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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족의 왕 아틸라 ㅣ 역사 명저 시리즈 10
패트릭 하워스 지음, 김훈 옮김 / 가람기획 / 2002년 8월
평점 :
품절
몇 년 전이던가, <박물관은 살아 있다>란 영화를 조카들 데리고 가서 보았다. 전시되어 있던 밀랍 인형들이 살아 움직이며 주인공과 더불어 소동을 일으키는 장면에서 유목민의 복장을 한 어떤 사람이 눈에 띄었다. 설정 상, 아틸라인 것이 확실했다. 게다가 야간 경비직에 있는 주인공이 무료한 밤에 읽는 책이 바로 이 책 <훈족의 왕 아틸라>였기도 했으니.
이 책의 주인공인 아틸라는 아마 징기스칸과 더불어 유럽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동양계 군주가 아닐까싶다. 그러나 아틸라는, 서양 신문에 의해 밀레니엄을 대표하는 인물로 꼽히고, 고국에서 신적 추앙을 받으며 제대로 업적이 자국 역사에 기록된 징기스칸에 비해, 너무 터무니없이 편견으로 가득찬 평가를 받고 타국 역사책에 실려 있는 인물이다. 저자인 패트릭 하워스 역시 그 점을 의식해서인지, 첫 장부터 "크게 중상당해온 민족"이라는 소제목 아래 이야기를 시작한다. 마음에 든다.
지난 1500년 동안 서구 사람들은 편견에 가득 차 있고 아주 적대적인 자료들을 통해 훈 족에 관한 지식을 얻었다. 라틴 어나 그리스 어로 된 그 같은 자료를 남긴 최초의 학자들은 로마 제국의 시민이었다. 그들은 야만인 훈 족을 경멸어린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의 뒤를 이은 기독교 계통의 연대기 저자들은 훈 족을 이교도 무리로, 아틸라를 하느님이 죄를 지은 사람들을 징벌하기 위해 지상에 내려보낸 도구로 보았다. 최근 들어서는 아틸라와 훈 족에 대한 새로운 자료들이 주로 고고학적인 유물의 형태로 등장하고 있다. - 본문 10쪽에서
저자는 훈족이 실제의 모습 이상으로 유럽사에서 유럽인의 시각에 의해 중상당해 왔음을 밝히며 훈족의 역사를 서술한다. 근래에 고고학적 발굴 작업의 성과로 이 시각이 많이 고쳐지고 있다고 한다. 훈족이 서진하고, 이에 위협을 느낀 게르만족이 이동하면서 로마 제국이 무너지고 중세가 끝난다, 라는 기본적 세계사의 서술만 보면 훈족이란 찬란한 고대 로마제국의 문명을 무너뜨린 야만족일 뿐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발굴된 유골을 보면 실제 순수 몽골로이드의 유전자를 가진 훈족은 1/4밖에 되지 않으며 크게 묶어 로마인들이 훈족이라 칭했던 그들 무리의 민족 구성은 보다 복잡했다. 유럽인과 같은 외모를 가진 화이트 훈족도 있었다고 하니 말이다. 그리고 훈족은 지배지역의 농경민족들을 그대로 땅을 경작하게 하기도 했으며 그들 지배하의 기독교 교도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누리게 했다. 물론 그들이 피지배인들을 지배계급 무사로서 칼로 다스린 것은 사실이지만, 고대, 중세의 다른 지배계급과 지배민족들에 비해 특별히 더 가혹한 지배를 했다는 증거는 없다.
이어서 저자는 아틸라의 탄생과 가족사, 그의 8년이란 짧은 치세 기간동안에 이룩한 정복 사업들에 대해 서술한다. 그의 콘스탄티노플 위협 부분에서는 로마 제국의 역사가 짧게 서술되기도 한다. 호사가들이 좋아하는, 서로마제국의 공주 호노리아에게 청혼받은 일화가 그의 서로마제국 침략을 앞당겼던 이야기가, 452년 카탈루냐 전투 이후 롬바르디아 지역의 도시들을 함락시켜 (결과적으로) 베네치아 공화국 탄생에 일조한 역사가 이어진다. 또 서구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교황과의 만남도 아틸라는 별 감흥없어 했다는 일화도 등장한다. 서구인들만 아틸라를 신의 채찍이니 뭐니 의미부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후 "니벨룽겐의 노래"를 비롯, 서구인들의 드라마나 오페라에 수없이 아틸라가 등장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그의 결혼식 이야기가 나온다. 게르만계 여성 일디코를 새 신부로 맞이한 첫날밤에 그는 급사하고, 이후 그의 아들들 대에 제국은 해체된다.
이후 아틸라는 긴 세월 동안 문학과 예술 작품들을 통해 그의 모습을 후세에 전하게 된다. 아마, 그 정도로 그란 인간 자체와 훈족의 침략이 인상적이었기에 가능했으리라. 실제로 로마 측 지식인의 기록이 아니라 일반 민중들의 구비 설화를 바탕으로 기록된 '에다'나 '니벨룽겐의 노래'를 보면 그의 모습은 그렇게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하지만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 등지의 드라마에서 그의 모습은 대개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근대에 와서 아틸라는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아틸라>에 등장, 당시 이탈리아 통일 운동을 위한 애국심 고취용으로 이용된다. 또한 기독교도의 승리를 상징하는 의도로 프란츠 리스트의 <훈 족의 전쟁>에도 이용된다. 게다가 보불전쟁시기나 1차대전 시기의 프랑스인들은 독일의 위협을 훈족의 침략에 빗대 선전 선동하는 문구를 사용하기도 했다.
물론 그가 무시무시한 정복자이기는 했지만 당시의 전쟁 관행에 비추어볼 때 전시의 약탈과 학살은 아틸라 만의 만행은 아니었다. 훈 족의 침략 역시 당시 민족 대이동 시기의 유럽사에 비추어 아주 특이한 그들만의 침략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후 유럽사와 유럽인들의 심리에 아틸라의 모습은 부정적으로 남게 된다. 천 오백여 년이나 전의 역사적 경험인데도 말이다. 유럽인들에게는 유전자에 그 때의 공포가 새겨져서 대대 손손 전하게 된 것일까? 아니면 끝없이 그 때의 공포를 상기시켜 야만과 문명, 동양과 서양, 기독권과 비기독권을 대립시켜서 유럽인들 스스로 챙길 이익들이 많았던 것일까? 게다가 웃기는 것은, 동양의 작은 나라 몽골로이드 인종인 우리는, 왜 고대 로마제국의 입장에 서서 게르만족을, 훈족을 야만족이라고 덩달아 평하는 것일까?
나는 이런 생각에 와 닿으면 엄청나게 혼자 달리게 된다. 나는 도대체 왜 내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면서 마냥 역사책을 읽어대는 것일까? 이 저자는 왜 이 책을 썼을까? 대중 역사서의 시각과 서술은 어떠해야 하는가? 등등,,, (게다가 나에게 여건이 허락된다면) 내가 역사 에세이 책을 쓴다면 과연 서술할 때에 가장 중요한 점은 무엇인가?,,, 에까지 나의 생각이 나의 지능과 재능을 앞질러 달려가 버리는 거다. 맙, 소, 사!
그래도 말하고 싶다. 이 책, 참 재미있다고. 거칠게 읽고 거칠게 말한다. 고대 훈족과 게르만족, 로마 제국의 부족명칭이나 전투 장소 지명 같은 것은 읽고 나서 다 잊어도 좋다. 단 하나, 우리가 그동안 훈족을 얼마나 편견을 가지고 남의 시각으로 봐 왔는지, 그 점만 기억하면 된다고. 비단 훈족의 역사만 그렇게 봐 왔으랴. 그러므로 대중 역사서를 읽으면서 얻는 소득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세계관의 재정립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계속 말하고 싶다. 연도 암기나 사건 순서, 위인 인명 외우기에 시달려 역사서를 멀리한 당신, 역사는 순 암기 투성이고 지루하다는 거, 그거 역사를 보는 시각을 자신들의 이익에 유리하게 만들어 우리에게 강요하는 강자들의 음모론 같은 것이니 속지 말라고. 이 책을 읽으며 고대 종족의 역사가 지금 현실에 뭐가 대수냐, 하지도 말라. 머나먼 옛적 사람들에 대한 편견으로 굳어진 세계관은 현재 당신의 세계관도 지배한다. 결국, 제대로 알지 못한 역사를 통해 형성된 세계관은 당신을 강자의 입장에서 그들의 이익 편에 서서 사고하게 만들고, 지금 당신 옆의 고통받는 사람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든다. 조심, 또 조심.
아마도 저자는 이런 말을 하고 싶어서 이 책을 쓰지 않았을까. (그리고, 나는 그런 시각으로 서술된 책을 쓰고 싶다! 맙, 소, 사! 그만 써 버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