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하늘 아래 노란 꽃
류진운 지음, 김재영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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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하늘 아래 노란꽃>은 류전윈의 첫 장편 소설로 원제는 故鄕天下黃花 (1991) 이다. 다른 중국 소설의 제목처럼 참 낯설다. 류전윈의 또 다른 작품 제목 역시 <닭털 같은 나날>로 한국 독자들에게 생경하기는 마찬가지다. 모두 다 원문을 직역했기 때문인데 처음에는 굳이 알듯말듯한 제목 번역으로 한국독자들의 외면 아닌 외면을 받을 필요가 있을까 싶었었다.

 

그런데 작품을 다 읽고 나니 작품의 주제를 그렇게 잘 담아낸 '제목'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제목을 의역한다는 건 책임감 있는 번역자로서는 크나큰 모험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원제목보다 더 나은 제목을 도출해 낼 수 없다면 원제목 그대로 직역하되 제목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독자들에게 충분히 전달할 수 있도록 또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하리라.

 

 

 

이 책의 역자 역시 이 점을 고려하여 역자후기에서 <고향하늘 아래 노란꽃>에 대한 친절한 설명을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번역자에 따르면 중국에서는 장례때 노란꽃 즉 황화(黃花)를 가슴에 다는 풍습이 있었고 이런 점을 감안해 보면 '고향하늘 아래 노란꽃'이란 곧 고향에서 벌어진 연이은 죽음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내공이 엿보이는 번역가의 후기에는 '고향 마을 죽음의 연대기'와 '고향하늘 아래 노란꽃'을 놓고 적잖은 고민을 한 흔적 역시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녹녹찮은 분량의 작품을 읽는 과정은 좋은 작가와 작품을 독자에게 알리고 전달하기 위해 역자가 갖추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름뿐인 황제를 몰아내고 공화정이 들어선 민국3년.

마을에서 대대로 촌장을 독점해오던 리(李)씨네로부터 촌장 자리를 빼앗아온 쑨(孫)씨네 젊은 촌장 쑨뎬위엔이 목 졸려 숨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아들을 청부살인업자에게 잃은 쑨라오위엔은 역시 양아들 쉬부다이를 시켜 리라오시의 목숨을 노린다. 쉬부다이의 살인 계획은 미수에 그치지만 리라오시가 놀라 죽는 바람에 쑨씨네 마부 펑씨와 부엌일꾼 라오더가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 만다.


이때부터 전개되는 두 집안의 복수 혈전은 아들 손자代까지 이어지고 이 두 집안의 일꾼과 소작농인 마을 사람들의 운명도 시대에 따라 부침을 거듭한다. 공산당과 국민당 그리고 일본군이 접전을 벌이는 가운데 비적까지 날뛰던 시절, 사람 목숨은 그야말로 파리목숨보다도 못한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비적질이나 하던 쉬부다이가 촌장이 되고 쑨마오단은 일본군 앞잡이로 활약하며 쑨뎬위엔의 여덟살 어린 아들 쑨스건은 청년이 되어 팔로군에 들어가고 리라오시 둘째 아들 리원우의 아들 리샤오우는 국민당에 둥지를 튼다. 그리고 영원한 부촌장이었던 루헤이샤오의 아들 루샤오투는 다황와의 비적이 되어 노략질을 일삼고...


마침내 공산당이 정권을 잡고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지주를 몰아내고 토지 개혁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소작농의 아들이 새로운 권력층으로 들어선다. 지주 리라오시의 소작농이었던 자오샤오거우는 지주의 첫째 아들 리원나오-돈20원 아끼려다 일찌감치 목숨을 잃는다-에게 겁탈 당해 아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도 아무 말도 못했지만 그의 아들 자오츠웨이는 달랐다. 그는 지주를 몰아내고 토지 분배를 도맡아 했을 뿐만 아니라 라이허상에게 권좌를 내줄 때까지 마을의 최고 권력자로 군림한다.


과거 지주에게 착취당했던 이들이 공산당을 등에 업고 권력을 잡자 그들의 권력 남용 및 횡포 또한 지주의 그것보다 더 하면 더했지 조금도 나을 것이 없었다. 달이 차면 기울고 겨울이 가면 봄이 오듯 세상도 바뀐다는 걸 알게 된 사람들은 남 세상을 제 세상으로 바꾸기 위해 피비린내나는 권력 쟁탈전을 벌인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그 피해는 아무것도 모르고 따르기만 하던 '라오바이싱(老百姓)'에게 고스란히 돌아간다.


공산주의 혁명으로 노동자 농민의 나라가 세워지지만 착취당하고 고단한 노동을 감내하는 '라오바이싱(老百姓)'의 삶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다. 역사의 희생은 언제나 이름도 없는 일반 민중의 몫인 것이다. 한때의 좋은 호시절을 누렸던 사람들 역시 비참한 말로를 맞이할 뿐이다. 격변의 시대에 사람들의 목숨은 말 그대로 어느 줄에 서느냐에 따라 갈린다. 한국도 6.25전쟁을 겪으면서 이데올로기가 헤집고 간 역사적 상흔을 아직도 안고 있지 않은가. 이청준은 작품 <소문의 벽>등을 통해 이처럼 '선택의 기로'에 몰린 사람들의 심정을 '전깃불'에 대한 공포로 묘사한 바 있다.


류전윈이 <고향하늘 아래 노란꽃>에서 그리고 싶었던 건 아마도 '일반 대중 즉 라오바이싱(老百姓)은 언제나 끊임없이 이데올로기적 선택을 강요받으며 그 속에서 희생을 당한다'라는 역사의 본질일 것이다. 공산당이 지주를 비판하고 주자파를 공격하는 조반파의 방식은 대단히 민주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 온 마을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저마다 한마디씩 발언의 기회가 주어지고 이와 같은 발언을 통해 지주의 잘잘못을 따지니 이보다 더 잘 직접 민주주의를 구현한 것도 없지 않은가.


정치적으로 민주 제도가 정착된 지금.
현대인들 역시 이들 '라오바이싱(老百姓)'처럼 자신의 운명을 어떻게 이끌어갈지 예측할 수 없는 정치적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정치는 언제나 직업 정치인이 하지만 그에 따른 책임은 언제나 대중이 진다. '조금 빨리 혹은 조금 나중에'의 순차적 차이만 있을 뿐 역사의 거친 물살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중국은 지난 세기 동안 공산주의 혁명과 문화대혁명이라는 역사를 겪었으며 이에 대한 문학적 고찰 또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편이다. 류전윈의 <고향하늘 아래 노란꽃> 역시 이와 같은 신역사주의 혹은 신사실주의 문학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지금 세상이 영원할 것 같지만 세상은 바뀌고 또 바뀐다. 세상이 또 한번 바뀌면 새로운 역사주의 소설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올 것이다.


류전윈의 <고향하늘 아래 노란꽃>은 분명 좋은 소설이다. 그렇지만 상당히 긴 시간을 배경으로 많은 인물들이 명멸해가는 역사소설의 작가로서 류전윈은 좀더 세심했어야 했다.

 

 

본문 속에서 쑨뎬위엔의 첫번째 부인 징씨부인은 남편이 사망할 당시 35세였고 아들 쑨스건이 자살하기 위해 연립에서 뛰어내려 두 다리를 못쓰게 된 후 76세를 일기로 사망한 것으로 나와 있다. 리라오시 일가는 민국3년에 촌장 자리를 쑨뎬위엔에게 빼앗기고 위안스카이가 정변을 일으켜 왕정을 복고시키자 쑨뎬위엔을 죽인다. 또한 본문에서는 쑨뎬위엔이 2년 동안 촌장을 했다고 나와 있으니 그의 사망 연도는 1915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 1915년 당시 35세인 징씨부인이 76살에 타계했다면 1956년도에 사망한 것인데 그녀의 죽음은 문화대혁명 이후(1966년~1968년)의 일로 나와있다. 아무래도 10년 가까운 시차가 존재한다. 번역의 오류가 아니라면 분명 작가의 착오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다.

 

이 밖에도 역자인 김재영씨의 말에 따르면, 자오츠웨이와 쑨스건 역시 나이차이가 10세이상 나므로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유년기를 함께 보낸 것으로 묘사되었다고 한다. 번역 작업 과정에서 류전윈에게 이와 같은 사실을 알렸는데 매우 놀라는 눈치더란다. 이 작품은 90년대 초반에 나왔고 중국에서도 상당히 많이 팔린 작품으로 알고 있는데, 연도의 오류를 십년이 넘도록 원작가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나 역시 적잖히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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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설이다 밀리언셀러 클럽 18
리처드 매드슨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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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매드슨의 <나는 전설이다>는 말 그대로 '전설'이 된 작품이다.

스티븐 킹은 '나는 이 작품을 보고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고, 이후 수많은 좀비 영화에 모티브를 제공하면서 널리 회자된다.

 

<나는 전설이다>는 서양식 귀신인 '좀비'와 '흡혈귀'라는 전통적인 재료를 자연과학과 결합시켜 인류의 멸종과 새로운 종의 탄생이라는 영역으로까지 확장시킨다. 

 

작품의 도입과 중간부분은 공포소설이 갖고 있는 모든 특징적 요소들을 배제하고 있다. 좀비의 출현과 공격 조차도 대단히 밋밋하고 평이하게 서술되어 있어 오히려 현실감이 떨어질 정도다. 이는 구성의 실패라기 보다는 원초적인 공포심을 자극하는데에는 남다른 재능을 갖고 있는 작가의 철저한 계산의 결과로 보인다. 불필요한 공포심이 최대한 배재된 작품은 오히려 세기말적인 스산함을 한껏 드러내면서 '인류 마지막 종의 최후'를 가장 극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어느순간 가족과 이웃들이 흡혈귀로 변한다. 주인공은 낮에는 코마상태에 있는 흡혈귀들-한때는 같은 종족이요, 이웃이었지만-의 가슴에 쇄기를 박아 제거하거나 음식 등을 구하며 보내고, 해가 지면 흡혈귀들의 공격에 시달린다. 2~3년 동안 흡혈귀만 상대하던 주인공에게 '사람' 그것도 젊은 여인이 나타난다.

주인공은 그녀에게 이끌리고 그녀 역시 주인공에게 의지하고 싶어하지만 그녀는 주인공 곁을 떠나고 만다. 그들이 곧 찾아 올거라는 경고의 메세지만 남긴 채...

결국, 주인공은 그녀의 경고대로 진화한 흡혈귀들에 의해 제거되고 만다.


소설은 흡혈귀에 얽힌 오래된 전설을 모티브로 하여 인류의 멸종과 함께 전혀 새로운 종족의 출현을 암시하고 있다. 인류의 진화란 여러 종족이 멸종해가고 새로운 종족이 지속적으로 탄생하는 과정의 반복으로 요약될 수 있다.


고인류학에서 인류의 진화 단계를 원인()ㅡ원인()ㅡ구인()ㅡ신인() 등으로 구분하는데, 흔히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원인()에 해당되며, 호모에렉투스 즉 자바원인은 원인()에, 네안데르탈인은 구인()에 속하며, 호모 사피엔스는 현생인류의 직접적 조상인 신인()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진화의 단계가 순차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구인()에 속하는 네안데르탈인과 신인()인 호모 사피엔스 사이에는 진화의 연결 고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즉, DNA적으로 전혀 다른 별개의 종(種)이라는 학설이 유력하다면, 네안데르탈인은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한 것이 아닌 호모 사피엔스에 의해 멸종된 것이다! 


리처드 매드슨의 <나는 전설이다>는 언제나 진화의 승자 편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현생 인류의 관점을 정면으로 겨누고 있다. 현생 인류의 마지막 남은 인종이 힘겹게 고군분투하다가 최후를 맞이하면서 결국 '전설'속으로 사라지는 것으로 작품은 마무리된다. 마치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호모에렉투스 그리고 네안데르탈인이 진화에 실패하면서 차례로 '전설'속으로 사라져 버렸듯이...


이처럼 리처드 매드슨은 패자의 관점에서 현생 인류를 바라보는 '혜안'을 갖고 있었다. 그것도 지금으로부터 아득히 먼 과거인 지난 1950년대에 말이다. 바로 이 점이야말로 <나는 전설이다>를 '레전드'의 반열에 올려 놓은 직접적인 이유라고 할 수 있으며, 스티브 킹으로 하여금 소설을 쓰도록 결심하게 만들고, 그 후 많은 사람들에게 공명을 불러 일으킨 영화와 소설의 모티브가 될 수 있었던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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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추락
하 진 지음, 왕은철 옮김 / 시공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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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계 미국인인 하진(哈金: 본명 金雪飞)의 단편집 <멋진 추락>은 외국인 이민자들이 많이 모여 산다는 뉴욕 플로싱 지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곳의 사람들은 각기 다른 사연들을 간직하고 있지만 한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건 바로 하나같이 부푼 가슴 안고 아메리칸 드림을 쫒아 미국에 왔다는 점이다.

 

고국의 가족들 생계를 위해 힘든 노동을 마다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기꺼이 몸까지 파는 젊은 중국 여성들이 있는가 하면, 고국의 삶을 정리하고 미국에 정착한 아들 가족과 함께 살게 되면서 세대간 갈등을 톡톡히 겪는 노부부도 있다. 


하 진의 <멋짓 추락>에 나오는 등장 인물들의 모습은 실제 미국으로 이주한 아시아계 이주민들의 삶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리라. 이주민이 세운 나라인 미국 주류 사회에 완벽하게 동화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고국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는 이들의 '이중생활'은 왠지 낯설지 않다. 바로 우리의 친척 이모나 작은 아빠 혹은 사촌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도 지난 9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미국 이민 붐이 크게 일었었다. 미국에 친인척 한 두명 두지 않은 이들을 찾아 보기가 어려울 만큼 많은 한국인들이 역시 아메리칸 드림을 안고 미국으로 건너가지 않았던가. 그리고 하진의 소설 속 주인공들과 비슷비슷한 삶의 모습을 연출했으리라. 집 나서면 친구가 가장 큰 의지가 된다는 중국 속담처럼 해외에 나가면 동포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 동포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직업을 얻고 동포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하며 동포 변호사를 고용해 비자 문제를 해결한다.


사원에서는 승려에게 급료를 주지 않는 게 분명했다. 여기에 오려고 그렇게 열심히 노력했던 것이 후회스러웠다. 미국에 가면 한몫 잡을 수 있다고 허풍을 떨며 그들이 여기에서 겪었던 어려움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사람들 때문에 그는 길을 잘못 든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 고향 사람들의 눈에 부자이고 성공한 것처럼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어리석었다. 너무나 어리석었다. 돌아가면 그는 진실을 말해주고 싶었다. 미국식 성공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여기서는 자신을 파는 법을 배우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바꿔야 했다.

                                                                                                   - '멋진 추락' 中-


서로 접촉하는 부분이 많다보니 해외 동포들 사이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사건 중에는 의외로 같은 동포가 가해자인 경우가 많다. 해외에 나가면 오히려 동포보다는 생판 모르는 낯선 사람들로부터 기대하지도 않은 도움을 받거나 진정한 우정을 나누게 되기도 한다. 하진의 단편집 타이틀이기도 한 <멋진 추락>의 쿵푸 사부 '간친' 역시 동포로부터 사기를 당하고 배신을 당하지만 오히려 미국 사회로부터 도움을 받게 되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마찬가지로 <벚나무 뒤의 집>의 후옹 역시 몸을 팔면서 홍콩 출신인 '크로크'부터 경제적 착취를 당한다.


중국인 갱들은 사람들을 협박하기 위해 마피아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퍼뜨렸다. 일부는 그저 소문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크로크는 마피아가 아닐지 몰랐다. 하지만 그는 후옹과 나를 쉽게 파멸시킬 수 있었다. 그는 두목은 아닐지 모르지만 갱일 것이었다. 그리고 중국과 베트남에 있는 우리 가족들한테 해를 끼칠 수 있는 조직망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 '벗나무 뒤의 집' 中-


작품에 대한 짧은 식견은 이 정도로 하고 작가 하진에 대해 좀 더 살펴보자. 솔직히 단편집이라는 사실도 모른 채 <멋진 추락>을 독서 목록에 포함시키게 된 계기가 작가에 대한 호평 때문이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미국에서의 쟁쟁한 수상경력과 그의 작품을 번역한 왕은철 교수(전북대 영문과 교수)의 '옮긴이의 말'때문이었다.


하얼빈이 고향인 하진은 지난 80년대 중반 미국의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다가 1989년 '톈안문 사태'를 겪게 되면서 다른 중국의 해외 체류 지식인들처럼 귀국을 포기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영어와 모국어(중국어)을 모두 사용하여 작품을 발표한 보기 드문 작가라고 한다. 이 정도면 작가의 정치 사회적 코드는 명확해 보인다. 이 말은 달리 말하면, 하진이라는 작가가 미국 사회에서 환영받을 기본조건을  충분히 갖추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는 첫번째 장편 <기다림>이란 작품으로 미국의 펜 포크너상과 전미 도서상을 수상했으며, <전쟁 쓰레기>,<광인일기>, <카우보이 키친>, <니하오 미스터 빈>, <남편고르기>등등 역시 미국 문단에서 이민자로서는 보기 드문 성공을 거두고 있다. 아직 작가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작품들을 접하지 못한 상태에서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겠지만, 그의 작품들이 문학작품으로써 평가받기에 앞서 '혹시 부지불식간에 미국식 '입맛'에 맞아떨어진 건 아니었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작품으로 대중과 소통하고 또한 작품으로써 대중에게 평가받는 존재이지만 작가 역시 국가와 민족과 사회를 떠나서는 생존할 수 없는 존재이므로 작가의 국가관(특히 정치적 입장)과 민족관 그리고 인생관에 따라 엇갈린 평가와 호불호(好不好)가 결정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현대 중국 정부의 가장 큰 아킬레스건이기도 한 '톈안문 사태'는 서방 국가들에게는 중국을 평가하는 또 다른 '잣대'의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이는 톈안문 사태가 중국의 민주화 운동으로써의 상징성을 갖고 있기 때문인데, 어찌됐건 이 시기에 조국에 돌아가지 않은 해외 체류 유학생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중국 대륙에서 '반독제 지식인'이라는 꼬리표를 자의반 타의반 갖게 되었다는 건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리라. 여기에서 언급하고자 하는 점은 이들이 과연 서방 주류 사회가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중국의 정치 민주화를 지지하는 세력인가 하는 점이다. 어쩌면 그들은 80년대 후반 톈안문 사태 이후 미국 정부가 실시한 중국인 체류 허가 제도를 '개인적'으로 이용하여 미국에 정착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


누 가 뭐래도 그 당시는 '냉전 체제'가 아직 종식되기 전으로, 미국은 소련과 중국을 필두로한 공산주의 국가에 대해 체제상 우위를 선전하고 싶었을 것이고, 톈안문 사태로 귀국을 포기한 중국 유학생들이야말로 선전용으로 충분히 이용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인진 몰라도 중국 대륙은 해외에 체류하며 작품 활동을 하는 중국계 작가들을 외면하고 있다.


이런 선입관 때문에서라도 나는 하진의 작품을 차례 차례 섭렵해 나가리라. 그의 눈을 통해 중국 사회와 그 일부라 할 수 있는 중국계 이민자들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아울러서 한국에 거주하는 중국계 특히 조선족들의 삶과 생활을 다룬 작품들의 탄생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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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자란다 - 아라이 연작 소설
아라이 지음, 양춘희 외 옮김 / 아우라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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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에는 '一方水土一方人'이란 표현이 있다. 사람은 나고 자란 지역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중국인인 아라이의 작품은 전혀 중국적이지 않다. 중국 소설 특유의 익살이나 허풍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흔적조차 없고 서사적 구조 또한 단순하기 그지없다. 중국인에 의해 중국어로 쓰여진 소설이 '중국'답지 않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작가가 그만큼 중국인의 색채를 띄고 있지 않거나 중국에서 나고 자라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1959년 쓰촨성 서북부 티베트 자치구인 마얼캉현에서 태어난 작가는 티베트인이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이 '중국적'이지 않다는 건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티베트인은 중국 한족과는 전혀 다른 생활풍습과 종교와 사유세계를 갖고 있으니 말이다.

 

 

중국 당대 작가의 작품에 익숙해 있던 나에게 아라이의 목소리는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마음을 비우고 오롯히 티베트적인 분위기에 젖어 보려 노력했으나 몇 몇 작품을 제외하곤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티베트와 티베트인에 대한 이해가 그만큼 적고 얕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아라이의 작품은 신,구 시대의 변화와 위협받는 민족 정체성을 담담하게 그려냄으로써 아려한 아픔을 자아낸다.

 

 

거라는 빈총을 내던지면서 소리쳤다.

"왕! 왕왕!"

"왕왕! 왕!"

그가 흉내낸 사냥개 소리는 경쾌하면서도 낭랑하게 숲 전체를 가득 채웠으며, 그 누구도 자신을 침범할 수 없다고 여기는 이 동물을 격분시키기에 충분했다. 거라가 오늘 총을 쏜 것이 처음이라면 개 짖는 소리는 마을 전체에서 제일 잘 냈다. 그는 여러 곳에서 개짖는 소리를 배웠다. 사람들이 말했다. "거라, 한번 짖어봐."그러면 거라는 왕왕 짖어댔다.

(.....)

 

"거라는 자신이 엄마와 똑같이 피를 흘렸고 엄마와 똑같은 신체적 고통을 느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문밖에선 눈 내린 뒤의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고, 방 안에선 화로 속의 불꽃이 타닥거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따스한 공기 속에서는 아들과 엄마의 피냄새가 떠다녔다.

(.....)

 

엄마가 말했다.

"그 곰 정말 크더라."

"엄마의 비명소리를 들었어요. 많이 아팠어요?"

"많이 아팠지. 듣기 괴로웠나 보구나?"

"아니에요. 엄마"

엄마가 눈물을 반짝이면서 머리를 숙여 거라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엄마의 몸에서 젖냄새와 피냄새가 물씬 났다. 거라의 몸에서도 한약냄새와 피냄새가 물씬 났다.

아라이, <소년은 자란다> 中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소년 거라와 역시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동생을 출산하는 엄마를 이어주는 매개체는 다름 아닌 '피'이다. 소녀가 출산의 고통을 겪은 후 여자로 거듭나듯, 소년 역시 사냥을 통해 남자로 거듭난다. 소년은 엄마가 동생을 출산하는 사이, 동네 아이들의 사냥을 따라갔다가 무섭게 자신을 추격하는 곰을 쓰러뜨린다. 진정한 남자의 길로 자신을 이끌어줄 아버지가 없는 소년은 이렇게 스스로 성장한 것이다. 마치 엄마 쌍단이 떠돌이 몸으로 지촌 마을에 정착하여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아들 거라를 낳고 또 다시 거라에게 예쁜 여동생을 낳아주었듯이...

 

 

아라이의 <소년은 자란다>는 마치 한편의 영화와도 같다. 짧은 단편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주제의식과 함께 시각과 청각 뿐만 아니라 후각까지 효과적으로 자극한다.

 

 

작품은 새하얀 눈(雪)이 내리기 시작하는 어느 날. 출산을 앞둔 엄마와 아들이 흘리는 붉은 피(血)가 선명한 시각적 대조를 이루는 가운데, 총소리와 개짖는 소리 그리고 비명 소리가 간간히 귓전을 울린다. 그리고 갓 태어난 아기의 젖비린내와 엄마의 젖냄새 및 피비린내 그리고 거라의 상처에서 나는 한약냄새와 피냄새 등이 콧속을 파고 든다.

 

 

학창시절 교과서에 실려 있던 기승전결에 따른 스토리 라인이 선명한 명작 한편을 접한 기분이다.

 

훌륭한 작가는 '경험을 재현하지 않고 주제를 구현한다'고 했던가.

이 점에서 볼 때, 아라이는 자신이 성장한 티베트 마을 지촌에서 겪은 경험을 배경으로 '인간과 삶'이라는 주제를 아주 잘 구현해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 중, <소년은 자란다>이외에도 마차가 마을에 들어온지 채 십년도 안 되 트렉터에게 자리를 내주고 마는 마부의 이야기인 <마지막 마부>와 도량형 통일이 된 줄도 모르고 여전히 800g을 한근으로 표시하는 구식 저울에 일편단심 목매달며 살던 늙은 촌부를 그린 <옛 저울추> 그리고 사원에서 보물을 훔친 도둑을 잡아 가둔 후 훔친 보물을 빼돌리려는 경찰과의 추격전 끝에 고작 맥주 한병 훔친 죄밖에 없는 '쌍지'의 헛된 죽음을 묘사한 <막다른 길>등이 인상적이었다.

 

 

끝으로,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한국 작가 채만식이 1940년대에 쓴 <소년은 자란다('없어진 아버지')>란 중편소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라이의 작품과 동명소설로, 간도 지역을 배경으로 한 소년의 성장기를 다룬 이 작품은 <탁류>와 함께 채만식의 대표작이라 하니 꼭 한번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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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인
하 진 지음, 왕은철 옮김 / 시공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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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특별한 이력을 갖고 있는 작가는 작품과는 상관없이 왠지 모를 강한 흡입력을 갖고 있다. 하진 역시 그런 작가 중에 한명일 것이다.

 


본명이 진쉐페이(金雪飛)인 하진(哈金)은 1956년 하얼빈에서 태어났으며 미국에서 유학하던 중 톈안먼 사태를 접하고 귀국을 포기한 채 미국에서 영어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일찍이 그의 작품은 미국에서 엄청난(?) 찬사를 받으며 '전미도서상' '플래너리 오코너상' '펜 포크너상' '어네스트 헤밍웨이상' 등을 수상했다. 솔직히 그의 명성에 이끌려 읽게 된 그의 소설집 <멋진추락>은 미국 이민자의 생활을 다룬 작품들로 그럭저럭 읽어 내려갔지만 그의 명성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빼어난 단편작품을 쏟아내는 작가도 있지만 장편소설을 주로 쓰는 작가들에게 단편은 잔잔한 '소품'과도 같은 존재일 뿐, 진면목을 보여주기에는 역부족인 경우가 의외로 많은 법이다. 이에 신중하게 하진의 장편 소설 되도록이면 대표작을 골랐다. 역자 또한 믿을만 했다.

 

<광인>은 톈안먼 사태를 정면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톈안먼 사태가 평범한 중국인들에게 어떻게 다가와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준다.

 


중국 고전시의 대가인 양교수가 뇌출혈로 쓰러진다. 그리고 그의 예비사위이자 제자인 주인공 완지안과 팡반핑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그를 돌보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양교수가 정신이 오락가락하여 터무니없는 소리들을 해대면서 시작된다. 양교수로부터 조각 조각 떨어져 나온 참담한 현실과 진솔한 고백을 통해 베이징대 대학원에 지원하려던 지안은 흔들리고 만다.


잠시 머리를 식힐 요량으로 떠났던 반핑의 고향 마을에서 농민들의 비참한 삶을 접하면서 지안은 자신이 가고자 했던 학자의 길이 실은 '사무원'에 불과하며 '다른 사람들에 의해 잘려지는 도마위의 고깃점'에 다름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물 한동이를 위해 5km 이상을 왕복해야 하는 가난한 마을 농민들이 마을에 들어와 영화를 찍는 촬영팀으로부터 일당 1위안을 받고 영혼을 파는 것처럼...


그는 공무원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도마위의 고기를 자르는 칼'이 되고자 하지만 이 마저도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 어쩌면 작가는 이를 통해 1989년 톈안먼 사태가 일어나던 당시, 중국인들이 처해 있던 상황을 고발하고자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양교수가 문화대혁명의 혹독한 고초를 견뎌내면서도 학자의 길을 고수해왔지만 그의 삶 역시 좌절과 배신 그리고 물욕과 권력에의 지향에 다름 아니었다. 그는 광인이 되어서야 자신의 진심을 고백함으로써 자유로울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진은 80년대 후반 중국 지식인 앞에 펼쳐져 있던 숨막히는 현실을 양교수의 헛소리(?)와 식당 앞에서 구호를 외치는 '올빼미'라는 미치광이의 모습을 통해 또 한번 극대화시킨다.

 


메이메이와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꿈꾸웠던 평범한 '룸펜'이었던 지안은 결국 양교수의 죽음과 함께 자신만 몰랐던 아니 어쩌면 알고도 외면해 왔던 냉정한 현실에 놀아났음을 알고 무력감에 빠진다. 그의 베이징행은 사실 그 어떤 정치적인 색깔을 띠고 있지 않다. 오히려 한롱의 사암마을로 떠난 것처럼 잠시 잠깐의 외출이요 일상 탈출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나 그 짧은 잠깐의 '한눈팔기'가 그의 인생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끄는 '터닝포인트'라는 걸 깨닫기까지 그는 또 한참을 걸어가야 하리라.

 


하진의 인생도 그러했을까. 너무나도 순식간에 뜻하지 않은 역사적 사건들로 인해 전혀 다른 방향의 삶을 살게 된 것일까?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깨닫기까지 거친 세월들을 걸어왔던 건 아닐까? 그저 지안의 다음과 같은 깨달음을 통해 진실을 유추해 볼 수 있을 뿐이다.

 

나는 개인적인 동기들이 정치 행위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 내가 메이메이에게 허세를 부리려고 베이징으로 돌진했던 것처럼, 사람들은 온갖 종류의 개인적인 관심사와 이유에 근거해 혁명에 가담한 것이었다. 하지만 공산주의 혁명에 대한 우리 역사서들은 언제나 개인적인 동기들을 제외시켰다. 나는 나이 든 혁명주의자들이 적군(赤軍)이나 공산당에 가입한 이유에 대해서 얘기할 때, 정해진 결혼을 피하거나 빚을 피하거나 충분한 음식이나 옷을 얻기 위해서였다고 종종 말했던 걸 떠올렸다. 개인을 움지이고 따라서 역사의 동력을 일으키는 것은 개인적인 관심사들이다.

 

-<광인> p435-

 

중국 본토에서 하진의 작품이 출판되진 않았을 것이다. 중국 정부는 톈안먼 사태로 망명한 자국인들을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톈안문 사태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단 한번도 진지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중국 대륙에서 톈안먼 사태는 집단 망각에 빠져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하진과 같은 이들이 작품 속에서 다루고 있는 톈안먼 사태는 그 자체만으로도 소중하고 역사적 기록의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겠다.


역자인 왕은철 전북대 영문과 교수에 따르면, 하진의 작품은 샨사의 <천안문의 여자>, 다이 시지에의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등과 확연히 구분되며 이들 작품들과 비교해 볼 것을 권한다. 기회가 되면 샨사와 다이 시지에의 작품을 읽어 보리라.

 


역자가 이미 밝혔듯이, 이 작품은 영어로 쓰여진 작품을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기에 중국적인 표현 등에 있어 미흡한 점이 있다. 예를 들면, 중국의 성장(省長)을 주지사로 표현한다거나 중국의 화폐단위인 '마오(分)'를 '펀'이라고 옮긴 점 등을 들 수 있겠다.

그리고 양교수가 과거에 사랑했던 여자를 회상하는 부분에서 연대가 부적절한 것 같아 지적하고자 한다.

 

그 여자가 누구지? 그녀는 그가 스물아홉이던 1930년에 그와 같이 있었다. 그녀는 양 교수의 부인 이전에 있었던 누군가였음이 분명했다. 메이메이는 지금 스물네 살이었다. 그녀는 그녀의 부모가 결혼한 지 3년 만에 태어났다고 했다. 양 교수가 서른 두살이던 27년 전에 결혼했다는 의미였다. 미지의 여자가 그를 퇴짜 놓은지 3년이 지나서 였다. 그는 수십만 명의 지식인들처럼 1950년대 후반에는 박해를 받지 않았다.

-시공사 <광인> 하드양장본 229쪽-

 

잘 알다시피,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1989년 톈안먼 사태가 발생하기 2~3개월전부터 톈안먼 사태 이후 몇일 간을 다루고 있다. 그렇다면 양교수의 딸 메이메이가 1989년 24살이라는 뜻이므로 양교수는 27년 전인 1962년 32세에 결혼을 했다는 의미이므로 그의 출생 연도는 대략 1930년도가 된다. 그러므로 본문 중, '그녀는 그가 스물아홉이던 1930년에 그와 같이 있었다' 라는 문장은 논리적으로 모순된다. 번역의 오류인지 작가의 착각인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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