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예술 - 소음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침묵을 배우다
알랭 코르뱅 지음, 문신원 옮김 / 북라이프 / 2017년 4월
평점 :
절판


침묵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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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어렵다. 장르 불문, 2017년 상반기 읽은 모든 책 중에서 <침묵의 예술> 읽기가 가장 어려웠다. 속된 말로, 딸렸다. 이해력과 배경지식뿐 아니라 '느림'을 다른 차원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시간감각의 면에서 다 딸렸다. 첫 페이지부터 다시 읽기를 수 차례. 읽을 때마다 문장 문장이 처음 만나듯 새롭다니 '무식함'을 자학하며 읽었다. 프랑스 역사가, 특히 미시사(micro-history)의 대가 알랭 코르뱅의 고도로 세련된 문체는 암호같다 못해 몽환적인 느낌까지 준다. 프루스트, 릴케, 위고, 졸라, 발자크 등의 문학가부터 마그리트나 루소, 반 고흐 등 화가와 파스칼을 위시한 철학자와 엘리아스 등 역사학자 등 언급하는 인물만도 수십 명이다. '침묵'이라는 절대 화두 아래 양과 질에서 압도적인 자료를 샅샅이 뒤져 찾고 수 놓아 문학작품처럼 엮어내다니, 80대 노학자의 높은 경지가 느껴진다.

<침묵의 예술>에서의 '침묵'은, 층간 소음과 대비되는 개념으로서의 가벼운 범주가 아니다. 사막이나 바다, 건축물과 연관되는 공간적 침묵,  유사성 면에서 침묵과 닮았다는 아이들처럼 존재의 침묵, 인간관계로부터의 침묵, 성스러움을 희구하는 이들의 신과의 침묵소통, 체화된 예의로서의 몸의 침묵 (강연 중에 방귀를 뀐다든지 트름 한다든지를 삼가게 하는 몸단속), 죽음이라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서의 고요 등 범주가 넓고도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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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역사가가 생의 성숙기에서 이처럼 깊고 넓게 침묵을 성찰한 이유는 무엇일까? 알랭 코르뱅은 "이 책에서 과거의 침묵을 환기하는 이유는 침묵의 탐색, 밀도, 준수, 전략, 풍요로움과 더불어 말의 힘에 있는 양상이 침묵하는 방법, 즉 나 자신이 되는 방법을 다시 배울 수 있게 해주기 때문 (9)"이라고 직접 알려준다. 알랭 코르뱅은 "끊이지 않는 접속으로 개개인을 현혹해 침묵을 두렵게 하는 하이퍼미디어(9)" 를 현대인이 침묵을 두려워하거나 과소평가하게 된 요인으로 보는 것 같다. 위 문장을 읽는데 갑자기, 18대 박근혜 정부는 사이버컬처를 타겟 산업으로 권장하면서 정작 '종이책 안 읽는 대통령과 정부였다'는 평이 겹쳐 떠올랐다. 야단스러운 속도감은 되려 침묵의 느림과 밀도가 갖는 힘에 밀리기도 한다. 20170420_185938_resized.jpg

 
미시사 중에서도, 시간, 공간, 소리, 냄새 등 감각적인 주제를 다루는 데 탁월하여 '감각과 감수성 역사 연구의 선구자'로 불린다는 알랭 코르뱅은 역사가답게 르네상스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침묵의 의미와 그 변화 양상을 살핀다. 개인적으로 "침묵에도 전략이 필요하다"는 소제목의 6장이 가장 흥미로웠다. 침묵보다 말이 위험하다는 현대적 확신의 뿌리를 저자는 궁정 사회의 모델에서 찾는데 엘리아스(Norbert Elias)를 빌어왔다. 풍습의 문명화가 "규범의 내면화와 관련된 침묵 명령의 무게가 늘어(103)"가는 모습으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즉, 교양있는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서는 말의 침묵뿐아니라 '기관들의 침묵(103)'으로 압축되는 정숙한 몸가짐(성적 쾌락의 소리를 삼감, 트림과 방귀를 삼감)이 점차 요구되어 왔다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유럽의 맥락일 테인데,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의 침묵의 의미 변화와 현재는 어떠할까? 한국에서는 어떤 학자가 이 주제를 다뤄왔을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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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나 성별, 연령 등 여러 변수에 따라 다르겠지만, 2017년 한국 사회에서는 즉각적인 반응, 즉각적인 소통이 현대적 매너로 여겨지는 듯 하다. 단체 카톡방에서 '묵묵부답 = 예의 없음'으로, 혼자만의 공간과 시간 점유를 '스스로 왕따 만들기' 테크닉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으니. 느리게 반응하고 때로는 반응으로서의 말을 삼가고, 혼자만의 공간과 시간을 갖는 이들을 유별난 존재 취급하기도 한다. 침묵을 통해 개인으로서의 내가 성장하고, 타자와 더 깊이 관계 맺는 그 힘을 <침묵의 예술>을 읽으며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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