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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프트 이야기
수잔 브리랜드 지음, 허진 옮김 / 강 / 2006년 7월
평점 :
절판

유명한 관광 명승지의 후미진 귀퉁이나 오래된 술집의 나무 테이블 한쪽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서툴게 새겨진 이름들과 날짜 등을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수 년전의 것은 물론이거니와 수 십년 전, 심지어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새겨진 '낙서들'을 보고 있노라면, 눈살이 찌푸려지다가도 나도 모르게 짧은 '탄성'이 터져나오곤 한다.
얼굴조차 마주한 적 없고, 앞으로도 마주할 가능성 '제로'에 가까운 낙서 주인과의 '만남'은 우연이 만들어낸 경이로운 인연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주인의 오랜 손때가 묻은 물건을 대할 때에도 엇비슷한 감정에 휩싸이곤 한다. 누가 사용했는지는 모르지만 세월의 흔적이 아로새겨진 물건 속에는 나보다 먼저 지나간 사람들의 숨결이 담겨 있는 것 같다.
이런 느낌들 때문에 사람들은 오래된 '골동품'에 열광하는가 보다.
수잔 브리랜드의 <델프트 이야기> 역시 이런 감정으로부터 시작된다.
![[베르메르] ‘음악과 와](http://tv01.search.naver.net/ugc?t=252x448&q=http://blogfiles.naver.net/data2/2004/7/10/7/77%C0%BD%BE%C7%C0%BB_%BF%AC%C1%D6%C7%CF%B4%F8_%C1%DF%BF%A123.jpg)
막달레나는 그날 본 모든 그림에 등장하는 모든사람들을생각했다. 아니, 아버지의 그림만이 아니다. 세상 모든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 말이다. 화가는 그 사람들의 시선과 고갯짓, 그들의 외로움과 고통과 슬픔을 빌려와서는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을 마주할 일
없는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막달레나는 생각했다. 사람들은 아주 가까이에서, 고작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막달레나를 보고 또
보겠지만, 그들은 결코 그녀를 알지 못할 것이다.
-수잔 브리랜드, <막달레나의 시선> 中-
초상화 앞에 서보라.
화가의 시선으로 초상화 속 주인공을 바라보게 된다.
처음엔,
색채와 명암과 구조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는,
초상화 속 주인공은 누굴까? 하는 궁금증이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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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프트는 네델란드 남서쪽에 위치한 작은 도시의 이름이다. 그렇다고해서 수잔 브리랜드의 <델프트 이야기>가 도시에 관한 이야기라고 지레짐작하진 마시길...
<델프트 이야기>는 도시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림'에 관한 이야기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작가에 의해 17세기 델프트에서 활동했던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작품으로 가정(假定)되는 '바느질 하는 소녀'라는 한폭의 초상화를 둘러싼 연작소설이다.
요하네스 베르메르는 <진주 귀고리 소녀>를 그린 바로 그 화가다.
트레이시 슈발리에가 <진주 귀고리 소녀>의 작품 속 모델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펼쳤다면, 수잔 브리랜드는 한술 더
떠서 '바느질 하는 소녀'라는 존재하진 않지만 존재할 것만 같은 베르메르의 작품을 소장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작가의 말처럼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삶의 걸음을 잠시 멈추고 작품 속으로 걸어들어가면, 너무도 시(視)적이고 시(詩)적인 세상과 마주하게 된다.
슈발리에의 <진주 귀고리 소녀>가 마음에 들었다면, 분명 이 작품도 좋아하게 되리라.
바로 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