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비문학의 차례다. 그들은 어떤 식으로 우리를 끌어당길까?


지나간 과거는 언젠가의 현재이고,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때에 일어난 대표적인 사건을 알아야 하며, 그 사건은 보는 이들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해석된다. 자유의 투쟁으로 얻어 낸 미국의 독립에서, 노예를 해방시키 위한 남북전쟁을 거쳐, '정의'를 내세우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미국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새디어스 러셀은 '불한당(bad civilians)'들의 시각으로 그것을 해석한다. 여기서 불량한 시민들이란 술꾼, 게으름뱅이, 창녀, 해적들이며, 그들이 만들어 낸 역사와 문화를 작가는 재조명한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자유의 가치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입체적으로 볼 수 있게 한다.
소로우는 강을 사랑했고, 자연을 사랑했다. 콩고드 강과 메리맥 강을 여행하며 겪는 소로우 형제의 이야기는 『월든』처럼 흥미롭다. 그러나 이 초기작에는 그것뿐만이 아니라, 「다이얼」 지에 올렸던 에세이들과 자신이 쓴 시가 실려 있다. 저자의 첫 번째 책이며, 동시에 그의 사상을 확립시켜 주는 중요한 책이기에 잊을 수 없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재해석했다. 항상 사람들은 플라톤을 따라, 소크라테스의 억울한 입장에서, 다시 말해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비판하는 입장에서 그의 변론과 죽음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아테네의 변명을 들어주지 않았다. 하지만 역사학자 베터니 휴즈는 직접 역사 유적을 찾아다니고 관련 저작을 10년 동안 조사하면서 "왜 아테네는 소크라테스를 법정에 서게 했고,또 그를 죽음에 몰아넣어야 했는가?"라는 궁금증을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역사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당시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져 있었고 내부 혼란 등이 일어나 어지러웠다. 소크라테스는 이 분노의 화풀이 대상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변명이 부족하다. 그것을 합리적으로 못 밝혀낸다면, 아테네는 영원히 현자를 죽인 살인범으로 몰릴 테니까.
나는 왜 평전에 열광하는가? 그 자의 삶과 사상을 통해 본받을 점을 얻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자유로운 영혼'인 예술가, 에드워드 호퍼의 평전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다양한 분야의 미술을 시도하고, 앤디 워홀이 이끌었던 팝 아트의 물결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만의 사실주의를 고집했던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과 『신국론』을 쓴 위대한 철학자이자 신학자. 그의 타락과 회개의 삶은 『고백록』에서 이미 목격한 바 있다. 이번에는 피터 브라운이 쓰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삶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의 삶만이 아니라 몰락하는 로마 제국이라는 시대의 아들로서의 그의 모습이 드러난다. 로마에 막 전파된 기독교를 로마인들에게 알린 전도사 역할을 한 성인, 아우구스티누스의 삶을 되돌아보자.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다. '문예부흥'이라는 뜻의 르네상스는 항상 1000년 동안 지속된 중세의 암흑을 벗겨내고, 새로운 계몽과 이성의 시대를 열었다고 찬사받는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는 법, 르네상스의 대개혁 뒤에는 많은 어둠이 감추어져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진실을 위해 반드시 그것을 들추어 내야 한다.
단 한 순간을 포착하여, 역사를 그려내는 일은 『왕의 하루』도 마찬가지다. 하루가 있기 전, 하루가 지난 뒤의 사건 역시 흥미롭다. 특히, 오랜 제국이 멸망하는 바로 그 날은 매우 중요하다. 역사가 바뀌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술탄과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투쟁과 고뇌를 통해 서사시를 보는 듯한 역사의 현장에 동참할 수 있으리라.
서양 철학자 중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들 중 한 명이 바로 헤겔이다. 그래서 헤겔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들이 수없이 나왔다. 헤겔이 왜 중요한가? 그것은 근대로 역사가 바뀌는 과정을 철학적으로 증명해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 '맹목'과 '정치철학'이 추가되어, 그의 사상을 좀 더 풍부하게 볼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저작으로는 『신학대전』만 있는 줄 알았는데, 『진리론』도 있다니. 한 번 읽어봐야겠다(이렇게 말하지만 『신학대전』도 안 읽었다. 책세상 고전문고는 가볍게 읽을 수 있는 편이니까 이거 먼저 봐야겠다).
'피노키오의 철학'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은 역시 피노키오의 딜레마이다. 『피노키오』가 세상에 알려진 이후, 끊임없이 회자되던 그 질문, "피노키오는 사람인가, 인형인가?"의 문제가 여기 다루어지고 있다.
'삼국지'가 중국의 고대 역사를 드라마틱하게 그리고 있다면, 『중국지』는 중국 현대사를 웅장하고 장대하게 서술하고 있는 대작이다. 얼마나 자신이 있었으면 『중국지』라고 이름을 붙였겠는가? 신해혁명 이후의 역사는 나도 안 배워서 모르지만, 여기에 그 모든 진실이 담겨 있을 것이다.
작년인가, 『분노하라』는 팜플렛으로 국내에 잠깐 '분노' 열풍을 분고 온 스테판 에셀 할아버지가 안 죽고 또 책을 썼다. 이번엔 분노에 그치지 말고 참여하라는 내용이다. 사실 그게 그거다. 작년의 팜플렛을 읽은 사람은 『분노하라』의 주제가 앙가주망(참여)이니까. 그래도 설마 똑같은 책을 다시 냈겠어?
지금 이 세상은 플라스틱이 없으면 도저히 돌아갈 수 없다. 컴퓨터에서 시작해서 컵까지....... 그런데 이 플라스틱에 어떤 성분이 들어있는지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그것이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정확히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여행....... 그것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 책. 이것은 사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결국 문학과 비문학의 대결은 무승부인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