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키친하우스
캐슬린 그리섬 지음, 이순영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6월
평점 :
절판
18세기 말, 버지니아의 한 담배농장에 한 여자 아이가 발을 들인다. 그녀의 이름은 라비니아, 아일랜드 출신의 고아 소녀다. 그녀가 살게 된 이 농장은 두 개의 세상이 존재한다. 하나는 '빅 하우스'로, 농장주인과 백인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다른 하나는 '키친 하우스'로, 흑인 노예들이 생활을 영위하는 공간이다. '화이트 하우스'를 연상시키는 빅 하우스는 좋은 시설과 대우가 존재하지만 흑인들은 살 수 없는 백인들만의 공간이다. 반면, '키친 하우스'는 좋지 않는 시설과 혹독한 환경의 공간이다. 그렇다면, 소설의 제목인 『키친 하우스』는 지옥을 말하는 것일까?
캐슬린 그리섬의 첫 번째 소설인 『키친 하우스』는 인간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다. 배경은 노예 제도로 갈등을 빚고 있는 미국 사회지만, 이 소설의 주제는 노예 제도와 불합리함에 대한 투쟁이 아니다. 이 책은 그 불합리함조차 극복할 수 있는 놀라운 사랑을 말하고 있다. 이 소설은 두 명의 화자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한 사람은 주인공 라비니아이며, 다른 한 사람은 농장주의 숨겨진 딸인 흑인 소녀 벨이다. 50장이 넘는 이 소설은 라비니아의 시선을 위주로 전개되어 있지만,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벨의 시선은 사건을 새롭게 보게 하거나 새로운 장면으로의 전환을 유발한다.
방금 전에 빅 하우스는 좋은 시설과 훌륭한 환경이 제공되는 공간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소설 속에서 빅 하우스는 이상적인 공간으로 제시될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모든 좋지 않는 비극의 전조가 빅 하우스 안에서 일어난다. 사람들은 빅 하우스에서 죽고, 싸우고, 강간하고, 병든다. 백인 라비니아도 예외는 아니다. 어린 시절 그녀는 여러 흑인들에게 사랑과 애정을 받아왔지만 안주인이 되어 빅 하우스에 '갇힌' 이후로 마음의 병을 얻었다. 라비니아를 어린 시절부터 쭉 지켜봐 온 독자들은 그녀의 병에 충격을 받으리라. 어쩌다가 이 순결하고 착한 소녀가 아편에 의지한 채 하루하루를 연명하게 되었는가? 그녀를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 있을까?
해독제는 키친 하우스에 있었다. 그곳엔 사랑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녀와 함께 해 온 친구들, 힘들 때 위로해 주었던 어른들, 그녀의 마음을 이해해주었던 벨과 벤이 있었다. 부모님을 잃고 사랑을 받지 못한 라비니아로서는 자신을 '아비니아'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아버지, 어머니 역할을 해 주었던 마마와 파파, 오빠와 누나 역할을 해 준 벤과 벨, 사랑스러운 동생이 되었던 수키와 엘리를 그 누구보다도 잃기 싫었으리라. 그 사랑은 이 소설을 일반적인 노예 소설과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게 한다. 이 흑인 노예들은 라비니아의 도움으로 도망칠 수 있었지만, '키친 하우스'를 떠나기 싫었던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 즉 비극이 절정에 달했을 때, 그 때에 이르러서야 그들은 이 농장을 탈출한다.
『키친 하우스』의 서문은 이 작품의 절정이기도 하다. '흑인 여자'가 누구인지 찾기 위해 이 소설을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소설이 범죄 소설이나 추리 소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자를 범인 찾듯이 추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반전과 충격은 이 소설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리라. 이 슬픈 20년의 역사는 라비니아와 벨이 서로 각자의 삶을 걸어간다는 내용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사실 진짜 역사는 그 때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