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전한 기독교 (개정무선판) 정본 C. S. 루이스 클래식 2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장경철.이종태 옮김 / 홍성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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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은 확실히 위험한 일이다. 사람은 종종 스스로를 잘 안다고 확신하지만, 자신의 신념만큼 흔들리기 쉬운 것도 없다. 믿음의 영역은 의심을 뛰어넘어야 하고, 그 중간에 걸쳐 있는 사람들은 아주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것을 신앙에 적용해 보면 이런 것이다. 전적으로 믿기로 다짐했다면, 흔들릴 일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아예 믿지 않기로 결심했다면, 그것 나름대로 마음이 편할 것이다. 하지만 주변 환경이나 순간의 생각으로 믿음이 흔들리는 사람은 매순간을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그 사람은 "내가 가는 길이 맞을까?"라는, 다른 누구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그에 대해 자신 있게 옳고 그름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를 보며 유독 많이 든 생각은 기독교인이 끝나지 않는 회의와의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목회자들이 영적 '전쟁'이라고 종종 표현하는 까닭이 이 때문인가? 아마 그들도 끊임없는 의심을 겪었을 것이다. 설령 신이 존재한다는 것이 개인적인 차원을 뛰어넘어 우주적인 초점에서 증명되었다 하더라도, 전능한 창조주가 나를 택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다. 인간은 빠른 속도로 믿음의 궤도를 벗어나려고 애쓴다.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컨테이어 벨트를 거슬러 가려는 것처럼, 애초에 방향성이 다르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과 신을 믿는 것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작용과 반작용처럼, 믿음과 의심은 한 몸처럼 따라간다. 가끔은 믿음의 내용이 삶으로 나타날 때, 회의감은 극대화된다. 내가 믿음이라고 부르고, 신앙을 실천하는 일이 사실은 자기 만족이며,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정당화하지는 않을까? 라는 생각 말이다.


 C.S. 루이스가 이 책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 중 하나는 "세상과 타협하는 신앙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세상에는 신이 있다는 증거만큼이나 신이 없다는 주장과 근거도 방대하다. 저자는 그러한 정보들 중 자신의 취향이나 이해에 신을 끼워맞추지 말라고 선언한다. 애초에 완전한 이해에 도달할 수 없는 존재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려는 시도 자체가 무익하다. 특히, 창조적 진화론이 그렇다. 저자가 말했듯, "이 이론이 하나님을 믿는 데 따르는 감정적 위안은 듬뿍 제공하면서, 믿음에 따라오는 덜 유쾌한 결과물들은 면제해 주기 때문"이다. 창조적 진화론을 비롯하여, '비기독교적인' 세상과 '기독교적(이라고 자칭하는)인' 나 사이의 불편한 지점을 없애려는 모든 시도는 "종교의 감동은 모두 누리면서 그 대가는 하나도 치르지 않겠다"는 위선적인 태도이다. 요컨대, 기독교인으로서 사는 것이 일종의 싸움이라면, 취할 수 있는 입장은 두 가지밖에 없다. 믿거나, 믿지 않거나. 중간 지대에 있기에 인간은 너무 나약하다. 벨트는 불신을 향해 항상 움직이기 때문에, 바람이 불거나 넘어지면 금세 처음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저자가 경고하는 또 하나의 죄악은 "나는 잘하고 있다"는 교만이다. 즉, 교회에서 헌신하고 타인에게 모범을 보이는 사람도 스스로에 취해 넘어질 수 있다. 루이스는 그런 사람이 불신자보다 더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그리고 자신이 교만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라고 촉구한다. 왜냐하면 내가 교만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큰 교만은 없기 때문이다. 자만심이나 교만을 정의하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기독교적으로 해석하면 '나를 세상의 중심에 두는 일'이고, 모든 죄의 시작은 바로 '자기중심성'에 있다. 기독교가 세상과 분명한 거리를 두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대부분의 종교는 믿는 자 본인의 마음과 행동이 중요하다고 설파한다. 무수한 매체들이 자신을 사랑하라고 말한다. 마땅히 맞는 말이다. 하지만 누구도 적절한 정도를 가르치지 못한다. 길을 잃은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이기적으로 변한다. 자신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타인을 품는 법을 잊어버린다. 


 믿음이 끝나지 않는 싸움인 이유는, 자신과 세상과의 관계는 항상 변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확신을 가지고 있어도, 내면으로 신을 받아들인다 해도, 믿지 않는 사람의 견고함 또는 믿는다고 말하는 자들의 교만 앞에서 무너진다. 그들에게서 도무지 사랑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길을 걷는 자들은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 처음에는 받아들이기가 참 어렵다. 그동안 나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너무 편했고, 이것이 맞는 방향이라고 굳게 믿었으니까. 그래서 실수하기도 하고, 내가 위선자인 것은 아닌가, 하는 회의에 젖는다. 그러다 발견하게 된다. 세상 어딘가에서 조용히 제 몫을 다하고 있는 동료들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들은 영원한 침묵을 지킨다. 말은 자신을 드러낼 뿐이니까. 대신 누군가는 삶으로 믿음을 증명한다. 그 존재만으로 나는 힘을 얻는다. 


 C. S. 루이스를 만난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다. 어린 시절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를 모두 읽으며, 흥미롭고 감동적인 모험의 이야기에 빠져들어간 기억이 생생하다. 라디오 방송에서 했던 직설보다는 그러한 우화들이 나를 더 매료시키기는 하지만, 다양한 종파를 아울러 지향하는 공통의 가치를 탐구하려는 그의 노력은 기억할 만하다. 그의 작품들을 보며 나의 부족함을 확인한다. 조만간 작가의 다른 책도 살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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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다 2023-03-13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글 너무 잘쓰심..

소보루 2024-10-11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분이세요? 문장하나하나가 곱씹게 됩니다.
 
좁은 문 / 전원교향곡 / 배덕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36
앙드레 지드 지음, 동성식 옮김 / 민음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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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과 추악함은 눈을 감고 뜨고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현실은 아름답다고 믿고 싶지만, 눈을 뜨는 순간 그 추악함에 경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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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텍쥐페리의 인간된 면모를 엿볼 수 있는 글들이다. 답장을 확인할 수 없기에 그의 편지들이 독백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그 안에서 보이는 애절함과 부족함이 작가를 이해하는 데에 한결 도움을 준다. 한편, 알베르 카뮈와 마찬가지로 생텍쥐페리의 글에는 생동감이 있다. 마음을 움직이는 무엇인가가 녹아 있다. 비평을 하기보다는 감상하려는 목적으로, 여기에 그가 쓴 글의 일부를 남긴다.

"글을 쓰기 전에 우선 살아야한다"라고 앙트완느는 대답했다. 다른 그의 말에 대해서도 상당한 반향이 일기 시작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야!" - P22

리네트, 항공 비행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당신 알고 있소? 이 곳에서 비행이란 그리 쉬운 것이 아니오. 내가 비행을 좋아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오. 여기서의 비행은 부르제 공항에서 하던 것과 같은 스포츠가 아니고,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며, 일종의 전쟁이오. - P73

밤새도록 나는 불안한 상태였소. 그리고 나는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에 애착을 느끼고 있소. 누가 자고 있는가. 내 침대에 누워 내가 밤새우고 있을 때면 환자를 지키는 간호원보다 나는 더 불안하다오. 여러날 밤을 새울 때 나는 나의 보물들을 잘 지키지 못하지요. - P97

리네트, 아가씨들은 그를 잘 보살펴 주지 않았어요. 그 아가씨들은 행실이 바르지 못하여 아름다운 모든 추억을 간직하지 못하게 했어요. 그렇지만 바로 그곳으로 그는 아가씨를 찾으러 갔다오. 이렇게 한다는 것은 각자 충실한 노력이지요.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바친 사람에게는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기 때문이지요. - P98

그렇지만 연극이란, 그것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연극은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가 아니라, 사람의 의식 속에서만 자주 상연되기 때문이다. 행복한 도시인 페르피냥에서도 병원 창문 위에서 어떤 암종 환자가 자기 고통을 피하기 위해 마치 냉혹한 소리개처럼 공연히 몸을 뒤척이고 있다. 그 도시의 평화는 그 때문에 바뀐다.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고 보편적인 중요성도 띄지 않는 고통도 아니고 정열도 아닌 것이 바로 인류의 기적이다. - P119

밤을 새운 암환자가 바로 인간의 두려움의 중심 인물이다. 어쩌면 광부 한 사람이 수천의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과 비길 만하다. 나는 인간이 문제가 될 때 이 무서운 숫자를 사용할 줄 모른다. 누군가가 내게 이렇게 말한다면, "단지 인구 문제에서 볼 때 수십 명의 희생자는 무슨 뜻이 있습니까? 타버린 몇 채의 신전은 계속 생활하고 있는 한 도시의 입장에서 보면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르셀로나에서는 어디에 공포가 있습니까?" 나는 이런 관점을 거부한다. 아무도 인간의 제국을 측량하지 못한다.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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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에덴 2 - 추앙으로 시작된 사랑의 붕괴
잭 런던 지음, 오수연 옮김 / 녹색광선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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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달러를 벌기 위해서는 몇 단어를 써야 하는가?" 이것이 잭 런던(Jack London, 1876~1916)의 삶을 관통하는 질문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글을 쓰는 노동자로 일컬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런던은 끊임없이 글을 써야 했고 그 결과가 200여편의 소설들과 500여편의 기사들, 그리고 수백 통에 달하는 편지들이었다. 창작의 결과로 돈과 명예를 원없이 쌓았지만, 말년에는 약물 중독과 지병으로 고통받다가 사망한, 삶의 모든 구간에 모순과 아이러니가 존재하는 잭 런던의 삶은 그가 쓴 『마틴 에덴』(Martin Eden, 1909) 속 주인공과 매우 유사하다. 


 잭 런던은 먼지가 아닌 재가 되길 원했다. 그리고 말마따나 이루어졌다. 40년의 생애 안에서 그는 많은 것을 이루었다. 굴을 약탈하는 해적이었다가 그 해적을 잡는 순찰대원이 되었고, 사회주의자로 오랜 기간 활동했으나 백만장자였고, 남태평양 제도를 일주하고 한국에서 종군기자로 활동했으나 백인우월주의를 놓지 않았다. 그밖에도 금을 캐기 위해 알래스카로 여정을 떠났다가 실패한 일, 시장 선거에서 낙마한 일,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부랑자 감옥에 수감된 일 등이 있었지만, 생애 전반을 보았을 때는 그리 대단한 사건이 아니었다. 제3자의 시선에서 잭 런던을 판단할 때, 무엇이 그에게 가장 중요했는지 쉽게 파악하기 어렵다. 


 『마틴 에덴』은 잭 런던의 삶에서 어떤 요소가 의미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되어 준다. "어떻게 해서 그는 글을 쓰는 노동자가 되었는가?" 그리고 "왜 아직도 스스로를 노동자라고 지칭하는가?"라는 두 가지 물음을 해소해 준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은 '탐구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루스를 만나기 전, 마틴 에덴의 삶은 단순하고 육체적인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는 교육받지 못했기에 구사하는 언어부터 풍습까지 소위 천박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루스를 동경하기 시작하면서 그녀가 속한 세계가 곧 자신이 지향해야 하는 곳이라고 인식했다. 학교를 다니기에는 너무 늦었기 때문에 마틴 에덴은 책을 마구 해치우는 것으로 지식의 갈망을 해소했다. 하지만 마틴은 읽으면 읽을수록 자신의 무지만 확인할 뿐이었고 책에서 배우는 내용이 실제의 삶과 괴리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루스의 일가와 그들이 속한 계층의 사람들과 만날 때 그는 언제나 실망했다. 마틴 에덴이 지향하는 가치는 궁극적인 진리를 얻고자 하는 끝없는 갈망이었으나 다른 이들의 마음은 시간을 적당히 때우는 소재의 별볼일없는 이야기들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가 루스, 그리고 그들이 속한 세계로부터 분리되었음을 선언하는 것은 여기에 있다. 어느새 마틴의 정신을 잠식한, 지식에 대한 강박관념과 잠재적인 특권의식이 그를 외롭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틴 에덴은 스스로를 노동자의 세계에 있다고 간주했다. 어느새 그가 쓴 글은 전 세계적으로 베스트셀러가 되어 부와 명예를 순식간에 거머쥐었지만, 그는 상류층이나 지식인들과의 모임을 경멸했다. 그가 굶주리기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썼을 때 거절당했던 글들이, 명예 때문에 갑자기 엄청난 판권을 받는 글로 바뀌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이 세상에는 지식만으로, 의지만으로 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루스와의 사랑이 그랬고, 작가로서의 성공이 그랬다. 마틴은 루스와 결혼하기 위해 그녀와 동등한 위치에 서고 싶었지만, 그 자리에 서기 위해 마틴은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고 결국 남들보다 높은 곳에 섰을 때, 그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소설의 결말부에 깊은 물로 스스로 뛰어드는 것은 원래 그가 속했던 세상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헛된 발버둥에 가까웠다. 죽음의 찰나에 그는 어떤 빛과 희망을 발견하는 듯 했으나, 실상은 어둠뿐이었다. 잭 런던의 삶이 그랬듯, 마틴 에덴의 삶은 모순투성이였다. 작가는 스스로를 노동자라고 표현했지만, 그는 어떤 세계에도 속하지 못한 이방인으로 남았다. 실제로 그렇지 않은가? 활동할 당시에는 비평가들로부터, 동료 작가들로부터 배척당했고 시간이 지났을 때, 어떤 대중도 그를 기억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왜 21세기의 독자들이 『마틴 에덴』을, 그리고 잭 런던을 다시 읽어야 할까? 작가가 했던 말을 조금 바꿔서, '흙이 아닌 물거품으로 살아가기'의 정신을 기억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우리가 그들(잭 런던과 마틴 에덴)처럼 매 순간에 전력을 다해 살아갈 수는 없다. 또한, 그들이 지녔던 편협한 사고방식까지 계승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분명히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짓밟았고 작가가 품었던 사고방식이 언제나 옳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활자를 비집고 올라오는 뜨거운 열정과 사랑을 향한 의지를 본다. 강력한 정신은 시대와 공간, 그리고 언어를 초월하는 법이다. 세상이 다르게 보이는 순간의 희열과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기대, 그리고 타인에게 이 마음을 전달하고자 하는 애틋함은 직접 겪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다. 때로 그에게 글쓰기는 돈을 벌기 위한 노동으로서 인식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렸을 적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않고 읽었던 책들이 그의 세계를 형성했듯이, 마지막에는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글쓰기를 통해 성취하고자 했을 것이다. 아니면 적어도, 언제 재가 될지 모르는 위태로운 삶 속에서 기억하고 싶은 스스로의 조각을 적어놓기를 원했으리라. 그는 스스로 흔적이 남지 않은 물거품이 되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읽혀짐으로써 기억되기를 바랐을 테다. 그렇다, 당신의 의지는 어쨌든 전송되었다. 어떻게 끝날지는 몰라도 나 역시 마음 닿는 데까지 가보겠다. 당신이 굳게 믿었던 사랑의 힘을 기억하며. 


 "언제부터 나를 사랑했나요?" 그녀는 속삭였다.

 "처음부터, 당신을 처음부터 본 바로 그 순간부터, 그때 나는 당신에 대한 사랑으로 미쳐 버렸고, 그 이후로 점점 더 미쳐갔어요. 지금 나는 최고로 미쳐서, 거의 정신 이상이에요. 너무 좋아서 머리가 돌아버렸어요." (p.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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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
헤르만 헤세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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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싱어송라이터 박소은의 <너는 나의 문학>이라는 노래가 있다. "너는 나의 문학 작품이야"라는 고백을 다양한 책을 통해 전하는 가사가 인상적인데, 그 중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와 『데미안』이 언급된다. 헤르만 헤세에 대해서는 잘 몰라도, (막스) 데미안은 익숙한 독자들이 더럿 있을 것이다. 그 명성과 영향력이 지대했기에 어린 시절 『수레바퀴 아래서』의 내용에 충격을 받았던 내가 『데미안』을 이제야 읽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작가의 자전적 체험이 다분히 담긴 이 소설은 나에게 그렇게 흥미롭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너무 커버린 탓이겠지. 기존의 세상에 대한 인식을 깨라, 특히 이분법적인 가치관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말라는 막스 데미안의 외침은 오래 전부터 내면화되었던 주제였기에 '늦은 혼잣말'이 되었다. 그래도 박소은의 노랫말이 얼마나 낭만적이었는지 다시금 깨달았다. "너는 나의 데미안"이라는 말은 "너는 또 다른 나야"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헤르만 헤세는 왜 그토록 정해진 틀과 자신을 가둔 세계를 깨고자 했을까? 때로는 그 보호되고 정제된 세상이 자신을 지켜주기도 하는데 말이다. '새'라는 상징성이 큰 까닭은 거기에 있다. 아기새는 어미새의 둥지 아래서 먹이를 먹으며 살아갈 수 있지만, 때가 되면 스스로 나는 법을 익혀야 한다. 단순히 주변의 환경을 깨는 것에 그친다면, 성장과 반항은 무의미하다. 그 모든 몸짓들이 도약으로 이어졌을 때, 새가 느낀 고통은 커다란 희열로 변한다. 이러한 보편적인 원리로 이유를 설명하는 일이 때로는 더 나을 수도 있다. 어린 시절의 억압을 거스르는 태도, 제1차 세계대전이 주는 상실감 등은 깨달음에 이르는 여정의 일부였다. 그러한 경험들이 많은 것을 대변해줄 수는 있어도 전부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헤르만 헤세의 발칙한 사유들, 예를 들어 아브락사스나 카인의 표식 등에 대한 기나긴 설명들은 한국의 독자들에게 와 닿지 않을 수도 있다. 한국은 유럽처럼 카톨릭(내지는 개신교)이 일상생활에 배어 있지도 않기에 야곱의 씨름이나 십자가에 매달린 두 강도들이 표제로 나올 때 의아함을 느끼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오히려 1장부터 프란츠 크로머로부터 구제해주는 '사이다'를 선사하는 데미안의 모습이 더 각인되었으리라. 하지만 나를 둘러싼 모든 인물들은 양면적이다. 구세주처럼 보이는 존재가 악마가 되고, 영원한 사랑처럼 여겨진 존재가 사실은 과장되었음을 깨닫기도 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이 싱클레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주변에서 알을 깨라고 다그쳐도, 선택은 그대의 몫이니까. 

그는 그저 한 여인을 얻는 대신 온 세계를 가슴에 품게 되었다. 하늘의 모든 별이 그의 내면에서 빛났으며, 그의 마음에 기쁨의 빛을 반짝이게 했다. 그는 사랑했고,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까지 찾은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개 사랑하면서 자기 자신을 잃는다.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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