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쓰리 세컨즈 1 - 생과 사를 결정짓는 마지막 3초 ㅣ 그렌스 형사 시리즈
안데슈 루슬룬드.버리에 헬스트럼 지음, 이승재 옮김 / 검은숲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요즈음 나에게 있어 서구 스릴러 소설 선택은 아무래도 비영어권(非英語圈)으로 넘어간 듯 하다. 내 독서 목록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일본 추리소설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제프리 디버”, “마이클 코넬리”, “할런 코벤”, “퍼트리샤 콘웰” 등 영미권 인기 스릴러 작가들의 작품들 한 두 권씩은 꼭 챙겨 봤었는데, 요즈음에는 그들 작품보다도 “스티그 라그손”의 <밀레니엄 시리즈(스웨덴)>, “넬레 노이하우스”의 <백설 공주에게 죽음을(독일)>, “요 네스뵈”의 <스노우맨(노르웨이)> 등 비영어권 중북부 유럽 스릴러 소설들이 눈에 더 띄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비영어권, 특히 지난 몇 년 사이 해외에서 '스칸디나비아 느와르'라고 불리며 선풍을 일으키는 북유럽 스릴러 소설들이 국내에서는 큰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데, 그 이유가 분위기가 어둡고 플롯이 복잡하기 때문이며, 모 출판사 관계자는 “사건 자체가 흉악한 데다 등장인물의 과거 상처나 기억과 얽혀들고 사회성이 짙다”며 “쉽게 읽히는 영미권 작가들에게 익숙한 국내 독자들이 어렵고 따분하게 느낀다”고 말한다(“북유럽 스릴러 소설 왜 국내에선 안 뜰까”. 경향신문. 2012.3.4.). 그런데 관계자의 말 중 흉악하고 사회성 짙은 사건,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인명과 지명, 사회·문화적 정서 때문에 “어렵다”는 말까지는 인정하겠는데, “따분하다”는 말 만큼은 도저히 동의할 수 없다. 위에서 언급한 세 권 모두 손에 땀을 쥐고 가슴 떨리게 만드는 최고의 스릴과 재미 때문에 따분함을 느낄 겨를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런 스릴과 재미를 맛볼 수 있는 작품들이 저 세 작품 외에는 없지 않냐고 되물으실 분들도 있을 텐데, 그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선뜻 내놓을 만한 멋진 북유럽 스릴러 소설을 최근에 만났다. 이미 작년(2011년)에 <비스트(검은숲/2011년 8월)>로 국내에서 첫 인사를 했던 “안데슈 루슬룬드”와 “버리에 헬스트럼” 공저의 최근 출간작 <쓰리 세컨즈(원제 Tre Sekunder/검은숲/2012년 3월)>가 바로 그 책이다.
스웨덴 스톡홀름 시(市) 베스트만나가탄 대로 79번가에 자리한 근사한 아파트 5층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사입구(射入口)는 하나인데 사출구(射出口)는 두 개인 이상한 총상을 머리에 입고 죽은 남자의 신원은 엉뚱하게도 이웃 덴마크 경찰에 의해 밝혀지게 된다. 바로 덴마크 경찰이 마약 조직에 심어 놓은 끄나풀이었던 것이다. 이 살인 사건을 전화로 경찰에 제보한 익명의 남자는 살인 사건 현장에 있었던 “피에트 호프만”이었다. 그는 겉으로는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을 갖고 있는 행복한 집안의 가장이자 다국적 보안 회사 임원이지만, 속으로는 폴란드 마피아의 조직원으로 마약 밀거래를 전담하는 흉악한 범죄자였다. 그런데 그에게는 또 하나의 신분이 있었으니 살해당한 남자처럼 스웨덴 경찰 비밀정보원인 암호명 “파울라”라는 신분이다. 9년 째 해온 이 비밀스러운 임무를 드디어 끝내게 될 위험천만한 임무가 그에게 주어진다. 바로 스웨덴 교도소 마약 시장을 장악하려는 조직이 그를 적임자로 선정했기 때문이다. 스웨덴 경찰청 비선(秘線) 라인에 마피아 음모를 알리고는 법무부 장관에게서 사후 자신의 신분과 안전을 보장받은 호프만은 계획대로 마약 은닉죄로 긴급 체포되어 교도소에 수감되고, 교도소 내 잠입해 있던 조직원들과 함께 기존 마약 조직을 제거하고 은밀히 반입해 온 마약을 공급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되던 이 일이 급반전을 맞게 된다. 바로 비선 라인의 경찰 고위 관료들이 79번가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수사하던 “에베트 그랜스” 경정이 호프만을 유력한 용의자로 수사선상에 올리자 그만 자신들의 계획이 탄로날까봐 호프만을 지워버리기로 한 것이다. 호프만이 경찰 끄나풀(“스투카치”)인 줄 알게 된 교도소 내 조직원들은 그를 죽이려 달려들고, 독방(獨房)을 자청하여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 호프만은 경찰 비선 라인에 연락을 취해보지만 그들은 호프만의 구명(求命) 요청을 거부하고 오히려 그를 일반 감방으로 내려 보내는, 즉 그를 죽이려는 수감자들에게 던져 놓으려고 한다. 호프만은 결국 그가 미리 준비해 놓은 최후의 계획을 시행한다. 제목이기도 한 너무나도 짧은 시간인 “3초”에 자신의 운명을 맡긴다.
(이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1,2 권 800 여 페이지에 이르는 만만치 않은 분량의 이 책, 1 권 중반까지는 좀 지루하다는 느낌이 들었었다. 특히 책 첫 부문 마약을 집어넣은 콘돔을 삼켜서 운반하는 “인간 컨테이너”들이 구토로 뱉어내는 장면에 대한 세세한 묘사는 욕지기까지 느껴져 금세 읽을 수 없게 만든다. 또한 그 현장에서 총에 맞아 죽은 경찰 정보 요원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노경찰인 “에베트 그랜스” 경정은 이 책이 “그랜스 형사 시리즈” - 첫 편이 앞에서 언급한 <비스트>이고 이 책은 다섯 번째라고 한다 - 가 맞나 싶을 정도로 그 존재감이 미미 - 어느 여가수와 특별한 사연이 있는 듯 한데 어떤 사연이었는지 이렇다 할 자세한 설명은 없다 - 하게 느껴지고, 호프만이 교도소로 잠입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준비하는 장면들, 즉 도서관에서 두꺼운 책을 빌려 그 안에 마약과 작은 권총을 분해해서 담고, 교도소장에게 보내는 튜울립 화분에 마약을 숨겨 담으며, 교도소 인근 교회 종탑에 도청기를 장치하는 장면들의 의도가 명확하지 않아 어리둥절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드디어 호프만이 교도소에 입감(入監)되면서부터 이야기는 흐름이 급격하게 빨라진다. 순조로울 줄 알았던 호프만의 계획이 믿었던 경찰 고위층의 배신으로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그 어느 곳보다도 폐쇄된 공간인 교도소에서 그를 노리는 살인자들의 숨결이 내 뒷목에도 느껴질 정도로 생생하고 치밀하게 묘사되어 있어 페이지를 넘길 수 록 호흡이 가빠지고 절로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이야기는 호프만이 교도관과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조직원을 인질로 잡고 경찰과 대치극을 벌이는 장면에서 최고조에 이르고 비로소 그 의도를 모르겠던 호프만의 사전 준비에 대한 모든 의문이 풀리면서 긴장감과 스릴 또한 최고조에 이르게 된다. 결국 자신의 가족을 위해 죽음을 택하게 되는 호프만의 선택에 일견 가슴 아프다가도 나라도 그럴 수 밖에 없는 선택이었을 거라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여기서 “3초”의 의미가 나온다. 호프만이 인질극을 벌이는 교도소와 저격수가 유일하게 총을 겨눌 수 있는 장소인 높은 위치인 교회 종탑까지의 거리는 1.5km, 종탑에서 발사한 총알이 호프만의 머리에 와 닿는 시간이 바로 “3초”였던 것이다. 결국 호프만의 죽음으로 긴장감이 일거에 해소하게 되는데, 이런 후일담을 다루기에는 2권의 남은 분량이 많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이 아닌 것이다!
이때부터 1권에서 존재감이 미미했던, 호프만 인질 사건을 진두지휘하고 저격 명령을 내렸던 그랜스 경정에게 호프만이 자신의 비밀이 담긴 자료를 보내오면서 그의 활약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다시 조마조마해지기 시작한다. 경정이 해결하기에는 법무부장관까지 연루된 이 사건의 크기와 무게가 너무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보통은 권력에 의해 무산되고 영원한 비밀로 묻혀 버리는 결론이 났을 텐데 이 책은 통쾌함이 다 느껴질 정도로 철저하게 까발려지고 호프만을 죽음에 몰아넣은 경찰 비선 조직은 법의 심판대에 오른다. 특히 호프만이 투옥되었던 교도소에 고위 경찰을 위한 특별 감호소를 만들겠다는 대목에서는 웃음이 절로 날 정도로 가슴 시원한 장면이었다. 이렇게 두 번의 큰 흐름이 지나가고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분량에 세 번째 반전이 등장한다. 그렇다고 머리를 멍하게 만드는 그런 충격은 아니고 기분 좋은 웃음을 짓게 하는, 제목인 “3초”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 결말로 이야기는 막을 내리고, 3번에 걸쳐 롤러코스트를 탄 것 같은 긴장감과 스릴에 여운이 쉽게 가시지 않아 책을 덮지 못하고 몇 번을 더 펼쳐 보다가 결국 진한 아쉬움과 함께 마지막 책장을 덮고야 말았다. 이 책, 이처럼 최고의 스릴과 재미를 맛볼 수 있었던 멋진 책이었다.
이처럼 스릴 만점의 이야기에 작가는 어디까지나 허구이고 사실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리얼리티를 극대화하고 있다. 작가는 마지막에 “작가의 말”을 통해서 이 작품에서의 허구와 사실을 설명하고 있는데, 사건 자체가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고, 경찰이 비밀 정보원을 운영하는 점이나 교도소가 마약 소굴이라는 점, 책 속에서 호프만이 마약을 교도소에 밀반입하는 방법 - 작가들이 실제 실험을 해서 증명했다고 한다 - 들은 “사실”이고 등장인물들과 교도소는 “허구”라고 밝히고 있다. 어쩌면 이 책에서 가장 큰 허구는 앞서 말한대로 경찰 비밀 정보원을 이끌었던 비선 조직, 즉 법무부 장관과 치안총감, 총경 등 고위 권력층들이 법의 심판대에 오르는 대목일 것이다. 그렇다면 철저하게 리얼리티를 추구했던 작가들이 왜 이런 비현실적인 결말을 써낸 것일까? 그건 북유럽 스릴러의 특징이라는 “사회성”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서 경찰이 범죄자를 비밀 정보원으로 활용하는 것이, 그리고 더 중대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그들이 저지르는 범죄는 묵인하고 덮어주는 것이, 또한 그런 비밀 정보원 활용을 은폐하기 위해 그들의 목숨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라는 그 해답이 결코 쉽지 않은 물음을 우리들에게 던진다. 작가는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서 스스로 이렇게 답을 내린다.
범죄자가 경찰수사를 돕는다니, 이런 빌어먹을 시스템이 또 어디 있습니까, 형사님. 정작 그 인간들이 벌인 범죄는 위장되고 묻혀버린다는 게 말이 되냐고요. 또 다른 범죄수사를 위해 경찰이 거짓말을 하고, 정작 수사를 담당하는 경찰에게는 진실을 숨기고 있다니, 이런 젠장, 이게 민주사회에서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형사님?
여기에 그렇게 이용해 먹은 비밀 정보원들을 헌신짝처럼 버려 버리는, 작가 말대로 민주사회에서 가당치도 않은 일들이 현실에서 버젓이 일어나고 있고, 그런 일들의 전말이 권력에 의해 감춰져 버리고 또는 왜곡되고 있기에 작가는 비록 허구로나마 그들의 단죄(斷罪)하고 싶었는 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이 책, 현실 세계의 사회 문제와 모순을 추리소설 형식으로 풀어낸 일본의 “사회파” 추리소설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일본 사회파 추리소설 대표 작가인 “마쓰모토 세이초”와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들이 우리나라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을 보면 이 작품도 충분히 어필할 만한 그런 작품이라고 하겠다.
스릴 넘치고 통쾌한 이야기와 반전, 극한의 리얼리티, 묵직한 주제 의식 등 스릴러 소설의 장점을 유감없이 보여준 이 책, 어느 독자의 평처럼 “걸작(Masterpiece)"이라는 표현이 딱 제격인 최고의 스릴러 소설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그래서 이 작품 못지 않는 재미와 감동을 선사한다는 작가의 전작인 갖고 있지만 아직 읽어보지 못한 <비스트>를 내처 읽을 셈이다. 어느 글에서 서구 스릴러 소설 평가를 앞에서 언급한 <밀레니엄>과 <스노우맨>으로 기준 삼겠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제 이 책을 세 번째 기준으로 추가해야 할 것 같다. 그렇다면 세 책 중 어느 책이 가장 재미있냐고 물어오는 분들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참을 고민해도 선뜻 답하기 어려운 참 난감한 질문이다^^ 그냥 세 책 모두 읽어 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어느 책을 읽어도 절대 후회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