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송필환 옮김 / 해냄 / 2008년 2월
평점 :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의 작가인 주제 사라마구는 내 문학 인생의 출발점이 된 작가였다. 4년 전 문학과 소설에 별로 흥미가 없었던 나는 우연찮게 서점에서 『눈먼 자들의 도시』라는 소설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때 나는 단지 그 책이 재미있어 보여서 산 것일 뿐이었다. 그런데 재미를 위해 산 책이 이렇게 내 인생을 바꿔놓을 줄이야. 『눈먼 자들의 도시』가 준 충격은 나에게 엄청났다. 지금 나는 눈을 뜨고 있는가,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것들은 진짜인가? 그리고 이 책은 언제 내가 눈이 멀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주었다. 그 소설이 준 여파는 들불처럼 번져나가(방향을 가리지 않고), 내 삶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불길이 거의 잦아들었을 때, 나는 다시 주제 사라마구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계기는 주제 사라마구의 죽음이었다.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사건이었다. 나는 그가 우리 곁에 남아, 언젠가 다시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 경고를 줄 것이라고 믿었다. 이제 그 희망을 바랄 수 없게 되었으니, 남은 작품으로부터 위안을 얻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해서 선택한 소설이 바로 '도시 3부작'의 나머지 작품, 『눈뜬 자들의 도시』와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였다. 그 중에서 나는 후자를 먼저 읽었다.
뒤늦게 생각하면, 『눈먼 자들의 도시』와 『눈뜬 자들의 도시』는 4년의 시간을 두고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는 이 두 작품과는 조금 별개된 소재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나는 전자를 먼저 읽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하지만 사라마구의 '마술적 리얼리즘'의 근본은 바로 이 '이름 없음'이 아닌가? 나를 매혹시킨 것도 누군지 알 수 없고, 작가에 의해 고의적으로 정체성이 상실된 인물들이 아니었던가?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는 작가가 고의적으로 없애버린 인물들의 이름을 스스로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주인공 주제 씨는 평범한 등기 사무소에서 일하고 있는 사무원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의문의 여자의 삶을 추적하고자 하는 강렬한 욕구를 얻게 되고, 그리하여 이름도 알지 못하는 한 여자를 찾아 방황한다. 과연 그는 그녀를 찾을 수 있었을까?
이름이 없다는 것은 유명하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원래 주제 씨는 유명인 다섯 명을 조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주제 씨는 자신이 특별해지길 바랬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방인이니까. 그의 도시는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반면, 주제 씨는 '주제'라는 이름이 있다. 따라서 그는 이 도시에 살고 있으면서 속하지 않는 자가 되버리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이 소설의 저자인 '주제' 사라마구의 현실과 유사하다. 그 역시 포르투갈에서 쫓겨나 이방인 취급을 받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주제 씨가 한 여자를 그토록 찾아다니는 행위는 자신의 소속감을 드러내기 위한 발악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비록 허무로 돌아간다 해도.
답을 내자면, 주제 씨는 여자를 아직도 찾지 못했다. 여자는 자살했다. 우리는 왜 그녀가 죽었는지 알지 못하고, 그녀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다만 상상력 있는 독자는 『눈뜬 자들의 도시』 마지막 부분을 떠올리며 그 여자가 누구인지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여자 역시 이름이 없는 존재이다. 주제 씨는 이름 없는 자를 찾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수많은 없어져가는 이름들을 뒤진다.
때로는 이런 상상을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다. 만약에 모든 사람들의 이름이 없어지고, 오직 한 사람만 이름이 존재한다면? 마치 이것은 모든 이들이 눈을 멀고, 단 한 사람만 눈을 뜨고 있는 상황과 유사할 것이다. 서로를 구분할 수 없게 되고, 이름 있는 그 한 사람만이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주제 사라마구는 끊임없이 경고한다. 그 '힘'이 '권력'이 되어 다른 이름 없는, 눈먼 자들을 억누르지 말라고. 그는 그 권력자 역시 도시에 속해 있다고 말한다. 의사의 아내도, 주제 씨도, 모두 '눈뜬' 자들이 아닌가? 작가는 '도시' 3부작을 통해 한 도시를 꿈꾸었다고 할 수 있다. 모두가 눈을 뜨고 평등하게 살아가는 세상이라는 도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