"하고 내가 너에게 말했을 때, "나도"하고 네가 나에게 대답해주기까지 단 1초도 걸리지 않았던 그 순간을, 나는 행복이라고 기억해. 사랑한다는 너의 말에 단 한 순간도 망설임 없이 대답해도 너에게 닿는 데 17분44초가 걸리고 그 말에 대한 너의 대답이 돌아오는 데 또 다시 17분 44초가 더 걸리는 지금의 이 거리를 두고 내가 가장 숨 막히는 게 뭔지 아니? 그건 대답이 돌아오기 전 까지의 그 긴 시간 동안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갑갑함이야. (p. 35~36)

우주 함대가 우주 전쟁을 벌이는 이 때에도 가장 빠른 속도는 광속이었고, 광속으로 간다해도 우주적 먼 거리는 서로에게 기다림의 시간을 갖게 했다. 하지만 멀리 떨어져 있을 때만 소통이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옆에 붙어 있을 때에도 소통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너는 달랐지. 내가 하는 말을 자꾸만 못 알아듣는 거야.

"알아들었다니까, 나도 사랑한다고"

"아니, 그런 게 아니고"

"뭘 확인하고 싶은 건데? 심장이라도 꺼내달라는 거야?"

그렇게 말하는 너를 한참이나 말없이 바라봤어. 그때는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리기만 했지만, 그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결국 이런 거였어. 그냥 사라하는 게 아니고, 내가 날아온 거리만큼, 그 지긋지긋한 우주 공간만큼 사랑하는 거라고. 그래서 너를 한자리에 매어두고 싶다고. 하지만 그 말은 할 수 없었어. 정말로 너를 매어두는 게 옳은 일인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 부분이 애매했지. 그래서 말할 수가 없었어. 그건 버글러의 모순을 해결한다고 전달될 수 있는 게 아니었어. 영혼에 관한 문제였으니까. (p. 37)

새삼 이 책의 제목이 생각나는 부분이었다. 이 책의 제목은 <청혼> 이고 그래서인지 자꾸 두 연인 간의 소통과 감정에 대해 초점을 두고 읽게 되는데, 사실 이 작품의 재미는 그보다 '우주 전쟁'이었고 이 작품의 핵심은 서로 다른 두 진영간의 입장차이 라고 할 수 있었다.

저들의 정체가 뭐고 어디에서 왔으며 또 무슨 목적으로 우리를 공격하는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지만, 다음에 나타났을 때 저들이 뭘 노릴지는 대강 알고 있었거든. 그래, 우리 함대 말이야. 적어도 어디서 싸우게 될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었다는 거지. (p. 55)

정체모를 적들이 불시에 나타나 공격하는 상대는 '나'가 속한 함대의 대장 '데 나다 장군' 이었다. 그들은 왜 어떤 목적으로?

어쨌든 전해내려오는 '예언서'의 내용과 몇가지가 맞아떨어지면서 감찰대는 더욱 '데 나다 장군'을 주목하고 있었다. 사교모임 반란군이 아니라 진짜 반란군의 수괴로서.

그건 정말 현실감 없는 싸움이었어. 소리라도 들렸으면 좀 달랐을 텐데, 우주에는 대기가 없어서 밖에서 아무리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도 이 안은 그저 고요하기만 해. 아무 예고도 없이, 별 긴장감도 느끼지 못한 채, 나도 모르게 삶과 죽음이 갈리는 거야. 중간 과정도 없이 그냥 사라지는 사람들. 마지막 변론도, 죽음을 피하려는 몸부림도, 정의의 칼을 받으리라는 외침도, 전부 생략된 채 신속하게 진행되는 최후의 즉결심판. (p. 64)

우주선과 우주선의 무기와 전술과 우주전쟁의 직접적 교전 등에 관한 서술을 읽다보면 우주적 정적이 느껴지면서 엄청난 전쟁인데도 굉장히 고요하게 읽혀지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야말로 잔혹하도록 아름다운 광경이었어. 빛을 나르는 악마들의 무도회처럼' (p. 65) 잔혹 과 아름다움, 빛과 악마 등 서로 안 어울리는 요소들이 한 문장으로 묶여 있듯 그렇게 전쟁과 고요는 함께 느껴진다. 그렇다고 우주가 고요한가? 라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에, 핵무기가 처음 만들어지던 무렵에 말이야. 누군가가 그런 생각을 했어. 궤도에 인공위성을 띄워놓고 거기에서 방사선 같은 걸 검출하게 하면 지상에서 발생한 핵폭발의 흔적을 바로바로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그러면 어느 나라에서 어떤 규모로 핵실험을 하는지 곧바로 알 수 있지 않겠어? 그 생각이 받아들여져서, 마침내 인공위성을 띄우게 됐어. 그런데 그 인공위성이 가동되고 첫 관측 결과가 지상에 있는 기지로 전송된 순간 사람들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대. 여기저기 너무 많은 곳에서 핵폭발 신호가 감지됐거든. 벌써 핵전쟁이라도 일어난 듯 어지러운 신호가 말이야. 알고 보니 그 신호는 대부분 우주 저편에서 날아온 거였대. 우주 어디에선가는 늘 끊임없이 대폭발이 일어나니까. 어떤 건 수백억 년 전부터 날아온 거고, 또 어떤 건 몇십만 년을 날아온 거였겠지. (p. 87)

책속에 나오는 우주의 이야기들이 신선하고 재미있긴 하지만 저자가 뒤에 작가의 말에서 말했듯 이 책을 과학책으로 읽으면 곤란하다. 하지만 그래도 책을 읽는 내내 감탄하곤 했다. 우주가 이렇다고? 하면서. 이렇게 우주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고 적응해가고 있지만, 우주전쟁은 점점 더 미궁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혹시 지금 적 함대 뒤쪽에 중력렌즈가 있었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p. 107)

"그게 뭐죠? 설마 다른 차원으로 통하는 문이라도 있었다는 건가요?" (p. 108)

한 가지는 분명했어. 그 방향으로 날아가던 적 함대가 갑자기 자취를 감췄다는 사실. (p. 109)

SF소설이고 우주전쟁 이야기이긴 하나 마냥 공상적이고 상상적이기만 한 소설이 아니라 무척 현실적으로 읽혀지는 소설이라 그런지, 블랙홀을 통한 이동이라든가 타임슬립이라든가 평행세계라든가 하는 (지금으로선) 너무 비현실적인 설정도 없이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지는 적 함대에 대한 과학적 추정도 무척 현실적으로 읽혀졌다. 하지만 이게 또 재밌는 것이 이러한 과학적 추정이 소설 속 예언서와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는 설정이다. 동시에 또 재밌는 것이 그렇게 과학과 비과학을 왔다갔다하면서 연인의 감정까지도 자연스레 연결된다는 점이다.

거기에 너의 중력장이 남아 있었어. 다른 사람에게는 작용하지 않는, 내 눈에만 보이는 중력장이.

너는 모르겠지. 그런 건 없다고 말할지도 몰라. 하지만 함대에서 생활하면서 나는 지구 출신과 나 같은 우주 태생 사이에 가로놓인 넘을 수 없는 장벽을 수도 없이 봐왔어. 그건 말이야, 사소해 보여서 더 본질적인 그런 차이야. (p. 115)

'나'와 '너'의 차이, 지구 출신과 우주 태생 사이에 '중력'을 바탕으로 한 사소하지만 본질적인 차이는 감찰단과 우주함대의 입장차이 그리고 아군과 적군의 차이와도 닮아 있었다. 여튼, 그러는 사이 적에 대한 새로운 가설이 등장하는데..

"예언서에는 다른 차원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우주의 저편이라고"

"그렇지, 그렇게 믿어왔지. 물론 그걸 모르는 게 아니야. 우리 때는 예언서를 외우게 했으니까. 그런데 UES에 새롭게 떠오르는 가설은 말이야. 그 너머에 있는 게 우주 저편이 아니라는 거야"

"그럼......?"

"시간의 저편, 말하자면 저 함대는 다른 차원에서 온 게 아니라 다른 시간에서 왔다는 거지" (p. 123)

같은 함선, 같은 무기, 같은 전술 ... 적들은 누구일까? 외계인일까 아닐까? 아니, 적군이긴 한 걸까?

마지막 교전 이후, '나'는 중요한 결심을 하게 된다.

곧 궤도연합군 조사단이 여기로 올 거야. 아니, 조사단이 아니라 조사군이라더군. 그리고 진실이 아닌 진실 하나를 만들어낼 거야. 반란군 사령관 데 나다에 관한 이야기. 그래도 너만은 끝까지 나를 믿어줘야 해. 사람들이 우리를 뭐라고 부르든 말이야. (p. 149)

'인류가 만들어낸 첫 번째 우주 함대가 깨부수려 했던 건 외계에서 날아온 정체 모를 함대가 아니라 지구 출신과 우주 태생, 그 두 인류 사이에 놓인 까마득한 거리의 장벽이었으니까' (p. 150) '나'는 지구출신 감찰단장 보다 우주태생 데 나다 장군의 생각을 더 잘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면 결혼하자고 말할 생각이었어. (p. 152)' 그걸 아는 장군은 '나'를 마지막 교전 때 다른 함선에 옮겨 타게 했다. 그러니 '나'는 더욱 이렇게 그냥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주 저편에서 너의 별이 되어줄게 (p. 154)' 라고 '너'에게 마지막 안녕을 적어 보낼 수밖에 없었다...

2013년에 이 책이 출간됐을 때는 작가의 말을 따로 넣지 않았다. 많은 독자가 사랑하게 된 책의 마지막 문장은 나에게도 마음에 드는 표현이어서, 그 뒤에는 아무 말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그사이 1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으므로, 이 개정판에는 나만 기억하는 발표 당시의 맥락에 관한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p. 155) -작가의 말 中-

무척이나 신선하게 읽은 소설이었는데 이 책이 십년 전의 작품이었다니~! '작가의 말'을 생략하는 이유가 마지막 문장 때문일 수도 있었구나! 개정판으로 이번에 새로 내면서 거의 모든 문장을 다시 쓰는 정도로 표현을 고쳐 썼다는데, 처음의 작품이 어땠을 지 궁금해졌다. 시간을 따로 내어 언젠가 꼭 초판본으로 찾아 읽어봐야 겠다.

여하튼 소설에서도 그러했듯 작가의 말에서 중요한건, 맥락에 대한 두 입장에 대한 '차이' 였다. 이 작품 발표 당시 문학잡지에 글을 발표하는 SF작가에 대한 평이 그렇게 상반되었었다니...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나는 '순문학을 주로 다루는 잡지의 주목받는 지면에 우주 전쟁 이야기를 실을 수 있는 소설가'같은 것이었는데, 그 우주 전쟁 이야기가 바로 이 작품 <청혼>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두 개의 문학장 사이에 놓은 '라그랑주 포인트'에서 처음 발표되었다. 어느 쪽 문학장에서도 충분히 이해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p. 156)' 작가의 말이 작품해설은 아니었지만 이번의 경우 '해설'에 들어맞는 내용들이었다. '작가의 말'을 읽으면서도 신기했던건, 순수 문학과 SF 문학 사이에서의 '차이'를 이런 작품으로 소설적으로 형상화낼 수 있는 작가의 작가적 능력이었다. 그 작가적 능력을 발휘해 소설의 마지막 문장 만큼이나 작가의 말 마지막 문장도 훌륭했는데... '함대가 나아갈 우주를 채우는 건 어느 시대 어느 공간에 속해 있을지 알 수 없는 새 독자들의 몫이다. (p. 162)'

ps. <미래과거시제> 라는 책도 표지가 소설들의 내용을 함축적이면서 온전히 다 담고 있어서 신선했는데 이번 책도 그랬다. 표지가 참으로 작품의 내용과 잘 어울려서 그또한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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