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리커버 개정판) - 국내 최초 수메르어·악카드어 원전 통합 번역
김산해 지음 / 휴머니스트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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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라는 단어는 인간의 호기심을 극도로 자극한다. 우리는 무엇이든 간에 처음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한다. 새로운 학기나 직장의 첫 번째 날, 첫 사랑, 아니면 최초의 음악과 문학 등등에. 아마 그것은 처음의 그 기대와 설렘 또는 순수함이 지속되길 바라는 열망에서 비롯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복되는 삶 속에서 우리는 깨닫는다. 처음의 감정은 결코 유지될 수 없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던 처음이란 것도 사실 삶의 수많은 조각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다. 때로 그것은 미지에 대한 호기심과 더불어 효과가 과장되기도 한다.


 나는 길가메쉬 서사시의 내용이 궁금했다. 기록상으로는 인류 최초의 신화이자 문학이라고 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고대어를 해독하고 문헌과 자료를 낱낱이 뒤진 인류학자들의 노고에 감탄하며, 과연 처음 이야기가 무엇을 다루는지 참으로 기대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다지 많지 않은 텍스트를 모두 보고 난 뒤의 느낌은 "뭐야, 별 거 없네?"였다. 물론 기원전 4000년 전이라는 까마득한 시대에 이 정도의 상상력을 발휘한 고대인의 역량은 감탄할 만하지만, 시대를 아우르는 통찰력은 결코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 이 이야기가 나에게 얼마나 유효한가?"를 따져보면, 그렇게 긍정적인 답변을 하기 어렵다. 물론 이 질문이 고전 문학에게 향하는 주요한 공격임을 안다. 고전이 현대가 요구하는 문제에 답해줄 수 없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외면하기 마련이다. 내가 편견에 차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최초의 신화라는 이름만으로는 길가메쉬 서사의 가치가 다른 신화, 예컨대 중국 신화나 그리스 신화보다 높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양한 고전을 읽으며 느낀 것은, 그것은 각 시대에 있어서 가장 빼어난 작품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 시대에 동시에 여러 고전을 배치하면 상대적인 우월함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마치 지역 리그에서 우승한 스포츠팀이 국제 무대에서 힘을 못 쓰는 것과 비슷하다. 길가메쉬 서사시가 소위 말해 제일 '잘 나갔던' 시절은 오래 전에 끝났다. 가장 보편적인 주제인 죽음에 대한 투쟁과 굴복 역시 수많은 신화와 전설에서 다루어진 지 오래이다. 설령 최초의 문학이 이후의 모든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고 해도, 그 작품이 이후의 작품보다 결코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다. 여전히 19세기와 20세기에 탄생한 문학이 오늘날에 있어서 훨씬 중요하다는 내 의견은 변함이 없다.


 그렇다고 길가메쉬 서사시를 지나치게 무시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여러 수식어를 제거하고 하나의 이야기로 본다면, 충분히 탁월한 이야기이다. 길가메쉬가 자신의 조상인 우트나피쉬팀을 조우한 뒤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는 장면은 서사시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명장면이다. "사랑했던 저의 친구는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언젠가 저도 그처럼 되지 않겠습니까? 저도 누워, 다시는 결코 일어나지 못하지 않겠느냔 말입니다!"에서 느껴지는 죽음에 대한 공포, 나아가 자신의 존재가 영원히 소멸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페이지 너머로 느껴진다. 길가메쉬는 이 세상에 이루어놓은 것이 너무 많았기에, 오히려 그가 너무 뛰어났기에 두려움이 더욱 컸다. 그의 마음 속에 있는 삶에 대한 집착이 그를 파멸로 이끌었다.


 역자와 연구자들의 상세한 설명과 참고 자료가 작품의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들의 수고가 아니었다면, 이제는 평범하게 느껴지는 길가메쉬 서사시가 더욱 멋없게 느껴졌으리라. 고대인의 삶과 가치관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토록 오랜 세월이 지나고 문명이 발전했어도 묘한 공통점이 발견된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건 별 거 없다는 것, 대단한 모험이나 뛰어난 업적은 개개인의 삶에 그렇게 특출나지는 않다는 것이 그렇다. 일상의 튼튼함이 보장되어야 우리는 성장한다. 누구나 길가메쉬처럼 살 수는 없다. 인간은 세계의 주인이 아니며, 신의 뜻에 따라 창조된 피조물임을 기억해야 한다. 겸손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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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4-11-08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길가메쉬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근동 신화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홍수설화는 구약의 노아의 홍수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지요.
 
지구 끝의 온실
김초엽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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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초엽 작가에 대해서는 학술대회에서 처음 접했으나, 『지구 끝의 온실』은 SF를 사랑하는 한 명의 독자로서, 순진한 호기심으로 읽기로 다짐한 책이었다. 인류세 논의, 한국 SF의 전망 등의 거창한 이야기는 제쳐두고, 멸망에 맞서는 인간들의 사투를 그린다는 점에서 참 반가웠다. 많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나 디스토피아 문학에서 놓치는 것이 멸망의 과정인데, 『지구 끝의 온실』은 더스트 폭풍 이후로 찾아온 무수한 혼란과 그에 투쟁하는 인간들의 사투를 생생하게 기록해 놓았다. 그리고 문명 재건 이후의 시점에서 바라본 과거의 치열한 사투가 결코 현재와 무관하지 않기에 참으로 작가가 치밀하게 소설을 구상했구나 싶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지수와 레이첼의 불분명한 성이다. 이름상으로는 지수가 남자고 레이첼이 여자 같지만, 레이첼에 대해 '그'라고 표현하는 것도 그렇고 지수의 성이 어딘가 불분명하게 묘사되어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물론 내가 초반을 주의깊게 읽지 않았는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으나, 작가는 상당히 의도적으로 인물들의 성별을 감추어 놓는다. 아마도 남성, 여성이라는 구분을 하기에는 레이첼이 반은 인간이고 반은 기계이기 때문에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인간의 기준으로 모든 존재를 해석하는 대신, 인간 역시 하나의 종으로 분류하려는 그녀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작가의 말이 꽤 인상 깊었다. 오직 식물만이 내 소설을 구원해줄 생물이라는 것. 그녀 역시 자신이 만든 세계가 존재할 법함을 믿고 있었다. 인간의 기술력이나 서로에 대한 신뢰라는 얄팍한 가치로는 소설 속 세상을 구할 수 없었다. 오직 식물의 번식력, 자생력, 그리고 단결이 끝없이 증식하는 재앙을 막을 수 있었다. 모스바나는 처음에 인간에게 해로워 보였으나, 아니 어쩌면 인간에게 적대적일 수도 있지만, 그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지구상에 퍼져나가며 더스트를 흡수했고, 자신의 본분을 다한 뒤에는 저절로 사라졌다. 그 모스바나를 간직한 레이첼은 지수를 제외한 어떤 인간에게도 이해받지 못했지만, 지구 끝의 온실을 끝내 간직했고 그것을 불태움으로써 도리어 모스바나를 전 세계로 퍼뜨리는 데에 기여했다.

 

 뇌가 기계로 되어 있는 레이첼은 어떤 것도 의도하지 않았다. 사랑이라거나, 인류의 구원자가 되겠다는 바람은 프로그래밍 되어 있지 않았다. 단지 레이첼은 한 명의 개체로, 종의 일부로 살아가고 싶었다. 나오미와 아마라도 마찬가지였다. 온갖 위협들에 맞서 프림 빌리지에 도달했으나, 그곳에서의 희망과 인간성은 외부 세력에 의해 끊임없이 위협을 받았다. 지구의 주인이라고 착각했던 인간들은 그 지위를 빼앗겼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에 대한 지배욕을 멈추지 않는다. 돔 시티에 사는 사람들은 지구에 있는 모든 생물들 중 자신들만이 같은 종을 학대하고, 또 학살하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인간이 과연 무슨 자격으로 종들의 지배자를 자처한단 말인가? 더스트 시대가 남겨준 교훈은 이것이었다.


 아영이 살아가는 22세기는 안녕한가? 멸종의 위기를 넘긴 자들은 과거를 잊지 않기 위해 계속 노력한다. 기술에 의존하여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어리석은 시절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한다. 그러나 여전히 남아 있는 숙제가 있다. 잃어버린 종의 역사를 어떻게 복원할 수 있을까? 다시 인류가 번성했을 때, 어떻게 겸손함의 가치를 전할 수 있을까? 우리는 종의 일부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인류세 논의의 모순(인류가 모두 멸종한 다음의 시대를 논의하는 것이 인류에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이 다른 종들, 그러니까 동물, 곤충, 식물과 동등한 지위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실로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지만,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이고 구원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있을까?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그 방향이 늘 바람직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희망을 포기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왜 작가들은 절망으로 가득 찬 세상을 기어이 만들어내는가? 역설적이게도, 지금의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무지 사랑할 수 없는 세계 속에서 살면서도 마침내 그것을 이어가기로 다짐했기 때문이다. 문학이 왜 존재해야 하느냐고, 인류의 존망이 걸린 문제에서 소설가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작가들은 바보처럼 "읽어보라"고 대답한다. 그들은 말보다는 글이 편하니까.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 주기를 애타게 바라고 있으니까. 그래서 나도 바보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한결같이 권한다. 어떻게든, 문학을 읽어 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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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angelism and the Sovereignty of God (Paperback, New ed)
제임스 패커 / Inter-Varsity Press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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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추천으로 읽게 된 책. 전도의 근본적인 이유를 알려준다. 우리는 원래 스스로도 구원할 수 없는 존재였으나, 주의 주권으로 구원을 얻었으니, 전도 역시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님을 되새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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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지음, 황문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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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이라는 단어가 주는 미묘함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다른 기술이 필요하지 않다. 오로지 인간됨의 기술만이 필요하다. 인간이라면, 좋아한다는 말과 사랑한다는 말의 차이, 감정적 이끌림으로 이루어지는 사랑과 이성이 결합된 종합적 형태의 사랑, 연애와 결혼의 차이 등을 능숙히 이해한다. 사랑하는 법을 모른다면, 배워야 한다. 자신만이 이해하는 방식을 사랑이라고 주장하거나 그것을 상대에게 강요한다면, 단언컨대 그 사람은 먼저 인간이 될 필요가 있다. 준비되지 않은 채 사랑을 시작했다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물론 사랑의 어려운 점이라면, 그것을 실패한 경험이 거의 전 인류에게 동일하게 해당된다는 것이리라.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에는 소위 말하는 '원하는 상대를 내 것으로 만드는' 기술 따위는 없다. 애초에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니까. 나의 이상을 상대에 맞추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서로가 같은 방향을 걷게 만드는 것이 사랑이니까. 생텍쥐페리의 『인간의 대지』에 소개된 그 문장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하여 프롬이 주장하는 사랑이란 궁극적으로는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사랑하는 사람, 주변 사람, 그리고 세상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나에게 가장 찔림이 된 말은 사랑하는 상대'만' 사랑하는 것은 진짜 사랑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흔히 우리는 착각한다. 오직 한 사람만 사랑하는 이들을 보며 참 순애보 같고 순수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철없고 무모한 사랑의 방식이다. 진정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세계를 사랑한다. <인터스텔라>에서 만 박사가 지적한 대로, 인간은 자기 자신과 가족의 안위 외에는 철저하게 무관심하다. 어쩌면 작중 세계를 위태롭게 만든 것은 바로 그러한 태도가 아니었는지 돌이켜 본다.


 이 책은 수십 년 전에 쓰였지만, 물질만능주의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일침을 고하기도 한다. 현대에 사랑은 물질보다 분명 아래이다. 보이지 않는 가치가 감각으로 접해지는 가치에 잠식 당한 시대이다. 그러나 작가는 분명히 주장한다. 많이 갖고 있는 자가 부자가 아니라, 많이 주는 자가 부자라고. 상호호혜주의를 환상으로 치부하고 오로지 시스템으로 인간 세계를 구성하려는 수많은 노력이 있었으나, 그러한 세상은 오직 유리벽으로 이루어진 고층 건물 속에만 존재해야 한다. 감히 사랑의 원리를, 인간 본능에 각인된 호혜의 원리를 원시적이라고 폄하하는 이들은 스스로를 견고한 유리벽에 가두는 자들이다. 때로는 손해를 보더라도, 때로는 실패하더라도, 때로는 자신의 인생이 조금 힘들어지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남을 돕는 것을 우리는 두려워 한다. 자신을 위해서라면 1원도, 1초도 소중히 여기면서 타인을 위해 쓰는 돈과 시간은 1원도, 1초도 아까워 한다. 나는 인간과 기계의 결정적인 차이점이 서로를 사랑하는가의 여부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볼 때 세상에는 인간의 탈을 쓴 기계가 너무 많아 보인다.


 그리고 자신을 성숙하다고 여기는 무리에게 한 번 더 비판을 던진다. 어린아이의 사랑은 '나는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한다'라는 명제를 벗어날 수 없다. 진정 성숙한 사랑은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그대가 필요하다'라는, 먼저 사랑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에리히 프롬은 현대인이 자기 자신, 동료, 그리고 자연으로부터 소외되며, 수동적인 소비에 취해 있다고 지적한다. 여전히 우리는 사랑을 먼저 받기를 바란다. 그리고 한 번 그것을 받고 나면 거기에 안주해 버린다. 그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인식에 미치지 못한다. 그렇게 많은 지식을 접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받은 사랑을 다른 방식으로 돌려줘야 한다는 상상을 하지 못한다. 모든 인간다움이 고갈되어 간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인가? 진부하게 들리겠지만, 유일한 방법은 사랑이 회복되는 것이다. 단순한 감정적 이끌림도 아닌, 육체적 욕구의 해소도 아닌, 세계를 대하는 태도와 방향성의 변화가 그것이다. 아이는 자신의 주변 환경에 변화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이사를 했을 때, 또는 이민을 갔을 때 어른들보다 적응을 어려워하거나 도피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마찬가지로, 현대인은 어른의 몸을 하고 있지만, 삶의 방식이나 가치관을 변화 시키는 것을 극도로 꺼려 한다.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보는 세상이 너무나 편하기 때문에, 이대로 지내도 별 문제 없다는 환상이 너무나 달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삶의 방향성을 바꾸어야 할 때이다. 당신이 알고 있는 세상은 그리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제는 당신이 그 세계로부터 받은 사랑을 돌려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 방법은 어렵지 않다. 양보하는 것을, 약간의 손해를, 잠깐의 시간 낭비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잃었다. 사랑의 실패보다 더 두려운 것이 어디 있을까? 나의 일부를 내어주고 사랑을 얻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물질적 가치로 환산되지 않는 가치 있는 교환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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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원 석사까지 지내면서 참 고마운 분들을 많이 만났다. 빼놓을 수 없는 두 분이 바로 이 두 책과 관련된 분들인데, 나의 대학 생활 및 대학원 생활에 큰 힘이 되어 주셨다. 


 Bell in Campo & The Sociable Companions은 대학생 시절 알게 된 교수님이 빌려주신 책인데, 여성들이 전쟁에 주도하여 참여한다는 설정이 흥미로웠다. 실제 역사에 상상을 더한 팩션(faction)이 이때부터 시도되었다니, 그 상상의 폭이 넓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에 이어지는 The Sociable Companions은 일종의 결혼극 또는 희극이었다. 빌린 책이라 메모나 필기를 할 수는 없었으나 곳곳에 인상적인 구절들이 있어서 읽는 내내 즐거웠던 기억이 있다.


 권석우 교수님의 『선악과와 처녀 잉태: 유대-기독교 문명』은 교수님의 연구 결과를 집대성하는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인데, '집대성'이라는 말이 걸맞게 방대한 지식과 인용 문헌이 사용되었다. 처음에는 꼬리 먹는 뱀을 의미하는 우로보로스의 상징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접하게 되었는데, 유대-기독교 문명뿐만 아니라 고대 문명이나 동양 문명까지 아우르는 사유의 폭넓음에 감탄했다. 연구자가 어떤 주제에 대해 심도 있게 탐구하면 이러한 성과를 낼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한편 지식을 전파하는 데에만 치중하지 않고 일반 독자가 읽을 수 있게 최대한 쉽게 풀어쓰신 노력이 보였다. 뱀, 처녀, 선악과 등 우리의 통념 속에 고정되어 있던 상징들을 해체한 뒤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기존에 그 개념에 접근하던 방식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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