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으로 읽는 조선고전담 - 역전 흥부, 당찬 춘향, 자존 길동, 꿈의 진실게임, 반전의 우리고전 읽기 내 인생에 지혜를 더하는 시간, 인생명강 시리즈 22
유광수 지음 / 21세기북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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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 흥부, 당찬 춘향, 자존 길동, 꿈의 진실게임, 반전의 우리고전 읽기

교훈에 갇힌 기존 고전에서 해방되는 능동적 사유의 시간

<문제적 고전 살롱 : 가족 기담> 이라는 책을 통해 저자를 처음 알게 된 이후 팬이 되었다. 그동안 내가 알았던 고전은 제대로 이해된 적이 한번도 없었음을 저자의 책을 통해 배웠다. 이후 읽은 <복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도 좋았다. 전래동화가 고전으로 탈바꿈해 다가오게 만들었다. 이번 책은 우리의 고전 중에서도 대표라 할 만한 4작품에 대한 새로운 가치를 깨닫게 해주었다. 바로, 흥부전, 춘향전, 홍길동전, 구운몽 이다. 흥미유발용으로 스포를 조금 하자면, 흥부는 한탕의 욕망이 있었고 춘향은 열녀라기 보다 자기결정권의 혁명가였으며 홍길동은 영웅이 아니었고 구운몽은 인생무상 이야기가 아니었다 랄까. ㅎㅎㅎ

이 책을 쓴 이유는 내 가슴 속의 흥분을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서다. 박제되다 못해 이젠 화석이 되어버릴 것만 같은 우리 고전을 원래 모습 그대로 복원해, 원래 모습 그대로 우리 가슴 속에 살아 숨 쉬도록 하는 게 목표다. 어쩌면 학교에서 배운 것과 많이 다를지도 모르겠다. [흥부전]은 우애 이야기가 아니고, [춘향전]은 열녀 이갸기가 아니란 것에 놀랄 수도 있다. [홍길동전]의 작가가 과연 허균인지도 고민해볼 문제고, 홍길동이 우리가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른 일을 벌였단 사실을 확인하고 난감할 수도 있다. 게다가 [구운몽]이 일장춘몽 이야기가 아니란 말에 마음이 착잡해질 수도 있다. 고전을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하게 만든 원흉은 그냥 그렇게 '좋고 좋은 착한 이야기예요'라고 넘어간 방조와 무관심이다. 시대적 요청과 우리의 필요에 따라 입맛에 맞게 고전을 불러내 멋대로 박제처럼 만든 게 우리 고전을 어렵고 지루하고 피곤한 짐 덩어리로 전락시켜 버렸다. 그러나 고전은 짊어져야 할 짐도 아니고 시험문제에 어렵게 출제하라고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고전에는 고전다움이 있다. 그 고전다움을 이 책을 통해 하나씩 제대로 풀어볼 생각이다. (p. 10~11) -프롤로그 中-

저자의 책에는 쾌감이 있다. 고리타분함의 대명사라고 할만한 고전이라는 분야를 너무나 재밌어 하며 연구한 사람이기에 전해져오는 진심어린 유쾌함도 있지만 무엇보다 편견을 깨부수는 시원함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전은 후대에 만들어진 이미지다. 아니 우리가 만들어낸 고정관념이다. 원래의 고전은 그렇지 않았다. 저자는 통쾌하게 그 원래다움을 알려준다. 그리고 그 원래다움의 기저에는 '욕망'이 있었다. 인간은 본디 욕망의 동물 아니던가. ㅎㅎㅎ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흥부전]은 우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과 욕심, 현실과 미래, 삶과 비전에 관한 이야기다.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놀부와 흥부, 둘 다 훌륭하기도 하고 둘 다 문제가 많기도 하다'는 점이다. (p. 20)

[흥부전]은 판소리로도 불리고, 널리 읽히며 퍼진 소설이다 보니 다양한 이본이 존재한다. (p. 22)

다양한 이본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만큼 인기가 있었다는 것이기도 하고 정본의 이야기를 확실하게 걸러내기 힘들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흥부전]의 시작은 명확하다. 바로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시고, 형 놀부는 부자로 살고, 동생 흥부는 가난하게 산다는 점이다. 저자는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당대 조선시대의 유산상속제도와 결혼 후 독립해 사는, 당연하지만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지점부터 흥부가 왜 가난해졌는가라는, 흥부의 삶의 태도 그리고 흥부의 아이들은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가 라는 의문등 [흥부전]이 이렇게 재밌었던가?싶을 이야기들이 술술 풀려나온다. 여하튼 알아두시라, 흥부도 놀부 못지 않은 욕망남이었다는 것을.


[흥부전]의 고전다움은 그런 해피엔딩 때문이 아니라 더 깊고 심오한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p. 86)

둘이 똑같다는 것, 반대로 보이지만 둘 다 동일하게 극단적으로 끝을 향해 달려간다는 것이다. 닮은 것을 넘어 거울을 마주한 듯이 둘은 무척이나 동일하다는 사실을 [흥부전]은 냉철하게 지적한다. 그래서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게 있다. (p. 88)

저자는 흥부와 놀부의 새로운 이해를 깨닫게 해준다. 그동안 우리가 너무 선 아니면 악 하는 식으로 이분법적으로 판단해 온 것이 얼마나 오독이고 오해였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흥부전]은 둘 중 한 명을 고르라는 게임이 아니고, 둘 중 한 명처럼 살아야 한다는 교훈서도 아니다. [흥부전]은 놀부 흥부가 보여주는 모습을 통해 단순한 선악 판단을 넘어 두 극단적 삶과 행동, 사고와 가치가 똑같이 문제라는 사실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그리고 그 두 극단 사이에 무수히 많은 모습이 스펙트럽처럼 펼쳐져 있는 게 세상이며, 그 사이 어딘가에 우리 인생이 자리하고 있다고 웅변한다. 흥부 놀부가 우리이고, 그들 삶이 우리 삶이다. (p. 92)' 그렇게 [흥부전]은 인간다움이란 무엇인지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우리 세상은 어떠한지 돌아보게 한다는 저자의 말은 고전이 왜 고전인지 새삼 깨닫게 한다. 고전이 던질 질문에 성실하게 답하는 것이 고전을 고전답게 읽는 길일 것이다.

사실 [춘향전] 이본 중 가장 주목해야 할 이본은 서울에서 유통되던 [남원고사]로, [열녀춘향수절가]보다 적어도 30년가량 먼저 출현했고 분량도 두 배 이상 많고 풍성하다. 무엇보다 돈을 받고 책을 빌려주던 세책점의 세책본이라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읽던 텍스트였다. (p. 106)

[춘향전]이라는 이야기는 '춘향굿'에서 비롯되었고 성춘향은 광복 이후 영화나 드라마에서 고정시키면서 만들어진 것이지 춘향의 성은 없었다. 남원에서는 성춘향이었으나 서울에서는 김춘향이었고 월매가 기녀였기에 기녀의 아이는 성씨가 없는게 당연했다.

저자는 당대의 법과 제도에 대한 설명으로 변학도가 얼마나 억울한 캐릭터인지 이몽룡이 얼마나 대단치 않은지 무엇보다 춘향의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이지 조목조목 설명한다. 읽다보면 아하 오호 헐 하면서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될 그런 합당한 이야기들을 읽고 나면 우리가 알던 [춘향전]은 과연 무엇이었나 싶어질 것이다.

대체 [춘향전]은 왜 이렇게 억지와 무리수를 많이 두었을까? 이유는 현대 막장 드라마의 뺨을 치고도 남을 이런 황당한 이야기에 사람들이 열광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춘향전]의 비밀이 숨어 있다. (p. 125)

[춘향전]의 핵심 가치를 굳이 꼽자면 에로티시즘과 혁명성이라고 할 수 있다. (p. 126)

에로티시즘과 혁명성을 뺀 [춘향전]이 그렇게 고루한 도덕 교과서가 되어버린 [춘향전]이 우리가 아는 그 [춘향전]이다. 춘향은 이몽룡이 와도 그만 안와도 그만 이었으나 자신의 몸은 자신의 뜻대로 라는 혁명적 캐릭터였다. 열녀가 아닌 춘향, 제대로 된 [춘향전]의 가치를 알고 싶다면 원전을 찾아 읽어야 하나? 아니다. 일단, 저자의 이 책을 읽으면 된다. ㅎㅎㅎ

[홍길동전]은 지극히 단순한 이야기라 오해의 여지가 없는데 정작 [흥부전], [춘향전]보다 더 크게 오해하고 있는 작품이다. 가장 큰 이유는 [홍길동전]을 잘못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홍길동이 시대적 요청에 따라 불려나와 영웅으로 만들어졌기에 실제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오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우리가 알고 있는 홍길동은 우리 의도대로 만들어진 영웅이기에 진정한 홍길동의 영웅성을 도리어 훼손하고 있다. (p. 156)

홍길동이 영웅인 것은 맞다. 하지만 어려운 백성을 돕는 의협심 강한 영웅이라기 보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욕망을 실현해낸 자존의 영웅이라는 것이 더 적절하다. 그러나 홍길동의 영웅성을 논하기 전에 더 큰 오해는 최초의 한글소설이냐 아니냐의 문제다. 이 최초의 한글소설이라는 명예 때문에 홍길동이 영웅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기도 했기 때문이다. ' '최초'와 '한글 소설'이 필요했던 당시 시대적 요청이 있었다. 그때 마침 우리 눈앞에 딱 '홍길동전'이 있었다. (p. 157)' 홍길동전은 과연 최초의 한글 소설일까? 아니 그보다 홍길동전의 작가가 허균인 것은 맞을까? 저자가 연구자로서 빛나는 대목이다. 문헌적 근거를 착착 들이대는 것을 보면. ㅎㅎ

전반부의 의로운 홍길동이 후반부의 조금 기이한 홍길동이 되었다는 식의 시각이 많아지면서 불일치성 운운하는 문제가 도드라진 것이다. 말했듯이 불일치성 문제는 없다. 적서 차별, 활빈당 활동, 탐관오리 정치 등의 전분부 사건들부터 엉뚱하게 읽어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하나씩 살펴보겠지만, 홍길동이 빈민을 구휼하고 탐관오리를 징치하는 등의 의로운 행동을 한 것은 맞지만, 그것은 행동에 따른 결과이지 목표가 아니다. 그런 행동의 본질은 욕망에 따른 자기 과시와 정치적 시위에 있다. (p. 185)


[흥부전], [춘향전] 보다도 시대의 영웅적 이미지를 가진 [홍길동전]의 오해를 바로잡는 저자의 설명에 반감을 가지는 독자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홍길동이 영웅이라는 것이 변하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가 그동안 잘못 이해해 왔을 뿐이다. 영웅이 뭐 다 시대적 영웅일 필요 있나? 그렇지 않은 영웅도 영웅은 영웅이다. 모든 고전은 그 고전이 지어졌을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알고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현재적으로만 홍길동을 읽으려 한게 아닐까. 당시 사람들은 홍길동이 '단지 구휼을 하거나 탐관오리를 혼내주고 못된 자들을 무찔러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마음을 이해해주고 자신들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담아낸 진정한 소망을 엄청난 활약을 통해 이루어 냈기 때문 (p. 222)'에 열광했던 것이다. 우리가 홍길동에게 덧씌운 이미지에는 어떤 이유 때문이었을까 생각해볼 일이다.

[구운몽]은 남성 판타지가 아니라 인간 존재 본연에 대한 이야기다. (p. 228)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구운몽]을 쓴 이유가 '어머니의 근심 걱정을 풀어드리고자'한 것인데 '부귀공명이 일장춘몽이다'라는 내용으로 과연 어머니의 근심을 풀어줄 수 있을까? 한번 생각해보라. 효자 아들이 귀양지에서 홀로 늙어가는 어머니를 위로한답시고 하는 말이 "어머니, 부귀공명은 한바탕 꿈같은 거예요. 인생은 덧없어요"라고 말했을까? 그리고 그 말을 듣고 어머니는 위로를 받았을까? 인생이 말짱 꽝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오히려 근심이 더해지지 않았을까? (p. 235)

저자는 [구운몽]에 대해 '우리 민족의 고전' 이고 '동서고금의 소설 중 [구운몽]을 뛰어 넘는 작품이 없으리라 생각한다'(p. 227) 며 [구운몽]이 얼마나 희대의 명저인지 설명한다. 눈앞에 있었다면 아마 입에 거품물 정도로 열심히 열렬하게 설명하는 저자의 모습이 보였을 것 같을 정도로 [구운몽]에 대한 저자의 애정은 각별하다. 그래서인지 나도 저자의 설명을 통해 [구운몽]의 위대함에 감탄하게 되었다. 알면알수록 엄청난 철학서였달까.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어느 욕망을 끝없이 추구해 그 정점에 도달하면 완성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고 전혀 다른 욕망으로 넘어간다는 것이다. 라캉(1901~1981)의 말처럼 욕망은 완전히 충족될 수 없어 여분의 욕망이 남아 인간은 늘 그것을 추구하러 달려간다는 것을 김만중은 17세기에 [구운몽]을 통해 이미 설파해놓았다. (p. 248)

김만중은 대단한 집안의 뛰어난 지식인이었다. 그가 촘촘히 구성해 놓은 프랙탈 구조의 이야기는 속고 속이는 와중에 진정한 깨달음을 숨겨 놓고 있었다. 읽으면 읽을 수록 '[구운몽]의 주제는 인생무상이나 일장춘몽이 결코 아니다. (p. 258)' 라는 저자의 설명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작품 자체가 깨달음에 대해 말하는 '깨달음에 대한 텍스트'이면서 깨달음을 주는 '깨달음의 텍스트'였던 것이다. 김만중은 소설 [구운몽]이라는 묵직한 탄환을 우리에게 날렸다. (p. 271)' 고전의 가치는 이런 것이다. 읽는 이에게 묵직함을 여전히 날릴 수 있는 그런 글.

[구운몽]의 묵직한 깨달음에 대한 설명으로 마무리되는 이 책의 끝에 가면 고전의 가치를 새삼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그동안 식상하다고 여겼던 고전이 사실은 우리가 잘못 알고 있어서 그랬다는 것도. 그러니 고전의 가치를 제대로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이 책과 같은 좋은 선생님과 함께 읽어나가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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