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소설 읽는 방법 - 히라노 게이치로의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찍이 나는 아사다 지로의 작품에 흠뻑 빠져 지낸 적이 있었다. <은빛비> <장미 도둑> <철도원> 등등... 그 당시 외롭고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감성적인 문장으로 이루어진 가슴 따듯한 지로의 목소리에 젖어 들곤 했다. 아마, 주변 지인들에게 선물로 그의 작품들을 주기도 하고 또 추천도 상당히 많이 했었다. 아사다 지로의 작품을 우리말로 옮긴 번역가에게도 감탄의 눈길이 저절로 갔다.


히라노 게이초로의 <소설 읽는 방법>이란 책을 도서관 신간 코너에서 발견하고 대출 예정에도 없는 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냉큼' 집어든 이유는 순전히 '양윤옥'이라는 번역가의 이름 때문이었다. 그녀라면 허접한 작품 따위를 번역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나도 모르게 자리하고 있었나 보다. 


앞서 출간된 <책 읽는 방법>에 이어 나온 <소설 읽는 방법>은 얇은 분량이지만 상당한 독서력을 갖추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책이다. 나 역시 가벼운 마음으로 덤볐다가 '윽크ㅡ'하고 비명을 지르며 앞장을 다시 훑어볼 수밖에 없었다. 히라노 게이치로라는 작가는 마치 자신에 대한 배경지식 하나 없이 순전히 번역가의 이름만 보고 고른 책을 고른 나에게 복수라도 하려는 듯 나의 지성(知性)을 무참하게 뒤흔들어 버렸다. 문학의 미래에 희망을 걸고 순수 문학을 추구한다는 히라노 게이치로에게 나는 보기좋게 한방 먹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도 마음먹고 날린 강펀치가 아니라 힘을 뺀 잽에 말이다. 


알고 보니, 1975년 출생한 히라노 게이치로는 1998년 데뷰작 <일식>으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하면서 적지 않은 작품을 쏟아낸 무림의 고수였다. 엊그제 시내의 대형 서점에 들러, 따로 마련되어 있는 그의 서가를 둘러 보고는 나는 내 자신의 식견이 얼마나 짧았는지를 뒤늦게 깨달았다.


<소설 읽는 방법>에 대한 서평이 자꾸만 자기 한탄조로 흐르는 것은 내가 이 책을 이해할 만큼의 독서 '깜냥'조차 안된다는 증거이리라. 부끄럽지만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앞으로 더 나은 독서와 습작을 위해 몇 자 남겨본다.


일단, 히라노 게이치로는 <소설 읽는 방법> 제1부 기초편에서 소설에 대해서 '작은 것을  말하는 것(小說)' 즉 '우리 인간의 마음 속 깊은 밑바닥을 작은 크기로 압축하여 농밀한 시간과 함께 체험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정보의 바다 속에서 부유하며 마치 스스로 과거보다 훨씬 더 똑똑해졌다고 착각하는 현대인들에게 '작고 사소한 이야기'인 소설은 어쩌면 불필요한 혹은 구시대적인 존재가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이들이 소설을 읽고 싶어하고 또 읽어야 하는 까닭은 바로 지나치게 넓게 확대된 세상이라는 공간을 좀 더 잘 이해하고 좀 더 사랑하기 위함이 아닐까. 


만약, 순수문학의 힘을 굳게 믿고 있다는 히라노 게이치로가 좀 더 많은 이들이 소설을 통해 자신과 세상을 이해하고 타인과 소통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소설 읽는 방법>이라는 책을 썼다면 그는 100% 목적을 달성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최소한 한명의 독자는 영원히 확보했으니 말이다.


그 는 소설 읽기의 방법으로 조류학자인 틴베르헌의 '네 가지 질문: 매커니즘, 발달, 기능, 진화'를 활용할 것을 권한다. 첫째는 '매커니즘'이다. 소설의 매커니즘이란 말 그대로 소설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살펴 보는 것이다. 등장인물은 몇 명이며 배경은 어디이고 시간과 공간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등등... 지극히 작가의 입장에서 소설을 바라보는 것이다.


두 번째는 '발달'이다. 발달이란 한 작가의 일생에서 그 작품이 어떠한 시기와 위치에 놓여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특히, 이미 작고한 대가의 작품의 경우에는 이와 같은 접근 방법이 상당히 유효하다. 최근 나 역시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한 작품이 또 다른 작품의 탄생과 전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상당히 흥미롭게 유추해 보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소설 읽기 방식은 작품의 범주를 넘어서서 작가와 그의 작품 세계 전반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세번째는 '기능'이다. 기능이란 작품이 독자와 작가 사이에 갖는 의미로 쉽게 말하면 바로 '장르'에 따른 구분이다. 작가 입장에서는 작품을 쓴 목적이나 의도일수도 있고 독자 입장에서는 작품이 갖고 있는 주제일수도 있다. 예를 들면,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 <이유>는 현대 일본 사회의 가족해체 문제를 다루면서 현대사회의 병폐는 개인의 책임 못지 않게 그런 개인을 만든 혹은 개인으로 하여금 그런 행동을 하게 한 사회적 책임을 묻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히라노가 언급한 소설 작품으로서의 <이유>의 기능이 아닐까 싶다.


마지막으로 '진화'란 문학사적으로 더 나아가 인류 역사적으로 그 작품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느냐 하는 점을살펴보는 것이다. 소설이란 시대상을 반영한다. 그렇다면 소설은 역사책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며,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또 다른 역사적 사건에 영향을 미치듯 한 소설작품이 또 다른 소설작품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한 사람의 작가가 또 다른 작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아 보는 것이다. 이 또한 소설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매우 유용한 방법이다.


히라노 게이치로는 이렇게 소설을 읽는 네 가지 방법에 대해 친절히 설명하고 있지만, 독자에게 가장 중요한 건 무엇보다도 '느낌' 즉 감동과 동감이다. 소설을 읽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감동받고 동감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책을 읽고 난 후, 만약 서평을 쓴다면 무조건 '매우 감동했다'라는 말처럼 무책임하고 무감동적인 것도 없으므로 서평을 쓰거나 소설을 창작하고자 하는 이들은 히라노 게이치로의 소설 읽는 네가지 방법을 숙지하고 소설 읽기에 적용해보는 것도 유의미한 시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 밖에도 히라노 게이치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플롯'을 '화살표'에 빗대어 설명한다. 즉, 이야기의 큰 뼈대를 거대한 화살표라고 한다면 이 거대한 화살표는 작은 화살표들이 모여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한편, 화살표들은 모두 기본적으로 '주어+술어'라는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결국 소설이란 '~는 ~이다'라는 궁극의 술어로 귀결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문장은 인물에 대한 설명과 이해를 도와주는 '주어 충전형 술어 문장'과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가는 '플롯 전진형 술어 문장'으로 구분되어 있단다. 즉, 주어 충전형 술어 문장은 '역방향 화살표'가 되겠고, 플롯 전진형 술어 문장'은 '순방향 화살표'가 되는 셈이다.


주 어 충전형 술어 문장이 많으면 인물에 대한 독자의 이해가 깊고 넓어져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는 쉽지만 자칫 이야기가 쳐지는 재미없은 소설이 되기 쉽고, 반대로 작품이 전반적으로 플롯 전진형 술어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면 속도감은 있으나 인물에 대한 독자의 감정이입을 방해하여 독자와 등장인물, 작가와의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히라노 게이치의 표현대로 무릇, 좋은 소설은 '플롯 전진형 술어'와 '주어 충전형 술어' 문장이 군형 있게 배치된 작품이다.


<소설 읽는 방법> 실천편인 2부에서는 일본과 서양 작가들의 작품 9편을 대상으로, 히라노 게이치로의 작품론이 펼쳐진다. 폴 오스터의 <뉴욕 3부작> 중 '유령들', 와타야 리사의<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 미르체아 엘리아데의 <젊음 없는 젊음>,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일본문학 성쇠사> 중 <알고 보면 훨씬 더 무서운 '한나절'>, 후루이 요시키치의 <사거리> 중 '한나절의 꽃', 이사카 고타로의 <골든 슬럼버>, 세토우치 자쿠초의 <발> 중 '환', 이언 매큐언의 <암스테르담>, 미카의 <연공>등이다.


다만, 나는 이 아홉 편의 작품 중 그 어떤 것도 읽지 못했고 습작다운 습작조차 해 본 적이 없기에 히라노 게이치로의 설명을 이해하는데에 솔직히 한계를 느꼈다. 그만큼 나의 지적 수준이 낮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히라노 게이치로의 소설에 대한 열정과 작품에 대한 분석이 그만큼 뛰어나다고 보아도 무방하리라. 법학를 전공했다고 하는데 소설만 잘 쓰는 것이 아니라 소설 이론과 분석에도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는 것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번역은 글쓰기다 - 이제 번역가는 글쓰기로 말한다
이종인 지음 / 즐거운상상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15년 동안 영어 전문 번역가로 살아온 지은이의 내공이 엿보인다.


'번역은 글쓰기다'라는 책 제목을 마치 증명이라도 하듯 한줄 한줄 섬세하게 다듬은 문장들과 번역실제를 통해 번역의 기술을 설명한 점도 훌륭한다.

 

번역이 '원문을 그대로 옮기는 것'에 머물지 않고,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처럼 '2의 창작'이 되려면 번역가의 역량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루쉰과 무마카미 하루키와 같은 소설가들이 각각 독일소설과 영어번역을 많이 했다는 점도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되면서 나도 언젠가는 번역가로 출발하여 작가가 된 사람들처럼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되새기게 되었다.  

 

 

이 책을 통해 양억관 김남희 등 일본어 번역가들의 실력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종인은 영어 번역가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어 번역가들에 대한 애정과 존경의 마음을 한껏 들어내고 있다.

 

특히, 그가 언급한 양억관 김난주 부부는 일본어 부부 번역가로 한국내에서 일본 소설 매니아 층을 형성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일찍이 일본 문학을 접하면서 어쩌면 이렇게 빼어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감탄하며 눈여겨 본 역자의 이름이 바로 이들이었다. 특히, 그 당시 읽었던 아사다 지로의 주옥같은 단편들은 정말 '번역문학'의 백미라 할 만 하다.

 

 

다만, 나의 전공 분야인 중국어번역에 대한 언급이 없어 아쉽다. 그만큼 영어나 일본어에 비해 중국어번역이 뒤늦게 출발한 감이 없지 않은 데다가 아직까지는 한국 출판계와 독서시장에서 중국번역문학이 확실한 자리를 잡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2000년대 중후반에 접어 들면서 몇몇 세간에 화제를 뿌리는 중국책들이 번역 소개되곤 하지만 아직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영어나 일본어 책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한국 출판시장이 그 규모면에 있어 한 단계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학 분야에만 치중되어 있는 중국어 출판 시장에 관심과 역량을 더욱 집중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중국 현대 문학을 전공한 소수의 교수진에 의한 추천과 번역에만 치중해서는 중국 소설에 대한 한국 독자층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학문적 성과와 기타 중국내 '연줄'등 정치적 파워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한국의 중국어 번역 분야에 중국교포출신 비전문가 대거 진출하면서 실력있는 중국어 번역가의 설자리가 점점 좁아져 고급 인재들이 번역에 종사하지 않게 되면서 번역의 질이 떨어지고, 이는 또 다시 독자들의 악평과 외면을 불러 일으키는 악순환을 끊지 않으면 안된다.

 

중국어 번역 출판계가 직면한 이와 같은 어려움은 한편으론 그만큼 성장 잠재력이 무궁무진하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 중국어 소설 번역을 대표하는 이름 있는 번역가가 아직 없다는 점에 좌절할 것이 아니라 '내가 첫번째로 중국어 번역계에서 네임밸류를 갖는 번역가가 되겠다'는 의욕을 다지는 계기로 삼으면 좋으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흔에 읽는 손자병법 - 내 인생의 전환점
강상구 지음 / 흐름출판 / 201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장이 잘 넘어간다.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옳소!'이다.

한문으로 이루어진 고문이 적당히 섞여 있고,

친절하게도 단원의 시작과 끝을 해당 단원의 줄거리 요약으로 시작하고 끝맺는다. 

첫눈에도 잘 팔리게끔 만들어진 '책'임을 알 수 있다.

 

손자병법은 춘추전국시대에 쓰여진 병법서로써 종이조차 발명되기 이전이라 나무편(片)에 적어야 했기에 최대한 글을 간략하게 요약하여 최소한의 글자로 쓰여졌다고 한다. 그러기에 손자병법은 읽는 이의 시선과 시대적 배경에 따라 새롭게 재해석될 여지가 충분하다.  

 

시대의 바람을 정면으로 맞아야 하는 신문기자인 저자의 눈에 손자병법은 이기기 위한 방법이 아닌 살아 남기 위한 방법을 역설하는 책으로 다가왔나 보다. 좋은 지적이다. 그 많은 병법 중,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과 '36계 줄행랑'은 모르는 사람이 없지 않은가. 그만큼 손자병법의 핵심은 남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지지 않고 또한 끝까지 살아 남는 것이다. 

 

사람을 움직이는 수단은 마음 아니면 이익, 이 두가지 뿐이다.

돈이든 지위든 명예든 체면이든 이익이 주어지면 사람은 움직인다.

이익이 아니면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마음을 움직이는 것 또한 두 가지다. 하나는 진심, 다른 하나는 속임수이다.

진심이 전해져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효과가 좋지만,

자기 속을 남에게 다 보여주고 산다는 게 쉽지도 않을 뿐더러

진심을 전한답시고 자칫 자기 패만 보여주기 십상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사람들은 속임수를 자주 썼다.

                                                                                   -마흔에 읽는 손자병법 中-


그러므로 강상구의 <마흔에 읽는 손자병법>이 갖는 가장 큰 미덕은 바로 '살아남는 것'이 '이기는 것'보다 더욱 절박해진 현대인에게 '속임수를 써서라도 마지막까지 살아남으라'는 메세지를 확실하게 전달해주고 있다는 점이리라. 

 

이처럼 고전을 재해석한 책들은 어려운 원문 번역서 대신 쉽게 해석되어 있어 부담없이 읽기에 좋아 보이지만, 바로 이러한 점때문에 혜안을 갖고 있는 독서가라면 멀리해야 하는 책이다.

 

물론 기자출신 글쓴이는 손자병법에 대한 분석으로 해박한 지식을 쌓았을 것이고, 그 결과물이 <마흔에 읽는 손자병법>이라는 한권의 책으로 탄생한 것이니, 일거양득의 효과를 거둔 것이다.  요즘, 서점가에는 독서평이나 책읽기에 관한 책들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유형의 책들은 저자로서는 책도 읽고 책도 냈으니 '님도 보고 뽕도 따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 되겠지만, 이런 종류의 책을 읽는 독자에게는 '독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그저 뭔가 읽고 있다. 혹은 읽었다라는 심리적인 만족감만 느낄 따름이다. 시간을 보내거나 정신적 휴식을 위한 목적이 아니라면 이런 독서는 사양하는 것이 마땅하다.

 

나 역시 최근 멋모르고 덥썩 집어들었다가 아니 읽느니만 못했던 책이 바로 정민교수가 쓴 <다산선생의 지식 경영법>이라는 책이었다. 그 책을 통해 내가 얻은 것은 다선 정약용은 정말 훌륭한 독서가이자 필자였다는 사실이다. 이를 제외하면 방대한 그 책속에 언급된 다산 정약용식의 책 만들기 기술은 단 하나도 습득하지 못했다. 물론, 나의 독서력이 빈약하여 아직 그만한 책을 '내것'으로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때문일 터이지만. 

 

무릇, 간접경험의 최고라는 '독서' 역시 자신에게 맞는 책을 고르고 책 속에서 무엇을 택하고 무엇을 버릴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만큼은 갖추고 시작하는 것이 좋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익숙한 것과의 결별
구본형 지음, 윤광준 사진 / 을유문화사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랜된 책이다.

시대를 초월하여 사랑받는 명작도 있지만 동시대인이 발간한 책들은 유난히 유행을 탄다. 특히, 자기개발서나 경영재테크 분야의 책은 출간된지 1~2년만 지나도 올드(old)'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구본형의 <익숙한 것과의 결별>은 초판이 90년대 말에 나왔으니 출판된지 10년이 훌쩍 지난, 말 그대로 올드 중에 올드가 되버린 책이다. 지난 세월동안 너무 많이 알려진 탓에 신선함이 다소 떨어져 식상할 법도 하련만 오히려 행간에 담겨 있는 글쓴이의 진정성에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하고 마른 침을 삼켜야 했다.자기개발서로는 보기 드물게 유행을 타지 않는 '좋은 책'이다.


가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과 재능의 한계에 대한 '꾸짖음'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그렇지만 야박하다고 글쓴이를 탓할 생각일랑은 추호도 없다.어쩌면 처음부터 눈꼽만큼의 능력도 타고나지 않았건만 각고의 노력으로 없는 '능력'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으며 인생을 낭비한 것은 아닌가 싶어 눈사위가 자꾸만 떨렸다.



하고 싶지만 잘 못하는 일은 그대와 인연이 닿지 않는 것이다.

옷소매조차 스치지 못한 인연이니 잊어라.

하기 싫지만 잘하는 일 역시 그대를 불행하게 만든다.

평생 매여 있게 하고, 한숨 쉬게 한다.

죽어서야 풀려나는 일이니 안타까운 일이다.

하고 싶고 잘하는 것을 연결시킬 때 비로소

그대, 빛나는 새가 되어 하늘을 날 수 있다.


(중략)


물론, 감성지능이 높아 자제와 인내력을 가지고 스스로를 위로해가며,

재능은 떨어지지만 자신의 꿈을 이루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없는 것도 아니다.

 

-구본형, <익숙한 것과의 결별> 본문 中-


 


애당초 인연이 아니면 아닌 것을...

사람도 돈도 명예도 다 인연인 것을...

끊어질듯 간신히 이어지는 가느다란 줄을 기어이 이어 붙여 '인연'으로 만들어 보겠다고 몸부림을 치며 살아들 간다.


자신이 진심으로 원하는 삶을 알고, 타인의 삶이 아닌 나다운 삶을 꾸준히 추구해가는 것이 잘사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와 아버지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옌롄커의 자전적 수필에 속하는 <나와 아버지>라는 작품은 원제목인 《我与父辈》에서도 알 수 있듯, 옌롄커 아버지 세대에 대한 이야기이자 그들에게 바쳐지는 진혼곡이라 할 수 있다.

 

중국 허난성의 편벽한 작은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작가는 큰아버지와 작은아버지를 각각 한 분씩 두고 있다.

이야기는 작가의 유년에 대한 회상과 함께 둘째인 부친으로부터 시작해서 큰아버지 그리고 작은아버지로 이어진다. 사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비록 어린시절부터 굶주림과 육체노동에 시달리지만 작가의 유년은 아버지 세대의 보살핌이 곳곳에 깊이 배어 있다.

 

옌롄커은 부친이 수년에 걸친 엄청난 노동을 감수한 끝에 얻은 산비탈의 자경지에 고구마를 심어 수확의 기쁨을 누리기 직전 인민공사로부터 자경지를 몰수당하자, 그 허망함을 못내 견디지 못하고 한줌의 흙처럼 무너지는 부친의 모습을 본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녀을 배불리 먹이고 결혼시키는 것을 평생의 의무로 여겼던 '부모'라는 이름의 숭고함은 장성한 자녀들에게 번듯한 기와집을 지어주기 위해 한겨울 자녀들을 이끌고 강을 건너 돌들을 져나르던 아버지와 큰 아버지의 모습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부모라고 왜 삶이 힘들지 않겠는가. 고사리손을 내밀며 끼니때마다 숟가락질을 부지런히 해대는 자식들의 그 '입(口)'에 심한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부모'라는 이름이 가져다 주는 삶의 '무거움'는 때때로 절규하며 자식들을 향한 심한 매질로 노름과 자살이라는 일탈적 행동으로 표출되었으리라. 

 

무려 슬하에 팔남매를 둔 작가의 큰아버지는 옌롄커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회상에 동참하는 모든 이들에게 참을 수 없는 눈물과 함께 '인성(人性)'에 대한 본질을 직시하게 만든다.

 

큰아버지는 매년 노름을 하면 잃기만 하셨고 잃고 나서도 또 노름을 하셨다. 판돈이 크다 보니 큰아버지는 해마다 택원 하나 또는 새로 지은 기와집 세 채를 날리셨다. 큰아버지는 심지어 아이들을 데리고 북풍한설을 그대로 견디면서 얼음을 깨고 강을 건너가 바위를 깨고 돌을 날라 겨울 내내 피땀 흘려 벌어서 모은 돈을 노름으로 한순간에 날려버리기도 했다. 돈을 다 잃고 나서 큰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셨으며 무슨 행동을 하셨는지, 마음 속으로 어떤 몸부림과 고통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

 

큰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오시면서 평소와 다름없이 길가에서 아는 사람들과 몇 마디 얘기를 나누셨고, 아이들을 전부 마을 오동나무 밑으로 불러 모은 다음, 주머니에서 사갖고 오신 사탕과 콩엿을 한 무더기 꺼내 한 줌씩 나누어주셨다. 그리고 아이들의 머리와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시고 아이들이 한 무리의 제비처럼 사탕과 콩엿을 먹으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확인한 다음, 천천히 발길을 돌려 댁으로 돌아가셨다. 그러고는 곧장 독약을 드셨다. 큰아버지가 입고 계시던 옷의 한쪽 주머니에는 아이들을 위해 산 사탕과 콩엿이 들어 있었고 또 다른 주머니에는 자신을 위해 산 쥐약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농촌의 험난한 삶의 조건에서 벗어나기 위해 작가는 일찍부터 '이터우천(一头沈): 본뜻은 편들기란 뜻인데 허난 사투리로는 장기간 떨어져 사는 부부을 지칭함'인 작은아버지를 따라 신샹의 시멘트 공장에서 임시노동자로 일한다. 그러나 해마다 명절때 근사한 도시의 향취를 실고 고향에 나타나던 작은아버지의 도시 생활 또한 고단하기는 농촌과 매한가지이다.

 

도시에 호구가 없는 농촌출신들은 설령 도시에서 살더라도 영원히 '주변인'일 수밖에 없으며 도시인들의 삶은 그들에게 그저 사막의 '신기루'와 같을 뿐이다. 그러나 농촌에서도 그들은 일찌감치 농촌을 떠난 '외지인'에 다름 아니다. 이를 작가는 '허공에 매달린 삶'으로 묘사하고 있다.


"시골사람의 눈에 도시가 하늘 높이 매달린 천당이고, 농촌은 대지 위의 지옥이라고 한다면 삼촌은 사십여 년에 달하는 인생의 황금기를 허공에 매달린 채 보낸 셈이다.(본문305p)"

 

작가의 부모 세대에 대한 단상은 우리의 부모 세대 혹은 그 바로 윗 세대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도시화와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과정에서 자신의 몫을 챙기지 못한 채, 생존을 위해 한평생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도리와 예절을 잃지 않고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한 바로 그 모습 말이다.

 

지난 한세기 동안 세상이 아무리 바뀌고 변한다 한들 인간의 가치와 정신은 크게 바뀌지 않았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늘 아래 한 생명으로 태어난 이상, 생명으로서 혼신의 힘을 다해 생존하고 자손을 번창시키는 것. 이것보다 더 중요하고 숭고한 것이 또 무엇이 있단 말인가.

 

참고로 이 작품의 번역에 대해 한마디 덧붙이자면, 역자 김태성은 옌롄커의 작품들을 비록하여 <핸드폰> 등 굵직굵직한 작품들을 많이 번역하여 소개하는 대표적인 번역가라 할 수 있다. 원문에 침잠하지 않으면서도 중국어의 특징을 잘 살린 그의 유려한 번역 문장을 나는 좋아한다. 특히, <나와 아버지>라는 작품은 중국식 표현을 의역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직역하여 원문의 분위기와 원작가의 문체를 최대한 고스란히 살리려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2장의 [나의 그 시대]에 등장하는 작은아버지를 5장에서 넷째삼촌으로 옮긴 것은 아무래도 부적절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여러가지 정황으로 볼 때, 분명 동일 인물을 작은 아버지와 넷째삼촌으로 옮긴다면 아무래도 독자의 혼란을 불러올 소지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나중에 원서를 구하게 되면 다시 확인해봐야겠다.

.

.

.

2011년12월20일 현재, 중국어 원문을 확인해 본 결과 옌롄커는 [나의 그 시대]에서 함께 시멘트 공장에서 고생했던 수청(큰아버지의 둘째아들)작은아버지를 각각 '书城'과 '四叔'표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어 번역본의 '작은아버지'와는 '넷째삼촌'은 동일 인물이 아닐까 싶다. 이에 대해 해당 출판사 홈페이지에 확인을 요청하는 글을 남겼으나 두 달이 지나도록 정확한 답변을 듣지 못해 아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