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 처음 읽는 철학
철학아카데미 엮음 / 동녘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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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현대 프랑스 철학
 
 
 
 
 중학교 사회 기말고사를 위해 이름만 외웠던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대학을 졸업하고도 한참 만에 읽으니 부끄러웠다. 마치 읽어본 적 있다는 양, 다윈의 <종의 기원>을 종종 언급하다가 막상 친구로부터 두꺼운 원서를 선물받고는 책장 장식용으로 고이 모셔두기만 했음을 고백한다. '나 이래뵈도 샤르트르의 <말>과 <구토>는 고등학교 때 읽었거든?,' '메를로 퐁티, 무용 평론에서 자주 들어보던 이름인데?''한국에서 대학나온 사람치고 설마 롤랑 바르트랑 미셸 푸코 책 하나 안 읽어보았으리라고?' 하였건만, 정작 프랑스 현대 철학자들에 대해 이름 이상의 것을 설명하라하면 머릿 속은 백지. 그래서 두꺼운 책에 도전장을 내었다.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 철학>에.......살구핑크빛 표지에 '처음 읽는'이라는 겸손한 문구도 마음에 들었다.
 
 철학 문외한에게도 친절하리라는 기대감을 져버리지 않고, <처음 읽는 프랑스 철학>은 친절한  서술방식을 택했다. 철학서로는 이례적으로 '해요'체 '합쇼'체로 쓰인데다 필자들은 솔직하게 자신의 지적 편력을 혹은 취향을 드러낸다. 자크 라캉을 소개한 김서영은 "너희 엄마도 모른단다"라는 자캉의 말을 24세에 처음 만났단다. 이후 라캉 전문가인 숀 호머(Sean Homer) 교수에게 지도 받으며 라캉 개론서를 두권이나 번역한다. 철학 아카데미의 대표인 김진영은 롤랑 바르트를 그의 "육체적인 삶과 지적이며 공적인 삶을 상호 관련해서 개괄하는 방식"으로 적고 있다.
 
사실 이 고마운 프로젝트는 '철학 아카데미(http://www. acaphilp.or.kr)'의 2012년 가을 학기 기획강좌에서 시작되었다. '불특정 다수를 위한 비제도권 평생교육기관'을 모토로 삼는 이 학교의 좁은 물리적 공간 탓에 프랑스 현대 철학 수강을 원하는 많은 이들이 안타깝게 발길을 돌려야 했고, 이에 강의를 글로 재구성하자는 움직임이 시작된다. 그 시간과 노력을 잡아 먹는 성가신 작업을 총 12명의 저자들은 기꺼이 나누어 맡아주었다. 이렇게해서 400여 페이지에 이르는  <처음 읽는 프랑스 철학>가 일반 대중과 만나게 되었다.
'들어가는 글'에서 '철학아카데미를 대표하는' 조광제는 말한다. "우리 나름의 철학 사상을 꾸릴 작업이 무르익지 못했고.......중략......다른 이들이 형성한 철학 사상의 진의를 정확하게 해독 (p. 9)"하는 것이 순서라고. 철학 사상에서의 배타적 민족공동체나 국가 공동체의 독선을 따르지 않되, 한국 사회가 지닌 특수성에 프랑스 현대 철학에서 해독한 진의를 적용해보자는 취지에 철학 까막눈 독자지만 고개가 끄덕여졌다.
 "샤르트르부터 바디우까지, 우리 눈으로 그린 철학 지도"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처음 읽는 프랑스 철학>는 장 폴 사르트르, 모리스 메를로-퐁티, 엠마뉘 엘레비나스, 모리스 블랑쇼, 롤랑 바르트, 자크 라캉, 루이 알튀세르, 미셸 푸코, 질 들뢰즈, 자크 데리다, 줄리아 크리스테바, 알랭 바디우를 소개한다. 어짜피 철학 지도 독도법(讀圖法)에 까막눈이지라 아무 철학자를 탐사시초로 삼은들 어떠하리란 생각으로, 이름이 친숙한 철학자 순서로 읽어내려갔다.  
 
 
먼저 <사랑의 단상>으로 왠지 친숙한 이름부터.....롤랑 바르트의 사적인 삶, 공적인 삶, 그리고 지적인 삶의 상호관계를 꿰뚫어 보는 김진영이 아니었던들, 바르트가 왜 '경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닌, 그 경계를 넘나드는 부드러운 사유(p.157)'의 철학자이며, 그의 카멜레온적 변신력과 기민한 지적 이동성이 실패자의 콤플렉스와 관련되는지의 이해를 결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19세에 발병했던 폐결핵으로 프랑스 지성계의 중심에 진입할 수 없이 주변을 머물러야 했던 바르트, 어머니 사망 이후에는 '죽음''연민''애도'의 테마를 중심으로 사유했다니, 앞으로 롤랑 바르트를 읽게 되면, 행간에서 그의 이런 사적인 삶이 중첩될 듯 하다.
 
 
 한국근대현대문화사상 연구소의 허경 대표는 푸코를 전공한다하면 '그게 누구냐?' 묻던 1980년대와, '아직도 푸코를 공부하냐?'라는 반농담을 들었던 1990년대 중반의 한국지적풍토의 변화를 꼬집으면서, 푸코의 영향력은 유행처럼 그리 쉽게 사그라들 수도, 들지도 않는다고 한다. 'web of science'의 통계결과까지 제시하며. 나남출판사에서 번역출간해준 미셸 푸코책을 수집하여 고이 전시'만' 해놓은 날나리 독자로서 허경 대표의 푸코 해설을 읽으니, 다시금 도전 욕구에 불이 붙는다. 우선 그는 푸코에 대한 오해들 - 푸코의 사유를 포스트모더니즘, 해체주의, 포스트구조주의,포스트마르크주의 혹은 비합리주의로 보는 관점들-을 조목조목 비판한다.
스스로가 동성애 성향을 가졌던 푸코는 정상이란 오직 정상 놀이에서 승리한 지배적인 개념일 뿐이며, 사람들이 절대적이라고 믿는 진리 역시, 사실은 무수한 진리 놀이(jeux de verite)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삐딱이의 시선을 제시한다. 허경 대표 역시 우리가 '진리'라고 부르는 단어 자체가 일본어이며, 우리가 탐구해야 할 대상은 영원불멸의 절대 진리라는 허상이 아니라, 조건화된 문제틀 자체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구성되었는가를 살피는 작업이라고 덧붙인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흔히 영어의 have 동사를 사용하여, '문화를 가지다' '권력을 가지다' 권력을 잃다' 식의 경제적 소유개념을 권력에 부가하는데,  푸코에게 권력은 '주어진 상황에 존재하는 요소들 사이의 전략적 배치(에 의해 파생되는 효과)'이자 복수의 권력관계이지, 획득,탈취, 양도, 계약의 대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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