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책 읽은 지 며칠 지났거나 실물 책이 옆에 없을 때, 리뷰 쓰기 망설여집니다. 기억에 의존해서 작가나 작품을 곡해한 리뷰를 남길까 봐 두려운 거죠. 소설 장르가 더욱 그러한데, [소금 아이]가 지금 제게 그런 망설임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읽은 지는 사흘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만, 제가 이희영 작가를 오해한 글을 쓰게 될까 조바심이 나기 때문이겠죠. [소금 아이]를 읽기 전 '맑음'이었던 제 기분은 소설을 다 읽은 후 급격히 심란해졌습니다. 방어할 틈도 없이 명치를 세게 가격 당한 기분이었습니다. 고백하자면, 책 읽기 전만 해도 발랄해 보였던 작가의 실물 사진조차 음험해 보였습니다. 솔직히 무서웠죠. 동시에 작가에게 미안했습니다. 첩보원을 주인공 삼은 소설을 썼다거나 살인자의 수법을 자세히 묘사했다고 작가가 그 인물들의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독자로서 당연한 상식이죠. 하지만, 이희영 작가의 [페인트]에 이어 [소금 아이]를 나란히 읽은 제게는 두 작품의 기저에 흐르는 음울함을 놓칠 수가 없었습니다. 청소년을 주 대상 삼은 두 소설이 생소할 분들을 위해 가볍게 소개 드리자면, [페인트]는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저출산 한국 정부가 입양아를 키우면 월급제로 돈도 주고 연금도 주는 제도를 운용한다는 설정으로 전개됩니다. 당연히 입양되는 아이들은 입양자들 대다수가 돈 때문에 자신을 데려간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며, 가족애愛가 아닌 '너 좋고 나 좋고' 전략으로서 모르는 타인과 맺어집니다. 부모에게 버려진 주인공 Janu301은 자신의 뿌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저 1월, January에 버려졌기에 자신의 이름이 제누라는 것만 알뿐. 흥미롭게도 소설 [페인트]의 어느 페이지에서도 Janu301은 부모에 대한 애증이나 그리움을 전혀 내비치지 않습니다. 자칫 소시오패스처럼 느껴질 정도로 차갑게 자기 앞가림을 잘하면서 독립적으로 성장하지요.


Janu301 ● 李水

이희영의 최신작 [소금 아이]에서도 주인공 "이수"는 아버지를 모릅니다. 아버지를 궁금해하지도 않죠. 게다가 출생의 비밀이란 게 얼마나 허접한지 듣고 나서는 차라리 귀를 막아버리고 싶을 정도였죠. 주민센터에서 출산장려금이라도 탈 심산으로 신생아 등록을 하러 갔던 어머니가 마침 보았던 달력에서 "수요일의 水"자를 보았기 때문에 이름이 "이수"가 되었죠. 이수는 부모에 대한 어떠한 기대도 원망도 애증도 잘 보이지 않습니다.


[페인트] 중반부에서 주인공 제누는 자식을 해하는 권력욕에 취한 원숭이 이야기를 합니다. 그 자식이 커서 자기 자리를 위협할까 두려워하는 원숭이지요. [소금 아이]에서 아래 세대의 주인공인 이수는 처단의 방식으로 단죄합니다. 작가는 피와 피비린내가 난무하는 이 청소년 소설 [소금 아이]를 자신의 노트북 폴더에만 고이 모셔놓으려 했었답니다. 작가 스스로 자신의 유년기가 '회색, 그중에서도 검은색이 많이 섞인 회색'이었고 그런 유년기를 자식에게 되풀이시키고 싶지 않아 노력했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페인트]와 [소금 아이]를 나란히 읽다 보니, 작가가 빵 부스러기 흘리는 헨젤처럼 소설이라는 분신을 통해 상처를 조금씩 드러내고 흘림으로써 자신을 치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잘못 이해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미리 작가에게 사과드립니다. 그리고, 읽기엔 정서적으로 거리감이 있었지만 작가가 치열하게 써 내려간 [소금 아이]가 분명, 저며진 심장이 소금으로 절여진 청소년들에게 공감해 주는 목소리로 다가갈 거란 확신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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