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주제 사라마구는 199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포르투갈 출신 작가다.

선과 악 사이에서 방황하는 보편적인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로 유명한 그는, 자신의 대표작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볼 수 없는 극한 상황'에 처했을 때 나타나는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다.

이 작품은 2008년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론 작가의 주제의식이 영화의 충격적인 장면들 속에 가려져 버린 것 같아 안타깝다.

오감을 자극하는 더럽고 추한 영화 장면들 속에서 유일하게 눈 뜬 자인 의사 아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분별력을 갖춘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생각만큼 많지 않으리라.

나 는 영화를 보지 않고 작품을 읽었을 따름이지만 읽는 내내 어쩔 수 없이 머리속으로 그려지는 영상만으로도 저절로 눈이 감기고 고개가 돌려졌다. 게다가 문장부호를 생략한채 끊임없이 이어지는 등장인물들의 대화 속에서 사라마구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기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그 러나 사려 깊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이 배반해 버리고, 또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거부해 온 도덕적 양심은 지금도 존재하고 또 전에도 늘 존재해 왔다. 그것은 영혼이란 것이 혼란스러운 명제로 전락해 버린 제사기(지질 시대의 최후기로, 현대를 포함하는 시대:옮긴이)의 철학자들이 발명한 것이 아니다. 세월이 흐르고, 더불어 사회도 진화하고 유전자도 바뀌면서, 우리의 양심은 결국 피의 색깔과 눈물의 소금기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우리의 눈은 내부를 비추는 거울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우리 눈은 우리가 입으로는 부정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러한 일반적인 관찰에 덧붙여, 특수한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 그 특수한 상황이란, 단순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어떤 악한 행동을 저질렀을때 생기는 가책이라는 것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온갖 종류의 공포와 뒤섞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 결과 자신의 잘못을 얼버무리려 하는 사람은 결국, 가혹하게도, 자신이 받아 마땅한 벌의 두배를 받게 된다. -p25-



어느날.

서 른 여덟의 신체 건강한  남자가 차를 운전하다가 갑자기 두 눈이 멀어 버린다. 그의 눈앞에는 순식간에 마치 우유 속에 빠진 것처럼 '백색' 세상만이 펼쳐졌다. 마치 전염병처럼 눈먼 사람과 접촉했던 사람들이 순차적으로 '백색의 세상'에 갇혀버리자, 당국은 '백색 질병'이라 칭하고 눈먼 자들과 눈멀 자들을 버려진 정신병원에 가둬 버린다.


처음에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결국에는 식욕과 성욕 그리고 탐욕만 남게 된 눈먼 자들은 양심의 눈까지 멀게 된다.

오물과 배설물로 뒤범벅이 된 공간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자인 의사의 아내는 곧 작가의 투영체라 하겠다. 사라마구는 그녀의 눈과 입 그리고 손(행동)을 통해 눈 먼 세상을 고발하고 대중을 일깨운다.


나 도 지치기 시작했어요, 때로는 나도 눈이 멀었으면, 다른 사람들과 똑같았으면, 다른 사람들이 지고 있는 의무 이상을 지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어요. 우리는 당신한테 의지하는 데 익숙해졌어, 당신이 없다면, 우리는 한 번 더 눈이 머는 꼴이 될 거야, 당신 눈 덕분에 우리는 그래도 눈이 좀 덜 먼 셈이지. 할 수 있을 때까지는 해볼게요, 그 이상은 약속 못해요. -p338



눈 먼 자들만 있는 세계에서 눈 뜬 자는 우월한 위치에 있다.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볼 수 있다는 능력을 이용하여 눈 먼 자들을 착취하고 심지어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눈 먼 자들을 돕기로 마음 먹는다.

볼 수 있다는 능력을 볼 수 없는 사람을 위해 사용한다.

이기적인 인간의 또 다른 이면에는 바로 이와 같은 이타성이 자리하며, 바로 여기에서 '희망'이라 불리우는 가냘픈 싹이 자라난다. 


어쩌면 의사의 아내 역시 눈이 멀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본 것들은 육체적인 눈에 비친 '상(像)'이 아니라 마음, 즉 양심의 눈에 비친 '상(像)' 일 수도 있으므로...


갑작스럽게 아무 이유 없이 눈이 안 보였던 사람들은 어느날 갑자기 눈이 보이게 된다.

다시 눈 뜬 세상으로 나온 그들이 마주한 세상은 어떤 곳일까?

당연히 푸른 하늘과 아름다운 호수와 웃음과 서로에 대한 배려가 넘치는 세상이지 않을까?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의 사의 아내는 일어나 창으로 갔다. 그녀는 쓰레기로 가득 찬 거리, 그곳에서 소리를 지르며 노래부르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이어 그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모든 것이 하얗게 보였다. 내 차례구나, 그녀는 생각했다. 두려움 때문에 그녀는 눈길을 얼른 아래로 돌렸다. 도시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p359




'눈 먼 자들의 세상'이 끝나자, '눈 뜬 자들의 도시'가 펼쳐진다.


거장은 9년간의 시차를 두고 <눈 뜬 자들의 도시>로 우리를 안내한다. 


고통스럽고 두렵지만 그의 안내를 차마 뿌리칠 수 없다.

그건, 볼 수 있지만 보지 않으려는 것과 다름 아닌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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