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 실험 - 문명이 붕괴된 이후의 세상을 실험한 어느 괴짜 과학자의 이야기
딜런 에번스 지음, 나현영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라! 소설이었어?' 『유토피아 실험』은 첫 페이지부터 정신 병원 풍경 묘사로 시작된다. 그것도 정신과에 입원한 환자 1인칭의 시점이 저자의 것이다. "이 책을 정신의학의 이름 없는 영웅인 전 세계의 정신과 간호사들에게 바친다"라는 헌정 문구도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저자 딜런 에반스(Dylan Evans)가 로봇 공학과 인공지능 시스템을 연구하며 닉 보스트롬과도 친구 사이인 과학자라는데 '왜 정신 병원에 있어?' 어찌 궁금하지 않으리.



어이없게도 소설이 아니었다. 저자는 정신적으로 많이 아팠고, 정신 병원에 강제 입원당했고, 아직도 회복 중이다. 이 책은 저자가 "유토피아 실험"을 진행하며 깊어진 정신 질환과 이 실험으로 인한 후유증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담은 일종의 자기 고백서였다. 저자는 강박증 환자의 읊조림처럼 수십 번이나 같은 자문을 한다. "내가 왜 멀쩡한 직장(대학교수)도 그만두고, 집도 팔아 버렸을까?" (책으로만 접하는 독자도 '내가 왜 그런 미친 짓을?'하는 저자의 한탄이 지겨워지는 데, 실로 그의 가까운 지인들은 넋두리를 들어주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도 싶다).

실은 저자는 실험 초기에는 강한 확신이 있었기에 다 걷어 찰 수 있었다. 딜런 에반스는 가까운 미래에 지구가 붕괴 직전에 이르러 여러 생필품의 글로벌 공급망이 끊어지고 소수가 각자도생을 모색해야 할 상황이 온다고 확신했다. 고고학자 친구가 "네 유토피아 실험에 어떤 가설이 있어?"라고 묻자 딜런 에번스가 내민 쪽글은 그의 세계관을 요약한다.



세계 문명은 지구 온난화와 에너지 위기로 우리 생애 동안 붕괴될 것이다. 문명이 붕괴되며 전 세계 수십억 인구가 죽겠지만 일부는 살아남는다.

문명은 재건 불가. 살아남은 이들은 야생으로 탈출해 무리를 이루어 생존 기술을 익힌다. 이를 '재야생화' 혹은 '탈산업화,' '신부족 혁명'이라 부른다. 이 과정이 이뤄지면 삶의 질은 붕괴 이전보다 나아진다.

『유토피아 실험』 265쪽

사진출처: The Rotters


문명이 붕괴되어 소수만 살아남을 수 있으니, 자급자족 공동체를 미리 연습하자는 취지의 실험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딜런 에반스를 포함 이 실험 지원자들은 문명의 혜택이 제로에 가까운 공동체를 이상향으로 꿈꾸면서, 자급자족 채소가 부족하면 매주 대형 마트에서 사 오고 각종 이국적인 향신료를 선반에 늘어놓고 저녁 식사를 준비한다. 특히 딜런 에반스는 공동체를 이끌 지도자로서의 자질도 현격히 부족한 와중에 우울과 망상이라는 정신질환까지 앓고 있어 공동체의 구심은커녕 우울의 수렁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이 설립한 공동체에서 정기적으로 탈출함으로써 도리어 다시 이 공동체로 돌아갈 버틸 힘을 재충전한다. 예를 들어, 자급자족 공동체에서는 따뜻한 물로 목욕하기가 어려운데 딜런 에반스는 여자친구 핑계로 주말마다 온수, 전기 다 들어오는 오두막집에서 쉰다.


결과야 뻔하다. 실험의 창시자가 제 발로 정신 병원에 진료받으러 갈 정도로 흔들리는데 18개월 예상한 프로젝트가 끝까지 순항할 리가 없다. 결국 딜런 에반스는 정신병원 입원을 핑계로 자연스레 이 실험에서 하차하였는데, 『유토피아 실험』 참가자 중 일부는 이후에도 남아 "피닉스(불사조) 실험"이라는 명칭으로 이 프로젝트를 더 지속했다고 한다.





"가디언(The Guardian)"지는 『유토피아 실험』을 두고 두 줄 평 하기를 "이 책의 진짜 줄거리는 망상과 우울이다. 에번스가 이 책으로 쓰는 작업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다."라고 했는데, 동의한다. 특히 마지막 챕터에서, 그동안 이 실험의 실패를 다른 참여자 탓으로 돌리던 자신을 성찰하며 고통스러워 보일 만큼 솔직히 자신의 자질 부족과 교만함을 인정한 부분이 인상 깊었다. 철학 박사 학위에 로봇 공학 전공에 제분야 학자들을 친구로 둔 딜런 에번스인 만큼 『유토피아 실험』을 읽다 보면, 고고학, 진화심리학, 사회학 등에서 불러온 재미난 생각거리가 엮여 있어서 읽는 재미를 더한다. 과연 망상이었을까? 망상 여부는 누가 규정할까? 규범적 공동체를 일탈해서 만드는 새로운 공동체는 또 어떤 방향으로 가는가?

다시 읽을 예정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