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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우맨 ㅣ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7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2년 2월
평점 :
“한 겨울의 밀짚모자 꼬마 눈사람~♬”
눈이 펄펄 내리는 어느 겨울 , 10살이 채 안된 소년이 동요를 부르며 눈덩이를 굴리고 있다. 옆에는 이미 큰 눈덩이가 있는 걸 보니 지금 만드는 것은 눈사람의 머리 부분이 될 것 같다. 어느새 완성한 눈덩이를 큰 눈덩이 위에 올려놓기 위해 낑낑거리며 들고 있다. 도와주고 싶어도 지금 보고 있는 상황이 현실이 아닌 내 “꿈” 속임을 알기에 그냥 지켜본다. 두 세 번 떨어뜨렸다가 겨우 올려놓은 머리 부분에 숯덩이로 쳐진 팔자 모양의 눈썹과 입을 붙이고, 눈과 코 부분에는 까만 색 돌을 박아 넣고, 아래쪽 몸통 손이 있어야 할 부분에는 어디서 꺾어 왔는지 가느다란 나뭇가지 두 개를 찔러 넣는다. 드디어 완성된 눈사람, 아이는 자신의 작품이 영 대견한지 깔깔거리고 웃고는 자신의 목에 두른 빨간색 목도리를 풀어 눈사람에 둘러주기까지 한다. 눈사람과 나란히 서서 까치발을 뜨고는 머리에 손을 얹어 눈사람과 키를 비교해보는 소년의 모습에 꿈 속임에도 절로 웃음이 나오고 흐뭇해짐을 느낀다. 그런데.......갑자기 TV 화면이 정지되듯 모든 영상이 멈춰버리고, 온통 하얗던 풍경이 잿빛 회색으로 변해버린다. 마치 오래된 흑백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잠시동안의 정지가 풀렸지만 실제보다 10배는 느리게 흘러가는 영상, 어느새 눈사람 옆에 나란히 서 있는 소년의 입에서 아까의 동요가 흘러나온다. 그런데 노랫소리가 아까 소년의 맑고 깨끗한 목소리가 아니라 카세트 테이프가 늘어질 때 흘러나오는 것처럼 굵은 남자의 목소리로 느리게 흘러나오는 게 아닌가. 순간 소름이 돋는다. 소년 옆의 눈사람도 처음 보았던 것과는 다르게 변했다. 아래로 처진 팔자 눈썹은 치켜 뜬 것처럼 역팔자(逆八字) 형태로 바뀌었고, 까만색 돌을 박아 넣은 눈이 선홍빛 빨간색으로 바뀌어 있지 않은가. 그 눈 또한 나의 존재를 알고 있기라도 한 듯 나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다. 굵고 느린 노래 소리가 끝나고, 순간 정적에 휩싸이고 소년 한 명과 눈사람 하나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뒤를 쳐다보지만 이곳은 내 꿈속 상황이니 나 혼자 뿐이다. 입을 다물고 있는 소년의 입이 천천히 열리며 예의 굵고 느린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은 이제 곧 죽을 거에요”
그 낮고 굵은 목소리에 비명과 함께 꿈에서 깨어났다. 옆에 아내가 내 비명 소리에 놀랐는지 같이 일어난다. 나쁜 꿈을 꾸었다고 아내를 안심시켜 다시 재우고는 침대에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거실 테이블에 놓여 있는 책 한 권이 눈에 띈다. 잠들기 전까지 읽었던 책이다. 내일 아침에 마저 읽자 마음먹었지만 책 결말이 궁금해 조금만 더 읽고 자자 한 것이 새벽녘이 다 되서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나서야 잠자리에 들었고 불과 3시간이 채 되지 않은 짧은 잠마저 망쳐버리고 만 것이다. 책 때문에 꿈자리가 사나워지는 경험, 참 오랜만인 것 같다. 밤잠을 설치게 만들고 악몽까지 꾸게 한 책, 북유럽 스릴러의 자존심이자 현재 유럽에서 가장 인기 있고 잘 나가는 스릴러 작가라는 “요 네스뵈(Jo Nesbø)”의 <스노우맨(The Snowman/비채/2012년 2월)>였다.
책에서 악몽을 꾸게 한 장면은 초반 부분에 나온다. 먼저 책의 첫 장면은 1980년 11월 5일, 눈 내리던 날부터 시작한다. 금방 올게라는 말과 함께 어린 아들을 차에 남겨 두고 낯선 집에 들어가서 40분이 넘어서야 차로 돌아온 엄마에게 아들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눈사람을 봤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마치 다른 사람은 절대 들으면 안된다는 듯이 메마른 목소리로 이렇게 속삭인다.
“우린 이제 죽을 거라고요”
그리고 또 한 장면. 2004년 11월, 24 년 전 그날처럼 함박눈이 내리던 그날 저녁, 퇴근한 엄마가 정원에 있는 커다란 눈사람을 이야기하자 아이는 자신이 만들지 않았다며 밖을 내다본다. 엄마의 말대로 눈과 입은 조약돌로, 코는 당근으로 만들었고 꺾은 나뭇가지로 만든 듯한, 앙상한 팔 하나만 있는 커다란 눈사람이 서있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이상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눈사람이란 원래 길가 쪽, 그러니까 열린 공간을 바라보며 서 있는 법인데 집 안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듯 집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상하게 여긴 아이는
“근데 왜 눈사람이 길을 보고 있지 않아요?”
라고 말하지만 아무도 아이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그날 밤 엄마가 사라진다. 이 두 장면 때문에 그런 악몽을 꾼 것이다. 이제 책 줄거리를 간단하게 요약해보자.
부녀자들의 실종 사건을 맡은 오슬로 경찰청 강력반의 반장 “해리 홀레”는 FBI에서 연쇄살인범 체포 훈련을 받았고, 호주에서 연쇄살인범을 체포한 경력이 있는 노르웨이 유일의 형사이다. 그는 이 실종 사건이 단순 실종 사건이 아닌 뭔가 공포스러운 일들 - 아직 노르웨이에서는 한번도 발생하지 않은 연쇄살인사건 - 이 일어나고 있다는 조짐을 감지한다. 이런 조짐에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 그에게 온 편지에 적혀 있는 수수께끼 같은 문구 때문이었다.
곧 첫 눈이 내리고 그가 다시 나타나리라. 눈사람. 그리고 눈사람이 사라질 때 그는 누군가를 데려갈 것이다. 당신이 생각해봐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누가 눈사람을 만들었을까? 누가 눈사람들을 만들지? 누가 무리(Murri; 해리가 여러 해전 사살한 연쇄살인범의 별명이라고 한다)를 낳았지? 눈사람은 모르기 때문이다
눈 내리는 날 부녀자들 실종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고, 두 번째로 실종되었던 여인은 잘린 얼굴이 눈사람의 머리 부분에 놓여 있는 끔찍한 모습으로 발견되고 만다. 수사가 진행되면서 “스노우맨” - 해리는 이 사건의 범인을 편지 속에 나오는 “스노우맨(눈사람)”이라고 부른다 - 으로 의심되는 여러 용의자들이 등장하지만 해리의 추리로 그들은 범인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고 스노우맨의 정체는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그때 해리의 머릿 속에 번뜩이는 무엇인가가 떠오른다. 스노우맨의 엽기적인 살인 행각은 바로 해리 자신에 대한 도전이며 그와 가까이 있는, 또한 그를 잘 알고 있는 “누구”라는 것을 말이다. 해리는 범인이 벌일 마지막 살육의 현장으로 급히 달려간다.
작가의 전작인 <헤드헌터>를 읽고서 썼던 감상문에서처럼 이 책에 대한 평가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정말 재미있다”라고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이 책에는 책 속에 빨려 들어간다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를 제대로 느끼게 해주는 재미있는 상황과 설정, 이야기들이 정신 차를 겨를 없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온다. 먼저 상관의 지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고집대로 일을 처리하는 안하무인의 성격에 냉소적이며 알코올 중독자이기까지 한, 그러나 천재적인 두뇌 회전과 사건 해결을 위한 집념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주인공 “해리 홀레”의 매력을 들 수 있겠다. 벌써 9권의 시리즈 - 이번 작품이 7번째 작품으로 시리즈 중 국내에는 첫 소개된 작품이기도 하다 -로 이어질 정도로, 이제는 “요 네스뵈”하면 “해리 홀레”를 금세 떠올릴 정도로 작가의 대표 캐릭터이자 스릴러 역사상 몇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성공한 캐릭터하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설정이라 할 수 있는 “눈사람(Snowman)"을 들 수 있겠다. 어린 시절 다들 겨울철에 한번쯤은 만들어 봤을, 바라만 봐도 저절로 웃음 짓게 만드는 친숙한 존재인 “눈사람”이 연쇄살인의 상징이 되어 버린다는, 즉 뉴욕타임스 평가처럼 익숙한 것이 가장 불길해지는 예기치 못한 의외성이 사람의 공포를 잡을 수 없이 크게 만든다는 사람들의 심리를 제대로 짚어낸 그런 요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악몽을 꾸게 만든 장면들은 앞에서도 언급한 초반부 두 장면 외에는 중후반부에는 등장하지 않는데, 그 장면들이 주는 강렬한 인상이 마지막 페이지까지 계속 머릿 속에 남아 책을 덮고 나서도 기괴한 모습의 눈사람이 계속 떠오르게 만든다. 즉 책 도입부부터 이 책이 어떻다 하는 방향성과 기대를 결정하는 이미지를 심어 주는데서 이 책은 분명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는 주인공과 “눈사람”이라는 의외성이 주는 공포스러운 설정과 함께 독자가 긴장의 고삐를 한 순간도 놓지 못하게 하는 작가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솜씨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연이어 계속되는 기괴하고 공포스러운 연쇄살인사건들과 수사가 계속되면서 속속들이 밝혀지는 정황들과 증거들, 그러면서 강력한 용의자들이 계속 등장하지만 이내 주인공에 의해 범인이 아님이 밝혀지는 반전들 - 사실 남아 있는 분량을 보면 벌써 범인이 등장할 리가 없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작가가 의도적으로 깔아 놓은 단서들과 복선 때문에 깜빡 속아 넘어 가고야 만다 - 이 이어지면서 한눈 팔 겨를도 주지 않고 중반부까지 숨 가쁘게 전개되고, 결말 에 이르러서는 범인의 정체와 그동안 모든 사건의 내력을 일거에 밝히고는 주인공과 범인의 대결이라는 드라마틱한 사건 때문에 가뜩이나 뗄 수 없는 시선을 아예 책에 파고 들어갈 기세로 더욱 몰입시켜 버린다. 마침내 모든 사건이 해결되는 결말을 읽고 책장을 덮고 나서는 처음에는 부담스러웠던 600 여 페이지라는 분량이 너무나도 짧다는 생각이 들어 1~2백 페이지가 더 계속되었으면 하는 아쉬움마저 들게 만든다. 이처럼 스릴러 소설의 성공 공식(公式)을 모두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이 책, 그래서 “정말 재미있다”라는 평가는 결코 과한 것이 아닌 이 책의 재미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가장 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국내에 소개된 책이 단 두 권 뿐인 생소한 작가인데다가 북구 유럽인 “노르웨이”라는 배경 때문에 망설이는 분들이 있다면 그분들의 선택을 돕기 위해 이 책과 비교해 볼 만한 작품 하나를 예로 들어보자. 작가의 이름 앞에 붙는 화려한 별칭 - 인터넷 서점 작가 소개글을 보면 북유럽의 “제프리 디버”, “마이클 코넬리”, “할런 코벤” 등 서구 스릴러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들이라면 익숙한 작가들이 별칭으로 쓰이고 있다 - 중의 하나이자 역시 같은 북구권인 “스웨덴”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으며, 최근 영화로도 제작된 “스티그 라그손”의 <밀레니엄 시리즈>을 떠올리면 좋을 것 같다. 동의하지 못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책의 재미와 스릴이 <밀레니엄>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밀레니엄 급(級)” - 우열을 가름하기 힘든 수준일 때 쓰는 표현인 “~급(級)” - 이라는 평가가 결코 과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역시나 감상문이 횡설수설 쓸데없이 길어졌지만 분명한 것은 앞으로 이 책, <밀레니엄>과 함께 서구 스릴러 소설의 평가 기준이 될 것이며 후속작이 기다려지는 작가 중 1순위가 바로 “요 네스뵈”가 될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