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20170501_224036_resized.jpg



미세먼지 탓으로 봄볕을 포기한 채 자발적 집콕, 독서로 5월을 시작하다. 쌓아놓고 책 읽는 즐거움. 척추 건강과 바른 자세를 강조한 책, <죽음의 밥상>, 육아서, 심리서, 그 중 가장 먼저 집어서 단숨에 읽은 책은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
나이가 한 자리 숫자이던 시절 어린 나는, 내가 천재인 줄, 선택받은 하늘의 존재인줄 알았다. 일곱 살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여덟 살이 되어서도 강력한 자기 환상은 별로 깨어지지 않았다. 미술 시간에 거듭된 시행착오를 겪기 전까지는. 나이 한 자리 숫자의 나는 연필을 들면 독후감 상이 나오듯,  크레파스를 들면 멋진 그림이 뚝딱 나오는 줄 알았다. 절대 그렇지 않았다. 미술 시간이건 미술 대회에서건 다른 친구들이 완성작을 낼 때, 나는 여전히 머릿 속의 그 많은 생각들을 좁은 종이에 다 담을 수가 없어서 밑그림으로 고심하다 종 울리는 소리에 울상이 되곤 했다. 하루키가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든다"라는 장에서 말한다.  대중은 술에 쩔어서 부시시한 머리를 한 채, 갑자기 영감 받아 휘리릭 소설을 쓰는 천재 소설가의 이미지를 좋아하겠지만, 자기는 그와 반대로 스스로 훈육해왔다고.

좀 더 쓰고 싶더라도 20매 정도에서 딱 멈추고, 오늘은뭔가 좀 안된다 싶어도 어떻든 노력해서 20매까지는 씁니다. 왜냐하면 장기적인 일을 할 때는 규칙성이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150)...(중략)....이사크 디네센은 '나는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매일 조금씩 씁니다'라고 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는 매일매일 20매의 원고를 씁니다(151).

즉 살바도르 달리가 영감을 얻기 위해 숟가락을 들고 낮잠을 자다 꿈을 그리듯, 요행과 우연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지겨울 만큼의 성실성으로 꾸준히 한 땀 한 땀 꿰어 나가는 것이 소설 쓰기라고. 글 쓰기라고.


20170501_224106_resized.jpg

 

하루키의 소설을 잘 모른다. 아예 친하지도 않다. 그렇지만 작가로서의 하루키가 독특하다는 이야기를 인터뷰 기사나 평론 등을 통해 전해서 또 전해 들어서 그가 어떤 사람일까 무척 궁금했다. 가장 궁금했던 점은, 그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삼십 년 째 매일 달린다는 점이었는데. 그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중 가장 인상 깊고 공감가는 장이었다.

 

달린다는 행위가 몇 가지 '내가 이번 인생에서 꼭 해야 할 일'의 내용을 구체적이고 간결하게 표상하는 듯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중략)...'오늘은 몸이 좀 안 좋아. 별로 달리고 싶지 않다'라는 생각이 들 때도 '이건 내 인생에서 아무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라고 나 자신에게 되뇌면서, 이래저래 따질 것 없이 그냥 달렸습니다. (186)

 

게으름 피우리 않고 육체를 잘 유지해나가는 노력 없이, 의지만을 혹은 영혼만을 전향적으로 강고하게 유지한다는 것은 내가 보기에는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합니다. (198)

체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그에 따라 사고 능력도 미묘하게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사고의 민첩성, 정신의 유연성도 서서히 상실됩니다. 나는 어느 젊은 작가와 인터뷰할 떄, "작가는 군살이 붙으면 끝장이에요."라고 발언한 적이 있습니다. 그건 좀 극단적인 말이었고 예외도 물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전혀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물리적인 군살이든, 메타포로서의 군살이든. 많은 작가들이 그런 자연스러운 쇠퇴를 문장 기법의 향상이나 성숙한 의식 같은 것으로 보완하지만 거기에도 역시 한계가 있습니다. (183)


 

20170501_224122_resized.jpg
 
최근 읽은 <혼자 있는 시간의 힘>과 <직업으로서의 소설가>가 묘하게 많이 겹친다. 두 작가 모두 일본의 중장년층인데다가 (하루키 1949) 사이토 다카시(1960) 개인주의적 성향이 뼛 속 깊이 박혀있는 이들이어서 그럴까. 두 사람 모두에게서 '남에게 피해 최소화하고, 내 존재감을 굳이 남에게 드러내지 않되 혼자 있는 시간을 통해 스스로 강해진다. 강인한 몸과 마음 (사실 둘은 하나인데)으로 원하는 바를 꼭 성취해낸다'의 정신이 느껴진다. 참 독특하다. 두 권의 책을 시간차를 두고 읽었는데, 마치 한 사람의 목소리로 충고와 질책받은 느낌이 든다. 내 어떤 아킬레스 건을 차인 걸까?
다 밀어두고, 이것부터 기억하고 실천하자.
"이래저래 따질 것 없이 그냥 쓴다. 쓰기 전, 혹은 쓰다가 달린다. 이래저래 따질 것 없이 그냥 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