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로 보다, 근현대사 - 한국 근현대사의 순간들이 기록된 현장을 찾아서 보다 역사
문재옥 지음 / 풀빛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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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사의 순간들이 기록된 현장을 찾아서

개항부터 촛불혁명까지, 격동의 근현대사 이야기기 담긴

14개의 답사 코스를 함께 걷는 역사 산책

예전엔 길치 방향치라는 자괴감에 지도 종류는 무조건 기피하게 되곤 했었는데, 역사를 좋아해서 이런저런 역사책을 읽다보니 지도가 필수라는 걸 깨달았다. 읽다보니 역사이해에 필요한 정도의 지도읽기는 즐겨하게 되기도 했다. 그러다 답사하듯 읽게되는 역사책은 더욱 반기게 되었는데... 이 책이 그랬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해설했던 내용을 중심으로 2023년에 <서대문형무소 도슨트>책을 출간했다. (p. 4) 이 책을 보고 풀빛출판사에서 감사하게도 연락을 주었다. 내게 근현대사 지식을 대중들에게 쉽게 전해 주는 책을 써 볼 것을 권했다. (p. 5)

대학다닐때 나의 역사지식과 사회지식을 쌓게 해주던 책들은 풀빛출판사 책들이 많았다. 대학앞 사회과학전문 서점도 사라지고 익숙했던 사회과학 출판사들의 이름도 잘 보이지 않는 시대에 이렇게 다시 풀빛의 책을 읽게되니 그또한 반가웠다. 아직 살아있구나 싶어서.

책의 구성이 굉장히 유익하게 되어 있었다. 답사때 실제로 들고다니면서 읽어도 좋을 만큼.

각 장마다 본문 내용에 해당하는 관련 연표가 한국사/세계사로 간략하게 실려 있고 이 챕터를 답사하며 생각할 지점들을 먼저 알려준 후 답사코스 지도까지 보여준 후 본문이 시작되니 준비가 아주 탄탄한 출발을 할 수 있게 해준다.

1863~2025 라는 근현대사와 관련된 장소들 중 중요사건들과 연결된 장소들을 골랐다보니 (지금의)서울을 중심으로 한 지역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니까, 장소로보는 근현대사라기 보다는 근현대사와 관련된 서울답사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한국의 근현대사는 침탈의 역사다. 그러니 개항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을터. 출발은 인천과 강화도이고 이후로는 내내 서울 곳곳의 투어다. 따라서 대부분의 장소들이 거의 가봤던 곳들이라 익숙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새로운 면면들이 보여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무엇보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보는 저자의 관점이 시원시원해서 좋았다.

'전 세계를 약탈했던 프랑스군의 도둑질은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p. 17)

'미국은 제너럴셔먼호의 잘못된 행동을 반성하기는커녕 조선에 책임을 묻겠다며 침략해 왔다.' (p. 21)

'금융 침탈은 단순한 물건 수출입보다 훨씬 강력하게 조선을 옥죄었다. 제일은행권은 조선을 찌른 일제의 가장 날카로운 칼이었다.' (p. 41)

일제가 미두 거래, 주식 거래, 금광 개발 등을 통해 일부 한국인이 벼락부자가 되도록 놔둔 것은 사람들에게 현실을 잊게 하는 마약 같은 효과를 주기 위함이었다. 이를 통해 식민 통치의 부당함에 대한 불만을 잠재우려는 목적이 있었다. 한탕주의의 만연은 일제가 한국인에게 뿌려 놓은 새로운 의식 문화였다. 근대화, 식민화는 한국인의 의 식까자도 변화시켰던 것이다. (p. 48)

역사는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꼭 알아야 하는 것이지만 역사를 읽다보면 변하지 않은 현실에 절로 개탄이 흘러나오는 것도 어쩔 수 없다. 벼락부자...한탕주의... 지금은 과연 다른가? 이것을 조장하는 세력이 과연 지금은 없는가?

2016년 아관파천 120주년을 맞이해, 서울시는 러시아공사관에서 덕수궁에 이르는 길을 정비했고, 2018년 10월30일부터 일반에 정식으로 개방해 '고종의 길', 영어로는 'King's Road'라고 이름을 붙였다. 나는 길이 120미터에 이르는 이 길을 걸으면서 서울시가 굳이 'King's Road'로 소개하려는 이유에 공감하기 어려웠다. 러시아공사관에서 미국공사관 뒤를 통해 덕수궁에 도달하는 길은 큰 길이 아닌 좁은 골목길로, 떳떳한 길이 아닌 숨겨진 길이다. 힘이 부족해 자국의 수도 한복판에서 외국군의 위협을 피해야 했고, 도 다른 외국의 힘을 빌려야만 겨우 안전을 보장할 수 있었던 고종이 지나간 이 길을 '왕의 길'이라고 외국인들에게 소개하기가 난감했다. 물론 고난의 역사를 가진 우리가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 내고 이렇게 발전했다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부끄러운 역사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King's Road'라는 명칭은 도리어 우리 역사를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 같다. 차라리 '고난의 길'로 부르는 편이 낫게싿는 생각이 든다. (p. 73)

궁궐에 가면 편전으로 가는 길에 표지석이 있고 중앙은 도톰하게 올라와 있다. '어도'라고 신하들은 이 가운뎃길을 걸으면 안되고 양 옆으로 가야 했다는 것을 궁궐구경을 한번이라도 하고 온 사람들은 대부분 알 것이다. 그런데 저 골목길을 굳이 King's Road 라고 한다라...

일제가 환구단의 핵심이자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공간인 원단을 파괴하고 그 자리에 철도호텔을 지었는데 이는 환구단을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겠다는(p. 76, 77) 일제의 의도가 다분했다. 해방후 1967년에 조선호텔을 재건축하면서도 대한제국의 환구단은 복원되지 못했다. King's Road와 환구단에 대한 무시는 같은 역사관을 가진 위정자들의 의도때문이 아닐런지...

'2010년 서울시는 이곳에 녹천정 표석을 세우고자 했다. 하지만 녹천정은 역사적 의미가 거의 없다. 그럼에도 서울시가 '녹천정터'라는 표석을 세우려고 한 것은 이곳에서 벌어진 아픈 역사를 감추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한국과 일본 시민 단체에서 이곳이 경술국치의 현장임을 알리는 '통감관저터'표석을 먼저 세웠다.' (p. 87) 2010년의 서울시장이 지금의 서울시장이다. 서울시장의 현재진행중인 만행?!은 뒤에도 여러가지 등장한다.

조선신궁이 있던 자리에서 1955년 10월3일부터 다음해 8월 15일 광복절까지 큰 공사가 이뤄졌다. 높이가 23.5척(약7미터), 축대 포함 총81척(약25미터)인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동상이 건립되었다. 생존해 있던 이승만의 81살 생일에 맞춰 세워진 이승만 동상은 그를 세계적인 지도자라며 떠받들던 간신배들이 세운 부끄러운 역사의 한 장면이다. 북한의 김일성 동상이 1972년에 건립되기 시작했으니 이보다도 먼저 이승만 우상화가 시작된 것이다. 그들은 서울시를 우남시로 바꾸려고도 했다. 국민을 무시하고 권력만을 바라본 아부꾼들의 세상, 간신배들의 전성시대였다. 일제강점기를 보내며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하고 반성도 하지 않은 결과 였따.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그해 8월에 동상이 철거되었다. (p. 98)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대한 이승만의 반응이 매우 놀랍다. "그의 행동은 어리석은 짓이며, 일본의 선전 내용만 강화시켜 줄 뿐 한국의 독립을 가져다주지 못할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p. 159)

이승만을 추앙하는 사람들은 다 그릇된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고 보면 된다. 역사를 다시 배워야 할 사람들...

3.1운동을 주도한 세력은 천도교다. 당시 천도교는 3대 교주 손병희를 중심으로 한 유능한 인재들과 중앙대성전 건립을 위해 모은 자금을 갖고 있었다. 천도교인들이 3.1운동을 준비하기 위해 활동한 곳이 서울의 북촌이다. (p. 130) 3.1운동에서 불교계의 활동도 중요했다. (p. 131)

역사적 사건에서 종교인들이 큰 역할을 할 때가 많다. 그 역할이 사회적 이익이냐 집단이기주의냐에 따라 결과는 크게 달라지는데...

동학이 천도교가 민족종교가 한국에 뿌리내렸다면 이후의 역사가 달라도 한참 달라졌을 것 같은데... 안타까운 부분이다...

그는(여운형) 1947년 7월19일에 극우 청년들로부터 테러를 당해 사망했다. 그의 죽음을 사주한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가 죽음으로써 가장 이득을 본 사람이 범인일 것이다. (p. 133)

정조가 자주 찾았던 효창원은 조선 왕실의 가족묘다. 주변에는 무덤을 보호하기 위한 숲이 우거져 있었다. 일제는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면서 한양도성과 가까운 이곳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일본인을 위한 공원과 행사장을 만들었다. (p. 156) 해방후 일제가 물러났을 때, 이곳은 사실상 공터나 다름없었다. 해방 직후에는 국립묘지가 따로 없었기 때문에 애국지사들을 모실 장소가 정해져 있지 않았다. (p. 156) 김구는 시민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효창공원에 애국지사의 묘소를 만들고자 했다. (p. 157) 김구가 좀더 오래 살아 있었다면, 효창공원은 순국선열의 묘역으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효창공원에 있는 김구 묘를 비롯한 순국선열의 묘를 이장시키려 했다. (...) 친일파가 득세했던 이승만 정권에게 순국선열의 묘가 서울 시내에 있다는 것이 눈에 거슬렸는지도 모른다. (p. 164) 이승만 정권은 1959년부터 약8천평 대지 위에 2만명의 관중을 수용하는 축구장을 짓기 시작했다. (p. 165) 이승만은 정권 유지를 위해 친일파 출신을 대거 등용했다. 이들이 친일 논란을 희석시키기 위해 강조한 것이 '반공'이데올로기다. (p. 166) 만주군관학교 출신인 박정희 대통령도 효창공원을 그냥 놔두지 않았다. (...)효창공원이 홀대를 받고 훼손되는 사이, 국군묘지인 현충원은 날로 커졌다. (p. 166) 국가유공자 묘역에는 친일파들이 다수 묻혀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비서장인 조경한은 '내가 죽으면 친일파가 묻혀 있는 현충원에 묻지 말고 동지들이 있는 효창공원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임시정부 요인을 위한 별도의 묘역이 만들어진 것은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부터다. (p. 167)

미국은 한반도에 그들의 입맛에 맞는 정부가 들어서기를 원했기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대한민국 정부로 전환되는 것을 막았다. 임시정부의 주석 김구와 부주석 김규식 등을 개인 정치가로 취급했다. 미국이 원한 대한민국의 지도자는 기독교 신자여야 하고 미국과 말이 통하는 사람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해방 정국에서 이런 조건에 부합한 사람이 이승만이었다. (p. 180)

이래서 대통령이 중요한 거다... 위정자의 역사관이 중요한 거다... 예나 지금이나 반공이데올로기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정치가는 친일파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무엇을 감추려고 다른 것을 그리 강조하겠는가... 성조기 흔드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일장기 흔드는 거나 성조기 흔드는 거나 남의 나라 국기 흔드는 것은 나라의 주인을 국민이 아닌 외국으로 갈아치운것 말고 무엇이겠는가... 일본도 미국도 어차피 다 자기네들 잇속 차리려 한국에 뿌리내린 침탈자들이긴 매한기지인 것을... 에혀...

2022년, 정부는 광화문광장을 세종대로 서편으로 붙여서 세종문화회관 및 정부 청사와 연결시켰다. 광장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시도였는데, 2009년에 광장을 만들 때부터 이렇게 만들었어야 했다. (p. 239)

2009년 광장을 만든 서울 시장이 앞서 말한 지금의 그 시장이다. 그리고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세우려고 난리다. 2024년에 100미터에 달하는 초댛형 태극기 계양대를 세우겠다고 발표했을 때 반대 여론이 들끓자 한발 물러나긴 했는데 그럼에도 광화문 광장에 국가상징공간을 조성하는 사업을 계속 추진하겠다는 입장(p.240)이라던데... 대체 왜 그러는 건지... 아무래도 역사를 잘못배운것 같은데 말이다....

1506년 연산군은 이렇게 말했다.

"임금이 두려워하는 것은 역사뿐이다"

역사를 두려어하지 않는 자들만큼 못된 사람들도 없다. 부끄러움을 모르니 큰 범죄를 저지르고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모른다. (p. 246)

하물며 연산군도 역사는 두려워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최근 역사도 두려워하지 않는 정치인들은 너무 많이 보고 있는 중이다. 이런 시대에 한국의 근현대사를 읽는 것은 더욱 암울한 기억속으로 파고드는 것이긴 했지만 어쩌면 어두운 시기라서 더욱 그 어두운 과거를 돌아보아야 할 때일지도 모르겠다. 부디 더 짙은 어둠 속에 파묻히지 않기를 희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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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와 거장 - 위대한 창의성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데이비드 W. 갤런슨 지음, 이준호 외 옮김, 박성원 감수 / 글항아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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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성 탄생의 두 가지 상이한 모습

'개념적 혁신가' vs '실험적 혁신가'

그리고 나이와 혁신의 관계

Old Masters and Young Geniues 를 단순하게 천재와 거장으로 옮기기엔 이 책의 내용은 Old 와 Young 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천재라 하면 젊은이를 떠올리고 거장이라고 하면 늙은이를 떠올릴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마찬가지로 '위대한 창의성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라는 이 책의 부제에서 '어떻게'에 방점을 두고 읽는다면 이 책을 통해 얻어지는 답은 없을 것이다. 창의성이 어떻게 생겨나는지는 누구도 알수 없다. 그보다는 'The Two Life Cycles of Artistic Creativity' 라는 원제의 부제, 즉 '예술적 창의성의 두 가지 생애 주기' 라는 부제에서 창의성과 생애라는 키워드를 중심에 두고 읽는다면, 이 책은 어찌보면 새롭고 어찌보면 당연한 논리 하나를 증명해 내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저자는 경제학자답게 자신이 주장하고자 하는 논리를 숫자적으로 정확히 보여준다. 창의성이 가장 최대한 발현된 시기에 따라 예술가의 혁신성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를. 숫자라고 해서 겁먹을 필요는 없다. 숫자의 구분은 크게 두개로 나뉠 뿐이니. 바로 Young 과 Old, 제목에서 부터 기억해두라고 했던 바로 그 구분 말이다.

저자는 자신의 논리를 주장하기 위해 예술가들을 크게 두 가지 그룹으로 나눈다. '개념적 혁신가' 와 '실험적 혁신가'

책을 읽는 내내 이 두 용어는 생각보다 그리 쉽게 이해되지 않고 입에 붙지도 않는데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개념적 혁신가는 young 으로 실험적 혁신가는 old 로 연결지어 받아들이면 그나마 헷갈리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른 나이의 성공작 과 일생동안 축적되는 명성 이라고나 할까.

혹은 대표적 예술가들과 연결지어 이해해도 좋을 것 같다. 개념적 혁신가의 대표로는 반 고흐, 허먼 멜빌, 제임스 조이스, 헤밍웨이, 피츠제럴드 등이고 실험적 혁신가의 대표로는 미켈란젤로, 렘브란트, 세잔 등이다.

또는 이렇게도 이해할 수 있다. 개념적 혁신가는 대표작이 하나 혹은 둘 크게 성공한 작품을 지녔고(그 뒤로 그 성공작을 뛰어넘는 후속작을 창조해내지 못했고) 실험적 혁신가는 장기간 꾸준히 명성을 쌓아올렸으나 (그만큼 성공작도 다양하여) 대표작으로 딱히 무엇을 꼽아야 할지는 모르겠는 예술가.

질문은 나이에 따라 예술가들의 작품의 질이 어떻게 그리고 왜 다양해지는가다. 이 책의 목적은 창의적 예술가들의 생애주기에 대한 나의 이론을 제시하고, 이 이론이 경험적으로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 그리고 이러한 분석의 결과를 검토해보는 것이다. (p. 10)

예술가들의 작품 질이 나이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지에 대한 질문은 예술가들이 혁신적인 모습을 드러낸 연령대가 다양한 이유가 무엇이냐 라는 질문이라 할 수 있다. 이 연구의 과제는 바로 이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다. (p. 13)

서문 中

저자는 자신의 논리를 펼쳐내기에 앞서 두 가지의 유형의 대표주자를 드러냄으로써 그 전형의 모습을 제시한다.

나는 그림을 통해 탐구한다 - 폴 세잔

나는 탐구하지 않는다. 발견한다. - 파블로 피카소 (p. 20)

느낌이 오는가? 그렇다. 세잔은 인생 내내 꾸준히 자신의 예술을 탐구하고 노력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혁신을 일궈낸 유형이라면 (실험적 혁신가) 피카소는 혁신적 아이디어를 먼저 제시하고 그 후 작품들로 그 아이디어의 혁신성을 완성해낸 유형 (개념적 혁신가) 이다. 세잔의 작품은 말년에 이를수록 완성도가 높아졌고 피카소의 가장 완성도 높게 평가되는 작품은 그의 젊은 시절 초기작들이다. 그 완성도의 기준은 동일하게 예술적 '혁신성' 이다. 혹은 예술적 창조성 이라고도 할 수 있을듯 싶다.

실험적 접근법과 개념적 접근법 간의 차이를 고려하면 이를 토대로 나이와 예술적 혁신의 관계에 관한 체계적인 예측이 가능하다. 중요한 실험적 혁신을 이루려면 종종 오랜 기간의 시행착오가 필요하며, 그렇기 때문에 예술가의 활동 후반기에 주로 드러난다. 개념적 혁신은 더 빠르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어느 나이에서든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p. 39) 가장 중요한 개념적 혁신은 예술가의 활동 초기에 일어난다. (p. 40)

저자는 예술적 성공을 계량화하기 위해 다양한 데이터를 활용한다. 경매에서의 가격, 교과서에 실리는 횟수, 회고전에서의 비중, 미술관 소장품, 전시회, 작품 활동 기간 등 다양하게 측정하여 숫자적으로 결과를 제시한다. 창의성이 발현되는 것을 생애주기적으로 분석하면 '개념적 혁신'과 '실험적 혁신'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질적으로 개념적인지 또는 실험적인지로 측정하는 경우 예술가의 생애주기에 따른 창의성과 체계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p. 120) 고 말이다.

젊은 천재는 혁신적 아이디어를 발견한 초기작으로 성공을 거두고, 거장은 평생토록 연구한 결과물을 통해 천천히 발전사를 보여준 끝에 완성된 혁신적 작품으로 명성을 얻는다는 것이 뭐 새롭단 말인가 라고 되물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차이점을 제대로 인지하는 것을 넘어 확장적으로 사고하면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19세기 프랑스 예술계에서 그룹전의 중요성은 예술가들의 관습적 행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야망에 찬 화가들은 명성을 높이고 유지하기 위한수단으로 크고 복잡한 개별 그림을 만드는 데 필요 이상의 노력을 기울였다. 더욱이 이러한 유형의 경쟁에서는 개념적인 예술가들의 작업 방식이 더 유리했다. 명성을 원하는 실험적 예술가들은 이러한 시도를 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시달렸다. 이러한 부분을 인식하는 것은 근대 미술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현재의 분석에 또 다른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p. 153)

우리는 인상주의 화파가 등장했을 때 기존의 살롱전에서 거부당하고 무시당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그림 때문이 아니라 완성된 그림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의 방법 혹은 인식에서의 차이라면 어떤가? 좀 다르게 이해되지 않는가? 인상주의 화파는 그림을 그리고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는 과정을 거쳤다. 하지만 당대 살롱전에 출품되는 작품들은 명확하게 아이디어적 혁신성이 더 가치를 인정받았다. 인상주의 화파로서는 아무리 거대한 그림을 그려내더라도 방법적으로 살롱전 그림들과는 너무나 달랐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후에 인정받게 된 인상주의 화파의 혁신성 이었다. 따라서 '인상주의자들의 그룹전시는개념적 예술가들에게 형식적으로 더 적합하다고 인정된 공식 제도에 대한 젊은 실험적 예술가 집단의 대응으로 볼 수 있다. (p. 158)' old 거장이 되기 전이라도 개념적 혁신성과 실험적 혁신성은 방법적 차이를 이해하고 나면 이렇듯 예술가들의 작품이 다르게 보이고 미술사의 흐름을 새롭게 볼 수 있게 된다. 이 책의 핵심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실험적 예술가와 개념적 예술가의 경력에서 최고의 성과를 보이는 시기의 차이는 분명했다. (p. 177) 실험적 화가들은 종종 개념적 예술가들을 예술적인 능력과 진실성이 부족한 지적 사기꾼이라고 생각한다. (p. 179) 실험적 예술가들은 종종 터치 감각과 경험을 통해 얻은 표현의 깊이로 칭송을 받는 반면, 종종 절제가 부족하고 신비주의적이라고 비난받는다. 근대 미술사에서 실험적 화가들은 비교적 짧은 기간 선도적 역할을 한 것으로 인정받아온 반면, 개념적 화가들은 비교적 오랜 기간 미술계를 주도했다고 인정받고 있다. (p. 181)

'급진적인 개념적 혁신은 실험적 혁신보다 훨씬 더 빨리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에 혁신에 대한 강력한 요구가 있는 모든 상황에서 개념적 예술가들이 더 유리하다. (p. 183)' 게다가 미술사에서도 개념적 예술가의 한두작품이 실험적 예술가들의 수많은 작품들보다 더 오랜 기간 더 비중있게 인정받는다. 이는 오랫동안 가난과 무명의 설움을 겪으며 고군분투한 실험적 예술가들이 젊은 나이에 빠른 상업적 성공을 거둔 개념적 예술가들에게 분노를 일으킬 법도 하다. '그러나 개념적 예술가들의 가장 큰 위험은, 초기에 찬사를 받을 가능성이 실험적 예술가들보다 높다고 하더라도 아이디어가 소진되면 정체기가 올 수 있다는 점이다. (p. 184)' 즉 너무 이른 성공은 그것을 뛰어넘을 후속작이 불가능해짐으로써 예술가의 남은 생애를 고달프게 만들 수 있다. 그 대표적 사례로 제임스 조이스와 헤밍웨이를 들 수 있는데 최근 제임스 조이스와 헤밍웨이의 작품을 읽은 나로서는 그들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새로운 힌트를 얻은 기분이었다.

준비 과정에서 밑그림을 그리지 않고, 작업 중인 작품을 계속 추가 수정하며 완성을 주저하고, 그림이 그려지는 과정을 통해 최종 완성품의 스타일을 점진적으로 드러내고, 순수하게 창작한 이미지를 바탕으로 완고하게 모든 작업을 온전히 스스로 감당하고, 판매될 그림 한 점을 완성하기 위해 일련의 단계별 상태를 구현하는 등의 모든 특징은 렘브란트가 모호하지만 야심찬 시각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실험적 예술가라는 명제에 부합한다. (p. 207)

작업하는 과정 중에 자주 수정되고 모든 작품 창작에 시각 효과를 대입하는 관점으로 접근하는 특징으로 볼 때 미켈란젤로는 실험적 예술가임을 알 수 있다. 경력이 쌓일수록 작품을 완성시키기 어려워했다는 점 역시 마찬가지다. (p. 215)

라파엘로가 준비 과정에서의 까다로움과 완성된 작품의 정확성으로 유명하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그의 그림은 마땅히 개념적이라 할 수 있다. (p. 217) 자신의 작품을 기꺼이 다른 사람이 구현하도록 한 라파엘로의 방식은 예술에 대한 그의 개념적 접근방식에서 비롯됐을 수도 있다. 이와는 달리 가장 야심 찬 자신의 프로젝트를 직접 제작하려 한 미켈란젤로의 욕망은 실험적 태도를 반영한 것일 수 있다. (p. 220)

이 책을 읽으며 개념적 혁신과 실험적 혁신을 이해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개념적 혁신이 아이디어에 비중이 있다보니 그림으로 보자면 사전작업이 더 미비할 것 같고 그림도 모호할 것만 같았고 실험적 혁신은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니까 밑그림이 엄청 많고 준비작업도 엄청 길며 그림은 아주 세밀하지 않을까 혼자 생각했었는데 오히려 그 반대였다. 개념적 혁신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구현해내기 위해 사전 작업이 더 치밀했고 정작 작품의 완성은 그에 비해 순식간이었지만 실험적 혁신은 작품 자체를 자꾸 고치고고치고 하다보니 결과적으로는 형이상학적 그림이 되기 쉬웠다. 예술적 창의성에서 '개념적'과 '혁신적'의 의미는 참 어렵다;;; 하지만 익숙하게 알던 명화들을 다시보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아~ 그래서 그랬구나~ 싶어진달까.

이 책의 시작도 그렇고 주된 내용도 화가들의 예술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후반부에 가서 그 범위를 확장시킨다. 조각가, 시인, 작가, 영화감독까지. 그중 특히 소설가에 대한 부분이 가장 재미있었다. 내가 읽었던 작가들 얘기라서 새롭게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보니. 시인중에서는 '에즈라 파운드' 관련 내용이 기억에 남는다. 이또한 내가 읽었던 제임스 조이스와 헤밍웨이와 아주 밀접한 관계의 시인이다 보니.

파운드는 [황무지]를 편집한 것으로 유명한데, 엘리엇 원작의 절반 이상을 잘라내 더 날카롭고 강렬한 시로 다듬었다. 엘리엇은 이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더 뛰어난 장인' 이라는 헌사와 함께 차후에 이 시를 파운드에게 헌정했으며 '파운드 작품의 기술적 완성도와 비평적 능력을 기리고 싶다'라고 밝혔다. (p. 266)

개념적 소설가들은 일반적인 생각 또는 원칙으로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주로 상징적인 작품을 집필할 가능성이 높은 반면 실험적 소설가들은 다큐멘터리 방식으로 특정 사례를 더 자주 다루는 편이다. 현실 상황에서 볼 수 있는 실제적인 사람들로 이루어지는 실험적 소설의 등장 인물에 비해, 개념적 소설의 등장인물은 지나치게 단순화되거나 일차원적으로 보일 수 있다. 개념적 작가의 언어는 형식적이거나 인위적인 경우가 많고, 실험적 작가의 언어는 일상적이거나 토속어가 많다. 개념적 작가의 책은 종종 명확한 메시지나 교훈으로 마무리되는 반면, 실험적 작가는 종종 줄거리를 마무리 짓지 않고 결론을 열어놓거나 모호하게 남겨둔다. 개념적 작가는 도서관 연구를 작품의 기반으로 삼아 사실적 정확성을 담보하기 위해 노력하는 반면, 실험적 작가는 일반적으로 자신의 인식과 직관에 의존한다. 개념적 작가는 사전에 신중하게 계획된 복잡한 플롯을 구성하는 반면, 실험적 작가는 일반적으로 작품을 쓰면서 플롯을 구성하며, 저작 과정 전반에 걸쳐 전개되는 플롯에 중요한 변화를 끼워 넣는다. 실험적 작가는 등장인물의 성격 묘사와 분위기 조성 효과를 위해 플롯을 사용하지만, 개념적 작가는 가장 중요한 구조나 개념을 끌어내기 위해 캐릭터와 설정을사용한다. 실험적 작가는 글을 쓰는 과정에 창의성의 본질이 있으므로 가장 중요한 발견은 글을 쓰는 과정에서 얻어진다고 믿는 반면, 개념적 작가는 작품의 초고를 작성하기 전에 구체화한 아이디어를 중요하게 여긴다. 일반적으로 개념적 작가의 목표는 명확하기 때문에 작품을 완결짓고 특정한 목적을 달성했음에 만족하지만, 실험적 작가는 정확한 목표가 없기 때문에 종종 작업에 대해 만족하지 못한다. (p. 280~282)

저자는 이러한 설명 뒤에 영미권 소설가 8명을 예시로 든다. 찰스 디킨스,마크 트웨인, 헨리 제임스, 버지니아 울프는 실험적 작가, 허먼 멜빌,제임스 조이스, 피츠제럴드, 헤밍웨이 는 개념적 작가다. 이 작가들의 작품들을 생각하면서 '실험적 혁신'과 '개념적 혁신'을 연결지어 보라.

헤밍웨이의 대화는 그가 작품 활동 초기에 개발한 여러 개념적 장치 중 하나로, 그의 대표적인 문체로 유명해졌다. 또 다른 장치 중 하나는 세번째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에서 시작된 상징의 사용으로, 여기서 비는 지속적 재난의 신호 역할을 한다. 헤밍웨이는 수년간의 시행착오를 통한 점진적 과정을 거치는 대신 마크 트웨인, 셔우드 앤더슨, 거트루드 스타인 등의 다른 작가들을 연구함으로써 빠르게 자신만의 장치들을 고안했다. (p. 304)

윌리엄 발라시는 헤밍웨이의 두번째 소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의 구성에 대해 연구한 결과 헤밍웨이가 체계적으로 집필앴음을 밝였다. '매일 그는 방법이나 주제를 선택했다. 예를 들어 제이크는 투우에 대한 열정, 마이크는 파산, 제럴드는 뿔로 들이받아 분리된 수소, 더프는 키르케 신화 등 주인공 한 명과 연관된 은유를 바탕으로 매일 구성을 짜는 작업을 나흘 동안 진행했다.' 헤밍웨이가 그 후 이틀간 제임스 조이스와 오디세이에 차례로 경의를 표한 것을 보면 신화에 대한 언급은 우연이 아니었다. (...) 헤밍웨이가 30세때 출간한 세번째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는 줄거리가 밀도 있게 짜였으며, 마이클 레이놀즈의 말에 따르면 '미국 소설로는 보기 드물게 질서 있고 논리적인 방식으로 신중하게 계획되었다.' 이 책에서 사랑과 전쟁이라는 두 테마는 평행을 이루며 구성되는데,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프레더릭 헨리의 태도는 여섯 단계에 걸쳐 변화하며 캐서린 버클리와의 관계도 이에 상응하여 여섯 단계를 거친다. 필립 영은 소설이 끝날 때쯤 '사회적인 삶이든 개인적인 삶이든 삶은 패배자가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투쟁이라는 점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결국 두 이야기는 하나로 이어진다'고 관찰했다. (p. 305)

저자는 헤밍웨이의 대표작으로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와 [무기여 잘 있거라]를 꼽고 있으며 이후의 작품들은 쇠퇴해왔다고 비평가들의 말을 전한다. 헤밍웨이가 제임스 조이스에게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했던 나로서는 확증을 얻은 기분이었다. 위 두 작품은 헤밍웨이가 파리에서 제임스 조이스와 교류할때 쓰여진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헤밍웨이는 노벨상까지 받았지만 초기작들에 비해 걸출한 후속작을 내놓지 못한다는 평가에 늘 시달렸고 스스로도 그 사실에 평생 괴로워했다. 여하튼 저자는 '개념적 소설가들이 실험적 소설가들보다 더 이른 시기에 주요 대표작을 발표한다는 가정이 옳았음을 알 수 있다' (p. 309) 며 화가들에 이어 제차 자신의 이론을 다지고 있다.

윌리엄 포크너는 동시대 작가이자 같은 노벨상 수상자였던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작품보다 자신의 작품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실험적 예술과 개념적 예술의 구분을 여러 차례 사용했다. 여러 인터뷰에서 포크너는 '조각가도 화가도 거의 없었으며, 모차르트처럼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수학자가 공식을 사용하는 것처럼 자신의 음악을 사용한 음악가도 거의 없었다' 라고 말했다. 포크너는 모차르트를 연역적으로 작업한 예술가의 원형이라고 밝힌 후, 모차르트와 헤밍웨이를 함께 결부시켜 모든 예술가가 '모차르트나 헤밍웨이가 가졌던 자질'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고 지적했다. 포크너는 헤밍웨이가 자신의 스타일을 일찍부터 익혀 그 이후로 일관되게 사용했지만, 토머스 울프와 퐄너 자신을 포함한 다른 작가들은 '본능, 교훈 또는 그게 무엇이든 간에 우리에게는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 모든 경험을 각 단락에 쏟아 붓고자 했다. 그래서 우리 작품은 서툴고 읽기 어렵다. 일부러 어설프게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포크너는 헤밍웨이가 자신이 만족할 수 있는 방법을 일찍 발견했기 때문에 '우리 가운데 가장 일관되게 탄탄한 작업을 해냈다'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포크너는 야심찬 시도를 주저하지 않은 토머스 울프를 당대의 가장 위대한 작가로 꼽았다. '그는 가장 열심히 노력했고, 가장 긴 도박을 했으며, 가장 긴 시도를 했기 때문에 가장 크게 실패했다' 반면 포크너는 헤밍웨이를 울프뿐만 아니라 어스킨 콜드웰, 존 더스 패서스는 물론 포크너 자신보다도 하수로 여겼는데, 그 이유는 헤밍웨이가 '실험에 '뛰어들지 않고' 자신의 초기 방식을 고수'했기 때문이었다. (p. 339~340)

그리고 헤밍웨이는 포크너의 이러한 평가를 알건 몰랐건 간에 스스로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그의 생애를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개념적 예술가들의 이른 성공과 실험적 예술가들의 단단한 완성이 아니다.

두 유형 간의 차이는 오히려 예술적 과정과 관련되어 있다. '한 유형은 한순간 엄청난 노력으로 경험의 최고치를 쏟아 부을 수 있고, 다른 유형은 자신의 의식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단계별로 파고 들어가야 한다' (p. 338)

두 유형의 예술가들 간 차이가 단순히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는 '방법'이 아니라 그리거나 쓰는 '이유'에 있다는 점 (p. 345)

작가들의 연령-창의성 프로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특정한 작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시간이 아니라, 그들이 예술을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시간이다. (p. 362)

저자는 '두 유형을 구별하는 것의 중요성과 이것이 예술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미치는 크나큰 영향을 고려할 때 예술을 연구하는 이들이' (p. 345) 자신이 이 책을 통해 이론화 하고 있는 것에 큰 비중을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안타까워 하고 있다. 뭐.. 안타까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두가지 유형에 대한 이해는 분명 예술가들에 대한 기존의 이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게 하는 면은 있다.

위대한 실험적 혁신가들은 이전에는 추상적이었던 전문 분야에 실질적인 내용을 추가할 수 있고, 위대한 개념적 혁신가들은 이전에는 복잡했던 영역을 단순화시키는 방법을 발견할 수 있다. (p. 367)

실험적 혁신가와 개념적 혁신가의 구분은 예술뿐 아니라 사실상 모든 지적 활동에 존재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 책에서 제시하는 분석의 의미는 매우 클 수 있다. (p. 369)

창의성은 이론가나 경험주의자의 전유물이 아니며, 주요 혁신은 젊은이나 노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연역적으로 일하는 개념적 혁신가와 귀납적으로 일하는 실험적 혁신가 모두 광범위한 지적 활동에 중요한 업적을 이뤄왔다. (p. 382) 연구를 통해 드러난 기본적인 결과는 각 예술 활동의 가까운 역사에서 개념적 혁신과 실험적 혁신이 모두 심대한 역할을 했다는 인식이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자신의 분야에 기여하는 데 있어, 연역적이든 귀납적이든 특정 방식으로 생각하고 일하는 능력보다 적성과 야망이 더 중요한 요소임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p. 383)

그러니까 결론은 요즘말로 케바케라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러한 책을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되는 이유는 사고력 확장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어떤 책을 읽었을 때 아! 하는 순간이 단 한번이라도 있다면 그 독서의 시간은 이미 충분히 가치가 있다.

실험적 혁신가는 찾고 개념적 혁신가는 발견한다. 이러한 차이에 대한 이해를 높이면 우리가 공부하는 학문의 발전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아울러 우리 자신의 창의성을 높이는 데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실험적 창의성과 개념적 창의성의 차이를 인식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뿐만 아니라 우리가 배우는 방식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p. 384)

저자는 후기에서 자신의 분석이 '현대 미술사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혔다는 점을 깨닫고, (p. 388) 시인과 소설가에게도 이러한 분석을 적용했을 때는 놀라운 이점이 있었다. 이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작가들의 행동과 작품의 전개 양상이 예술가의 유형에 대한 일반적 특성으로 설명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p. 389)' 라고 말하고 있는데, 나역시 그랬다. 내가 익히 알던 화가와 소설가들 그리고 그들의 작품들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이 책이 주는 만족감이었다.

역자 중 한명은 자녀들의 유치원 학부모 대상 특강을 준비하며 이 책의 메시지를 활용했다고 한다. '인간의 전성기는 젊어서 올 수도(천재), 나이가 들어서 올 수도(거장)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이클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으므로, 세상과 인간 기대의 사이클에 맞춰 아이들을 바라보지 말자고 했다. (p. 424) 또 한명의 역자는 '예술교육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을 함께 생각해보기를 (p. 430)' 권하는데 이 책을 활용하고 있다. 나와는 또다른 이 책의 활용 예시를 보며 역시 다시한번 독서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책 내용도 좋았지만 만들어진 책의 형태가 무엇보다도 마음에 들었다. 풀로 왕창 붙여져 잘 펼쳐지지도 않는 그런 만듦새가 아니라 정성들여 실로 이어지고 다시 붙여지고(이런 제작 형태가 이름이 뭐더라;;;기억이;;;; ㅜㅜ) 하드커버로 된 책의 모양새가 내용 못지않게 기품 있어 이런 책이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고 손에 들려지고 읽혀지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가득하다. 또한 이런 책을 만들어주시는 정성이 앞으로도 계속 되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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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가 옳았던 이유 - 프로메테우스의 꿈과 좌절
테리 이글턴 지음, 박경장 옮김 / 21세기문화원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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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턴 특유의 재치와 유머, 그리고 명쾌함!

마르크스가 옳았던 이유 10가지!

이 책은 마르크스 이론에 대한 책이다. 마르크스 이론은 다 지나간 옛논리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본주의 시대에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이론 하나 제대로 없다는 게 더 이상한 것 아닌가? 어느 시대이던 그 시대의 사상이 있었고 그 사상에 대한 반론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시대에 자본주의에 대한 논쟁은 너무 없는게 아닐까?

마르크스 이론은 자본주의가 완전히 형성되기 전에 나온 이론이므로 자본주의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만든 논리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채 형성되기도 전에 그 허점들에 대해 낱낱이 파악했다면 자본주의는 그 시작부터 너무 부실했던 논리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더구나 그 허점 투성이 자본주의 논리에 대해 마르크스 이론이 너무나 따박따박 잘 반박하고 있다면 더더욱 말이다.

저자는 영국에서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문화비평가이자 문학평론가 라고 한다.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마르크스 이론이 연구되고 현세태를 분석하는데 유의미한 툴이 될 수 있음을 가장 활발하게 보여주고 있는 학자라고나 할까.

저자는 서문에서 '2011년 이 책이 처음 출간된 후 마르크스 사상은 적어도 한 가지 측면에서 극적으로 확인되었다.' 라고 이 책을 시작한다. 2007~208년에 미국에 금융위기가 닥쳤고 2011년에 '월가를 점령하라'는 '반(금융)자본주의'구호를 외치는 행동시위가 80여개 나라로 번졌고, 이 책은 그런 역사적 맥락 아래 나오게 되었기 때문에 한 말이다. 여기에 멈추지 않고 이 책은 2018년 개정판이 나오기에 이르러 이제 한국에도 번역되었다. 그러니까... 마르크스 이론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겠다.

포퓰리즘은 항상 이런 식으로 양날의 칼과 같아서 가장 관대한 평등주의 본능과 가장 추악한 본능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우파 포퓰리즘은 자본주의 자체에 내재된 모순의 한 극을 나타낸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자유주의 시장 체제가 더욱 지구화되고 집약화되면서 모든 안정된 정체성과 익숙한 좌표가 용광로에 던져져 끊임없는 유동과 동요의 세계를 만들어 냈다. 이 혼란에 대한 반발로 이 용감한 신세계에서 뿌리 뽑히고 불안정하다고 느끼는 사람들 사이에 깊은 불안감이 조성되었는데, 그런 불안은 혐오와 인종주의 측면에서 쉽게 이용될 수 있다. 흔히 그렇듯이 증오의 뿌리는 단순한 적대감이 아니라 두려움에 있다. (p. 7)

핵심은 이 무익한 갈등에서 어느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이 갈등이 선진 자본주의 본질에 어떻게 뿌리내리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구화된 형태의 선진 자본주의 시스템이 작동되는 한 이런 내재된 모순에 끊임없이 빠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즉 모순을 제거하려면 스스로를 제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 모순은 매 순간 위협적으로 스스로를 무너뜨리려 하고 있다. 이러한 이해를 추구하는 데 마르크스의 사상은 그 어느 때보다 여전히 유효하다. (p. 7~8)

개정판 서문 中

우파 포퓰리즘이 한국 사회를 멍들게 하고 있는 지금 이 서문의 문장들이 너무도 와닿았다. 자본주의를 경제학적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현상적으로 이해하는데에도 마르크스 사상이 이렇게 필요한 거였다니 다시금 놀랍기도 했고.

여하튼, 개정판의 서문은 이 책이 왜 2025년 지금도 유효하게 읽힐 수 있는지를 깨닫게 해주었다면 처음 이 책을 발간하며 저자가 쓴 서문에선 이 책의 탄생배경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놀라운 생각 하나에서 시작되었다. '카를 마르크스의 작업에 대한 가장 익숙한 비판들이 모두 잘못된 것이라면? 혹은 적어도 완전히 틀리진 않더라도 대부분 틀린 것이라면 어찌 되는가?' (p. 9) 나는 마르크스 사상이 완벽하다는 게 아니라 개연성이 있다고 제시하려는 것이다. 이 점을 보여주기 위해 이 책에서는 마르크스에 대한 가장 표준적인 비판 열 가지를 택하여 중욛에 어떤 순서를 정하지 않고 하나하나씩 반박하려 한다. 또한 마르크스 작업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명확하고 이해하기 쉽게 그의 사상을 소개하고자 한다. (p. 10)

초판 서문 中

이 책의 뒷표지에 보면 '세상에서 가장 재밌는 마르크스 입문서' 라고 쓰여 있다. 솔직히 '재미'까지는 보장하지 못하더라도 색다른 '입문서'라는 점에선 고개끄덕여진다. 사실 마르크스 사상을 조금이라도 접해본 사람이 이 책을 읽을때 이해하기 쉽기는 하다. 하지만 마르크스 사상을 모르더라도 이 책의 반박논리들을 보면 그 사상이 궁금해진다는 점에서 이 책은 색다른 입문서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 사상을 반대?하는 입장에 대한 반박문장 열가지로 이 책은 소제목을 짖고 있어서 차례만 봐도 일단 그 주장들이 무엇인지 빠른 확인이 가능하다. 또한 각 챕터별로 소제목 아래에 그 반대 논리를 개략적으로 요약해놓고 있어서, 아하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반박하려는 내용이 이 챕터의 줄거리구나 라는 것도 빠르게 알 수 있다.

  1. 마르크스주의는 끝나지 않았다

  2. 마르크스주의는 도그마가 아니다

  3. 마르크스주의는 결정론이 아니다

  4. 마르크스주의는 유토피아를 꿈꾸지 않았다

  5. 마르크스주의는 경제 환원론이 아니다

  6. 마르크스주의는 기계적 유물론자가 아니었다

  7. 마르크스주의는 계급 강박증이 없다

  8. 마르크스주의는 폭력 혁명을 옹호하지 않는다

  9. 마르크스주의는 국가를 믿지 않는다

  10. 마르크스주의는 급진적 운동에 기여했다

소제목들만 봐도 왠지 상식적수준으로만 알던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흥미를 끄는 열개의 문장 아닌가!

마르크스주의가 왜 여전히 유효한지,

마르크스주의가 어떻게 소련에서의 사회주의와 다른지,

마르크스주의가 역사를 결정론적으로 인식한 것이 왜 아니고,

마르크스주의가 유토피아적 몽상이 왜 아닌지,

마르크스주의가 경제를 넘어 어떻게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지,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이 얼마나 구체적이고 실천적인지,

마르크스주의에서 계급론이 얼마나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계급론을 재해석할 수 있게 해주는지,

마르크스주의보다 자본주의가 얼마나 더 폭력적이고 착취적이었는지,

마르크스주의가 독재자에 의한 권위주의 국가를 세울 것이라는 상식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마르크스주의가 다양한 급진적 운동(페미니즘, 환경주의, 반세계화, 평화운동등)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저자는 아주 열심히 열렬하게 논증에 논증을 거듭한다.

비판에 대한 재비판이라 학문적으로 이해하려 들자면 어렵겠지만 저자는 문화비평가이고 문학비평가라그런지 문장이 학술적이지 않아 내용의 무게를 문장이 조금은 가볍게 해주고 있어 읽는데 다행이다 싶었다.

하지만 이토록 흥미롭고 여전히 유효한 이론임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비판으로서만 유용할 뿐 그 대안으로 소환되지 않는 우리 시대의 마르크스(주의)란 무슨 의미란 말인가? '마르크스는 분명히 옳았다. 그런데 왜, 자본주의 모순이 극에 달한 이 시대에 소환되지 않는가?' ' (p. 338 -옮긴이의 말 中-) 라는 역자의 물음은 묵직한 의미심장함을 남긴다. 그렇다. 마르크스가 옳았다는 이론은 분명 논리적이다. 그러나 여전히 분단국가인 한국사회에서 마르크스 라는 이름과 그 이론은 여전히 거론되기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우파건 좌파건 포퓰리즘이 극성인 이 시대에 사회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사상'에 대한 토대는 좀더 넓어지고 깊어져야 하지 않을까? 아쉽지만 바래본다. 프로메테우스가 꿈이 좌절되어 고통에 묶였을지라도 포기하진 않았던 것처럼 우리 사회에서도 사상적 토론이 좌절된 것처럼 보이는 시대같아도 포기되진 않고 토론과 합의가 더디게라도 성장해나갈 수 있기를. 그래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재해석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가는데 보탬이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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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너의 역사 - 품격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설혜심 지음 / 휴머니스트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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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왜 매너와 에티켓을 발명했는가?

아리스토텔레스부터 20세기 섹스 에티켓까지

품격있는 인간이 되기 위한 '매너'의 모든 것

영화 <킹스맨>을 안본 사람도 아는 명대사, 영화를 본 사람은 더더욱 명료하게 기억하는 명대사, 바로 Manners, Maketh, Man.

폭력과 살인이 난무하는 영화에서 킬러를 교육하며 이런 대사를 하는 것이 아이러니지만, 모든 사람은 제 나름의 품격이 그 사람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일견 통하는것 같기도 한 이 명대사가 '매너'라는 것에 대해 새삼 생각하게 했었고 매너란 무엇일까.. 궁금증을 남겼었는데 그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책이 나왔다. <매너의 역사>

동양의 예의범절 전통이 서양에서보다 훨씬 더 유구하고 정교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이 책은 서양, 특히 영국에 초점을 맞추어 매너의 역사를 고찰한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전공인 영국사에 한정할 수밖에 없는 나의 부족한 역량 탓이다. 하지만 이유를 한 가지 더 찾자면 영국의 제국주의가 영국식 예의 규범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매너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p. 7)

저자 서문 [책을 펴내며] 中

매너라고 하면 동양에 예의라는 것이 있듯 서양엔 매너라는 것이 있지 라고 생각하게 되기도 하지만 예의범절과 매너라는 것은 뭔가 좀 다른 것 같다. '신사'라는 말 앞에 왠지 '영국'이라는 글자가 숨겨져 있는 것처럼 느껴지듯 ('신사'라고 쓰고 '영국신사'라고 이해한달까) '매너'라는 말 앞에도 왠지 '영국'이라는 글자가 숨겨져 있는 것 같다. 그러니 영국사 전공자의 매너의 역사는 저자서문부터 느낌이 좋았다. 게다가 '두어 해 전부터 우리 사회에서는 갑자기 예의, 무례, 배려, 불관용, 매너, 품격, 천박 같은 단어들이 엄청나게 회자되기 시작했다. (p. 6)' 라는 이 책을 쓰게 된 배경중 하나였다는 문장을 읽으며 더욱 공감했다. 무례의 시대가 되어서야 매너에 관심을 갖게 되었구나 싶어서... 혹은 사회의 무례를 더이상 참을 수 없어져서 매너의 역사를 찾아보게 되었구나 싶어서...

학계에서 매너를 도외시했던 이유는 또 있었다. 매너가 이른바 '역사 발전의 단계별 변화'와 완벽하게 조응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예법서가 다루어 온 중요한 규칙들은 사회경제적 변화와 발맞추어 변화하기보다는 상당 부분 그대로 유지되는 경향을 보였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온 역사학은 일반적으로 지속보다는 변화에 주목하기 때문에 매너처럼 지속력을 보여주는 주제는 매력적이지 않다. 따라서 매너에 관한 통찰력 있는 논의가 역사학자가 아닌 사회학자에게서 생산되었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p. 15)

저자에 의하면 '매너의 역사'는 역사학 중에서 홀대받는 분야였다고 한다. 아니 좀 무시되었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역사연구에서 '사회경제적 변화에 발맞추어 변화하는' 역사를 찾아냈는지 모르지만 내가 역사를 읽으며 매번 느끼는 것은 인간의 역사는 늘 비슷했다는 점이었다. 그러니 '상당 부분 그대로 유지되는 경향'을 보여왔다는 매너의 역사 경향이 그리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그동안 '매너의 역사'가 체계적으로 연구되지 않았는지 몰라도 다행히 저자는 이 책을 체계적으로 쓴 것 같다. '매너에 관한 역사학의 성과는 여전히 미진하고 특정 시기에 집중되어 있다. 이런 공백을 메우기 위해 이 책은 거칠게나마 고대 그리스·로마시대부터 20세기 말까지 긴 시간 전체를 아우르며 매너의 역사를 재구성한다.(p. 20)' 독자로서 참 감사할 따름이다.


서양역사에서 예절에 관한 담론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예의를 갖춰야 하는 이유를 철학적·도덕적·종교적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의 바른 행동이 어떤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행위 지침서다. 전자는 예의범절을 독립적으로 고찰하기보다는 인간 혹은 사회에 대한 성찰과 분석을 통해 존재의 당위성을 논하는 것이고, 후자는 온전히 사람의 외형적 행동거지에 집중하는 일종의 매뉴얼이다. 그런데 학자들은 후자인 행동 매뉴얼을 가치가 떨어지는 것으로 여기며 진지하게 다루지 않았다. 그 결과 예절의 철학적·도덕적 가치를 파고든 연구에 비해 예법의 실체적인 행태를 연구한 사례는 별로 찾아볼 수 없다. 나는 역사가들이 소홀하게 취급해 온 바로 그 행위 지침서를 주목하며, 그 장르야말로 진정한 예법서라고 생각한다. (p. 30)

저자의 이러한 접근이 이 책을 더욱 재미있게 만들었다. 역사서가 너무 학문적으로만 서술되면 지루해지기 쉬운데 이 책은 구체적 행위지침들에 주목하면서 그 시대 그런 행동들을 했을 사람들이 연상되어 친근하게 읽혀졌다. 그리고 조금 스포하자면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하는 행동들이나 사고방식들은 그리 많이 변하지 않았다.

전체 6부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에서 1부는 고대와 중세의 매너를 다룬다. 여기서 핵심은 '키케로'이다. 모든 사람이 갖추어야 할 덕으로서의 매너에서 '계급성'을 부여한 매너를 최초로 언급하고 강조한 인물이 키케로였다. 그리스·로마사에서 그리스를 중요시하게 여기는 사회와 로마사를 중요시하게 여기는 사회는 그리스·로마라고 한묶음으로 묶기엔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또한번 느꼈다. 로마사를 계승하고 중요시하는 사회는 권위적이고 계급적이고 차별적이다라고나할까...

2부는 매너의 새로운 이상인 시빌리테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매너를 가르쳐야 할 교육의 범주에 넣은 것은 유의미하지만 아직 프랑스 예법의 영향이 큰 매너였다.

3부에서는 프랑스의 영향에서 벗어나 영국식 예절이 탄생하는 과정을 살펴본다. 이 변화는 영국식 경제적 성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만큼 '젠틀맨'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4부에서는 그동안의 조금은 느즛한 매너를 대체해 엄격한 에티켓이 탄생하는 원인과 과정을 살펴본다. 산업화와 더불어 새로운 부르주아 집단이 성장하자 영국의 상류층은 신흥부자들이 침범할 수 없는 배타적인 '소사이어티'를 만들었다.

5부에서는 에티켓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해 간 양상을 살펴본다. 다양한 에티켓들이 등장하는데 쇼핑에티켓까지 나타날 정도다.

6부에서는 20세기 에티켓의 특징을 살펴본다. 계급적 구분이 희미해져 가는 상황에서 사회적 구별 짓기의 단위가 계급에서 개인으로 전환되는 변화가 일어난다. 다양한 생활 에티켓들이 등장하는데 아마도 가장 현실적이면서 재미있게 읽혀질 최신 매너모음 부분이겠다.

매너라고 부르든 에티켓이라고 부르든 여하튼 서양식 예의범절이라고 할 수 있는 이 행동지침들의 시작은 서양 역사의 시작인 고대그리스·로마에서부터 출발한다. 매너의 역사가 인간의 역사와 동시적이랄까. 인간사회의 시작에 인간행동지침들이 필요했던건 당연한 것일수도 있지만, 고대그리스·로마 시대에서의 매너론은 인간이 갖추어야 할 덕으로서의 철학적 소양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테오프라토스의 저서에서 확인되는 바, 그중에서도 눈여겨보게되는 부분은 이때부터 '이후 매너의 역사를 관통해 허세는 아주 경계해야 할 악덕의 지표로 꼽히게 된다. (p. 42)'는 점이다. '내면과 외양의 일치는 19세기 전까지 매너의 역사에서 예법의 절대적인 대전제였다. (...) 외적 행동이 내면적 덕과 상응한다는 오랜 믿음은 결코 생명력을 잃지 않았다. (p. 64)'

여기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리스 시대에는 예절이 계급을 구분하는 수단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매너는 단지 덕을 갖춘 좋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인간을 구별할 수 있는 표지였다. 하지만 이후 서양의 역사에서 매너는 계급적 구별 짓기의 강력한 수단으로 등장한다. 그 시작은 키케로였다. (p. 59)

키케로는 매너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첫번째는 그가 '데코룸'이라는 용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데코룸은 (...) 이후 '매너'와 동의어로 사용된다. (p. 60)

예법서의 전통에서 인간이 생리현상을 은폐해야 하는 철학적 근거를 제시한 최초이자 거의 유일한 인물이 키케로다. (p. 65)

키케로는 직업의 귀천을 논함으로써 이후 직업에 따른 차별이 생겨나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기도 했다. (p. 69)

키케로는 외국에서 물품을 수입해 대량으로 분배하는 도매상들에게는 찬사를 보내면서 소매업자들은 거짓말쟁이들이라며 천하게 여겨야한다고 주장했다. 지금 사회기준으로 말하자면 재벌옹호자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 지배층들이 이 '매너'에 관심을 안 가질 수 있었겠는가?!

테오프라토스와 아리스토텔레스가 매너를 인간 모두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윤리의 관점에서 접근했다면 키케로는 데코룸에 계급성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사실 키케로는 누구라도 갖출 수 있는 미덕, 누구나 추구해야 할 행복을 위한 행동강령으로서의 매너가 아닌, 사회 엘리트가 갖춰야 할 자질로서의 매너를 처음으로 언급한 인물이다. 이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매너 담론에서 커다란 분기점을 형성하며 이후 매너가 계급적인 구별 짓기의 기제로 작동하게 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p. 68)

사실 '매너의 역사'는 '매너'라는 말 자체부터 문제가 있었다. 모든 사람이 갖추어야 할 윤리로서 제시된 행동지침들이 누군가를 특징짓기 위한 '매너'가 되면서 '차별'의 기준이 되어버렸다. 키케로 이후 매너의 역사가 아무리 다채롭고 시대적 흥미를 불러일으킨다해도 결국은 그 매너를 행하는 사람이 그 사람을 특별하게 만들기 때문이라는 차별적 기본전제를 알고 나면 왠지 씁쓸해진다. '매너가 사람들 만든다'는 명대사에 광분했던 우리는 결국 우월적 계급성을 갖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례보다는 '매너'라도 있는게 낫긴 하지만...

다시 아리스토텔레스로 돌아가자. 좋은 매너를 갖추는 일은 곧 행복에 대한 추구이자 삶의 즐거움의 하나다. 그것은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의 따뜻함과 인정, 그리고 이해를 소중히 여긴다는 감정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처럼 매너에는 자기에 대한 존중과 남에 대한 존중이 교차하고, 그 존중을 행동으로 주고받는 기쁨이 있다. 따라서 좋은 매너는 당연히 더 나은 관계를 만들고, 더 좋은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평화로움을 창조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그래서 훌륭한 매너를 보는 일은 즐겁고 행복하다. (p. 594)

저자의 '나가며' 글 中

어쩌면 우리는 고대시대 사람이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를 고민하고 나름의 결과들을 도출해낸 이후 계속 퇴행해온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어떻게든 구별짓고 차별짓기 위해 기준점들을 꼬고꼬아서 만들어온 것이 매너인것 같아서... 재미있게 읽은 이천년간 다채로운 매너의 변화사가 퇴행이라고 하면 좀 허무해질지도 모르지만 '행동이 사람을 만든다'는 관점에서 다시 핵심을 되돌아보게 하는 중요한 깨달음이기도 하다. 다시 아리스토텔레스로 돌아가도 좋겠지만 그렇지못하더라도 꼭 다시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행동이 사람을 만들고 사람이 사회를 만드니 '어떤 행동'을 하고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ps. 역사적으로도 탄탄하고 서술내용도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아서 두꺼운 외형이 주는 부담감을 간단히 날려보내주는 재밌는 책이었다.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휘리릭 읽혀지고 역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 많은 사람들이 읽어봤으면 좋겠다.

책날개를 보니 저자의 책들이 재미난 주제들로 다양했다. 그중 <지도 만드는 사람>이란 책이 눈에 들어온다. 다음에 저자의 책을 읽는다면 이 책을 꼭 읽어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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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 백성을 위한 나라 만들기 창비 한국사상선 1
정도전 지음, 이익주 편저 / 창비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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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民)과 더불어 새롭게 시작하라!"

정도전, 유교 문명국 조선을 구현하다

창비에서 한국사상선 시리즈가 나온다고 했을때 일단은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고전'이라 하면 으레 시대순으로 대표 사상가들이 착착착 떠올려지는 서양고전이 있고 정치사 철학사 등 세부적으로 구분된 사상사들도 즐비한데 한국의 고전이나 사상선 이라고 하면 딱히 생각나는게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고전과 사상사가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전집처럼 구비될 수 있으면 참 좋겠다 싶었는데 드디어 나오는 건가 싶기도 하고.

사상선 각권이 개별 사상가의 전체 저작에서 중요한 일부를 추릴 수밖에 없었듯 전체적으로도 총30권으로 기획되었기에 어쩔 수 없이 선별적이다. 시기도 조선시대부터로 제한했다. 그러다보니 신라의 원효나 최치원같이 여전히 사상가로서 생명을 지녔을뿐더러 어떤 의미로 한국적 사상의 원류에 해당하는 분들과 고려시대의 중요 사상가들이 제외되었다. 또 조선시대의 특성상 유교사상이 지나치게 큰 비중을 차지한 느낌도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의 유학 자체가 송학 내지 신유학의 단순한 이식이 아니라 중국에서 실현된 바 없는 독특한 유교국가를 만들려는 세계사적 실험이었거니와, 이 시대의 사상가들이 각기 자기 나름으로 유·불·선 회통이라는 한반도 특유의 사상적 기획에 기여하고자 했음이 이 선집을 통해 드러나리라 믿는다. (p. 8)

창비 한국사상선 간행의 말 中

책을 시작하기에 앞서 '창비 한국사상선 간행의 말'에서 이 선집의 장점과 단점이 동시에 설명되어지는 듯 하다. 이 선집은 조선시대부터 시작하여 현대까지 다루고 있기에 일단 사상사라는 역사적 측면에서 그리 긴 시간대를 다루고 있지 못하므로 한국의 사상선이라고 아우르기엔 무리가 있다. 게다가 사상가들의 사상들도 주요부분 편집본이 실린 것이라 맥락적 흐름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를 만든 주축이라 할 수 있는 조선시대의 사상들이 대륙의 것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 아니라 의외로 한반도 만의 고유한 특성을 드러내어 현실에 맞게 수정된 것이라는 깨달음과 그 수정이 시대를 거듭하며 이어져 왔기에 한국의 사상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점을 살펴 볼 수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니 그 시작은 조선의 건국을 이끈 정도전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조선은 한국 역사에서 매우 드물게 전쟁을 거치지 않고 건국된 나라이다. 조선 건국은 고려 말 정치투쟁에서 개혁파가 승리를 거둠으로써 가능했으며, 이성계를 국왕으로 추대하는 역성혁명을 통해 완성되었다. 정도전은 고려 말 개혁파의 일원으로 활동했고 이성계를 추대하는 데 앞장서싿. 조선이 건국된 후에는 [조선경국전] [경제문감] [경제문감별집]을 연달아 저술해서 새 왕조의 국정 운영 방향을 제시했다. 조선 건국에 참여한 사람 가운데 이런 역할을 한 사람은 달리 없었다. 그래서 정도전에게는 '왕조의 설계자'라는 칭호가 누구보다도 잘 어울린다. (p. 13)

정도전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는 [서문]은 정도전의 사상을 소개하기에 앞서 그의 삶을 풀어낸다. 좋은 시작이다. 한 사람의 사상은 그 사람의 삶을 알아야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상사는 그 사상가의 개인의 삶을 먼저 알아야 이해할 수 있다. 고려말 혼돈의 시기 정치적 야망이 컸던 정도전의 삶에서 가장 눈여겨 보아야 할 부분은 의외로 그의 관직 이력이었다.

급제 후 이때까지 26년 동안 중서문하성 낭사와 어사대의 관직, 즉 대간의 경력이 전무하고 지방 수령 경험도 거의 없다. 또 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상서6부의 관직도 1371년에 예부낭중을 지낸 것이 전부이다. 대신 유교 경전을 관리하는 전교시와 제사를 주관하는 전의시의 여러 관직을 역임했고, 그 밖의 대부분은 성균관의 박사·사예·좨주·대사성을 두루 거쳤다. 당시 관리 인사를 담당하는 이부·병부의 낭관과 언관인 대간이 청요직이라 불리며 선호되던 상황에서 비교적 한직으로 돌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경력이 행정 실무보다 교육과 연구, 그리고 각종 제도의 연혁 등 고사에 밝게 했고, 그동안 쌓은 지식이 조선 건국 후 새로운 제도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p. 19)

그랬다. 그는 누구보다 학문적 탄탄함을 갖춘 학자이자 정치가였다. 현실적 흐름을 읽을 줄 알았고 그 흐름에 적당한 이유를 고전에서 찾아낼 수 있었다. 앞으로 보게 될 그가 쓴 책이며 왕에게 하는 조언이며 그의 주장들은 모두 옛고전문헌들 속 사례를 바탕으로 과거에 이러이러했으니 지금 이러이러하는게 옳다는 식이다. 그러니까 정도전은 고전 짜깁기의 절대강자 였다고나 할까. 그리고 무엇보다 시대를 바꾼 핵심사상은,

신하들이 민심의 소재를 들어 추대하자 이성계는 "예로부터 제왕이 일어나는 데는 천명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며 천명을 거론했다. 이후 정도전이 지은 태조의 즉위교서는 '천명은 결과적으로 민심의 향배를 통해 확인된다'고 하여 민심과 천명을 연결하는 논리를 제공했다. 왕조 교체의 정당성이 천명과 민심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천명은 민심을 통해 확인되므로, 결국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민심을 얻는 것이었다. (p. 26)

민본과 위민을 중요시하는 가치관은 지금도 여전하다. 과거 왕을 하늘과 연결시켰던 제왕의 운명은 이제 민심이라는 땅과 연결된 것이다. 비록 양반이라는 귀족계급에 의해서이긴 하나 절대왕의 운명을 백성의 손에 쥐여준 것은 프랑스시민혁명보다도 앞선 것이니 이렇게 보면 유럽보다 이 조그만 땅덩어리에서 혁명이 먼저 시작된 것일수도 있지 않나 싶다. 그러나 하늘 혹은 신이라는 천명도 확인불가능한 것처럼 수많은 백성의 마음도 확인불가능하긴 마찬가지였다. 결국 명분은 그 명분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이것이 민심이다 하고 이용하기 나름인지라 혁명다운 혁명일 수 없었던 것이 조선의 건국이라고 할수도 있을 것 같고. 그러니까 혁명이긴한데 혁명의 한계가 시작부터 이미 있었던 것이다.

왕조 국가에서 정치의 잘잘못에 대한 최종 책임은 당연히 최고 권력자인 국왕에게 있었고, 혁명이란 것도 사실은 잘못된 정치에 대한 국왕의 책임을 묻는 행위였다. 이러한 논리로 실제 혁명을 성사시켜 새 왕조를 개창했지만, 혁명은 빈번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었다. 이런 이유에서 정도전은 국왕에게 정치의 책임을 묻는 것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따라서 국왕 대신 총재가 권한을 행사하고, 그에 대한 책임 또한 총재가 지도록 한다면 혁명까지 가지 않고도 책임 정치가 가능할 것이었다. (p. 29,30)


정도전은 왕이 할일은 오로지 제대로 된 총재를 뽑는 것이지 왕이 정치를 직접 할 필요가 없다 했다. 고려시대 왕권 중심의 무책임한 정치에 넌더리를 냈던 지라 새국가의 정치는 왕의 정치력은 약화시키되 책임자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그것까지는 괜찮은 것 같은데 문제는 그 책임자가 정도전 자신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도전의 모든 사상서들은 하나같이 자신을 총재로 뽑아야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들 같은 것이었다. 그러니,

조선 건국에 공이 많았던 방원보다 나이 어린 방석이 정도전의 구상을 실현할 수 있는 후계 국왕으로 적합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도전의 생각이 혁명적이었던 만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사람도 많았다. 특히 국왕권을 제한하는 데 대해서 왕실 내부의 반대가 심했고, 결국 이방원이 정변을 일으켜 정도전을 죽이기에 이르렀다. 뒤어어 태조마저 왕위에서 물러남으로써 정도전이 꿈꾸고 태조가 동의했던 새로운 정치는 실험도 해보지 못한 채 끝이 났다. (p. 31)

그렇다. 정도전의 실험은 시작도 못하고 끝났다. 정도전이 조선의 기틀을 마련한 것처럼 역사를 배워왔지만 아니었다. '정도전이 꿈꾸고 태조가 동의했던 새로운 정치'는 조선의 시작이 아니었다. 조선은 건국과 동시에 왕조만 바뀐, 과거와 그닥 달라질 것 없는 똑같은 왕권 국가 였던 것이다. 그러니 그 뒤로도 왕조만 바뀌는 혁명아닌 혁명이 조선시대 내에 몇번이나 가능했던 것이다. 민심과 위민도 애초부터 시작된 적도 없었다.

아! 신하가 밝은 임금을 만나기가 진실로 어렵지만, 임금이 좋은 신하를 만나기도 역시 어렵다. 바야흐로 지금은 밝은 임금과 좋은 신하가 만나서 성의로써 서로 믿으며 유신의 정치를 함께 도모하니 천년, 백년 만에 한번 있는 융성한 시기이다. 이에 재상연표를 만드는 데 오직 시중만을 적는 것은 총재가 여러 관직을 겸하며, 임금의 직책은 재상 한 사람을 택하는 데 있고 그밖에 아래의 여러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p. 50)

이탈리아에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있었다면 조선엔 정도전의 사상선들이 있었다. 그 모든 책들에서 정도전은 시종일관 주장한다. 왕은 총재를 임명만 하고 정치에 관여하지 않으며 총재가 모든 것을 다 하는데 그 총재는 정도전 자신이 가장 적합하다고. 그 증명으로 과거의 온갖 고전들 속 말씀들을 짜깁기해놓았는데 그것이 정도전의 사상선들이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가 등용되지 못했듯이 정도전도 총재가 되지 못했다.

이렇게 수많은 고전들을 편집하여 잘 짜깁기 해서 자신을 총재로 쓰는 국가를 만든 것이 조선이었다. 자신의 정치를 위해 나라까지 바꿔치기 한걸 보면 정도전이 대단한 인물이긴 하다. 만약 태조가 이방원을 누르고 정도전의 정치실험을 가능하게 해주었다면 조선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니 그전에 공양왕이 정도전을 총재로 임명했다면 조선은 아예 건국도 되지 못했을 텐데 그렇다면 고려말 이후의 시대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조선의 건국에 정도전의 비중을 따져보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물음표들이었다.

여하튼, 정도전의 사상이 '백성을 위한 나라 만들기'라는 구실 아래 결국은 자신이 총재가 되어 새로운 정치를 해보고싶은 야망을 위한 것이었다는 점을 배우게 되어 의미있는 독서시간이었다. 다른 사상선의 책들은 또 어떤 새로운 깨달음을 줄지 자못 기대가 된다.

ps. 창비의 한국사상선 간행을 응원하며 앞으로 한국사상선 보충과 고전에 대한 시리즈물을 계속 기획해주길 또 더 응원한다. 고마워요 창비!



#한국사상선 #창비 #정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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