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 성년의 나날들, 박완서 타계 10주기 헌정 개정판 소설로 그린 자화상 (개정판) 2
박완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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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맞았어. 네가 본 산은 처량하게, 나목으로 남아 있었지. 일제강점기와 해방을 거치며 꽃이 꺾였고 나무들이 베였어. 전쟁 중에는 군인들의 피와 포탄 자국을 품었고 격전지가 바뀌면서 나무 뿌리까지 캐먹으려는 굶주린 이들이 찾아왔지. 그때마다 그 산은 자기 자신을 스스럼없이 내어주었어. 비가 오면 쌓인 흙이 점점 벗겨지고 누구도 돌보지 않아 계절의 변화에 야위어 갔대. 하지만 그 산은 단지 그곳에 우뚝 서 있었어. 여전히 생명을 품은 채 말이야.

 

 젊은 남자들이 전장에서 싸우고 있을 때, 남아 있는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또 다른 방식의 전쟁을 치러야 했어. 어린 나이의 너는 그 모든 현장에 목격자가 아닌 생존자로서 참여했지. 오빠는 다리에 총을 맞고 돌아와 존경했던 모습을 상실했고 너는 올케와 함께 가족을 부양하는 처지에 놓였어. 북한군이 점령한 버려진 서울의 광경은 실로 암울했어. 너와 올케는 담을 넘어 빈 집에서 양식과 팔 것을 훔쳤고 공산당의 앞잡이에게 굽신거리며 버텼지. 네가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어. 이것이냐 혹은 저것이냐로 생사가 갈리는 순간이었으니까. 살아남기 위해서는 싸구려 예술에 기꺼이 박수를 치고 불편한 사람들과 살을 맞대며 사는 것쯤이야 감당할 수 있었지.


 오빠가 죽고 나서 너희 가족이 겪었던 아픔을 기억해. 오빠가 무덤 틈으로 다시 기어나오는 악몽은 올케와 엄마의 갈등으로 현실이 되었어. 문득 내가 올케였다면 어떤 심정이었을까 생각하곤 해. 사랑하는 이가 죽어가는 동안 그를 보살폈지만, 그이는 속절없이 세상을 등졌어. 생계를 위해 올케는 양놈들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준 뒤, 그 역겨움을 이기지 못해 입을 게워내야 했지. 하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너의 눈에는 동정심이 없었어. 올케 역시 험난한 세상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또 하나의 인물이라는 그 평정심이 오히려 나에게 위로가 되었어. 그래서 올케와 엄마가 그 문제로 싸운 뒤, 홀로 걸으며 네가 품었던 생각이 더욱 와 닿는다.

 

 어쩌다 우리가 이 지경까지 이르고 말았을까? 엄마는 건강하여 손자들을 잘 돌보고, 올케는 사나흘에 한 번씩 주머니마다 돈을 하나 가득 벌어 오고, 아이들은 살지고 기름이 흐르고, 나는 한 달에 사십만 원이나 되는 수입이 보장돼 있고, 집 안에는 구메구메 양키 물건이고, 오빠가 살아 있어도, 전쟁이 안 났어도 이보다 잘 살기를 바라기는 어려울 터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은 점점 추비하고 남루해지는 걸까. 도둑질해서 먹고 살 떄도 이렇지는 않았다. 온 식구가 양키한테 붙어먹고 사는 거야말로 남루와 비참의 극한이구나 싶었다. (p.279~280)


 그때 나는 네가 본 산이 무엇인지 알았어. 네가 왜 과거를 돌아보는 기록들 사이에서 선명하게 기억날 이름을 담지 않았는지도. 일제강점기, 해방, 6˙25 전쟁을 거치며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남았고, 몸과 영혼의 안식처를 찾아 헤맸어. 하지만 자신들을 보호할 줄 알았던 산은 나목 투성이였고, 이미 줄 것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지. 도시는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미군에게 빌어먹으며 불법을 일삼는 사람들과 그들에게 다시 빌어먹는 양아치들과 부랑자들로 가득 차 있었어. 그속에서도 악착같이 희망을 보려 하는 너의 집요하게 객관적인 시선이 기억 난다. 백목련, 교하, 박수근, 지섭, 그이까지,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병든 사람들 틈에서 너는 그 시들지 않는 향기를 담아냈어.


 왜 너의 고백은 이토록 생생할까? 누구에게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강렬한 기억들이 있지. 변한 시대의 일상을 살아가다가도 문득, 사라진 사람들의 감각이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이를 테면, 숙모가 쑨 시뻘겋고 걸쭉한 팥죽을 아귀아귀 먹기 위해 달라붙은 식구들의 체취나 출근할 때마다 살색 스펀지를 달고 캐넌 중사에게 연애편지를 보내는 티나 김의 목소리, 그런 것들. 세상을 잘 몰랐던 시절에 체험했던 과격한 기억들이 그동안 얼마나 깊이 너의 영혼에 새겨져 있었을까? 나는 글의 힘을 믿는다. 어떤 글을 통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치유되는 존재는 바로 작가 자신이야. 이제 네가 본 산의 모습을 모두 담아내어 너를 괴롭혔던 기억들을 털어놓으렴. 세상의 파도에 마모되고 싶지 않았던, 최소한의 자기 자신을 지키고 싶었던 너를 위해서. 


 -비로소 산을 찾은, 누구보다 험난했지만 아름다웠던 20대를 보낸 이를 기억하며.

이렇게 그이는 멋이라고는 없는 남자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지섭이와 그이를 비교하다가 뭣 하러 비교를 하는지 자신을 의심스러워하곤 했다. 아무리 비교해 봤댔자, 그이가 지섭이보다 나은 점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았다. 나은 점이라기보다는 명확하게 다른 점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그이하고 있을 때는 내가 말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전혀 부담이 안 된다는 거였다. - P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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