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만두의 추리 책방
홍윤(물만두) 지음 / 바다출판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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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인터넷에 카페를 열고 개인 블로그를 만들었을 무렵이었다.

카페와 개인 블로그에 올린 컨텐츠를 찾기 위해 나는 그 어느때보다도 책읽기에 악착같이 매달렸더랬다. 그러던 무렵 미야베 미유키라는 일본 추리소설작가를 알게 되면서 서서히 추리소설 세계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추리소설장르는 한번 빠지면 쉽게 헤어나오지 못하는 '늪'과 같은 마력이 있는지라 나 역시 지난 겨울 한철을 오로지 추리소설만 읽으면서 보낸 것 같다.

 

그리고 계절이 두 번이나 바뀐 지금.

추리소설에 대한 흥미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읽으면 읽을수록 알면 알수록 오히려 더 커져만 갔다.

 

 

그러다가 인터넷을 통해 물만두를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녀를 알게 된 건 이미 그녀가 고인이 된 뒤인 것이다. 그녀를 애도하는 글들이 넘쳐나는 물만두의 알라딘 서재를 방문했을 때는 묘한 감상에 빠지기 보다는 방대한 리뷰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리고 손쓸새도 없이 삐져나온 건 다름아닌 '질투심'이었다.

 

 

강산도 변한다는 십년동안 추리소설 한 장르만을 꾸준히 읽고 리뷰를 올린 그녀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그러던 참에 그녀가 올린 1388권의 리뷰 중 200여편을 추려 만든 <물만두의 추리책방>과 그녀의 비공개 블로그 일기를 엮어 만든 <별다섯인생>이라는 수필집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물론, 물만두의 블로그에 다 공개되어 있는 내용들이지만 아무렴이나 인터넷보다는 종이책으로 읽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고 정감이 있어 좋다.

 

 

그렇게 서점을 들락거리며 한두장씩 읽게 된 그녀의 수필집을 통해 물만두의 본명이 홍윤이라는 것과 불치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만순이와 만돌이로 불렸던 여동생과 남동생이 있었다는 사실과 삼남매의 우정과 사랑이 얼마나 끈끈했는지도 '덤'으로 알게 되었다.

 

 

2012년 어느 봄같지 않은 봄날.

평소 즐겨 찾는 도서관의 신간코너에서 <물만두의 추리책방>이 눈에 띄자마자 고민할 것도 없이 대출하고 또 대출기한을 연장하여 최대한 오래(?) 갖고 있고자 한 것은 어쩌면 이런 사전 정보(?)에 따른 지극히 정상적인 처사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지난 3주동안 평일 오후 한가한 시간을 이용하여 물만두의 추리책방과 도서관 홈페이지를 오고가면서 한국추리소설들과 일본 그리고 서구의 추리소설들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리뷰를 읽고 마음이 동하면 도서관 홈페이지의 자료검색을 통해 바로 검색을 하고 도서대출목록에 하나 하나 기록을 해나갔다. 언뜻 보기에도 다 읽으려면 상당히 오랜 시간이 필요해 보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대출목록은 점점 늘어만 갔다. 그만큼 그녀의 리뷰는 책을 읽고 싶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갖고 있었다. 출판사측에서 그녀를 VIP로 대우할 만했다.

 

 

물만두는 2000년 3월2일 처음 글을 올리기 시작해서 2010년 11월17일 기리노 나쓰오의 <메타볼라>까지 무려 1388권을 추리소설을 읽고 리뷰를 달았다. 그녀가 블로그에 공개한 글은 모두 1833편이고 비공개 글까지 포함하면 무려 1만2334편이라고 하니 정말 엄청난 양이 아닐 수 없다.

 

 

일단, 그녀를 통해서 한국의 추리소설작가인 류성희를 알게 된 점이 그 무엇보다도 기뻤다. 그리고 애거서 크리스티의 명탐정 푸아로 베스트10과 미스마플 베스트5, 엘러리 퀸 베스트5 그리고 뤼팽전집 순서대로 다시 읽기 등은 모름지기 서양 추리소설의 계보를 가늠할 수 있는 소중한 방향타가 되어 줄 것 같다.

 

 

뿐만 아니라 물만두의 추리책방을 통해 히치콕 감독의 영화 <사이코>가 사실은 로버트 블록이 쓴 추리소설 <사이코>를 원작으로 만들어졌다는 놀라운 정보까지 알게 되었다.

 

 

끝으로, 부끄러운 말이지만 애거서 크리스티의 명작으로 꼽히는 <그리고 아무말도 없었다>를 읽고는 남몰래(?) 실망을 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 물만두의 추리책방을 읽고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들을 다시 한번 읽어 봐야겠다는 욕망(?)이 샘솟았다.

 

 

그러나 그 많고 많은 작품들을 어떻게 다 읽을 수 있겠는가. 그 중에서 몇 편을 골라 읽는 수밖에...

하여, 나중에 추리소설 읽기에 참고하기 위해 물만두가 추천한 책들을 그녀의 짧은 리뷰평과 함께 적어놓는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명탐정 푸아로 베스트10]

 

 

커튼: 푸아로의 마지막을 접할 수 있다는 의의가 있는 작품이다. 엘러리 퀸의 드루리 시리즈 마지막 편인 <최후의 비극>도 이 책과 유사한 결말로 끝나 비슷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크리스마스 살인: 작가의 장기인 밀실 살인에 시간을 교묘하게 사용한 이중 트릭이 빛나는 작품이다. 체스터튼도 유사한 소재를 다룬 단편에 <최악의 범죄>라는 제목을 붙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최악의 범죄를 그린다.

 

 

오리엔트 특급살인: 달리는 열차 안에서 한 남자가 죽는다. 같은 칸에 탄 13명의 승객 모두가 용의자다. 그러나 이 작품은 살인자를 찾는 것이 아니라 살인에 대한 이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사연에 따라서는 살인도 용서될 수 있기 때문이다.

 

 

ABC살인사건: 애거서 크리스티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작품이다. 푸아로가 등장하는 작품들뿐 아니라 작가의 작품 전체에서도 수작으로 꼽힌다. 살인자의 놀라운 이중 트릭 앞에서 푸아로가 드물게 인간미를 풍긴다.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 작가의 처녀작이자 명탐정 푸아로가 처음 등장한다는 점에서 추리소설 역사상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이다. 유독 로맨스를 강조하고 돈과 가족 간의 불화를 즐겨 다룬 작가의 성향을 예견할 수있다.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 평론가들 사이에서 페어플레이 논쟁을 가져오며 가장 말이 많았다. 개인적으로는 그래서 더 재미있다고 생각한 작품이다. 극중 화자, 피해자, 경찰, 최초 목격자까지 모든 사람이 범인이 될 수 있으니 어떤 트릭에도 속지 말기를.

 

 

백주의 악마: 푸아로는 휴가를 가서도 범죄를 만난다. 여배우가 살해당하고 심증이 가는 용의자가 너무 많다. 적어도 여자 세 명과 남자 두명, 이 중에 분명히 범인이 있다. 명탐정 푸아로보다 먼저 찾아보시길.

 

 

구름속의 죽음: 푸아로 앞에서 버젓이 살인이 일어난다. 이럴 수가.

 

 

엔드하우스의 비극: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 중 푸아로가 가장 바보같이 나오는 작품이다. 끝가지 푸아로를 속이려던 범인에게 더 감탄했다. 숨겨진 명작이라고나 할까. 아기자기하면서 재미있는 작품이다.

 

 

3막의 비극: 자신보다 뛰어난 자가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살인자가 결국 자만심에 파멸하는 내용이다. 푸아로는 죽을 뻔하다 살아난다. 운 좋은 푸아로.

 

 

[애거서 크리스티의 미스마플 베트스5]

 

 

예고살인: 조용한 마을의 신문에 살인을 예고하는 광고가 실린다.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둘 살해당하고 미스 마플은 여기저기 자료를 수집하러 다닌다. 아기자기한 재미를 주는 미스 마플만의 매력이 나타난다는 점에서 강력 추천한다.

 

 

화요일 클럽의 살인: 미스 마플의 지혜와 매력을 한층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미스 마플이 화요일마다 사람들과 모여 한 사람씩 들려주는 풀기 어려운 13가지 사건을 풀어 가는 이야기다. 미스 마플에 대해 이 작품만큼 알 수 있는 작품은 없을 것이다.

 

 

목사관 살인사건: 미스 마플이 처음 등장한 작품이다. 미스 마플이 등장하는 작품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한정된 장소, 한정된 공간, 한정된 인물이다. 이런 구성은 독자에게 안정감을 주고 무엇보다 추리라는 한 점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든다. 특히 여성 독자들은 이런 미스 마플이 등장하는 작품을 좋아할 것이다. 인간적인 감성을 자극하는 매력적인 작품이고, 매력적인 탐정이다.

 

 

패딩턴 발 4시50분: 개인적으로 미스 마플의 매력에 푹 빠진,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기차에서 살인을 모격하고 시체를 찾아 나선 미스 마플의 끈기에 감탄할 뿐이다. 너무 재밌어서 두 말이 필요 없는 작품이다.

 

 

복수의 여신: <카리브 해의 비밀>에서 만난 백만장자 노인의 의로로 그가 죽은 뒤 그의 아들이 저지른 살인 사건의 진실을 캐기 위해 미스 마플이 고용된다. 의뢰인의 아들이 죽인 소녀와 연관된 사람들이 살해당하면서 서서히 진실이 드러난다.

 

[엘러리 퀸 베스트5]

 

 

Y의 비극: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윌리엄 아이리시의 <환상의 여인>과 함께 세계 3대 추리소설로 꼽히는 대작이다. 나이 들고 귀가 어두운 은퇴한 연극배우 드루리 레인이 탐정으로 나온다. 엘러리 퀸의 비극 시리즈 중 이 작품을 최고로 꼽는 이유는 아주 독창적인 추리 기법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목격자가 3중 장애 즉 청각, 시각, 언어장애가 있어서 용의자를 잡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드루리 레인은 사건을 해결한다.

 

 

중간지대: 지저분한 서스펜스, 스릴, 호러나 엽기적인 요소는 찾아볼 수 없고 완벽한 추리의 세계로 독자를 이끈다. 몇 가지 단서로 범인을 찾기 위해 몇 시간 동안 독자를 몰두시킨다는 점에서 진정한 정통 본격 추리소설의 묘미를 보여 준다. 패트릭 퀸티의 <두 아내를 가진 남자>가 연상되기도 한다.

 

 

이집트 십자가의 비밀: 엘러리 퀸의 국명 시리즈 중 가장 걸작이라고 생각하는 작품이다. 1930년대는 엘러리 퀸의 전성기였고, 그때 쓴 작품 중에서도 비극 시리즈와 이 작품, 그리고 <중간 지대>를 베스트로 꼽고 싶다. 많은 작가들이 목 없는 시체들을 다뤘지만 엘러리 퀸만큼 근사하고 창조적인 솜씨를 보인 절묘한 작가는 없었다. 엘러리 퀸의 작품 중 한 편을 추천하라면 고르고 싶을 정도의 작품이다.

 

 

일곱 번의 살인 사건: 라이츠빌 시리즈는 트릭에 중점을 둔 엘러리 퀸의 국명 시리즈나 XYZ시리즈와는 달리 인간의 심리에 초점을 맞춘 드문 작품이다. 그래서 이 시리즈가 특히 눈에 띄는지도 모르겠다. 시리즈 중에서도 이 작품이 제일 괜찮다.

 

 

엘러리 퀸의 새로운 모험: 다양함을 맛볼 수 있는 엘러리 퀸의 단편 모음집이다. 집이 사라지는 트릭을 사용한 <신의 등불>은 그의 단편 중 최고로 꼽고 싶은 작품이다. 밀실 트릭, 알리바이 조작에 의한 트릭, 쌍둥이 트릭 등 추리소설에는 몇 가지 트릭이 사용된다. 쌍둥이 트릭이 사용된 작품으로는 아이라 레빈의 <죽음의 키스>가 있는데 <신의 등불>에서 사용한 쌍둥이 트릭을 똑같은 집과 똑같은 여자를 이용한다. 퀸은 초자연적인 현상, 집이 사라진 것을 목격하고 경악하지만 탐정은 언제나 과학적인 추리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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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녀냐 추녀냐 - 문화 마찰의 최전선인 통역 현장 이야기 지식여행자 3
요네하라 마리 지음, 김윤수 옮김 / 마음산책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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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녀냐 추녀냐>는 요네하라 마리의 생생한 통역 경험담을 묶은 것으로 1995년 요미우리 수필부문 수상작이다. 대부분의 통역 이론서들이 난해하거나 통역사들의 개인적 체험 위주여서 일반인이 이해하기 쉽지 않은 것과는 달리, 그녀는 한껏 몸을 낮춰 독자들과 눈을 맞춘다. 통역과 번역의 차이 그리고 통역에도 동시통역과 순차통역이 있다는 것 등등...요네하라 마리와 함께라면 어렵고 복잡한 혹은 베일에 가려 있는 통번역의 세계에서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통번역사를 꿈꾸는 이들이나 일반인 모두 일독할 만하다.


당연히 완벽하고 이상적인 통번역은 일단 원문에서 전달하려는 내용을 남김없이 정확하게 전해야 한다. 그리고 번역이라면 원래 그렇게 쓴 것처럼 자연스럽게 정돈되어 있어야 하고, 통역이라면 원래 그렇게 발언한 것처럼 자연스럽고 무리 없고 거슬리지 않아야만 우리는 좋은 통번역이라고 판단한다.

(...) 그리고 역문의 좋은 정도, 역문이 얼마나 정돈되어 있는지, 편안하게 들리는지를 여자의 용모에 비유하여, 정돈된 경우에는 미녀, 아무리 봐도 번역한 티가 나면서 어색한 역문일 경우에는 추녀라고 분류하면 네 가지 조합이 생기는데 다음과 같다. 정숙한 미녀, 부정한 미녀, 정숙한 추녀, 부정한 추녀.

-미녀냐 추녀냐 中-


 

요네하라 마리의 설명에 의하면, 가장 이상적인 경우는 아름다우면서도 정확한 통번역 즉 '정숙한 미녀'일테고, 가장 안좋은 경우는 아름답지도 정확하지도 않은 통번역 즉 '부정한 추녀'일 것이다. 그러나 통번역사가 신이 아닌 바에야 언제나 어느 분야에서나 완벽한 결과물을 도출해낼 수는 없으니 '정숙한 미녀'는 그저 지향할 뿐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만찬가지로 언제나 어느 분야에서나 부정확한 오역과 세련되지 못한 통번역으로 일관한다면 아무도 일을 맡기려 하지 않을 것이니 자연스럽게 퇴출되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직역과 의역, 오역과 정역 사이에서 피 말리는 재주를 부려야 하는 통번역사로서 그녀의 '미녀와 추녀론'에  크게 공감하며 무릎을 쳤다. 뿐만 아니라, 출발어를 듣거나 읽은 후, 도착어로 말하거나 쓰는 통번역의 과정을 '블랙박스'에 비유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궁금해하고 많은 학자들이 연구해 왔던 통번역이 이루어지는 과정 즉 통번역사의 두뇌 활동 과정은 사실 '검은 비밀의 세계'처럼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개발된 그 어떤 통번역기기들도 통번역사를 100%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미래에 대해 단정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지만 기계문명이 발전을 거듭한다하더라도 인간 통번역사를 대체하는 기계장비의 출현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참! 그리고 <미녀냐 추녀냐>를 통해 일본의 통역세계와 한국의 통역세계의 가장 큰 차이점을 알게 되었다. 다름 아니라 일본에서는 도착어보다는 출발어를 모국어로 하는 통역 즉, '정숙한 추녀'가 '부정한 미녀'보다 훨씬 선호된다는 것이다. 출발어를 모국어로 하는 통역사의 통역은 비록 거칠고 어색한 면이 있지만 원문을 오해하거나 곡해할 가능성은 극히 낮은 반면, 도착어를 모국어로 하는 통역사의 통역은 자연스러우나 원문이 모국어가 아니므로 그만큼 못 알아듣거나 오해할 가능성이 훨씬 높아지기 때문이다. 과연, 정확성을 추구하는 일본인답다. 섬세함이나 정확성 면에서 일본에 훨씬 못 미치는 한국은 통역 분야에서도 보여지는 결과와 겉치레에 더 치중하는 것같아 씁쓸하다.


그리고 저자가 러시아어 통역사이다보니 러시아와 관련된 일화와 러시아어-일본어 간의 통번역을 다루고 있어 한국인 독자들에게는 이해가 잘 안 되거나 공감의 정도가 다소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옥의 티'라 하겠다. 그렇지만 이 책의 역자 역시 이대통번역대학원 출신이라 일반 번역사라면 달리 해석하거나 표현될 수 있는 부분들을 놓치지 않고 적확하게 옮긴 점은 미덕이라 할 만하다.


끝으로,요네하라 마리의 책들을 접하면 접할수록 떠오르는 질문 한가지가 있다.

'난다 긴다하는 한국의 그 많은 동시통역사들은 다들 어디로 간 걸까?'

나 역시 밀려드는 자괴감을 떨쳐버릴 수 없다. 그동안 몇 권의 번역서가 출판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번역사로서의 사회적 역할과 임무에 충실했다고 스스로 자부해왔으니 말이다. 정말 부끄럽기 그지없는 노릇이다.

요네하라 마리처럼 일본에서는 자신의 직업 분야에서 일가견을 이루고 직업적 체험을 바탕으로 책을 출판하는 일을 흔히 볼 수있다. 그들 역시 한국인들처럼 먹고 살기 바쁠텐데 말이다. 

세세한 일까지도 기록하고 정리하여 보관하는 일본인의 자세는 정말 감탄을 자아낸다. 그리고 분명 본받을 만한 점임에는 틀림없다. 그녀의 또 다른 책들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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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방법 - 히라노 게이치로의 슬로 리딩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김효순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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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문학의 힘을 믿는다'라는 한마디의 말을 나는 믿었다.

히라노 게이치로라는 작가의 작품을 단 한편도 접하지 않은 상태에서 히라노 게이치로의 <소설 읽는 방법>에 이어 <책을 읽는 방법>까지 단숨에 읽은 이유는 바로 그 '믿음'때문이었다. 

 

속도와 양을 점점 중시하는 시대에 '슬로 리딩'을 주장하는 그의 목소리는 순수문학이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이 시대에 장중한 울림이 되고 있다. 그러고 보면, 나 역시 지금까지 독서의 질보다는 양을 중시하지 않았나 싶다. 최소한의 시간을 투자하여 최대한 빨리 더 많은 책을 읽고 싶어했으니 말이다.


참으로 어리석었다.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고 공감하지 못했음은 물론이거니와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가 버리는 부분 또한 상당하면서도 버젓히 블로그에 독서일기를 썼다. 마치 난 이런 이런 책을 읽었노라고 자랑하는 것처럼...

 

사실 최근들어 우후죽순처럼 출판되어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른 독서관련 서적들을 보면, '한달에 백권의 책을 읽으니 인생이 바뀌어 있더라'라는 식으로 깊이 있는 슬로리딩보다는 스피드리딩을 강조하고 있는 것같다. 물론, 다독(多讀)이 무조건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독서의 즐거움을 느끼려면 일정 수준 이상의 독서 경력을 갖추지 않으면 안되고 대다수 사람들에게 있어 이와 같은 독서 경력은 일정 분량 이상의 책을 읽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나를 포함하여 상당수의 사람들이 다독에만 치중한 나머지 정독의 기술을 습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을 읽는 방법>은  '슬로리딩'의 중요성을 감지한 이들에게 슬로리딩의 구체적인 방법까지 제시해준다는 점에서 기존의 독서관련 책들과 엄연히 구분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일본 서적들이 그러하듯, 차례만으로 대략의 내용과 주제를 파악할 수 있도록 잘 짜여진 구성이 우선 눈에 띄었다. 뿐만 아니라 작가이기 이전에 독자로서 그리고 자칭 '슬로 리더'이자 '슬로 라이터'인 히라노 게이치로의 독서방법을 살짝 엿보는 즐거움은 '덤'으로 누릴 수 있다.

 

히라노가 주장하는 슬로 리딩의 몇 가지 테크닉을 나열하자면,

조사, 조동사에 주의하고 사전 찾는 습관을 기르며 작자의 의도를 파악함과 동시에 창조적인 '오독'을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왜'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앞으로'가 아닌 '깊게' 읽을 것과 다시 읽기 즉 재독(再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읽기'만을 놓고 본다면, 나름 스스로 독서광이라고 자부하고 있는 나는 유난히 '다시 읽기'에 인색하지 않았나 싶다. 지금까지 '다시 읽기'를 일종의 시간낭비라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으니, 이 얼마나 '수박 겉핥기'식 독서를 해왔단 말인가.

 

이 밖에도 '밑줄과 표시' 역시 슬로 리딩의 기술로 소개하고 있다.

참고로, 나를 예로 들어 말하자면 이 점에 있어서 만큼은 슬로 리딩을 실천하고 있는 것같다. 주로 도서관에서 대출하여 읽는 관계로 밑줄은 그을 수 없지만, 그 대신 작은 수첩을 항상 휴대하면서 중요한 문장등을 수시로 메모한다. 그리고 메모하기에 분량이 다소 많은 경우에는 해당 페이지의 한쪽 모서리를 살짝 접어 놓는다. -게이치로의 설명에 따르면 서양에서는 이런 식으로 책 모서리를 접는 걸 'dog ear'라고 한단다- 나중에 블로그에 독서일기를 쓸 때 인용하거나 다시 찾아보기 쉽도록 하기 위함이다. 

 

슬로 리딩 실천편에서는 8명의 작가의 여덟편의 작품을 텍스트로 삼아 어떻게 슬로 리딩을 하는지 혹은 슬로 리딩의 결과로 작품에 대해 알 수 있는 것들을 설명하고 있다.

 

작년에 읽었던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은 게이치로의 슬로 리딩으로 더 한층 이해가 깊어진 걸 실감할 수 있었고, 안락사 문제를 다룬 모리 오가이의 <다카세부네>편을 읽을 때에는 일본 현대 문학에서의 모리 오가이의 자리를 재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마쓰모토 세이초의 <고쿠라 일기전>을 비롯하여 세이초의 작품 세계에 자주 등장하는 모리 오가이를 히라노 게이치로도 언급한 점이 매우 흥미로웠다.

 

이 밖에도 카프카의 <다리>에 대한 분석은 그 자체만으로 한편의 작품이라 할 수 있을 만큼 훌륭했다. 매우 짧은 작품인 <다리>는 카프카의 <변신>과 비견되는 작품이라는데, 나는 처음 접하는 작품이다. 그러면서도 매우 의미심장하게 다가왔기에 전문을 옮겨 본다.

 

  나는 뻣뻣하고 차가웠다. 나는 다리였다. 어느 심연 위에 나는 있었다. 이편에는 두 발끝이, 저편에는 두 손이 뚫고 들어가 있어, 부스러 떨어지는 진흙을 나는 단단히 붙들고 늘어지고 있었다. 치맛자락이 내 옆구리 쪽으로 날렸다. 아래 깊은 곳에서는 얼음 같은, 숭어들 노니는 개울이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런 다니기 어려운 고지(高地)로 길을 잘못 들어 헤매는 관광객은 없었다. 이 다리는 지도에조차도 올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ㅡ그렇게 나는 누워 기다렸다. 기다려야 했다. 무너지지 않은 바에야 한번 만들어진 다리가 다리이기를 중단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한번은 저녁 무렵이었다ㅡ그게 첫번째 날 저녁이었는지, 천번째 날 저녁이었는지는 모르겠다ㅡ나의 생각이란 항시 뒤죽박죽이 되었고 항시 빙빙 돌았으니. 여름 저녁 무렵 한층 더 어둡게 개울이 좔좔 흐르고 있었다. 그때 어떤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다! 나에게로 오는, 나에게로 오는 발소리. 몸을 쭉 펴라. 다리여, 당당한 태세를 취하라, 난간 없는 들보여, 너에게 몸을 맡기는 이를 받쳐주어라. 그의 걸음걸이의 불안정을 눈에 띄지 않게 메워주어라. 그래도 그가 흔들거리거든 신분을 밝히고 나서 산신(山神)처럼 그를 건너편 땅에다 휙 집어 던져주어라.


그가 왔다, 그는 지팡이 끝에 박힌 쇠징으로 나를 두드렸다. 그러고는 그거로 내 치맛자락을 걷어올려 내 몸위에 가지런히 해주었다. 무성한 내 털 속으로 지팡이 끝을 옮기더니 그 지팡이를 , 아마도 격한 눈길로 주위를 둘러보며, 오래 털 속에 눕혀져 있게 버려두었다. 그 다음에는 그러나ㅡ마침 나는 그를 따라 산골짜기 너머로 아득히 꿈에 잠겨 있었다, 그가 두 발로 내 몸 한가운데서 뛰어올랐다. 나는 뭐가 뭔지 모르면서도 격한 고통에 몸서리를 쳤다.


그게 누구였을까? 어린아이였을까? 꿈이었을까? 노상강도였을까? 자살자? 유혹자? 파괴자? 하여 나는 그를 보려고 몸을 틀었다. 다리가 몸을 틀다니! 미처 몸을 다 틀기도 전에 나는 벌써 추락하고 있었다. 추락하였다. 그리고 어느덧 산산히 찢기고 찔려 있었다. 격류(激流)속에서도 항시 그렇게도 평화스럽게 나를 응시했던 삐죽삐죽 솟은 돌멩이들에.

 

-프란츠 카프카, <다리> -

 

히라노 게이치로는 이 작품을 관료제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하고 있다. 산이라는 거대한 전체에 속한 작은 다리는 사회에 속한 일개 개인으로, 필사적으로 버텨내는 다리를 직업적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현대사회의 직장인으로 대치시킨다.

 

   <다리>가 섬뜩한 분위기를 풍긴는 것은, 그러한 회사에서의 역할을 빼앗기는 것이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서야 '나'는 '꿰뚫림'우로써 자기 자신과의 동일성을 회복한다. 그리고 그가 잡고 있는 산(사회나 제도)역시 끝부분부터 '부슬부슬 무너져내리고'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은 문제는 '그'가 누구였는가 하는 것이다. '나'의 낙하 장면에서도 '그'가 어떻게 되었는가에 대한 기술은 없다. 어쩌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나'가 정말로 자신의 역할과 합치하고 있는지를 충격을 통해 시험해보는 자이다. 보통은 권력자로 파악할 수 있겠지만, 그 충격은 그를 일상(='다리'로서 계곡에 걸려 있는 것)에서 일탈 시킬 정도였고, 그 때문에 그만 몸을 틀어버렸다. 누구일까? 전 쟁 등과 같은 파멸적 상황의 비유일까?ㅡ유감스럽게도 여기서 더 파고들 수는 없지만, 이러한 수수께기를 늘 기억하고 있으면 책을 읽고 있지 않을 대에도 머릿속에서 계속 슬로 리딩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작품을 다시 읽으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때마다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히라노 게이치로 <책을 읽는 방법> 제3부 동서고금의 텍스트를읽다: 슬로리딩 실천편 中-

 

히라노의 해석에 공감하면서도 두 가지 의문이 남는다.

 

하나는 '내 치맛자락을 올려 내 몸위에 가지런히 해주었다'라는 문장으로 보아, 다리의 성(姓)을 여자로 봐야하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그 당시 여성의 사회활동은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적었으니 작품을 관료사회의 비판으로 해석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르지 않을까. 카프카는 어째서 다리에게 '치마'라는 여성의 옷차림을 부여했을까? 그는 또 다른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두번째는 히라노는 다리가 무너져 내린 이유를 일상에 충격을 줄 수 있는 '권력자'로 해석하고 있다. 반면, 나는 다리의 무너져내림이 권력자에 의한 어쩔 수 없는 행위 즉 '피동'이 아닌 사회권력에 대한 능동적인 저항으로 이해했다. 왜냐하면, 다리는 그 '누구'인지 모를 인물이 맞은 편으로 건널 수 있도록 묵묵히 견뎌내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그가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몸을 틀었기 때문이다. 

 

 '그게 누구였을까? 어린아이였을까? 꿈이었을까? 노상강도였을까? 자살자? 유혹자? 파괴자? 하여 나는 그를 보려고 몸을 틀었다.'                                             -프란츠 카프카, <다리> 中-


다리의 무너짐(=죽음)은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와 같은 절규이자 굴종의 삶에 대한 도전의 결과는 아니었을까.

 

혹시나 이 글을 읽는 분들이 계시다면, 히라노의 해석에 토를 단 것이 아니라 그의 슬로 리딩을 실천한 과정에서 얻은 결과로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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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통신 - 유쾌한 지식여행자가 본 러시아의 겉과 속 지식여행자 13
요네하라 마리 지음, 박연정 옮김 / 마음산책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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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와 사이>이후 두번째로 접하게 된 요네하라 마리의 <러시아 통신>은 영토 크기의 차이만큼이나 정서적으로 멀리 있는 러시아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되기에 충분하다. 특히, 1991년 소련 해체이후 공산주의체제에서 자본주의체제로 전환해 가는 혼란기의 러시아를 잘 보여주고 있다.

 

<러시아 통신>은 일본인으로서 어린 시절 러시아의 위성국 체코에서 수학하면서 러시아어와 러시아인을 '일찍' 그리고 '직접' 접하고 무엇보다도 일러동시통역사로 활동했던 그녀의 독특한 이력이 없었더라면 탄생할 수 없었으리라. 그 어떤 신문기사나 다큐멘터리보다도 훨씬 더 실감나고 정확하게 구소련과 러시아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나를 포함한 그녀의 열혈 독자들은 요네하라 마리에게 어느정도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러시아 하면, '시베리아의 혹한과 독한 보드카 및 예술의 나라' 정도의 이해 수준밖에 갖고 있는 못한 나에게 요네하라 마리는 러시아의 화장실 문화(?)와 '다챠' 그리고 그들의 순박한 인간애에 대해 때론 일본인 특유의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설명해주는가 하면 때론 러시아인 특유의 열정에 찬 목소리로 웅변한다. 그러나 그녀의 펜끝은 언제나 '사랑에 진실'을 향하고 있다.

 

충격적인 발견이나 재발견을 무한히 안겨주었던 실험국가는 소멸했다. 하지만 그 실험 자체가 무의미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공산주의는 과학이라고들 하지만 적어도 자연과학은 아니지. 자연과학이라면 인간에게시험해보기 전에 동물실험을 했을 테니까.

 

러시아인들의 이와 같은 재담으로 웃어넘기는 그 실험의 무참하고도 익살스러운 소멸 과정 역시 또 하나의 실험이었다. 생각해 보면 1917년에는 '노동자와 농민의 국가'를 탄생시켜서 세계를 뒤흔들더니 이제 다시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향하는 노정에 돌진하려는 러시아는 인류를 대표해서 20세기 최대의 역사적 실험 두 가지에 도전한 것이다.

                                                                         요네하라 마리 <러시아 통신> 中-

 

74년만에 해체되는 대국의 모습은 '환란' 그 자체였다. 국민투표로 러시아 최초의 대통령 자리에 오른 옐친은 불과 3년만에 소련 공산당이 70년 동안에도 이루지 못 한, '사회주의가 더 좋다'라는 인식을 러시아 국민들에게 각인시켜주었다. 소련이 해체된 후, 자본주의 질서가 자리를 잡아가기까지 10여년 동안 러시아에서는 말도 안되는 일들이 자행되었다. 권력과 연이 닿아 있는 사람이거나 눈치 빠른 사람들에게 이 시기는 부를 축적하는 '행복한 시절'이겠지만 대다수 일반 민중의 삶은 처참하게 내동댕이쳐졌다.

 

중국은 이런 러시아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경제 성장이 이루어지기 전의 정치 민주화는 없다'라는 굳건한 자세로 21세기를 맞이했다. 만약, 중국이라는 또 다른 실험국가가 '중국특색의 사회주의경제'를 성공적으로 추진하여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선진화된다면 여기에는 러시아의 공(功)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하겠다.

 

동시 통역사로서 러시아 지도층을 가까이에서 접한 요네하라 마리의 예리한 시각 덕분에 우리는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그라스노스트(개방)로 상징되는 고르바초프와 탱크위의 연설로 유명한 옐친의 인간성까지 살짝 엿볼 수 있는 행운까지 잡을 수 있다.

 

끝으로, 인문 사회학자로서 손색이 없는 그녀의 에세이집들과 소설 등 많은 작품들이 너무 늦게 한국에 소개되었다는 점이 매우 유감스럽다. 1998년 일본 현지에서 출판된 <러시아 통신>역시 2011년 요네하라 마리가 우리곁을 떠나지 5년이나 훌쩍 지나 한국에 번역, 출판되었다. 만약 우리가 요네하라 마리를 조그만 일찍 만날 수 있었더라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소련과 서서히 무대위로 등장하는 러시아를 조금은 더 관심있는 자세와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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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와 사이 -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커뮤니케이션 강의 지식여행자 12
요네하라 마리 지음, 홍성민 옮김 / 마음산책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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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예기치 못한 우연이 커다란 기쁨을 가져다 주나 보다. 

도서관의 신간 코너에서 우연히 발견한 이 한권의 책은 러시아어 동시 통역사인 저자에 대한 나의 질투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썸네일   썸네일  

 

 

요네하라 마리는 자신의 전문 분야인 통번역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걸쳐 해박한 지식과 통찰력을 갖춘 사람이다. 특히 그의 범상찮은 어린 시절의 경험과 동시 통역사로서의 직업적 체험들이 어우려져 저자만의 독특한 세계를 펼쳐보이지만 그 세계가 전혀 낯설게 다가오지 않는다.


국제화와 세계화에 대한 분석은 가히 촌철살인이라 할 만하다. 

국가와 국가 사이라는 뜻인 국제화(국제화)는 영어로 Internationalization이라고 하며, 영어로 globalization 또는 globalisation인 세계화는 서구에서는 자신들의 질서를 세계에 보급시키는 걸 의미하는 반면, 일본을 포함한 비서구는 이를 세계적 표준에 스스로를 맞추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이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영미권인지 그렇지 않은지에 따라 '세계화'의 의미는 달리 해석되므로 통번역 과정에서도 이 점을 충분히 유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제화가 곧 세계화요, 세계화가 곧 국제화'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나는 한방 제대로 맞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중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은 모두 비서구에 속하므로 세계화라는 단어가 뜻하는 바가 같다는 점이다. 그동안 세계화를 全球化로 국제화를  国际化로 얼마나 많이 옮겨왔던가...안도(?)의 한숨과 함께 갑자기 '오역의 혐의'에서 자유로운 영어권 통번역사들은 도대체 얼마나 될까 궁금해진다.


또한 요네하라 마리는 오역의 역사에 대해서도 짧게나마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는데 특히 '동정녀' 마리아란 표현은 히브리어 원서의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다른 언어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처녀'로 잘못 번역되면서 생긴 것이라고 한다. 의도적인 오역이었든 단순한 번역 실수였든 간에 그 결과는 지금 우리가 아는 바와 같다.


어쩌면 인류 역사는 오해와 오류와 오역의 역사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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