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
마루야마 겐지 지음, 고재운 옮김 / 바다출판사 / 2014년 3월
평점 :
품절


내친 김에 마루야마 겐지의 또 다른 수필집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을 읽었다.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가 이십대 청춘을 위한 책이라면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는 4,50대 그중에서도 퇴직한 이들을 위한 책이라 하겠다. 단순히 귀농을 준비하고 있는 이들을 위한 안내서라고만 생각하고는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 들었다가 한방 제대로 먹었다. 

 

마루야마 겐지는 도시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꿈꿔봤고... 또 누구에게는 구체적인 미래이자... 암담한 현실을 버티게 해주는 마약과 같은 '귀농(歸農) 혹은 귀촌(歸村)'의 이유를 묻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가 싶더니만, 처음부터 오금이 저릴 정도로 핵심을 파고든다. 역시, 이름만으로도 관록이 느껴지는 작가는 달라도 확실히 다르다.  

 

 

'당신은 홀로서기를 한 사람입니까?'

당신은 그동안 부모에 의존하고, 학력에 의존하고, 직장에 의존하고, 사회에 의존하고, 국가에 의존하고, 가정에 의존하고, 술에 의존하고, 경제적 번영의 시대에 의존하면서 이럭저럭 수십 년을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홀로 설 기회를 그때마다 잃고, 그저 공부나 일을 하면서 겪은 혹독함 정도를 인식하고 있을 뿐입니다. 사실 당신은 자신에게서,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고 또 도피해 온 것은 아닐까요.  한 사람의 성인으로서 몸으로 익혀 두지 않으면 안 될 조건을 그저 지식으로만 머릿속에 채워 둔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직장이라는 후원자를 빼앗긴 당신은 자신의 판단만을 강요받는 진정한 어른의 처지로 내몰리자 그런 어린애 같은, 너무나 허술하기 짝이 없는 발상에 휘둘리고 만 것은 아닐까요.


-마루야마 겐지,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p17~18 中-

 

 

 

'당신은 홀로서기를 한 사람입니까?'

이 얼마나 무섭도록 정확한 질문이란 말인가.


老작가는 육십 평생을 살아온 기껏해야 자신보다 10살 정도 더 젊을 뿐인 노익장들을 대상으로 '인생은 그런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문체도 존칭체이고 활자도 큼지막한, 고작 200여 페이지 남짓한 수필집일 뿐이거늘...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것처럼 시작부터 숨통이 조여온다.

 

 

아름답던 자연은 얼마든지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돌변할 수 있고, 순박하던 마을 주민들은 예의가 없고 고집스러울 뿐만 아니라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주민을 괴롭힌다.


 

시골에서는 서민기질을 실로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그 노골적인 모습에 기겁을 하고 문화적 충격도 받을지 모릅니다. 그들은 강하고 힘있는 사람에게 전적으로 매달리고, 때론 신과 부처 같은 것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일밖에 모릅니다. 당신은 이상하리만큼 보수적이고 윗사람게에 굽실거리는 이들에 둘러싸였을 때 놀라 심지어 버럭 화를 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어떤 사람들을 구성하는 특질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아연해질 것입니다. 


 

-마루야마 겐지,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p50 中-

 


이처럼 시골사람들이 도시인과는 사뭇 다른 근성을 갖게 된 배경을 작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오랜 세월 혹독한 자연 환경과 싸우면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협동이 무엇보다 중요했을 뿐만 아니라, 강자에게 복종해야한다는 농경민족 특유의 속성이 강하게 박혀있기 때문이라고....

특히, 시골사람들을 정의할 때 곧잘 동원되곤 하는 '순박하다'거나 '소박하다'는 표현은 그 자체로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다는, 더 나아가 본능의 힘에 따른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거라고...

그리고 또 다른 측면으로는 도시에는 도무지 적응할 수 없는 사람들만 농촌에 남았기 때문일 거라고...

 

 

한편, 일본이나 한국이나 농촌은 주로 고령자들만 남아 있다. 즉, 젊은 사람들이 농촌에 남지 않으려 한다. 인생의 후반부를 농촌에서 마무리하는 것이 그렇게 좋다면, 왜 이들은 농촌에 남지 않는걸까? 설령 젊어서 도회지로 나갔더라도 은퇴 이후엔 그 좋은(?) 고향으로 되돌아와야 하지 않을까?  어째서 귀촌이나 귀농을 하려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시골 출신이 아니거나 시골에서 태어났더라도 농촌에서의 삶을 직접 체험하지 않은 사람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걸까?


그건, 그만큼 농촌 생활이 녹녹치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농사를 짓지 않고 삶의 터전만 농촌으로 옮기는 귀촌(歸村) 역시 생각만큼 쉽지 않다.

솔직히 도회인들이 그리는 귀촌생활이란 도시의 편리함과 생활 습관이 보장되는 별장 생활이지 않을까.

물론, 별장을 소유하고 관리할 만큼 건강과 재산을 갖고 있다면 문제 될 건 없다마는...


 

 

작가는 이 밖에도 현지인들만 이주자를 괴롭히는 게 아니라, 같은 이주자들 중에도 흑심을 품고 시골로 흘러들어온 사람들도 있으니 주의를 당부한다. 이들은 주로 퇴직금 등 목돈을 갖고 있는 은퇴자들을 대상으로 사기를 치려는 사기꾼 아니면 사이비 교주를 사칭하며 돈 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피폐하게 만드는 범죄자일 확률이 크다고 한다.


 

마루야마 겐지는 이와 같은 사람들을 구별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그들이 갖고 있는 공통된 몇가지 특징들까지 짚어준다.


 

자연이 너무 좋아서,

자연 속에서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멸종 직전에 있는 야생 동식물을 지켜 주고 싶어서,

원시 환경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지방의 토착 문화나 예술을 세계로 알리고 싶어서,

사랑의 상처를 입고 말아서,

질문한 것도 아닌데 상대편에서 이런 이유를 늘어놓는다면 일단 그 사람은 상대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

또한 이들에게는 공통된 특징이 아주 많습니다.

청산유수 같은 어조, 풍부한 표정, 한없이 밝고 그늘이 없는 웃음 띤 얼굴, 아무리 시시껄렁한 자랑이더라도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이따금 맞장구도 쳐주는 등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자세, 너무나 드라마틱한 경력, 강한 자기 도취,


 

-마루야마 겐지,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p136~137 中-

 


도시와 달리 시골은 문단속 등 방범과 치안 의식 및 시스템이 부족하거나 열악한데다가 생활비가 저렴하다는 등의 이유로 경제범들이 흘러들어 숨을 공산이 크다. 뿐만 아니라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와는 달리 집과 집 사이가 멀어서 강력 범죄가 의외로 손쉽게 일어날 가능성 또한 크다. 그리고 목가적인 한낮의 풍경과는 대조적으로 해만 지면 펼쳐지는 칠흑같은 어둠이 주는 공포감은 작가의 표현대로 수십년이 지나도 적응되지 않는, 그런 근원적이고도 원초적인 두려움일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을 다 극복해내고 시골에 터를 잡은 은퇴자일지라도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서서히 나이를 먹게 되면서 병원 신세를 져야 할 일이 늘어나고... 간단한 일조차 할 수 없을만큼 기력이 쇠약해질 것이며... 부부 중 어느 한명이 먼저 타계하면서 반드시 홀로 남겨지는 노인네가 생기게 마련인데... 이에 대한 대책은 커녕 당연한 이와 같은 기본적인 사실조차 고려하지 않은  채, 무작정 시골로 내려오려한다며 우려의 목소리를 높인다.

 

참으로 좋은 지적이라 하겠다.


 

이밖에도 작가는 노화와 죽음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을 강조한다. 가장 가까운 자연인 자신의 몸부터 먼저 돌봄으로써 말이다.


 

어쩌면 당신은 자연 속에서 살고 있다는 말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감정이 행하는 대로, 본능이 행하는 대로 사는 것이라고 오해하거나 자신의 형편에 맞는 해석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자연이라는 말을 남발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빠져든 자신을 변호하려는 것은 아닐까요. 자연에서 배우지 않으면 안 될 것은 무엇보다 스스로를 다스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홀로서기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


 

자연과 자연속에 사는 동식물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완벽한 겉모습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어 아름다운 것입니다. 가장 친근하고 중요한 자연은 다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그 자연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대자연을 지키고 사랑할 수 있을까요. (...)


 

사회적 지위를 만족시켰는지 아닌지로 승리자와 패배자를 가르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진정한 패배자란 자신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거나 다스릴 방향을 잡지 못한 사람을 이를 때 써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적이라는 표현은 어디까지나 지성과 이성에 부합하게 사는 것을 의미하지 결코 그 반대는 아닙니다. 동물로 태어나 동물인 채로 일생을 보낸 인간이야말로 진짜 패배자입니다. 패배자인 당신을 자연이 환영해 줄 리는 절대 없습니다. 오만한 신념에 젖어 자연에 깊숙이 헤치고 들어온 당신 목숨을 순식간에 앗아가 버릴 것입니다.


-마루야마 겐지,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p145~148 中 부분 발췌-

 


그저 단순히 귀농이나 귀촌에 대한 환상을 통해 위안이나 받고, 구체적인 정보나 얻을 요량이었는데...  책은 어느 순간 삶의 의미를 되묻는 진지한 철학서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눈앞이 뿌옇게 변해버렸다.

 

한참이나 지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다음과 같은 문장이 펼쳐져 있었다.


 

당신은 인간입니다. 본능을 거스르려면 그럴 수 있는, 이성과 지성을 겸비한 인간입니다. 당신은 분명 원숭이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어느날, 상식의 끈이 뚝 끊어져 버립니다. 도대체 어떻게 되어 버린 것일까요. 일 자체나 대인관계에서 오는 긴장을 느낄 필요가 없어지고 시간에 구속당하지 않게 되어 마음이 완전히 풀어졌기 때문일까요. 분명히 그런 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원인은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이 홀로서기를 한 성인(남성)이 되지 못했고 되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어린애의 혼을 가진 채 60년을 지내왔기 때문입니다. 명령을 받아야만 움직이고 자신의 의지로는 움직일 수 없는 목각 인형, 타율적인 빈껍데기 인생밖에 살아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당신은 다시금 어린애 시절로 돌아가고 만 것입니다.


-마루야마 겐지,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p147~156 中 발췌 -

 


'뭐, 이 정도 가지고....'

살짝 오기가 솟구쳤다.

그러나 '나도 인생 살만큼 살았는데.... 뭘...' 하는 자만심은, 작가가 칠십 평생 살아오면서 자기 자신에게 수십번 속삭였을 다음 문장들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자신을 진정으로 구제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지, 결코 다른 누군가가 아니다.

진심으로 자신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는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정도는 달라도 그 힘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자신을 미더워하지 못하는 사람, 자신을 약한사람으로 단정해 자기 외의 사람에게 의지하려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다.


 

혹 신과 부처 같은 존재가 실제로 있더라도 그것은 당신 자신을 가리키는 것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아닐 것이다. 신이나 악마가 있다면 그 어떤 것도 당신 자신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요컨대 어느 쪽을 택할지는 당신의 의지에 달려 있다.

정에 흔들리지 않고 본능에 빠지지 않으며 의지력을 성실히 발휘하는 것이야말로 신이며 부처이고, 그 반대의 힘은 악마이며 괴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이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진리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이견을 달지 않을 것이다. 이견을 내놓는다면 그것이 그가 사기꾼이나 악당의 무리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


-마루야마 겐지,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p190~191 中-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서, 두 눈이 나도 모르게 감겼다.

시골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하던 마루야마 겐지...

그가 진심으로 해주고 싶었던 말은, 다름 아닌 '인생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였다...


 

 

진정한 빛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만 빛납니다.

진정한 감동은 현실의 고단함 속에서만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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