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삼성 - 이건희, 그리고 죽은 정의의 사회와 작별하기
김상봉 외 지음 / 꾸리에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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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진실을 알고 있는 자들에게만 전하는 메시지이다. 이미 우리 사회는 삼성에게 지배당한지 오래다. 한 기업이 한 나라를 이렇게 '식민지' 삼는 것은 역사상 유례 없는 일이다. 이 기업의 회장은 대통령에 버금가는 권력과 부, 그리고 명성(어떤 방향으로의 명성인가?)을 가지고 있다. 그는 자신의 기업에 반란을 일으키는 세력의 등장을 아예 막는다. 사실 이것은 모든 독재자들의 공통적인 특징 아니겠는가? 독재자가 시민군에게 무기를 쥐어주는 경우는 없으니까. 이제 늙어버린 ㅎㅈ(회장, 아니 황제)은 자신의 권력을 자식에게 세습하여 통치를 이어가려고 한다.

 

 우리는 누구인가? 이 거대한 기업의 노예들이다. 어린 시절부터 철저하게 교육을 받아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 결국 우리나라 최고의 일류 기업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제국의 수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최종 목표다. 이 삼성 제국에 들어가기 위해 5살부터 20살까지 15년 동안 우리의 유년, 청소년 시절을 소비하게 한다. 그러나 이 제국에 들어가는 이들은 한정되어 있고, 사회는 이들을 성공한 사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패배자로 간주한다. 그리고 모든 문화는 이 제국에 의해 통제된다. 그러니까 국민은 두 강력한 세력에게 지배당하고 있는 셈이다. 하나는 우리가 '표'로 만든 정치적 세력, 다른 하나는 '돈'이 만들어 낸 경제의 세력.

 

 물론 봉기의 세력은 있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소수로 행동했고, 대기업의 거대한 음모 앞에 진압되고 말았다. 반란자들은 여러 수단을 동원하여 끊임없이 대항하고 있지만, 삼성 제국은 언론, 방송 등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막지 못한 것은 우리의 영원한 유산, '책'이었다. 삼성 제국의 황제가 책을 읽는다면, 아마 『삼성을 생각한다』라는 책을 읽었을 것이다. 아마 그는 이 정신적 반란을 보고 깜짝 놀라 진압을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물리적 저항이 금세 우리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면, 정신적 반항은 끊임없이 세력 중에 회자된다. 결국 2차 반항이 시작된다. 『굿바이 삼성』이다. 이 책을 통해 삼성 제국을 무너뜨리려는 시도가 등장한다.

 

 책을 통한 혁명이다. 혁명의 깃발을 이끄는 사람들은 김상봉, 김용철, 김재홍, 김진호, 류동민, 성현석, 우석훈, 이계삼, 이득재, 이택광, 조국, 최성각, 하승우, 홍윤기, 황광우다. 성격도, 하는 일도 모두 제각기인 이 사람들은 '삼성'이라는 하나의 독재 세력에 저항하기 위하여 한데 뭉쳐, 각자만의 방식으로 삼성에 저항하는 방식을 알려주었다. 이들의 말하기는 매우 호소적이다. 제발 깨어나라고, 제발 혁명하자고 외친다. 하지만 나도 인정하기 싫은 사실은, 대부분의 국민들이 이미 삼성이 만들어 낸 물질과 문화의 노예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삼성이 만든 갤럭시, 전자 제품에 빠져 살며 우리나라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죽은 정의의 사회'를 만들어버렸다. 이건희가 있는 한, 자유도 평등도 없다. 영원한 차별과 억압만 있을 뿐이다.

 

 사실 나는 두렵다. 이건희 황제는 가히 '빅 브라더'를 연상시키니까. 조지 오웰의 미래소설 『1984』에서 절대적인 존재, 신과 같은 존재로 여겨지는 바로 그 인물 말이다. 안타깝게도 그의 미래소설은 현재가 되었고, 빅 브라더는 실존하는 강력한 세력이다. 이제 이 독재를 끊을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 자유가 찾아올까? 마음놓고 삼성을 하나의 '기업'으로 바라볼 수 있는 그 날까지, 혁명은 계속되어야 하리라. 삼성이 제국이 아니라 기업이 되는 것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 기업은, 적어도 국민을 노예로 보지 않는다. 지금의 삼성은 너무나 변질되었다. 돈이 많다고 자신이 하나의 나라인 듯 착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세상이 '돈'으로만 된다는 생각은 이제 버려야 할 때다. 세상은 돈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혁명을 시작한다. 굿바이, 삼성. 이것으로 시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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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고 생소한 표현까지 완벽하게 잡아주는 개정 N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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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픽처`, `템테이션`의 작가 더글라스 케네디를 추천합니다. 그는 쉬운 문장과 위트 있는 표현으로 인생을 이야기하는 작가입니다. 그의 놀라운 호소력은 작품을 읽는 데 집중시킬 뿐만 아니라 더글라스 케네디라는 작가를 다른 이들과 다르게 볼 수 있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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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대혁명 1
막스 갈로 지음, 박상준 옮김 / 민음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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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프랑스 혁명에 대한 역사를 기록하고, 소설로 각색했다. 이 책의 독특한 특징은 무엇일까? 소개에 따르면, 막스 갈로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쓴 프랑스 혁명 소설이라면 믿을 수 있겠지. 곧 만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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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하우스
캐슬린 그리섬 지음, 이순영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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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세기 말, 버지니아의 한 담배농장에 한 여자 아이가 발을 들인다. 그녀의 이름은 라비니아, 아일랜드 출신의 고아 소녀다. 그녀가 살게 된 이 농장은 두 개의 세상이 존재한다. 하나는 '빅 하우스'로, 농장주인과 백인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다른 하나는 '키친 하우스'로, 흑인 노예들이 생활을 영위하는 공간이다. '화이트 하우스'를 연상시키는 빅 하우스는 좋은 시설과 대우가 존재하지만 흑인들은 살 수 없는 백인들만의 공간이다. 반면, '키친 하우스'는 좋지 않는 시설과 혹독한 환경의 공간이다. 그렇다면, 소설의 제목인 『키친 하우스』는 지옥을 말하는 것일까?

 

 캐슬린 그리섬의 첫 번째 소설인 『키친 하우스』는 인간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다. 배경은 노예 제도로 갈등을 빚고 있는 미국 사회지만, 이 소설의 주제는 노예 제도와 불합리함에 대한 투쟁이 아니다. 이 책은 그 불합리함조차 극복할 수 있는 놀라운 사랑을 말하고 있다. 이 소설은 두 명의 화자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한 사람은 주인공 라비니아이며, 다른 한 사람은 농장주의 숨겨진 딸인 흑인 소녀 벨이다. 50장이 넘는 이 소설은 라비니아의 시선을 위주로 전개되어 있지만,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벨의 시선은 사건을 새롭게 보게 하거나 새로운 장면으로의 전환을 유발한다.

 

 방금 전에 빅 하우스는 좋은 시설과 훌륭한 환경이 제공되는 공간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소설 속에서 빅 하우스는 이상적인 공간으로 제시될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모든 좋지 않는 비극의 전조가 빅 하우스 안에서 일어난다. 사람들은 빅 하우스에서 죽고, 싸우고, 강간하고, 병든다. 백인 라비니아도 예외는 아니다. 어린 시절 그녀는 여러 흑인들에게 사랑과 애정을 받아왔지만 안주인이 되어 빅 하우스에 '갇힌' 이후로 마음의 병을 얻었다. 라비니아를 어린 시절부터 쭉 지켜봐 온 독자들은 그녀의 병에 충격을 받으리라. 어쩌다가 이 순결하고 착한 소녀가 아편에 의지한 채 하루하루를 연명하게 되었는가? 그녀를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 있을까?
 

 해독제는 키친 하우스에 있었다. 그곳엔 사랑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녀와 함께 해 온 친구들, 힘들 때 위로해 주었던 어른들, 그녀의 마음을 이해해주었던 벨과 벤이 있었다. 부모님을 잃고 사랑을 받지 못한 라비니아로서는 자신을 '아비니아'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아버지, 어머니 역할을 해 주었던 마마와 파파, 오빠와 누나 역할을 해 준 벤과 벨, 사랑스러운 동생이 되었던 수키와 엘리를 그 누구보다도 잃기 싫었으리라. 그 사랑은 이 소설을 일반적인 노예 소설과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게 한다. 이 흑인 노예들은 라비니아의 도움으로 도망칠 수 있었지만, '키친 하우스'를 떠나기 싫었던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 즉 비극이 절정에 달했을 때, 그 때에 이르러서야 그들은 이 농장을 탈출한다.

 

 『키친 하우스』의 서문은 이 작품의 절정이기도 하다. '흑인 여자'가 누구인지 찾기 위해 이 소설을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소설이 범죄 소설이나 추리 소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자를 범인 찾듯이 추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반전과 충격은 이 소설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리라. 이 슬픈 20년의 역사는 라비니아와 벨이 서로 각자의 삶을 걸어간다는 내용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사실 진짜 역사는 그 때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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