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왕자 그리고 기사 - 다 알지만 잘 모르는 이야기 아르볼 N클래식
조제프 베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아르볼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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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들이 많이 찾는 작은 도서관에 일부러 종종 들립니다. 서가를 찬찬히 둘러보고 옵니다. 예산이 넉넉한지 매년 새 전집으로 교체하는 시리즈가 있는데, [그리스로마신화]입니다. 만화책입니다. 아이들이 하도 많이 찾아 빌려가고 돌려주고 하는 사이에 책표지가 뜯겨나가고 모서리가 너덜너덜 해졌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만화책으로라도 신화를 읽으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하겠지만, 저는 마음이 불편합니다. 적어도 신화의 영역만큼은 성인용 게임 캐릭터처럼 몸매가 울퉁불퉁한 남녀가 등장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신화는 어짜피 인간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새로운 기억 공간에 윤곽을 풀었다가 또 새로운 색채를 입혀가며 부풀어온 상상의 세계잖아요. 그런 섹슈얼화된 게임 캐릭터 몸들과 다이아몬드 몇개씩 박힌 눈으로 아이들 상상의 입구를 꽉 틀어막아 버리다니, 암튼 저는 속상합니다. 오지랖이라하셔도, 많이 아쉽습니다. 




그래서 더욱 이 책이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표지가 무척 고급스러워서 마치 큰 맘 먹고 장만하는 소장용 다이어리 느낌인데요. 시리즈입니다. [영웅, 왕자 그리고 기사]와 [마녀, 요정 그리고 공주] 두 권입니다. 프랑스의 음유시인이라는 조제프 베르노(Joseph Vernot)가 글, 그림 모두를 완성했는데 특히 일러스트레이션이 경탄을 자아냅니다. 조제프 베르노가 삽화의 황금기라 할 19세기를 재현하려는 노력에 신비함을 더한 세계를 창조해냈지요. 놀라운 사실은, 그가 정식으로 미술 학교를 다닌 적 없이 혼자 책의 삽화를 따라 그리며 연습하고 독학했다고 해요. 하나 하나 놀라운 작품입니다. 




부제가 "다 알지만 잘 모르는 이야기"인데, 실로 고개를 끄덕하게 됩니다. 롤랑, 아이반호, 베어울프, 랜슬롯 등, 이름은 익숙한데 정작 그들의 무용담을 설명해보라 하면 벙어리 되기 십상입니다. 바로 [영웅, 왕자 그리고 기사]에서 섬세하며 우아한 문장으로 복원한 이야기의 주인공들입니다. 



요즘처럼 "싸움"의 의미가 부정적으로 변질한 시대에 [영웅, 왕자 그리고 기사]에 등장하는 대사들과 고귀한 정신은 놀랍기까지 합니다. 클릭한번이면 예고도 없이 미사일이며 무기가 발사되고 효과음과 함께 전투캐릭터들이 싹 사라졌다가 다시 게임판 위에 등장하는 걸 보는 데 익숙한 아이라면 이 책의 대사가 고어처럼 느껴질지 모릅니다. 그 누가, 결투를 앞두고 "고해성사는 했소, 형제여? 솔직히 말해 이제 그대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오늘 아침 미사는 드린 거요?"('아이반호' 에피소드 중)이라고 점잖게 도발하면 다시 "그대의 정중한 충고에 감사드리는 의미에서 더 기운 좋은 말을 타고 새 창을 들기를 권합니다."라고 응수하겠습니까?


그러니 이책을 행여 어린이에게 선물하려거든, 꼭 옆에서 소리내어 읽어줄 행복한 각오쯤은 하셔야 합니다. 꽤나 어려운 단어도 종종 등장하거든요. 다행히 아르볼 출판사 측에서 친절히 각주를 달아주었기 하지만, "면갑" "박차" "등자" "성유물" 등의 단어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울테죠. 




장담할 수 있습니다. 조제프 베르노(그의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josephvernotillustration/) 가 장인정신으로 공들여 한땀 한땀 수놓듯 만든 책인만큼, 읽고 나면 분명히 이책 읽기 "전/후"로 영웅 이야기를 보는 시선이 달라져 있을 것입니다. 제 그림책 취향을 과하게 드러내나요?  실은 요새 이 책에도 눈독 들이고 있습니다. 19세기의 삽화 213점이 수록되어 있다해서요. 지갑을 열까 말까 요새 하루에도 몇번씩 망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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