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의 공동체 - 신형철 산문 2006~2009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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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훌륭한 예술작품에는 최소한 다음 세 가지 종류의 가치가 따로 또 같이 존재한다. 물론, 문학의 경우도 그렇다.

 

첫째는 인식의 가치다. 훌륭한 예술 작품은 인간과 세계에 대해서 우리가 미처 몰랐던 무언가를 알게 한다. 그 '무언가'는 과학 철학 종교 등이 제공하는 인식적 가치와 함께 갈 수도 있고 그것들을 거스를 수도 있지만, 최상의 경우에는 그것들과 무관한 곳에서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

 

둘째는 정서적 가치다. 훌륭한 예술 작품은 우리를 기쁘게 혹은 슬프게 한다. (...) 그러나 어떤 작품은 기쁨을 슬프게 하고  슬픔을 기쁘게 해서 낯선 정서를 창출해내기도 한다. 그 경우 우리는 익숙한 정서를 작품에서 재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제공하는 낯선 정서에 서서히 젖어들어가게 될 것이다.

 

셋째는 미적 가치다. 훌륭한 예술 작품은 아름답다. (...) 그러나 어떤 경우에 작품은 흔히 아름답다고 간주되는 것을 전복하는 추의 미학을 보여주기도 하고 심드렁한 방식으로 미추를 해체하여 이상한 아름다움에 도달하기도 한다. 아름다움을 더욱 아름답게 하는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지만,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다.  

-신형철 산문집 <느낌의 공동체> 후주 中 발췌-

 

 

훌륭한 문학 평론집의 가치는 썩 괜찮은 작품을 능가하고도 남는다. 

신형철의 산문집 <느낌의 공동체>를 읽었다는 건, 여러 권의 시집을 읽은 후거나 빼어난 문학작품 한편을 읽은 것처럼 묵직하다.

얼마전 내가 재미없게 읽었던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을 무라카미 하루키가 극찬했고 번역했다는 사실과 역시나 심드렁하게 읽었던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이 실은 '본능-욕망-충동-사랑'이라는 감정의 패턴을 성실하게(?) 따른 놀라운 작품이란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언 매큐언의 <속죄>, 구스타프 야누흐 <카프카와의 대화>, 코맥 매카시의 <로드>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그리고 김소연의 <마음사전>과 권혁웅의 <두근 두근>을 포함한 산문집들을 독서목록에 올렸다. 내가 만약 이 책들을 애써 찾아 읽는다면 그건 순전히 신형철 이 사람 때문이다.

 

 

ㅡ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게 사랑이지만, 더 많이 아파하는 사람이 이기는 게 시다. p127

ㅡ 사회적 약자를 재현하는 일은 어렵다. 시의 의식이 동정의 눈물을 흘릴 때 시의 무의식이 감사의 눈물을 흘리는 사태를 힘껏 막아내야 하기 때문에

ㅡ 시인의 상상력이 세상을 바꾸지는 못해도 세상을 바꿀 사람들을 아주 조금씩 바꾸기는 할 것입니다. 이상하고 아름답게, 이수명의 시처럼, p204

ㅡ 사유를 건너뛴 감각은 가슴만 물들이지만 사유를 관통한 감각은 머리를 뒤흔든다. p54

ㅡ 사람과 사람이 만나 받침의 모서리가 닳으면 그것이 사랑일 것이다. 사각이 원이 되는 기적이다. p42

ㅡ 지옥의 문은 사랑하는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될 때 열린다. 나는 가해자가 되고 사랑은 파괴된다. p230

ㅡ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나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서 가련한 사랑이다. p271

ㅡ '한'사람이 문득 '이'사람이 되어 사랑이 시작되고, '이' 사람이 어느덧 다시 '한' 사람이 되면 애도는 끝난다.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일의 내막이 본래 이토록 헐렁한 것인지도 모른다. p86

ㅡ 때로 사랑은 거짓말의 힘으로 세월을 견딘다. 상대의 거짓말을 묵인해주는 거짓말, 그것이 같은 세월을 견디고 있는 이에 대한 예의가 되기도 한다. p86

ㅡ 인물에게 감정이입하는 '정서적 독서' 말고 상황의 사회심리학적 의미를 곱씹는 '성찰적 독서'를 유도하기 위해서다.p317

ㅡ 희망이 없을 때 희망은 가장 숭고해진다. (...) 무신론자에게 희망은 신이다. p304~305

ㅡ 고독은 인간의 근본조건으로 우리는 어떻게든 그것과 친구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p350

(이렇게 옮기고 나서, 그 아래에 '고독은 삶의 맨얼굴이기 때문에...'를 내 멋대로 붙였다.)

ㅡ 삶을 견디게 하는 아름다움과 삶을 서글프게 만드는 아름다움. 아름다움은 문득 이 두 손 중 하나를 우리에게 내밀고 우린 하릴없이 그 손을 잡는다. p371

 

 

그의 문장 하나 하나에 저만치 떠내려갔다가 밀려오기를 여러차례 반복해야만 했다.

그리고 기어이, '글의 무게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를 깨닫게 만들고 나서야 살포시 내려놓는다.  

 

현기증이 인다.

나는 오늘 신형철의 산문집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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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치유는 너다 - 인생에, 사랑에, 관계에 아직은 서툰 당신을 위한 삶의 수업
김재진 지음 / 쌤앤파커스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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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진 시인의 시집 『삶이 자꾸 아프다고 말할때』를 빌리면서 충동적(?)으로 손이 간 책이다.

흠...

'역시 시인은 시로 말하는 거다.'

 

원래부터 '평온이니... 치유니...' 하는 류의 책들은 지나치게 종교적이거나 인위적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더랬지...

 

이 책 역시 그런 거 같다.

 

그냥, 요즘 계절 탓(?)도 있고... 해서 읽긴 읽었다만 그냥 시집만 볼 걸... 그랬다.

이건, 아마도 전적으로 내 잘못이 크다 하겠다.  적당히 나이도 먹을 만큼 먹고... 세상 돌아가는 물정도 아는 만큼 아는 나로선... 이미 다 알고 있거나 한번쯤은 가슴 설레였던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몇몇 문장들은 옮겨 적고 싶을 만큼 빼어났음은 인정해야겠지...

 

 

 

 

성공하려면 성공하는 길을 찾아야 할 것이며, 행복하려면 행복으로 가는 길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행복하기를 원하면서도 자주 불행한 길을 택한다. 모순된 말이지만, 더 많이 행복해지기 위해 우리는 더 많이 불행해져도 괜찮다고 믿는 것이다. p35

 

사랑은 때론 최선을 다하다가 일을 망친다. 내가 하는 최선이 알고 보면 나를 위한 최선이지, 상대에겐 최악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를 나와 같이 생각하기보다 타인을 타인으로 인정할 때 사랑은 비로소 온전한 모습을 갖춘다. p159

 

그대가 할 일은 사랑을 찾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막기 위해 쌓아놓은 그대 안의 장벽들을 허무는 것이다. p161

 

누가 사랑 때문에 눈물 흘리거든

나를 적시며 흘러가 버린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강물이라고 해라.

 

상처받은 이를 껴안기에 나는 너무 작다.

작은 나를 넘어서기에도 나는 너무 작다.

멀리 있는 사람이여, 나는 아직 너를 안을 수가 없다. p174

 

따뜻한 손으로 내 차가운 손 잡으며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네 손의 체온이 내게 가르쳐줄 때

너는 나의 하나뿐인 치유다. p179

 

만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을 만난 경우는 없다. 오히려 꼭 그 사람을 만났어야 하는 것이다. 원수같이 헤어졌다 해도 내 인생에 그는 필요한 역할이 있었던 것이다. 그와의 경험을 통해 나는 크게 학습할 것이 있었던 것이다. 인생은 우릴 그렇게 가르치는 것이다. p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게 만드는 힘>

 

눈 무게 견디지 못한 나무들이 부러집니다.

그대 무게 견디지 못한 나도

부러질지 모릅니다.

눈썹 위에 얹히는 눈은

나비보다 가볍습니다.

가벼운 것이 모여 무거움을 만듭니다.

사랑하는 마음도 쌓아두면 무겁습니다.

사랑은 그러나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딥니다. p199

 

 

사랑에 대한 말들은

때로 우리를 긴장시킨다.

우리 모두는 사랑에 상처받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를 상처 나게 했던 건 사랑이 아니라

사람이다.

예습하지 않은 인간관계가

우리를 아프게 했던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살얼음 밟으며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밥 한 그릇 따뜻하게 나누기보다

한 그릇 밥조차 제 몫으로 챙기기 위해

적으로 서진 않았던가?

살아온 세월보다 살아갈 세월이 짧아

어둡고 차가운 새벽

누군가를 용서하기에 앞서

누군가에게 용서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갚아야 할 빚처럼 떠오르는 새벽 p238

 

 

 

때로 용서할 수 없어 우리는 누군가를 버리고, 용서받지 못해 또 누군가로부터 떠나게 된다. 용서보다는 차라리 망각을 선택해 잊어버리려 애쓰지만 강력한 것일수록 쉽게 잊혀지지도 않는다.

 

마음만 먹으면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내가 나를 버리지 않는 한, 나를 버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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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긴 만남 - 시인 마종기, 가수 루시드폴이 2년간 주고받은 교감의 기록, 개정판 아주 사적인, 긴 만남 1
마종기.루시드폴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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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 존재'란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새롭게 생성되는 '마음의 우주'다.

 

 

마종기 시인과 가수 루시드폴(본명: 조윤석) 사이에 오고간 편지들을 읽고 있노라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여있다는 그 깊은 '심연'조차 사라지고 없다.

1938년 1월생인 마종기 시인과 1975년생인 루시드폴 사이를 가르는 무려(?) 36년이라는 세월의 깊이도 미국과 유럽이라는 공간적 거리감도 어느덧 무의미해진다.

 

이 책을 읽기 전,

루시드폴이라는 사람이 나에게 준 인상이란 그저 '요즘은 가수도 학벌로 되는 시대인가 보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였다. 그런데 지난 가을 시인들이 뽑은 가장 좋은 노랫말에 그의 자작곡이 다섯곡이나 뽑혀 1위를 차지했다는 소식은 다소 뜻밖이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가 최근에 결혼을 하면서 다시 검색어에 오르내리면서 내 관심이 자연스럽게 집중되었다.

 

한편, 마종기 시인은 한국에서 의대를 졸업하고 1966년 미국으로 건너가 의사로서의 삶을 살면서도 시인으로서의 삶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는 인물이다. 다만, 수능시험에 출제될 정도로 유명(?)하다는 그의 시는 나에게 그 어떤 특별한 감흥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루시드폴은 그의 시들을 읽으면서 외국에서의 사무치는 외로움을 달래고 노래까지 만들었는데...

다만, 그의 부친이 나에게 어릴 적 깊은 감동을 전해주었던 아동문학가 마해송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를 좋아할 이유, 충분하다.

 

편지 속에서 읽혀지는 루시드폴은 '떠날 때를 아는 사람'같고...

 

#- 여기에 더 이상 머물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사실 오래전부터 가능하면 조금이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었습니다.익숙해진다는 것이 두려워진 걸까요. 주로 3,4년이 걸리는 학위를 마칠 때가 되면 자기가 연구하던 환경에 익숙해지면서 그 연구실에서 발언권도 강해지고, 그러면서 일종의 권력도 가지게 되지요.(한국이나 유럽이나 사람 사는 건 어디를 가나 매한가지인가 봅니다). 그러면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을 두려워하고, 자기가 있던 곳에 눌러앉게 되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아무튼 왠지 모르게 지금이 그냥 '떠나야 할 때'라고 느껴져서 그런지 교수님의 '배려'가 그리 반갑지많은 않았지요. -p80

 

처음엔 마종기 시인 역시 나처럼 루시드폴의 노래들을 이해하지 못했더랬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아, 이 노래들은 혹 대화를 나누려는 외로운 영혼의 숨소리 같은 게 아닐까...'하고 생각하게 되었단다.

 

루시드폴의 가사도 마종기 시인의 시도 소위 '시작(詩作)법'에서 한발 빗겨나 있다. 쉽고 편하게... 느낌의 순간을 살려 최대한 솔직하게... 솔직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거니까.

 

편지 속에서 느껴지는 루시드폴은 또한 '괴짜'이면서도 별 생각없는 '범인'같다...

 

#- '루시드폴'이라는 이름이 궁금하셨군요. 저는 그 얘기만 나오면 참 창피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깊게 생각해서 지은 이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앨범이 나오기 전에 라디오 출연을 하게 되었는데 혼자 방송에 나가는 것이 쑥스러웠어요. 또 당시 녹음을 해주신 분이자 저의 소속사 사장이었던 분과 함께 팀(뮤지션+엔지니어)개념으로, 일종의 프로젝트처럼 소개를하면 어떨까 해서 생각나는 대로 이름을 정했지요. -p138

 

 

그리고 또 한없이 맑고 착한 사람 같다는 거...

 

#- 아아, 이 시를(마종기 <동생을 위한 조시>) 저는 얼마나 많이도 읽었던가요. 그리고 늘 이 시의 뒷부부늘 읽을 때면 가슴속에서 울컥하는 것이 있어 전철역에서, 집에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전화를 하는 중에 얼마나 읽고 또 읽어주었던지. 보내주신 편지 중에서 무엇보다도 '쉽고 좋은 시'라는 시구가 가슴을 울렸습니다. 그 '쉽다'라는 것이 저에겐 단어 그대로의 '쉽다'가 아니라, 시인의 가슴에서 독자의 가슴으로 '쉽게'가는, 그런 시가 '쉽고 좋은 시'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결심하게 되었지요. 나는 쉽고 좋은 노래를 써야겠구나......

 

 

 

마종기 시인과 가수 루시드폴의 만남은 마종기 시인이 언급했던 것처럼 조국(혹은 모국이나 고국)이 아닌, 이국땅에 있었다는 '디아스포라(diaspofa:이산의 백성)'라는 공통점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루시드폴은 유럽 땅에 도착해서야 마종기 시인의 시집을 펼쳐들었고 깊이 매료되니 말이다. 일찍 고국을 떠나 의학자로서 시를 썼던 마종기 시인의 정서가 공학도로서 노랫말을 짓고 부르는 그의 심장에 정확하게 꽂혔다고나 할까.

아무튼 둘 다 남다름과 특별함을 모두 겸비한, 이 시대의 '아리스토텔레스'라 하겠다.

 

그들의 우정에 마음이 따듯해지면서도 한편으론 부럽기 그지없다. 

그들에게 주워져 맘껏 향유되는 지성과 감성이 나에겐 허락되지 않았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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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속에 숨다
그레그 도슨 지음, 유영희 옮김, 잔나 아르샨스카야 도슨 / 살림Friends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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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라는 영화는 폴란드 출신 유대인 피아니스트(블라디슬로프 스필만)의 자전적 이야기로 유명하다. 역시 폴란드계 유대인으로 일찍이 스필버그로부터 <쉰들러 리스트>의 연출을 의뢰받았던 로만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스필버그의 청을 거절했다고 한다. 

 

이처럼 유명한 영화를 나는 이제서야 접하게 되었고, 이 영화의 원작으로 착각하여 읽은 책이 바로 그레그 도슨의 <빛 속에 숨다>였다. 이 책 역시 우크라이나 출신 천재 피아니스트 자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지은이 그레그 도슨은 자매 중 언니인 잔나 아르샨스카야 도슨의 친아들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스필만의 이야기 못지 않게 감동적이다. 오히려 스토리 전개로 볼때 어린 시절 피아노 신동에서 출발한 성장 과정과 나치의 선전대 소속 연주 경력 및 그후 미국에서의 삶 등등.. 훨씬 더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한편의 영화로 제작되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은데, 아마 시기적으로 좀 더 일찍 나온 스필만의 <피아니스트> 때문에 묻힌 게 아닌가 싶다.

 

 

무대 위에 오름으로서 무대 뒤에 숨다.

 

특히, 무엇보다도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점은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잔나 아르샨스카야가 자신이 지나온  세월과 과거를 애써 묻어두려고 했다는 점이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튿히 성공한 유대인일수록 자신의 '과거'를 널리 알리려는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무엇이 이토록 그녀를 머뭇거리게 하고 대중의 시선으로부터 숨도록 만들었을까?

아마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 책의 원제인 <Hiding In the Spotlight>에 담겨 있지 않을까 싶다. 잔나와 두 살 어린 동생 프리나는 집단학살장소(드로비츠키 야르)로 향하는 행렬에서 극적으로 도망쳐나온 후, 신분을 감추고 가짜 이름으로 나치를 위한 위문공연을 함으로써 살아남을 수 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간 청중 앞에서 연주를 한다는 게 어떤 기분일까?  

박수갈채를 받으며 그들을 향해 무대인사를 한다는 건 또 어떤 기분일까? 

무대 위에 올라 스포트라이트를 한껏 받으며 자신을 널리 드러냄으로써 무대 속에 자신을 감추고 무대 뒤에서 생존할 수 있다는 현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처럼 이율배반적인 상황에 반복적으로 노출되었던 잔나의 삶은 그후 '드러냄'과 '숨는것' 사이의 복잡미묘한 싸움으로 점철되었을 것이다. 글쓴이가 서문에서도 밝혔다시피 이 책을 완성하는데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로 엄마가 사실을 말하는 것을 내켜하지 않아 끈질기게 설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지적한 점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인생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지만, 인과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신은 그녀에게 요구하지도 않은 음악적 재능과 함께 유대인과 나치의 홀로코스트라는 운명도 함께 주었다.

그녀는 운명을 거부하지도 순응하지도 않은 채, 운명 앞에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한다. 

"무슨 짓을 해도 좋다. 살아만 남으라'고 말하던 아버지의 마지막 당부와 음악에 대한 멈출 수 없는 열정과 사랑을 위해 매순간 혼신을 다했을 따름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바로 삶에 대한 그녀의 이와같은 자세가 아닐까 싶다.

 

그녀가 태어난 우크라이나라는 곳은 걸출한 천재 음악가들을 유난히 많이 배출한 곳이라고 한다. 그리고 스탈린 공산주의 체제에서는 국가의 지원 속에 체계적인 음악 교육이 이루어졌으며 잔냐와 프리나 역시 이런 시스템 속에서 음악 신동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13살 그녀의 운명이 어긋나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모스크바 음악원 전액 장학생으로 선발되었고 이미 고향인 베르단스키에서 하리코프로 이주해 훌륭한 음악가들 밑에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고 있었다. 죽음의 행렬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후, 빼어난 그녀의 연주실력은 그녀의 목숨을 살렸다. 그리고 살아 남은 그녀는 18살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까지 나치 소속의 연주단원으로 쉴 새 없이 많은 공연을 하면서 이른바 성공에 이르는 '만시간의 (연습)시간'을 자의반 타의반 거치게 된다. 아마도 이런 과정들이 미국으로 이주한 이후 그녀를 성공적인 피아니스트로 이끌었을 것이다.

 

 

신은 가혹한 운명일수록 행운의 여신도 동행시킨다.

 

잔나는 분명 불운 속에서도 운이 좋은 편에 속했다. 행운의 여신은 그녀에게 여러차례 강림했지만 푼크 카제르네 난민 수용소 소장인 래리 도슨과의 만남만큼 극적인 것도 없으리라. '신의 한수'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을 것 같다.

만약, 그에게 음악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없었더라면...?

혹은, 그에게 조금만 더 현실적인 감각이 있었더라면...?

무엇보다도, 그에게 잔나와 같은 음악 신동인 동생 데이비드가 없었더라면...?

잔나의 운명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으리라.

 

 

한편, 우리는 이 한권의 책을 통해 소련 공산주의의 비인간성과 스탈린의 이중성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비운을 새롭게 알게 된다. 

 

우크라이나는 지정학적으로 유럽(폴란드)과 동양(러시아)의 가운데에 자리하여 언제나 두 세력간 충돌의 희생양이 되어야만했다. 1991년까지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이었다가 소련의 해체후 독립되었으나 최근 동부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영유권 주장으로 다시한번 나라의 운명이 뒤흔들리고 있다.

 

동유럽과 맞닿아 있는 탓에 히틀러의 공격에 제일 먼저 노출되었으며, 스탈린의 반유대인 정책과 맞물리면서 우크라이나는 소련 정부에게 철저히 버림받고 만다. 그러므로 동유럽에서 유대인 대학살이 일어나기전에 이미 우크라이나에서 유대인 학살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 잔나는 고향인 우크라이나로 돌아가려하지만 동생 프리나의 강력한 반대로 주저앉고 만다. 프리나는 잔나보다 죽음의 행렬에서 조금 늦게 탈출하여 어쩌면 조부모와 부모의 죽음을 직접 목격했을지도 모른다. 돌아가도 가족이 없는 고향, 음악적 방면에서도 항상 언니의 그림자에 가려 있어야만 했던 그곳은 프리나에게는 지어버리고 싶은 과거 그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프리나의 어린애다운 고집과 질투가 죽음의 늪으로 다시 들어가려는 잔나의 옷깃을 붙잡고 만다. 마치 운명처럼...

 

전쟁이 끝난후, 소련 정부는 제3국을 선택할수도 있었지만 조국으로 돌아온 애국자들을 따뜻하게 맞이해주기는 커녕, 매국노로 누명씌워 대대적인 숙청을 가했다. 공산주의 체제의 치부를 가리고 강력한 독재를 실시하기 위해 선택한 악랄한 조치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잔나처럼 유대인도 음악 신동도 아니지만, 책을 읽는 내내 이미 내가 엄청난 행운을 누리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만약, 조금만 더 일찍 태어났거나 혹은 지금보다 조금만 더 위쪽 지역에서 태어났더라면 어떠했을까...?

.

.

.

생각해 보니 그리 먼 과거도 아니다.

고작해야 6,70여년 전이다.

그런대도 우리는 과거를 잊고 살아간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있다.

이는 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행동을 취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역사로부터 배우고 잘못된 행동을 수정하지 않는 한, 역사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비극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과거를 되새기고 과거로부터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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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마사코입니다
강용자 지음, 김정희 엮음 / 지식공작소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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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李) 마사코(方子)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의 본명이다.

잘 알다시피, 그녀는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였던 이은(垠) 영왕의 부인이다.  운좋게(?) 세자의 자리에 오른 영왕이 일본 황실의 자손과 결혼을 한 것은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두 사람은 부부로서 천생연분이었다. 만약, 두 사람이 몰락한 왕가의 세손도 일본 황실의 여식도 아닌, 그저 평범한 필부필녀로 만나 부부의 연을 맺었더라면 더할나위 없이 행복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 생각해보면, 그들이 부부가 되었던 것 역시 세손이요 황녀였기때문에 가능한 일이였으니 이 모든 것들을 그저 운명이라고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을 듯 싶다.

 

이 책은 1984년 5월14일부터 10월24일까지 <경향신문>에 연재된 이방자 여사의 자전적 기록인 <세월이여 왕조여>를 기본 텍스트로 삼아 엮어졌다.

그동안 이방자 여사에 대해 아니 조선의 마지막 왕실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는데, 이 책을 통해 몰락해가는 왕조의 뒷모습을 되짚어 볼 수 있었다. 500년 조선왕조가 수십년에 걸쳐 서서히 저물어가는  와중에 일반 백성은 물론이요 왕실의 자손들 역시 말못할 고통과 슬픔을 겪었음을 알게 되었다. 특히 이런 사실들은 정식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도 않고 널리 다루지도 않기에 더 소중하고 값지게 느껴졌다. 다른 누구도 아닌 마지막 황태자비의 비망록인만큼 훨씬 더 진솔하게 읽혔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왕이었던 순종은 슬하에 자녀가 없었다.

그래서 고종의 셋째아들이었던 이은(垠)이 세자로 책봉된다. 둘째아들인 이강(剛)이 나이로는 앞서지만 모친(덕수 장씨)이 비(妃)로 책봉되지 않아 세자가 되지 못했단다. 한편, 이은 왕세손의 모친인 영월 엄씨는 명성황후 서거 후 고종이 아관파천 당시 가까이 모시면서 승은을 입어 순헌황귀비로 책봉되었기에 그의 소생인 이은이 세자가 될 수 있었다. 그는 11살 어린 나이에 볼모로 일본에 끌려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황실 자녀들과 함께 교육을 받고 20세 되던 해에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일본 황족인 나시모토미야 마사코(이방자 여사의 일본명)와 정략결혼을 하게 된다.

 

한편, 나시모토미야 마사코는 이치조오카 도키코공주와 쿠니노미야 나가코공주등과 함께 당시 일본의 황태자였던 히로히토의 비로 물망에 올랐으나 권력투쟁에서 밀려 나면서 '선일융화(鮮日融和)라는 명목으로 조선 황태자비가 되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들로 미루어 볼때, 마사코라는 여인은 일본 천황비가 될 수도 있었던 자신이 망한 나라의 허울뿐인 천대받는 세자비가 되었다는 것에 한탄할 법도 하리라. 그러나 그녀는 묵묵히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남편인 영왕을 진심으로 존경했고 사랑했으며 마침내 한국인으로서 한국땅에 묻혔다. 

 

사람들은 나를 비운의 왕비라고 한다. 그러나 이제 낙선재 뜰에 서서 회고해 보는 나의 지난날들은 마냥 비운만은 아니었다. 긴 폭풍우 속에서도 가끔 한 조각 파란 하늘과 눈부신 햇살이 보이듯이 여인으로서의 사랑과 행복이 있었다. 무지개 같은 꿈과 희망도 있었다. 비록 고달프고 외로웠던 기억이라 하더라도 이제 회한과 슬픔의 대상이 아니라 마냥 끌어안고 싶은 것들, 내가 사랑해야 할 소중한 나의 것들로 받아들이고 싶다.

은(垠)전하와 나는 피차 불행한 조국의 왕족이었기에 서로 눈물겨운 역정을 나누는 부부가 되었다. 거목이 휘어질 때 그 기우는 아픔이 크듯 망해 가는 나라의 왕세자였기에 당하는 전하의 아픔은 옆에서도 감히 추축하기 힘든 것들이 많았다.

인간으로서 은 전하는 훌륭한 분이었다. 따뜻하고 깊은 마음과 중후한 인품, 뛰어난 영어 프랑스어 실력과 조선 유학생들을 위한 나름대로의 장학회 사업 등 망국한을 되씹으며 몸부림치는 그분을 보며 나는 한일 융화보다 외로운 그분의 따뜻한 벗이 되고자 했었다. 부부로서 우리 두 사람은 오히려 행복했다. 험하고 암담한 길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두 사람이 인간으로서의 결합과 깊은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두 개의 조국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나를 낳아준 곳이고 하나는 나에게 삶의 혼을 넣어 주고 내가 묻힐 곳이다. 내 남편이 묻혀 있고 내가 묻혀야 할 조국, 이 땅을 나는 나의 조국으로 생각한다.

 

-<나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비 이 마사코입니다> p4~6 中-

 

 

아버지(대원군)와 아내(명성황후) 사이에서 우유부단한 임금으로만 알려졌던 고종은 실제로는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했으며, 특히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물심양면 노력하다가 일본에 의해 강제로 폐위되었고 상왕의 자리에서도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노력과 시도를 그치지 않자 결국 죽음에까지 이르렀던 왕이었다. 고종의 서거는 아직도 의문에 휩싸여 있지만 앓는 지병도 없이 식혜를 마시고 바로 사경을 헤매다가 죽었으므로 그 당시에도 독살설이 파다했고, 결국 여기에 분노하여 조선 백성들이 일으킨 사건이 바로 그 유명한 3.1운동이다. 

 

영왕 역시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끌려갔지만 모든 면에서 일본의 황실 자손들보다 뛰어났다고 한다. 특히, 그는 자신이 눈에 띄는 행동을 하면 조선인 유학생들이나 조선인들에 대한 일본의 감시와 지배가 더한층 심해질 것을 감안하여 항상 행동거지를 바르게 하고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지만 조국에 대한 사랑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해방되자마자, 조국에 돌아오고 싶어했지만 이승만대통령(1875년 생으로 같은 전주이씨였던 이승만은 1897년생으로 자신보다 22살이나 어린 영왕을 무시하고 아랫사람 취급했으며, 혹시나 영왕이 돌아오면 왕정복고운동이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했다고 한다.)의 냉대와 무관심으로 돌아오지도 못하고 일본에 남아 일본 정부의 도움도 한국 정부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곤궁한 생활을 이어나갔다 한다. 이방자 여사의 수기에 이 부분이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정말 나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승만 정권이 물러나고 박정희 대통령이 취임한 다음에서야 영왕과 이방자 여사는 한국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많던 왕실 재산은 소리소문 없이 사라져 버리고 왕실 후손들은 빈궁하게 살고 있었다. 

 

1970년 귀국 6년6개월만에 영왕이 서거한 후, 이방자 여사는 낙선재에 남아 1989년 눈을 감을 때까지 장애아동 등을 돕는 일에 매진했다.

 

그녀의 삶은 결코 평탄하다고 할 순 없다.

첫아이를 7개월만에 어이없이 떠나 보냈으며 잦은 유산과 암 등 병치레 또한 잦았다. 그리고 일본의 태평양 전쟁으로 힘겨운 시절을 겪어야만 했다. 어디 이뿐인가.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비로서 영광보다는 책임과 의무 그리고 식민통치국의 여자라는 손가락질 또한 받아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인내하면서도 인간에 대한 사랑(인류애)과 고결한 인품을 잃지 않았다. 

 

그녀는 마지막 황태자비이기에 앞서 모든 이들에게 삶의 모범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이런 그녀가 이런 그녀의 삶이 오히려 이승만 대통령의 25세 연하 부인이었던 프란체스코 여사보다도 덜 알려져있거나 사실이 왜곡되어 알려진 것이 못내 아쉽다. 아마도 그녀가 일본인이라는 점이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영왕과 그녀 사이에서 태어난 유일한 자손인 이구 역시 안타까운 일생을 살다갔다. 열일곱이라는 어린 나이에 혼자 힘으로 미국유학길에 올라 명문 MIT까지 졸업하고 미국인 아내를 맞이했건만, 한국에 돌어온 이후 이런저런 세력들과 이씨 문중의 참견에 견디다 못해 1979년 일본으로 건너가버렸다. 그후 어머니 이방자 여사의 귀국 종용에도 불구하고 2005년 그곳에서 곡절 많은 삶을 마감했다고 하니 이 또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황세손이라는 의무와 책임만을 강요하고 걸핏하면 일본인 피가 섞였다는 질시와 비난을 견뎌내기엔 그에게 조국은 너무 낯선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올바른 역사를 남기려면 무엇보다도 흔적이 남아 있는 근현대사부터 정확히 기록하고 확인하고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 마사코 입니다>의 단행본 출판은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되도록 특히 젊은 세대들이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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