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디 위대한 클래식
요한나 슈피리 지음, 김수진 옮김 / 크레용하우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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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디Hei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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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스 소녀'라는 별명의 '하이디'를 일본 애니메이션으로 친숙하게 여기는 이도 많겠지만, 나는 책으로 더 친숙하다. 어린 시절, <하이디>는 읽고 또 읽던 책 중 한 권이었다. 돌이켜 생각건대 상당한 수준의 완역본이었다. 알프스 풍경의 섬세한 묘사며, 하이디와 클라라의 우정, 하이디의 태양 같은 환한 성품이 문장 속에서 살아 있었다. 커서도 종종 생각나는 <하이디>, 참 흥미롭게도 그 다양한 에피소드 중에서도 나는 유독 '흰 빵'을 기억한다.  아니 하이디는 왜 그렇게 '피터네 할머니'께 그 흰 빵을 사드리고 싶어 했을까? 그런데 신기하게도, 나와 30년의 시차를 두고 <하이디>를 읽은 어린 딸도 대뜸 같은 질문부터 한다. "하이디한테는 왜 그렇게 흰 빵이 중요해요?" 어린 아이의 마음과 30년 전 내 어린마음이 묘하게 공명하면서 눈물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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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디>를 몇십 년 만에 다시 읽으면서 또 울었다. 어렸을 때도 이렇게 벅차오르는 감동을 매번 느꼈는데. 그래서 고전인가? 그래서 사람더러 변하지 않는다고 하는가? '하이디'라는 순수한 존재, 주변에 기쁨을 주는 태양 같은 존재에 경외감까지 느낀다.

 

 

 

 

 

 

 

 

 

 

 

<하이디>의 작가 요한나 슈피리(Johanna Spyri 1827-1901)은 스위스 태생의 늦깎이 작가이다. 의사인 아버지와 시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변호사인 남편 사이에서 외아들을 두었다. 1884년 남편과 아들을 동시에 잃고, 1886년 홀로 알프스로 돌아가 작품 활동에 전념했다고 한다. 놀랍게도 <하이디>는 작가가 불과 4주 만에 탈고한 작품이라고 한다. 1830년에 출판된 라는 작품이 모티브가 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2010년에 제기되었지만, 요한나 슈피리 안에 뜨거움이 있기에 이 아름다운 작품이 4주 만에 태어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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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디는 '태양의 아이'로 타고난 듯, 밝고 꾸밈이 없다. 부모님을 아주 어려서 여의고 이모 손에서 자라다가 어느 날 갑자기 할아버지에게 인도된다. 알프스로 오던 첫날, 두꺼운 외투와 신발을 벗어 던지고 갓 짠 염소젖을 꿀꺽꿀꺽 들이켜는 하이디는 태양의 아이라 거침이 없다. 그 자신이 이미 사랑의 화신이기에 주변 사람들에게 온기와 생명력을 나누어주고도 본인은 정작 모른다. 의식하고 '베푸는' 선행이 아니라, 그 존재감 자체로 사람들에게 빛이 되는 경우이기에. 하이디의 존재감으로 '피터네 할머니'는 음울한 노년의 어둠에서 빛을 찾았고, 고집스레 은둔 생활을 하던 하이디의 친할아버지도 마음을 연다. 부자집 딸이지만 다리를 쓰지 못해 온실 안 화초로 자라던 클라라 역시 하이디를 통해 생명의 활기를 열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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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화신, 하이디. 그러나 보살핌이 필요한 여덟 살, 아이이다. 타고난 생명력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빛을 주지만, 정작 자신은 고향 알프스와 할아버지가 그리워서 몽유병까지 걸려버린다. 그런 하이디를 클라라의 아버지는 좋은 약으로 치료하자고 하지만, 현명한 의사 선생님은 진정한 처방을 한 방에 내려준다. 그것은 바로, 하이디의 마음이 원하는 그것. 하이디의 내면이 부르는 그곳, 그 사람들. 마음의 병은 마음으로 치유한다. 하이디는 알프스로 돌아갔고, 다시 초록 풀처럼 싱그럽게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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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레용 하우스 출판사에서는 한국의 어린 독자를 위해 <하이디>를 출간하면서 완역 대신, '뒷이야기'라는 타이틀의 15장에서 클라라와 하이디의 이야기를 압축해서 전한다. 하이디가 떠난 뒤, 건강이 나빠진 클라라가 다시 하이디를 만나러 알프스를 찾은 후의 이야기가 몇 페이지에 요약된다. 압축된 이야기를 통해서도 느낄 수 있다. 자연의 치유력, 사람의 생명력. 근본이 가지는 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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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국 어린이들의 입에서도 '착하게만 살아서는 안 된다. 착하면 바보.'라는 뉘앙스의 세속적 처세를 종종 듣는다. 1970, 80년대, 한국 사회를 채색하던 집합적 차원의 '착한 아이 콤플렉스'와는 사뭇 다른 강령이다. 어느 것이 맞다 그르다를 판별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시대마다, 사회마다 이상화하는 어린이상, 인간상에는 변이가 있을테니. 그런데 그 변이조차 어쩔 수 없는 근본이 있다. '하이디'라는 상징적 존재가 보여주는 그 근본. 따뜻한 생명력이 넘쳐나는 존재는 타인의 삶까지도 밝히고 뎁혀준다. 타고나지 못했더라도, 우리는 그런 따뜻한 존재가 되도록 노력은 할 수 있지 않을까? 빛을 감아들이는 블랙홀같은 존재가 아니라 빛을 발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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