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최고의 10경>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한국영화 최고의 10경 - 영화평론가 김소영이 발견한
김소영 지음 / 현실문화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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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에 극장가본 게 언제였지 하고 떠올려 보니 2007년 크리스마스 때 본 주드 로, 카메론 디아즈 주연의 “로맨틱 홀리데이”가 마지막이었으니 벌써 3년이 다 되어가고 한국영화역시 2007년 여름을 뜨겁게 달구었던 봉준호의 <괴물>이 극장에서 본 가장 최근 영화이니 어디 가서 영화에 대해 명함 하나 제대로 내밀지 못하는 참 무심한 영화팬 중 하나 일 것이다. 영화를 좋아하는 편인데도 자주 못 간 핑계거리를 대보자면 서울에 비해 영화관이 많지 않은 지방에 거주하고 있기도 하고 - 물론 이곳에도 시내에 나가면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있긴 하다 -, 바쁜 일상에 치여 주말에는 잠자기 바쁘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TV, CATV, IPTV 등 각종 방송을 틀면 하루에도 수십 편씩 영화를 볼 수 있고 어디서든지 쉽게 다운받아 볼 수 있는 인터넷 등으로 굳이 극장에 가지 않아도 쉽게 영화를 접할 수 있는 환경이 큰 이유일 것이다. 물론 크고 시원한 화면과 고막을 울리는 멋진 음향시설에 쾌적한 환경의 극장에서 보는 영화의 맛은 작은 브라운관의 TV 화면과는 질적으로 다른 재미와 감동을 주는 것이 분명하지만 이제는 패스트푸드보다 더 쉽고 간편하게 접할 수 있는 편리함이 더욱 나에게는 큰 셈이다. “한국영화 최고의 10경 (김소영/현실문화/2010년 4월)”는 나처럼 한국영화라고는 최근 개봉된 영화밖에 기억 못하는 무심한 관객에게 벌써 100년 가까이 되는 한국영화사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10가지 경관을 소개하면서 한번쯤은 한국영화를 제대로 바라봐달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작가는 서문에서 “어떤 한국영화를 봐야 할까? 어떻게 보는 게 좋을까? 보이지 않던 무엇이 보일 수 있는가?”라고 질문하고 “빼어난 감독들과 배우들이 이루어내는 경관, 한국영화들이 고심하면 다루어냈던 토픽들이 만나” 이루어낸 한국영화 최고의 10경을 선정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고 있다. 책에서는 나에게는 생소한 재중 조선인 감독 장률의 <망종>과 <경계>를 소개하는 1경 <경계>에서부터 1950,60년대 영화인 <열녀문>,<자유부인>과 한국영화 초반기 팜므파탈 여배우인 “도금봉”, “신일선”, “문예봉”을 소개하는 마지막 10경 <섹슈얼리티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총 10개의 한국영화의 경관을 설정하여 각 경관마다 일제 시대부터 최근 영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한국 영화를 소개하고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영화 중 최근 “아바타”에 의해 최다 관중 기록은 깨졌지만 한국영화사상 최대 흥행작인, 그리고 내가 극장에서 본 가장 최근의 한국영화인 봉준호 감독의 <괴물(2006)> 에 대한 작가의 이야기를 소개해보자. 작가는 영화를 넘어 사회적 이벤트가 되어버린 <괴물>을 세 가지 징후(몬스트룸 monstrum, "징후‘,“경고”라는 뜻의 라틴어)로 설명하는 데 먼저 괴물이 포스트-냉전 시기에도 여전히 미군 기지가 잔존하는, 즉 여전히 냉전이 진행중인 한국이 탄생시킨 괴물이며, 기존 괴수영화와는 달리 한강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대규모 파괴장면이 없는, 반확장성 축적지향적 특성을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준거로 보고 있다. 또한 명백한 가족영화를 주창하면서도 잘 기능하지 않는 가족, 즉 희생적인 아버지와 사회 부적응자의 아들들, 어머니가 등장하지 않는 아버지만의 가족 구성을 이야기하고 마지막으로 괴물의 기술적 성취는 한국 기술력의 독점적 일취월장이 아닌 외국 기술력에 기인한 것이며 이런 제작 방식의 결과물을 민족적 자긍심으로 수렴하는 것은 한국형 블록버스터가 만들어낸 홍보방식과 ’기술이 국력이다‘를 외쳐온 기술 결정론적인 70년대식 국가주의에 상당히 기인한다고 꼬집고 있다.

 책에서는 이 외에도 일제 시대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우리 영화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데, 솔직히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한국 영화 중 내가 감상했거나 이름이라도 들어본 영화라곤 봉준호의 <괴물>,<마더>, 임권택의 <천년학>, 홍상수의 <해변의 여인>,<강원도의 힘>, 박찬욱의 <올드보이> 등 비교적 최근에 개봉한 영화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특히 1950~60년대 한국영화의 황금 시기를 열었다는, 그리고 이 책을 바치고 싶다고 한 김기영 감독이나 이만희 감독의 작품들은 주말에 EBS 영화 프로그램에서나 틀어주던 흑백 한국영화의 감독으로 , 또는 이 책처럼 한국영화를 다룬 책에서나 한번 들어본 이름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낯설고 생소하다. 물론 작품의 배경과 줄거리, 등장인물들을 요약해서 설명하고, 영화의 스틸 컷들도 같이 제공하고 있어 책으로나마 그들의 영화를 간접적으로 접해볼 수 있었던 점은 좋았지만 내가 직접 감상하지 못해서 작가의 설명에 올곧이 공감하지 못하고 겉도는 느낌은 많이 아쉬웠다. 나처럼 한국영화에 관심이 부족했던 사람들에게는 다소 어렵고 낯설겠지만 한국영화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체득할 수 있는 입문서로서 손색이 없는, 한국영화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영화팬들에게는 애정을 환기시켜줄 수 있는, 누구나 한번쯤은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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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사랑해도 될까요?
제임스 패터슨.가브리엘 샤보네트 지음, 조동섭 옮김 / 밀리언하우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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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 노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면 주변의 모든 사물들과 조잘조잘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종종 볼 수가 있다. 생일날 선물 받은 인형, TV 속 연예인, 책 속 그림들, 애완용 동물들, 하물며 하얗게 칠해진 벽하고도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고는 어른들인 우리들에게 자신의 친구가 해준 이야기라며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사물을 의인화하여 친구를 만들려는 유아기의 대표적 심리현상”이라는 어느 심리학자의 분석보다도, 혹은 유령이 순수한 아이들의 눈에만 보여 그들과 이야기한다는 공포 영화에서 단골로 쓰이는 그런 상상보다도, 어른들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 즉 수호천사가 아이들 곁을 지키고 있다는 동화 같은 상상을 떠올리게 된다면 한결 마음이 따뜻해지고 낭만적이지 않을까? 제임스 패터슨의 판타지 로맨스 소설 “지금, 사랑해도 될까요(밀리언하우스, 2010년 4월)”는 그런 동화 속 마법 같은 사랑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이제 막 아홉 살 생일을 맞는 제인은 비록 남성편력이 심하고 일에 바쁜 어머니와 살면서도 외롭지가 않다. 언제나 그녀 곁에는 자상한 미소와 따뜻한 말을 건네는 상상의 친구 “마이클”이 함께 해서다. 어른들은 그저 아이의 상상 속에서나 있을 법한 그런 존재이겠거니 하지만 제인은 그로 인해 하루하루가 즐겁고 신난다. 그러나 아홉 살 생일날 그는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며 너도 나를 잊게 될거야 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떠나버린다. 마이클은 아이들이 어른으로 커나갈 수 있도록 옆에서 지켜주는 수호 천사 같은 존재이고 아이들이 훌쩍 커버리면 그 아이를 떠나 다시 새로운 아이를 찾아 나서야 하기 때문이었다. 아이의 꿈은 깨고 나면 부질없듯이 잊혀져야 할 그를 제인은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기억하고 그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들어 큰 성공을 거둔다. 자신을 구속하는 어머니와 자신에게서 잇속만 챙기려는 애인에게서 지치고 힘들어 하는 그녀에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다. 상상속의 친구였던 마이클이 실제로 그녀 앞에 나타난 것이다. 둘은 마법과 같은 사랑을 나누게 되지만, 마이클은 신이 자신에게 준 사명이 과연 어떤 것인지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곤 다시 그녀를 떠나게 된다. 결국 신의 사명은 전혀 다른 것으로 밝혀지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은 절대 헤어지지 않아”라는 아이의 말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는 이 소설은 어린 시절 누구나 꿈꿔 봤을 그런 사랑에 대해 마치 판타지 소설을 읽는 것처럼 신비롭고 낭만적으로 그리고 있다. 결코 사랑은 낭만적이지만은 않은, 어쩌면 결코 견디기 힘든 현실일 수 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내 나이의 남성들이 읽기에는 예전 할리퀸 문고처럼 낯 간지러운 이야기였지만, 누구나 꿈꿔봤을 마법 같은 사랑이야기를 풀어내는 작가의 솜씨에 그만 읽는 내내 분홍빛 감성에 젖어들 수 있었다. 어쩌면 하루에도 몇 번을 스쳐 지나가는 저 사람이, 아니면 어른이 되어 만나서 결혼을 한 지금의 내 아내가 사실은 어쩌면 어릴 적 나를 지켜주었던 상상의 친구였을 지도 모른다는 상상, 삭막한 마음을 한결 부드럽게 풀어주고 따뜻한 사랑의 온기마저 불러 일으키는, 한번쯤은 꿈꿔 볼 만한 상상이 아닐까?

동화같은 사랑이 우리 곁에서 지금 바로 우리가 하는 그 사랑일 수 도 있다는 달콤한 상상을 이 책과 더불어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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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니소스의 철학>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디오니소스의 철학
마시모 도나 지음, 김희정 옮김 / 시그마북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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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술, 이 두 가지가 참 잘 어울리는 궁합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 것은 임권택 감독의 “장군의 아들” 1편을 보고 나서이다. 영화 장면 중 김두한의 여인이었던 “화자”(방은희)에게 두꺼운 안경을 쓰고 유약한 남편이 술이 취해 찾아오고 화자가 남편에게 데카르트, 칸트, 쇼펜하우어의 철학 - 솔직히 그때는 이 세 명이 철학자인지도 제대로 몰랐었다 - 우리의 근대를 망치고 있다고 쏘아 붙이는 장면이 나온다. “고뇌하는 지식인(철학자)과 술”이라는 등식이 자연스레 받아져서 철학자들과 술은 절대 뗄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로 지금까지 생각해왔다. 그런데 마시모 도나의 “디오니소스의 철학(시그마북스, 2010년 3월)”을 보면 모든 철학자들이 술을 좋아하는 것만은 아니었다고 한다. 이 책은 수많은 철학자의 저술과 사상을 통해 “철학”과 “술”의 오랜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작가는 책머리에서 “필연적인 무절제를 동반하는 술, 그 술의 즐거움에 건전하게 빠져드는 현상은 순수하게 철학적인 체험 속에서 고찰해볼 만한 주제”이며 “술이라는 담론이 그 장벽을 넘어서고, 협소한 인간 이성의 한계를 초월할 수 있도록 도울 것”으로 이야기한다. 그리고는 “인식과 결합된 술이 그 너머의 철학의 세계”로 갈 수 밖에 없다고 강조하면서 우리가 한번쯤은 들어봤을 수많은 철학자들, 즉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등 고대 철학자들로부터 몽테뉴, 칸트, 피히테 등의 근세 철학자들과 미셀 푸코, 이름도 생소한 테오도르 아도르노와 같은 현대 철학자들까지 총 망라하여 그들이 술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들의 삶과 저술, 사상들을 통해 소개하고 있다. 그저 이름 한번 정도 들어봤을 정도로 철학에 깊은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솔직히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운 책이었다. 그래도 인상깊었던 몇몇 철학자들이 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이야기해본다.
 

 먼저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 철학자였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소개해보자. 둘은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서로 다른 생각을 가졌던 두 사람은 역시 술에서도 전혀 상반된 견해를 나타낸다. 플라톤이 술은 숨겨진 “진리의 빛”으로 이끄는 존재로 생각한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술을 마시고 하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에 불과하며, 술에 흠뻑 취한 자는 '이성적인 사고를 전혀 시도할 수 없으며', 술에 취한 상태에서는 '어쨌든 나쁜 생각으로 기운다'라고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그가 술에 대해 제기했다는 의문은 몇 천년이 지난 지금 읽어봐도 재미있는데, 
 

"술은 뜨거운 성질인데 술을 마신 자는 냉기를 느끼는가? 그리고 늑막염과 그에 유사한 병에 쉽게 걸리는가? 어째서 약간 희석된 술을 마신 자는 진한 술을 마신 사람보다 머리가 무겁게 느껴지는 것일까? 뜨거운 기운을 가진 아이들은 술을 즐기지 않는데, 어째서 시아파 사람들과 용맹한 남자들은 술을 찾는가? 그들 역시 뜨거운 열기를 내뿜지 않던가? 왜 술에 취한 상태에서는 짠맛과 물의 나쁜 맛을 더 잘 느끼고 그렇지 않을 때에는 덜 느끼는가? 어째서 완전히 술에 취한 자는 그 주변이 빙글빙글 도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술기운이 돌면 멀리 있는 사물들이 잘 보이지 않는가? 왜 취한 자는 이따금 하나의 사물이 여러 개로 보이는가?"
 

라는 의문은 딱 우리가 술에 만취해서 겪게 되는 그 상황을 그대로 연상시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술에 안취하게 마시는 방법으로 위에 떠 있는 독한 술을 밖으로 밀어내기 위해 큰 컵을 사용하고 알코올을 증발시키기 위해 술을 끓여 마시라고 충고하기도 했다는 데 이 점 또한 재미있다. 
 

 그 외에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철학자들은 자기 가치관과 사상에 입각해 술을 예찬하기도 하고 또는 술을 부정하기도 하는 등 모두가 술을 좋아하던 것만은 아니었다고 책에서는 설명하고 있다. 모두 다 소개할 수 없고  그저 내 멋대로 몇몇 철학자들의 생각을 질문과 답변 형식으로 읽어본다면,
 

Q: 여성들은 왜 남성보다 덜 취할까?
A: 칸트의 말을 빌자면 “왜냐하면 여성들은 자신의 본성을 쉽게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자제의 필요성"을 알기 때문에 술에 취하지 않으며 술 마시는 일은 남성들의 전형적인 악습이다. 여성들은 품위에 있어서는 남성을 능가하며 남성은 '무분별하다'. 그렇기 때문에 술의 악습에 더 잘 빠진다.

Q: 최근 술 취하고 저지르는 범죄를 감형하는 판결이 나왔는데 과연 이는 합당할까?               A: 몽테뉴는 술 취함은 '몰상식하고 난폭한 악행'으로서 그 안에는 정신적인 면이 없으며 관대함도 없으며 '다른 이들에게 해를 덜 끼치고 덜 위험하다 할지라도 시민사회를 보다 직접적으로 송두리째 동요시키며 분별하고 경박스러운 음주는 그 자체가 고통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피히테는 '분노 또는 취기로 자신의 이성을 컨트롤하지 못한 범법자는 고의적으로 사악한 의지를 가지고 저지른 죄악‘이며 이는 오히려 가중사유가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정신을 감당하지 못할 때까지 취하는 것이 습관화된 자는 동물로 변하는 것을 정식으로 허락한 것이나 다름없다. 사회 안에서 이성적인 존재로 살 수 있는 단계에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음주에 대한 처벌을 아주 단호하게 하여야 한다고 한다. 미셀 푸코는 광기에 의해 타락된 의지는 '순수한 상태일 수 없으며, 비이성적인 일탈 행위는 결정적으로 사악한 의지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배척되어야 하고 처벌받아 마땅하다고 이야기한다. 

Q: 젊은이들이 흥청망청 취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쇼펜하우어는 윤리의 중요한 규율은 '삼가하고 조절하는 것', 즉 '우리의 욕망에 제한을 두는 것'을 배우는 것이라고 하면서, 알코올의 혼미상태는 젊은 시절 순전히 환각적인 자신의 즐거움을 찾는 무의식과 어리석음에 대한 하나의 표식일 뿐이고 청춘이 웃음을 잃고 '의기소침한' 시기, 하지만 지혜로움을 갖추었을 때에, 비로소 보다 참되고 각성된 시각으로 세상에 대해 그리고 모든 존재에 대해 너그러움을 유지하기 위해 술이 필요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위에서 소개한 몇몇 철학자들이 술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한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책에서는 술에 대해 관대하고 찬미하는 철학자들을 더 많이 소개하고 있으니 말이다.
 

작가 또한 술에 대한 일방적인 찬미나 또는 부정적인 견해를 표출하기 위해 이 책을 집필한 것은 아니다. 작가는 에필로그에서 “취함과 절제는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며 “동일성의 원칙은 취함이 적절하고 참되게 표출되었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즉 적절한 절제 속에서 이뤄지는 취함이 신들의 넥타라고까지 불리웠던 술의 진정한 가치를 이끌어낸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나에게는 참 어려운 책이었지만 그래도 궁금했던 “철학과 술”의 관계에 대해서 공부해볼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그런데 술자리에서 이 책에 나오는 철학자들의 멋들어진 술에 대한 해석을 이야기할라치면 "그래서 뭐 어쩌라고!" 하는 면박을 당하기 일수일 것 같다. 결국은 세상 사는 이야기하면서 두서없이 횡설수설 늘어놓는 “개똥철학”이나 늘어놓게 될 것 같다.  술에 대한 진지하고 철학적인 해석이 애시당초 불가능한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눈크 에스트 비벤둠 (Nunc est bibendum, 자 한잔 합시다!)" 라는 이 책의 마지막 문구처럼 모두가 즐거운 마음으로 한 잔 하는 것이 그 어떤 철학적 해석보다도 더 값질 것이다.

이런이런 술에 대해 잔뜩 늘어놓으니 오늘 저녁 술 한잔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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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1권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1 - 진시황과 이사 - 고독한 권력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1
김태권 글.그림 / 비아북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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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정일 “삼국지”가 신문에 연재되던 당시 연재 글과 함께 실렸던 삽화가 참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삼국지야 워낙 다양한 작가들 작품을 많이 읽어서 새로울 것이 없었지만, 연재물 상단의 한컷 한컷 삽화는 몇몇 삼국지 책에서 소개하는 중국풍의 그림들과는 전혀 다른, 마치 예전 대학시절 흔히 보았던 운동권 걸개 그림처럼 거칠고 굵은 선, 흑백명암 처리, 판화로 찍어낸 듯한 느낌이 참 독특했었다. 그 당시에 삽화를 그린 작가가 궁금해서 인터넷을 해보니 한국 신문연재 사상 최연소인 신예 삽화가인 “김태권”이란 작가였다. 물론 홍보글이긴 하겠지만 기자도 “검고 강렬한 필치로 동서양의 다양한 장식적 요소를 활용해 세련된 화면”이 가히 충격적이라고 설명하고 있어 내 느낌이 맞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이 작가는 이 책과 같은 삽화뿐만 아니라 자신이 지은 작품들이 여러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아쉽게도 다른 작품들의 그림은 접해보지 못했지만 이름만큼은 지금도 또렷이 기억에 남는 작가였는데 - 그의 강렬한 그림만큼 “태권”이라는 이름또한 쉽게 기억되는 강렬한 이름이다 - , 그 삽화가가 최근 자신의 이름을 단 그림 역사책을 출간했다. 역시 삼국지의 시대를 아우르는 중국 고대 제국 “한(漢)”의 역사를 그린 “김태권의 한(漢)나라 이야기”(비아북, 2010년 4월)“이다. 

 작가는 왜 한나라 이야기를 그리게 되었을까? 작가는 머리말에서 “서양 문명에서 로마 제국에 해당하는 것이 동아시아에서는 ‘한나라’”라며 동아시아를 이해하는 첫걸음으로 “한나라”를 선택했으며, 작가 개인적으로는 “남다른 의지를 가진 사람이 그 의지 덕에 출세를 하고 또 바로 의지 탓에 파멸하는 비극”을 적나라하게 파헤친 <사기>와 <한서>가 너무 재미있었기 때문이라고 이 책을 쓴 이유를 이야기한다. 전 10권으로 출간될 예정이라는 “한나라이야기” 첫 권인 이 책은 여러 작가들의 소설 “초한지”의 도입부처럼 “아버지(仲父)”라고까지 불렀던 여불위를 숙청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주변에 여불위의 사람들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진시황이 법가의 “이사”를 만나는 장면(B.C. 238년)부터 시작하여 진시황 사후 “호해”가 이사의 도움의 통일제국 “진”의 2대 황제로 오르고 진승과 오광의 난이 일어나는 장면(B.C.200년)까지 사마천의 <사기> 중 ‘진시황 본기’와 ‘이사열전’을 뼈대로 중국 최초의 황제 진시황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그림은 역시 장정일의 삼국지에서의 삽화처럼 굵고 거칠면서도 시원시원한 그의 특징이 여실히 들어나며 머리관, 옷 문양 등은 그동안 중국 영화나 만화 등에서 본 익숙한 형태의 그런 옷들이 아니라 각종 고분이나 문헌을 참조하여 그 당시의 복식을 철저히 고증한 것이 눈에 띄인다. 특이한 점은 인물들의 얼굴은 하얀색 머리와 눈동자, 오독한 콧날, 쌍커풀 진 눈등 다소 서양적으로 묘사된 점인데 복식과 마차, 수레, 용 등 전통적인 중국 동물문양 등 동양식 그림들과 안 어울릴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독특한 그림체를 나타낸다는 점이다. 예전 삼국지 삽화를 그릴 때도 “서양으로 건너간 상상력을 다시 동양의 소설 삽화로 활용하는 방식”이라던 화가 클림프, 비어즐리의 그림을 참조했다고 한 인터뷰 기사를 읽었었는데 이처럼 동서양 이미지가 함께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는 그림체가 작가만의 독특한 개성이라 여겨진다. 

 그동안 소설들이 극적인 재미를 위해 여불위를 진시황의 아버지로 묘사하거나 이사를 친구 “한비자”도 죽여 버리고 자신의 정치생명과 권력을 연장하기 위해 진시황의 유언을 조작하여 둘째아들 “호해”를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하는 간악한 모사꾼으로 묘사하는 반면, 이 책에서는 비교적 원전인 사기의 기록에 충실히 따르면서 이사를 옛날 정치만 들먹이는 수구세력을 타파하고 “법”과 “체제”를 통치이념으로 국가 기반을 닦은 “법가사상”에 철두철미한 정치가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그동안 “아방궁”, “만리장성” 등으로 전쟁과 살인을 좋아한 폭군으로 여겨왔던 진시황을 하루에 처리할 문서의 무게를 목표랑으로 삼아 매일 밤늦게까지 목표량을 채우기 위해 성실히 일을 하고, 주요 정책도 독단이 아니라 토론을 거쳐 결정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실시해 권력의 안정을 꾀하고 “법치”를 강조했던 군주로 재평가하는 장면은 인상적인 해석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각 장 말미에는 "<사기>를 읽다" 라는 코너를 두어 앞에서 언급한 소설 속 극적 장치들에 대하여 원전 사기를 통해 부정확한 정보나 오류를 바로 바로잡고 원전에서도 의심스러운 부분은 작가의 견해를 곁들어 재해석하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 진시황의 대표적인 실정(失政)인 “분서갱유”중 “갱유(坑儒)”는 사실은 막대한 돈을 드리고도 불사의 명약을 찾아오지도 못하고 황제가 “일벌레”라고 비난하는 방술사들과 체제 비판세력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실제로 유가 지식인들은 몇몇 정도에 지나지 않은, 너무 유학자들 입장에 치우친 표현이라고 이야기한다. 또한 진시황이 죽고 난 직후 조고와 이사가 남몰래 밀담을 주고 받으면서 음모를 꾸몄다는 이야기는 밀담이 백년 후 사마천의 <사기>에 고스란히 나오게 된 점을 의심스러워 하며 2천 2백 년 동안 풀리지 않는 수수계기로 남은, 고대사 최대의 미스터리라고 이야기한다. 독특한 그림체와 재밌는 역사해설이 장점인 이 책은 만화 책이라기 보다는 그림 역사 책으로서 청소년들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대가 함께 읽어도 좋을 만큼 쉽고 재미있다. 특히 시리즈 중 9권과 10권으로 나올 “삼국지”부문은 삼국지의 삽화와는 다른 그의 그림과 해석이 그려질 것으로 기대가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천년이 훨씬 지난 지금 이 시대에 강력한 “법치”를 전가의 보도마냥 휘둘러대는 현 시대가 오버랩되는 것은 나만의 과도한 해석일까? 정권을 비판하는 각종 집회나 문화행사를 온갖 법을 들어 불법으로 몰아 법정에 세우기에 바쁘고, 자유로운 소통의 공간조차 법으로 틀어막고자 시도하고, 합법이라는 미명하에 방송과 공공기관을 자신의 사람들로 채우고, 여야간 합의에 의해 입법화한 법조차도 국익과 국가의 미래를 들먹이며 뜯어고치고자 하는 그들을 보면서 “법치”가 능력이나 권력에 상관없이 모든 이에게 평등하게 적용되기보다는 단지 권력자의 강력한 통치 수단만 여겨질 때 얼마나 위험한지를 제발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이 천년 전의 사례를 제발 그들이 귀담아 듣기를 바랄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참 씁쓸하면서도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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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두 번 진행되길 원한다면 - 감각의 독서가 정혜윤의 황홀한 고전 읽기
정혜윤 지음 / 민음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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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을 몰래 훔쳐보는 것과 같은 은밀한 즐거움, 타인의 독서읽기 

 장정일의 “독서”나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처럼 다른 사람의 책읽기를 읽는 것은 마치 그 사람의 일기장을 몰래 훔쳐보는 것 같은 은밀한 즐거움이 느껴진다. 독서라는 것이 책이라는 객관화된 대상을 각자의 삶과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것으로 주관화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그들만의 감성과 내가 간직하고 있는 감성을 서로 견줘보고 비교해보는 묘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느낌일 때면 나의 책읽기가 결코 남과 다르지 않다는 묘한 안도감과 더불어 그들에게 친밀감을 느끼게 되고, 다른 느낌일 때면 같은 사물을 바라보는 데도 내가 보지 못했던 다른 면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에 색다른 재미와 함께 묘한 질투심까지 느끼게 된다. 그래서 이미 전작 “침대와 책”으로 다양하면서도 깊이 있는 독서편력으로 책 꽤나 읽는다고 자부하는 만른 사람들을 절망케 했던 정혜윤의 “세계가 두 번 진행되길 원한다면(민음사, 2010년 3월)”은 같은 책에 대한 전혀 다른 책읽기의 색다른 재미가 있지만 그보다도  작가의 방대하고도 깊이 있는 책읽기에 더 큰 열등감과 질투심을 갖게 만드는  그런 책이었다.
 

고전 읽기는 내면의 삶의 출발점이자 또 하나의 삶을 키우는 황홀한 경험 

작가에게 있어 고전은 어떤 의미일까? 작가는 프롤로그에서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다음과 같은 시(또는 문구)를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유명 작품의 문구인지 아니면 작가의 창작인지 이 글의 출처를 알고 싶어서 인터넷을 검색해 봐도 누구의 글인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세계는 두 번 진행된다. 
한 번은 우리가 그것을 보이는 그대로 보는 순간
두 번째는 그것이 존재하는 그대로 전설로 새겨지는 순간." 

 위에서 말한 첫 번째와 두 번째 세계는 각각 과거와 미래의 자신이며 “두 번째야 말로 우리의 어떤 욕구”, 즉 “더 배우려는 욕구, 쓰려는 욕구, 골똘히 생각해보려는 욕구, 규명하고 분석하고 해석하려는 욕구”라 할 수 있으며 이런 “읽고 쓰고 배우는 것이야말로 한 번 뿐인 인생의 쓸쓸한 일회성, 혹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해 내려는 의지”라고 말하고 “세계가 두 번 진행되기를 원한다면, 내가 좀 더 나아지기를 원한다면, 미래는 좀 더 다르기를 원한다면 당연히 뭔가 읽고 써야 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빼놓지 않고 언젠가는 읽어야 할 책이 고전”이라고 이야기 한다. 따라서 작가에게 있어 고전은 현실과는 다른   두 번째의 세계를 실현하기 위한 준비물이자 수단인 셈이다.  작가는 “세계가 두 번 진행되길 꿈꿨던 밤마다 누군가와 함께 나누고 싶었던 이야기”인 15편의 고전과 그 고전을 이해하기 위해 함께 읽은 수많은 책들은 “우리 삶 전체를 바꿀 수 도 있는 '내면의 삶'의 출발점”이며 “삶 안에 또 하나의 삶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이 내겐 황홀한 독서”였다고 말하며 자신의 “ 내 이야기 좀 들어봐!”라는 고전에 대한 황홀한 독서 경험이 책을 읽는 모두에게도 전해져 우리 모두가 "우리들의 이야기 좀 들어 봐!"라고 같이 이야기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다. 

내적인 삶의 근원에 대한 의문에 고통스러워 하는 베르테르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작가는 베르테르의 슬픔이 갈망하는 여인과의 이룰 수 없는 사랑 때문인 면도 있지만 또 다른 무엇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다른 생각이 자꾸만 든다고 이야기한다. 로테 곁을 떠났다가 견딜 수 없어 다시 돌아온 어느 날 베르테르가 느꼈던 무서운 공허는 과연 로테에게서 비롯된 공허였는지, 로테가 완전히 다 메워 줄 수 있는 것이었는지, 그의 충족되지 않는 열정은 모두 사랑에 빚지고 있는 것인지 다른 그 무엇이 있지 않았을 까 하는 의구심인 것이다. 작가는 괴테의 자서전 “시의 진실”에서 그 해답을 찾는다. 베르테르의 슬픔은 “세상이 절대적으로 순결하지 않고 내가 꿈꾸는 모습과 완벽한 일치를 보이지 않아서 삶이 무의미하고 고통스러워 죽을 지경”에서 비롯된 것으로 “베르테르의 가슴에 난 구멍은 내적인 삶의 근원에 대한 이야기”이며 따라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자신이 어디에 놓이면 행복할지 알고 있지만 그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던 인간의 이야기이고, 차 한 잔을 마시면서도 깊이를 갖고 싶어 했던 낭만적인 인간의 이야기이고, 자기가 사랑한 아름다움을 위해 치명적이고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계속 사랑하려 했던 인간의 이야기”라고 정의한다. 그리고는 베르테르에게 진정한 지옥이라 부를 수 있는 “ 일평생 한 일을 그대로 똑같이 하는 것을 누군가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는 것”과 같은  경험을 다시 반복할 수 있겠냐고 되묻고는 땅에 묶이지 말고 사랑보다 높고 인생의 즐거움보다 고귀한 그 무엇을 찾으라고, 그리고 “사랑하는 이의 모습이 오래도록 내 우울한 영혼 속에 감춰져 불타” 오를 수 있도록 오래 살라고 충고한다. 

“우리들의 이야기 좀 들어봐!” 

 작가가 소개하고 있는 총 15편의 책 중에서 “변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폭풍의 언덕” 등 내가 읽어본 7 편의 책에 대한 이야기는 책장 한 켠에서 누렇게 바래고, 먼지가 하얗게 내려 앉은 그 책들을 이십 여년 만에 다시금 꺼내들게 하고, 이미 잊혀진지 오래인 줄 알았던 그 당시의 감동을 다시금 내 심장 속에서 되살리는, 가슴 뛰는 “황홀한 경험”을 맛보게 만들었다. 아직 읽지 못한 8편의 책들도 앞으로의 독서 목록 맨 앞 순위를 차지하고는 어서 자기와 이야기하자고 은근하면서 매혹적인 목소리로 끊임없이 나를 유혹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책에서 미처 소개하지 못했던 수많은 고전들과 굳이 고전은 아니더라도 저마다의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들 또한 온갖 교태스러운 목소리로 나를 유혹해댈 것이다.  이 뿌리치기 힘든 꽤나 치명적이고 유쾌할 수 밖에 유혹에 나는 기꺼이 넘어갈 작정이다. 그래서 작가의 편에 서서 “우리들의 이야기 좀 들어봐!”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수다 꽤나 크게 떨 작정이다.  그래서 내 자신을 위한 두번째 세계의 시계  바늘이 멈추지 않고 앞으로 계속 나아가게끔 시계 태엽을 힘차게 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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