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주제가, 허용하는 만큼의 정확성에 도달한다면 충분히 논의된 셈일 것이다. 기술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들의 경우에도 똑같은 정확성이 추구되지는 않는 것처럼, 정확성은 모든 논의들에서 똑같이 추구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p.15)."
모든 논의마다 정확성은 다르게 요구되는 법이다. 마치 기술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의 정확성이 모두 다르듯이, '행복'에 관한 이 논의는 "허용하는 만큼의" 논의만 가능하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행복에 대한 논의가 얼마만큼 허용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 정치학이 고찰하는 고귀한 것들과 정의로운 것들은 많은 차이와 가변성을 가지고 있어서, 오직 관습적으로만 그러할 뿐 본성적으로 그런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일 정도이다(p.15)."
이 주장은 '주관적 상대주의'를 주장하는 프로타고라스의 견해와 어느 정도 상통한다. '관습'이라는 것이 인간적인 것에 의해 주도되는 것이며, '본성'이 그 자체에 의해 주도되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그것은 옳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그런 것'들에 대해 논의하고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그런 전제'들로부터 출발하는 것이기에,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그런 것'들을 추론하는 데 만족해야 할 것이다(p.16)."
결국 우리는 주제의 본성이 허용하는 만큼의 정확성을 추구해야 한다. 좋음들도 지나치면 많은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기 때문이다.
정치학은 직접 행하지 않으면 모르는 '행동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경험이 없는 젊은이는 정치학을 알 수 없다. 이 말을 뒤집어서 말한다면, 정치가야말로 정치학에 있어서 가장 능통한 인물이다. 정치학의 목적은 앎이 아니라 행위이다. 게다가 젊은이는 자신의 감정에 따르기 쉬워서 알려는 마음조차 없다. 그리하여 정치학은 이성적인 행위를 할 수 있는 정치가야말로 가장 잘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정치학』에서 더 깊이 있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