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라는 극장 그리고 문화
최영주 지음 / 글누림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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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4대비극 관련 서적들을 주욱 찾아보고 있다가 좋은 책을 만났다. 그런데 인터넷 서점에 있는 이 책 상품 상세 페이지에는 책 관련 정보가 거의 없다. 책 소개글은 너무 간략하고 저자 소개도 아예 올려져 있지 않다. 독자 리뷰도 한 편도 없다. 안타깝다.

 

독자가 책을 읽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에 뭐 정답이 있겠느냐만은, 내가 읽고 생각하는 셰익스피어란 고전이 아닌 당대의 대중 오락인 연극 대본이다. 셰익스피어 사후 400년 지난 지금에서야 불멸의 고전이지 셰익스피어 당대에도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다. 물론 1페니 극장에 올릴 목적인 대중 희극과 왕실의 화이트홀에서 공연될 목적으로 쓴 역사비극은 좀 차이가 있겠지. 여튼 근본적으로 셰익스피어 작품은 당대인 영국 자본주의 초기의 대중 문화 상품이었을뿐이다. 그런데 셰익스피어 작품은 400년 지나 현재까지 연극 영화 뮤지컬 오페라 등등 문화 상품으로 계속 생산되고 소비되고 있다. 분명 셰익스피어를 문자로 접한 사람보다 이런 문화 상품으로 접한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셰익스피어를 책으로 읽더라도 그 대본 자체보다 셰익스피어라는 문화 상품이 어떻게 작가 생존 당시 역사적 문화적 상황을 반영했으며, 400년동안 재생산되고 소비되어오면서 어떻게 그 소비 대중들의 시대와 문화, 욕망, 가치 등등 당대의 삶을 반영했을까,,,, 하는 점에 더 주목해야하지 않을까. 

 

위와 같은 생각을 하고 관련 책을 찾아보다 이 책을 만나서 반가웠다. 책은 연극 대본으로서 셰익스피어 작품과 해석의 역사를 다룬다. 각 시대별 무대별 연출자별 셰익스피어 인물을 어떻게 재현하는가,,, 하는 셰익스피어 연구자이자 연극평론가인 전문적인 시선을 따라가다보면 보이는 것은 셰익스피어 당대부터 현재까지 각각의 시대다. 바즈 루어만 감독의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도 다룬다. 특히 거투르드, 오필리아, 데스데모나, 레이디 맥베스 등 여성 인물들을 분석하는 페미니즘적 시선이 정치적으로 올바르(pc)다. 저자는 10년전 이미 '여성혐오'를 말하고 있었다. 이런 면에서, 10년전 나온 책이어서 편집 등이 좀 촌스럽기는 하지만 내용은 2016년 지금 봐도 전혀 10년전 책 같지 않다.  

 

또 이 책의 좋은 점이다. 저자는 세익스피어의 조국 영국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의 셰익스피어 극 수용 역사도 같이 다루고 있다. 셰익스피어 관련 이론서 찾아보면 거의 영어권 저자들 책이 많아서 영미 쪽 상황만 읽게 되는 것에 비해 이 점, 이 책의 엄청난 장점이다. 문학과 역사를 같이 보길 좋아하는 내 입장에서 <햄릿>이 일제강점기와 1070년대 저항 정신을 우의적으로 표현하는 무대가 되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결국, 셰익스피어 작품의 시대 배경은 늘 현재였던 셈.

 

셰익스피어의 공연사에서 <햄릿>은 단연 극장 안팎의 관심을 독점하였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햄릿>에 쏟아부은 관심과 정성은 플롯이 함유하는 다층적인 의미, 주인공의 심오한 대사, 그리고 무대 구성에서 오는 재미뿐 아니라 우리 관객이 무대 속의 현실을 자신의 삶으로 전환시켜 볼 수 있는 보편성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전자의 관점이 전통적인 해석으로 성실히 맥을 이어가고 있는 반면, 후자의 관점은 군사 독재 시대를 거치며 사회 현실을 무대에 담아내는 정치극의 면모로 발전하게 된다. (중략)

표현의 자유가 억압된 현실에서 안민수의 <하멸태자(1976)>가 현실 인식을 은유적이고 우회적으로 패망하는 백제의 아사달과 아사녀의 사랑 이야기를 빌어 동양적 색채로 바꾸고 있다면, 80년에서 90년에 걸쳐 진행된 기국서의 <햄릿>연작은 위험 수위를 넘나들며 군사 독재, 광주 사태, 사회 부패 등의 현실 사회에 통렬히 비한을 가하는 저항 문화의 첨단에 서 있다.

- 본문 388쪽에서 인용. (광주 '사태'란 용어 사용은 맘에 안 든다만)

 

개화기 셰익스피어 소개는 격언으로부터 시작되어 찰스 램의 셰익스피어 이야기가 일본을 거쳐 번역되고, 1930년대 동경 유학생들의 극예술연구회를 통해 대중적으로 알려지며 1960년대에 와서야 셰익스피어의 한국 수용은 학계의 연구와 번역, 공연이 삼위 일체를 이루며 일단 완성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나는 좀 의아하다. 그러니까, <햄릿>의 원작을 읽지도, 무대에 오른 모습을 보기도 전에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약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여자이니라"같은 격언이 먼저 대중에게 알려졌다는 것 아닌가?  "죽느냐 사느냐" 같은 대사야 식민지 청년들의 갈등을 대변하는듯하여 유행했을만 하지만, "약한 자여" 는 왜 유행했을까? 식민지 남성성 관련, 이 부분은 나중에 더 알아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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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셰익스피어 대전집
    from to be immortal 2016-04-03 23:42 
    십년 전 우연케 도서관에서 발견하여 다행히도 중고서점에서 구입한 전집. 20년 전에 이만한 전집을 출간한 대한민국의 문화역량에 감동!
 
 
blackbooks 2016-04-12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죄송한데 예전 리뷰보고 말씀드립니다

blackbooks 2016-04-12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인에어는 작은아버지가 아니고 외삼촌에게 유산을 상속받은게 맞습니다

자유도비 2016-04-13 08:12   좋아요 0 | URL
예, 제가 <19세기 영국 여성 작가 읽기>란 책의 리뷰 마지막에 이렇게 적어 놓았네요.

이 시대의 문학과 역사에 관심 있다면 한번 읽어볼만한 책이다. 서구 책 읽으면 늘 그렇지만, 등장인물 가계 호칭이 멋대로인 점이 거슬린다. 엉클을 무조건 외삼촌이라 번역했다. 제인 에어가 작은 아버지가 아니라 `외삼촌`에게 유산을 물려 받았다고 서술되어 있다. 박사 학위 가진 전공사분이신데, 좀 방심하신듯.

자유도비 2016-04-13 08:25   좋아요 0 | URL
제인 에어에게 유산 상속하신 남자친척어른의 이름은 John Eyre입니다.
제인 에어가 자선기숙학교 들어가기 전에 있었던 친척집은 the Reeds입니다.
제인 에어의 아버지 성은 Eyre이고 어머니의 결혼전 성은 Reed였습니다.

제인 에어의 아버지 형제는 3남매였죠. 그 중 한 남자 어른이 제인 에어에게 유산을 물려주는 존 에어이고, 그 중 한 여자 어른, 즉 제인의 고모님이 샌존, 다이아나, 매리 리버스의 어머니였습니다. 샌존의 풀네임은 St. John Eyre Rivers거든요. 그래서 제인과 샌존이 사촌간이 됩니다. 제인에게 유산을 물려주는 존 에어는 샌존네 남매들에게는 외삼촌이 됩니다.

그러므로, 제인 에어는 외삼촌이 아니라 작은아버지에게 유산을 상속 받은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국내 <제인 에어>번역본에는 uncle을 삼촌이라고 번역한 책이 많기에 많이들 착각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혹은 백부, 숙부라고 번역한 책도 있습니다. 숙부는 원래 작은 아버지이지만, 요새는 외숙부 외숙모 하는 식으로 더 많이 쓰기에 숙부라고 번역해 놓은 책으로 읽어도 외삼촌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여튼,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 진지하게 길게 답댓글 단 것 같네요. 민망해하지 마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