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용감한 마흔이 되어간다 - 기숙사에 사는 비혼 교수의 자기 탐색 에세이
윤지영 지음 / 끌레마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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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나 "기숙사 사는 이야기를 글로 써보라"는 제안 받기 어렵다. 사회학자 에릭 클라이넨버그의 말을 빌자면, "Going Solo"가 '사회적 실험(social experiment)'이자 대세인 요즘은 더욱 더. 그런데 윤지영은 그 제안을 받았다. 그리고 책을 썼다. 책 제목에 왜 작가가 그런 제안을 받았는지, 단서가 무더기로 담겨 있다. 


[나는 용감한 마흔이 되어 간다: 기숙사에 사는 비혼 교수의 자기 탐색 에세이]


"비혼, 사십 대 중반, 여성."


여기까지는 도시 1인 가족에서 쉽게 찾아 볼 공통분모이다. 이제 독특한 요소가 가미된다.


"부산 동의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등단 시인, 무주택자, 대학기숙사 거주자


솔직히 나부터도 그 독특한 조합에 끌려서 이 책을 찾았다. 영구 주소지를 대학 기숙사로 삼으며 몇 년씩 사는 이유가 무엇일까? 도대체 "마흔"이 뭐길래 콕 집어 '용감한 마흔이 되어간다'고 제목지었을까? (본문의 단서로 추정하면 저자는 2020년에 최소 43세이다.)


궁금해서 읽었는데, 책 읽으며 궁금함이 거의 해소되었다. 우선 그녀는 국문학 교수였던 아버지, 등단 문인이었던 어머니, 그리고 등단시인이자 고전산문 박사인 여동생을 두었다. 심지어 여동생의 남편도 문학박사인 문학가족 출신이다. 교육을 통한 신분상승의 장기 플랜을 세웠던 아버지의 진두지휘에 따라 서강대 국문학과에 들어갔다. 아버지의 관리 하에 강의시간표를 짜고 교수들에게 과제를 제출하기 전에 아버지에게 점검받았다. 아버지의 그랜드 플랜대로 마흔 전에 국문학과 교수가 되었다. 30대 후반에 인생의 사랑을 만났다. 하지만, 죽음으로 연인을 떠나 보냈다. 비혼을, '누군가의 며느리'가 되지 않기를 마음 먹었다. 33평 아파트에 살았지만, 공간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안식년마다 외국에서 방랑생활을 하기 위해 과감히 아파트를 처분했다. 대학교 게스트하우스에서 산다. 빨래는 이용자 적은 시간에 공용세탁실에서 돌리고, 통금 시간이 지나 기숙사로 못 돌아가면 연구실에서 침낭 깔고 잔다. 이 정도만 늘어놓아도, 저자 윤지영이 어떤 이유에서 현재의 선택들을 했는지 상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이다. 


우선 저자는 외롭기 때문에 가급적 기숙사에 머무르지 않는 대신 연구소에 상주한다. 부산 동의대학교 교정의 나무와 풀들을 자택 앞뜰의 수목처럼 상상한다. 교정을 산책하다가 까마귀를 만나면, "까악 까악"하고 놀래켜주기도 한다. 학자니까 '논문 써야지'하면서도 Netflix에 필 꽂히면 정주행 시청한다. 저자가 시간을 환산해보니 12달 중 1달을 꼬박 본 셈이라 한다. 그래도 강의평가 좋은 교수인지라, 까마귀랑 서로 "까악까악" 교감한 이야기를 강의 소재로 끌어낼 만큼 일상을 학문하는 삶과 연결하려는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세번 째 질문들은 책을 읽고도 풀리지 않는다. 

1) 윤지영 교수는 꽤 자학적 조크를 한다. 왜 했을까? 무척 궁금하다. 실은 나도 이 책을 읽으면서 "4차원 안드로메이다" "괴짜스러움과 소탈한 매력" 이런 생각을 했는데 본인도 알고 있나보다. 이렇게 자평한다. 


얼마 전 SNS에서 나 같은 부류의 사람에 관해 쓴 글을 보았다. 우주가 자기를 중심을 돈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 글은 이들이 얼마나 피곤한 족속인지 조목조목 분석하고 나서 그런 사람에 대처하는 법을 제시했다...(중략)...맞는 말이다. 나도 이런 내가 싫다. 그런데 잘 고쳐지지 않는다. 고쳐지기는커녕 나이가 들면 더 심해질 가능성이 높다. (223쪽)


질문 하나, 윤지영 교수는 자신을 어떻게 이렇게 잘 아는가? 게다가 이렇게까지 독자에게 솔직할 필요가 있을까?


질문 둘, 동의대학교에서 우수강의상도 받았을만큼 인정받는 교수인데 왜 단 한 수강생의 비판에 그토록 집착할까? 오죽했으면 책을 내며, 자신을 비판한 학생의 문장을 토씨하나 안 빼고 그대로 옮겨 소개하기까지 하다니! 왜 그랬을까? 등단시인이라면, 강단에 서 온 교수라면 어느 정도의 비판에는 무뎌지는 자기 훈련을 거치지 않았을까?


다음에 인용한 문단은 윤지영 교수의 강의에 대한 익명의 학생 평가



현실적이지 않고 뜬구름만 잡는 수업이었으며, 정확한 정의를 내리지 못하는 철학적 이야기, 작가나 영화감독이 주고 싶은 메시지를 자신의 생각으로 덮어씌워 더렵히는 수업이었고 영화의 정확한 내용이나 상황등은 무시하고 보이는 것과 교수의 생각으로만 설명하는 괴상한 강의이다. (31쪽)


나는 왜 윤지영 교수가 처음엔 이 익명의 학생을 괘씸해하며 색출하고 싶어하다가, 마지막에는 "찾아내서 꼭 A+를 주고 싶었다"고 굳이 공개적으로 밝히는지 굉장히 궁금하다. '(학생인)너는 나를 욕했지만 (교수인)나는 너에게 "A+"을 주고 싶어.' 이 말을 왜 한 걸까? 결국 최종적으로 널(학생을) 평가할 사람은 나라는 권력관계의 우위성이 안 감춰지는대도?


다음엔 책 말고, 연극무대에서 그녀를 직접 보고 싶다. 섬세하기에 상대를 피곤하게 할 수 있으나 사람을 끄는 매력이 크기 때문에. 활자 밖의 그녀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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