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센스라는 말이 역설적으로 '비정상적'이게 구현되는 때가 있다. 그것은 이것이 넌센스라고 지시되면서 동시에 물어지는 질문인데, 가령 역사적인 -위대한- 유물을 만든 사람이 누구? 라는 것이다. 여기에 넌센스적인 답은 상식에 기대어 답해지고, 그것은 '인부'라는, 전혀 감흥조차도 되질 않는 뻔한 답으로 결론지어진다.

 

 그러면 이 인부라는 상식성은 어떻게 '넌센스'로 물어지는 것인가? 무거움과 가벼움. 무엇이 긍정적이고 부정적인가? 그들은 역사적인가? 가벼운가? 무거운가? 그의 『농담』 역시 역사를 거부하는 태도로부터 역사에 '휘말려 버리는' 비역사적인 역사적 운명(?)이라는 서사? 일화?를 보여준 바 있다. (그러니까 그 농담을 농담으로 치부하지 않고 차라리 적극적으로 수용했더라면 『농담』이 아니었단 말이다.) 이런 제스쳐는 『참을 수 없는...』 역시 반복된다. 아니, 일관된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es muss sein. 이 엄숙하고 경건해지는 압도되는 문자그대로의 명령. 모든 역사의 일관성 속에 있는 핵. 그러나 그 부동의 엄숙함에 자리한 희극을 비춘다. (그러니까 베토벤은 꿔간 돈에서 비극적인 서정을 찾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땅한 표현을 찾던 내게 '수다맨' 님의 "냉소주의와 허무주의"라는 표현은 딱 적격이란 마음이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그럼에도" 그 냉소와 허무의 공간(어김없이 역사적으로 찬란할 순간 모두가 '꾸르륵거림'으로 엇갈린 채 시작되는 두 작품 모두의 그러함들) 속에서도 찾아지는 존재의 '속닥임'들 때문에 미워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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