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이미지 - 이미지 과잉 시대에 ‘생각하는 이미지’를 말하다 이종건의 생활+세계 짓기 시리즈 3
이종건 지음 / 궁리 / 201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깊은 이미지 이미지 과잉 시대에 '생각하는 이미지'를 말하다



20170707_144138_resized.jpg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모두에 "최," "순," "실"이라는 그 유명한 고유명사가 등장한다.  탈 진실(Post_Truth) 시대에 촛불 집회라는 "완전한 의미의 비폭력 상태를 유지 (8)"한 대한 민국국민을 칭송하는 동시에  가짜 뉴스 (fake news)의 치명적 독성을 환기시킨다. 말보다는 이미지에 의한 선동이 앞서서 진실을 가리는 탈 진실의 세상에서 '가짜뉴스'야 말로 "합리적 사고와 의사소통을 방해 (11)"한다고 이종건 교수는 강력히 경고하는 것이다. 현실을 치환하는 가짜 뉴스, 가짜 가벼운 이미지를 구별해내어 프로파겐다에 휘둘리지 않으려거든 '깊은 이미지'를 사유해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 작업은 쉽지 않다. 물론 "없는 지점 곧 영점 零點에서 플러스를 다루는 것 (33)," 다시 말해 깊이 없는 것을 해명함으로써 출발할 수도 있는 작업이지만, '얕이,' '깊이' 등 언어 그 자체가 사물화 경향을 띠고, 개념 명사는 워낙 느슨하게 의미를 나르므로 '깊이 있음'을 묻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묻는 일 자체는 의미가 있다. 

*
  <깊은 이미지>는 "이종건의 생활 + 세계 짓기 시리즈"의 제 3권이다. 이전에 <시적 공간>, <살아 있는 시간>을 읽을 독자라면 "산다"를 능동사가 되도록, 능동의 힘을 부추기려고 내 놓는다는 이 시리즈 기저의 의도를 보다 잘 파악할 수 있겠다. 혹은 메를로 퐁티, 아도르노, 발터 벤야민, 니체, 칸트의 인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지적 레벨의 독자라면 <깊은 이미지>가 추구하는 깊은 메세지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겠다. 나의 경우, 두 둘다 해당 사항이 없기에 열심히 메모해가며 <깊은 이미지>를 읽어도 시선이 활자의 얕은 층만 오간듯 하다.  얕은 독해력이 안타깝다 못해 참담하기까지 하다.
*
그 얕은 독해력에 불구하고, 눈에 들어오던 문구가 있었는데, 바로 "어려운 아름다움 (63)"이 그것이다. 프로파겐다의 방편으로 전락하기 쉬운 '쉬운 아름다움(67)'과 달리, '어려운 아름다움'은 깊은 아름다움이기에 다른 차원의 삶의 진리로 나아가라고 우리를 추동시킨다. 이종건 교수는 "지도자의 격에 턱없이 못 미치는 미숙한 언어구사력도 문제였지만, 해가 거듭될수록 사라져가는 주름살과 변해가는 얼굴 윤관은 적잖은 충격 (64)"이라며, 가짜 아름다움 즉 쉬운 아름다움에 현혹될뻔한 우리 국민이 그 얕은 프로파겐다에서 빠져나왔음을 축하하는 것도 같다. 그렇다고 완전히 빠져나온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탄핵 심판 앞에서 촛불과 태극기 양극으로 나뉘었던 대한민국은, 각자 자신의 신념에 부응하는 매체들만 믿고 다른 매체들은 불신하는 불통의 세계를 짓는 중 (130)"이며, 이미지는 "옷 젖는 줄 모르는 가랑비처럼 알게 모르게 스며들(131)'기에 계속 깨어 있어야 한다. 깨어 있음은 계속 날카롭게, 근원을 묻는 질문을 던지는 삶과 다름 아니다.
*
<깊은 이미지>를 읽으며, 소비주의 사회에서 외모지상주의의 허상을 진실로 믿고 추구하다보면, 더 큰 힘의 결집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페터 슬로터다이크 (Peter Sloterdijk 1947~ )의 경고가 떠올랐다. <분노는 어떻게 세상을 지배했는가?>를 <깊은 이미지>와 교차해 읽으며 좋겠다.
 20170604_164020_resized_jpg_origin_temp00.jpg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