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셀러 - 소설 쓰는 여자와 소설 읽는 남자의 반짝이는 사랑고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3
아리카와 히로 지음, 문승준 옮김 / 비채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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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書評)을 쓰기 시작한 지가 2년 반이 넘었다. 그 이전에는 책을 읽고 미니홈피에 인터넷 서점의 책 소개 글과 함께 간단한 느낌만 몇 줄 정도 적었었는데, 자주 방문하는 작가 블로그에서 개최한 이벤트에 당첨되면서 서평 쓰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감히 제목에 “서평”이라는 단어를 붙인 글들을 써오고 있지만 “서적에 대한 비평(批評)과 평가(評價)” 수준에는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저 개인적인 느낌을 적은 “독후감(讀後感)” 에 지나지 않아서 지금도 내가 쓴 글을 읽으면 부끄러워서 얼굴이 다 화끈화끈 거리곤 한다. 그래도 함량 미달의 독후감들이지만 글을 공개하고 있는 터라 내 글을 읽는 분들의 반응이 궁금할 수 밖에 없는데, 칭찬과 관심 댓글에는 어깨가 다 으쓱거리고 비판의 댓글 - 고마운 것은 비난까지는 해주시지 않는다^^ - 에는 절로 의기소침해지기도 한다. 많은 분들이 부족한 내 글에 관심을 보내주시지만 그래도 가장 큰 힘이 되는 칭찬과 응원은 “책 읽는 것보다 당신 글들 읽는 것이 더 재미있다”라는 아내의 격려라고 말하고 싶다. 어쩌면 아내는 나의 제 1호이자 유일무이한 팬(Fan)인 셈이다. 그러기에 아내의 응원만 철썩 믿고 부끄러운 줄도 이렇게 계속 서평을 올리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서언이 긴 이유는 “일본 연애소설의 여왕”으로 불린다는 “아리카와 히로”의 <스토리셀러(원제 スト―リ?セラ― / 비채/2012년 7월)>도 사랑하는 사람의 글을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부 이야기 때문이다. 물론 책에서는 글 쓰는 사람이 작가인 아내고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 남편이라는 게 다르지만 말이다^^

 

Side A

같은 디자인 사무실에 근무하는 “그녀”는 자신만의 디자인을 하겠다며 의욕을 불태우는 여느 젊은 직원들과는 달리 디자이너 보조 역할에만 충실하는 그런 어시스턴트 사원이다. 그럼에도 일처리가 적확하고 빠르며 야근과 숙직도 마다하지 않는 그녀를 정식 디자이너인 그는 눈여겨보게 된다. 어느날 그는 퇴근한 그녀가 남기고 간 USB에 담겨 있는 그녀의 글들을 읽게 된다. 놓게 간 게 있다며 다시 돌아온 그녀는 자신의 글을 읽고 있는 그를 보고 비명을 지르며 만류하지만 그녀의 글에 흠뻑 빠진 그는 그녀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글들을 읽는다. 이렇게 그는 그녀의 글을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팬 1호가 되었고, 둘은 결혼하기에 이른다. 그녀는 남편인 그의 격려와 응원에 힘입어 용기를 내어 자신의 글을 출판사 문학상에 응모하고 대상을 받으면서 전업 작가의 길에 오른다. 그녀가 발표하는 글들마다 크게 인기를 끌지만 그녀는 사고(思考)하는 것만으로도 죽음에 이르는 병인 “치사성뇌열화증후군”이라는 불치병에 걸리고 만다. 글쓰기도 중단하고 하루하루 조심스러운 삶을 살지만 결국 아내는 죽고 만다. 그에게 저작권료 상속권을 넘긴다는 유언장과 함께 자신의 글에 첫 팬이 되어준 것에 대한 감사의 편지를 남기고 말이다.

 

Side B

여성 작가가 죽는 소설(Side A)을 썼던 아내는 출간 분량을 맞추기 위해 이야기를 고민하던 중 남편의 권유로 작가의 남편이 죽는 이야기를 쓰게 된다. 그런데 이 소설처럼 남편인 그가 불치병에 걸리고 만 것이 아닌가. 자신의 글 때문에 남편이 죽게 되었다고 자책을 하는 아내. 그런데 실제는 소설과 조금씩 어긋난다. 소설에서 남편은 결국 죽고 말지만 현실에서 남편은 고통스럽지만 삶을 이어나간다. 역몽(逆夢: 실제 사실과는 반대인 꿈)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은 이처럼 작가인 아내와 남편과의 사랑과 이별 이야기이다. 두 편 다 작가인 아내가 쓴 글을 매개체로 서로 만나 결혼하고 남편은 아내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이자 애독자라는 설정은 공통되지만, Side A에서는 작가인 아내를, Side B에서는 남편을 잃는다는 상황은 서로 다르게 전개된다. 두 편 다 사랑하고 이별하는 과정이 잔잔하면서도 가슴 뭉클한 감동을 준다. 연애 소설로써도 충분히 감동과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소설이지만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소설과 실제를 넘나드는 특이한 구성에 있다. Side A는 Side B의 작가가 쓴 글이니 말 그대로 “소설” - 그런데 Side A 말미에도 이 글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허구인지에 대한 물음이 나온다 - 일 텐데, Side B에서는 소설로 시작되지만 중반부터 소설 속 상황과 실제 상황이 중첩되어 버린다. 아내는 작가의 남편이 죽는 자신의 소설이 현실에서 일어나자 그런 글을 자신을 자책하면서도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바로 자신의 소설과는 반대되는 현실, 즉 역몽(逆夢)이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일 따위는 내가 역몽으로 만들어주겠어. 내가 내 손으로 그를 죽이겠어. 신에게 빼앗기기 전에 내가 내 문장으로 그를 죽이겠어. 신이 있다면 어디 한번 받아보시지. 내가 당신에게 거는 싸움을. 나는 작가야. 요깃거리도 되지 않는 공상을, 진실성 없는 이야기를, 꿈을 이 세상에서 맛깔나게 조리하고 있지. 나는 꿈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사람이야. - P.187

 

이런 작가의 시도 때문이지 현실은 소설과는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다. 점점 병이 심해지기는 하지만 남편은 소설과는 달리 삶을 계속해서 이어나간다. 그래서 Side B 최종 원고를 받아본 편집장은 Side A 말미의 편집장처럼 작가에게 소설 속의 일들 중 현실과 부합되는 일들을 언급하면서 어디까지가 사실이냐고 물어온다. 그러나 그건 중요치 않다. 이 소설은 팔려야 한다. 왜냐하면 역몽이 일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도 편집장에게 원고를 보내기 직전까지의 모든 상황이 소설인지 아니면 Side B에서의 작가가 역몽을 일으키기 위한 과정인지가 분명치 않다. 즉, Side B 전체가 소설일 수 도 아니면 소설과 실제가 섞인 것 일 수 도 있는 것이다. 이렇듯 서로의 배우자와 이별하는 상황은 같지만 Side A에서는 아내의 죽음으로 완결된다면 Side B에서는 남편의 죽음으로 완결되지 않는다. 물론 시기가 더 늦어지고 소설과는 다른 상황이 전개되지만 소설처럼 죽게 된다는 슬픈 결말만큼은 현실에서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어쩌면 작가인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이겠지만 그 결말이 슬픔으로 끝맺음할 것을 알기에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서도 가슴 한 켠에 잔잔한 여운과 함께 아련한 슬픔을 느낄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 혹시 작가의 실제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계속 했었는데, 책 소개글을 보니 실제 남편을 모델로 삼아 자전적 요소를 더해 쓴 이야기 인 데가 작가가 독자를 헷갈리게 만들어보자 하고 계획해서 썼다고 하니 적어도 나에게는 작가의 의도가 100퍼센트 맞아떨어진 셈이 되었다. 물론 아리카와 히로 본인의 이야기가 아닐까라는 생각 뿐만 아니라 소설과 현실의 경계마저 착각해버렸으니 너무 과하게 들어맞긴 했지만 말이다^^ 아뭏튼 현실과 소설을 넘나드는 특이한 구성과 전개의 소설로써, 가슴 시리게 만드는 연애 스토리로써 재미와 감동을 함께 맛 볼 수 있었던 멋진 소설이었다. 또한 연일 무더위가 기승을 부르는 요즈음, 더위를 잊겠다며 살벌하고 끔찍한 추리소설만 파대고 있는 나에게는 피폐해진 정서 순화(?) 차원에서도 안성맞춤인 소설로 평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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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너 매드 픽션 클럽
헤르만 코흐 지음, 강명순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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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고 하물며 사람의 자식 사랑은 두 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 이런 부모의 자식 사랑이 도를 넘어 아이를 아예 망치는 사례가 허다한데 특히 학교에서 그 예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아내가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니 학교에 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종종 듣게 되는데, 최근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사연인즉슨 학교에서 문제아로 소문났던 한 학생이 수업 중에 선생님이 말리는 데도 반 친구를 의자에 묶어 놓고 우산으로 때려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고 한다. 결국 선생님들 회의가 열려 그 학생에게 최고 수준의 벌점을 부여하자 아이의 아버지가 득달같이 달려와 담임인 여선생님 멱살을 잡고 당신 때문에 아이 인생이 망쳤다며 폭언을 퍼부어 교무실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학교에서는 이 사실을 알려질까 봐 쉬쉬하고 아이를 전학하는 정도로 마무리했다는 데, 그 일을 당한 선생님은 며칠을 학교에 나오지 못하고, 정신과 치료까지 받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아내에게 사실이냐고 몇 번을 되물었을 정도로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이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심심찮게 들리는 것을 보면 하루 이틀 일은 아닌 것 같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유를 찾자면 열 페이지가 부족할 정도로 복잡다단 - 신문과 방송에서 단골 소재로 등장할 정도로 분석 기사들이 넘쳐난다 - 할 텐 데 부모의 그릇된 자식 사랑 - 엄밀하게는 아이에 대한 지나친 보호와 관심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인식의 문제 - 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런 그릇된 자식 사랑 세태 또한 그 이유를 따지자면 마찬가지로 차고 넘칠 테니 이 글에서는 생략하기로 하자. 그런데 이런 일이 비단 우리나라 문제만은 아닌가 보다. 2009년 한 해 네덜란드에서만 42만 부가 판매되었고 네덜란드 독자들이 선정한 ‘2009년 가장 좋은 책’에 선정되었다는 “헤르만 코흐”의 소설 <디너(원제 Het Diner / 은행나무 / 2012년 5월)>을 보니 말이다.

 

 

(이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자식의 잘못을 덮으려는 부모의 그릇된 선택

 

 

차기 유력한 수상 후보인 정치인 “세르게” 부부와 세르게의 동생이자 전직 학교 선생님인 “나(話者)”의 부부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한다. 최고급 요리들이 계속해서 들어오고, 두 부부는 영화 이야기와 휴가 계획 등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한다. 그런데 어딘가 분위기가 이상하다. 그들은 단순한 가족 모임을 위한 것이 아니라 뭔가 끔찍한 일이 그들 아이들에게 벌어졌기 때문에 그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이 레스토랑에 모인 것이다. 그건 바로 두 부부의 아들이자 열다섯 동갑내기 사촌 형제들이 은행 현금 인출기에 잠들어 있던 여자 노숙자를 구타하고 불을 질러 끔찍하게 살해한 일 때문이다. 이들이 저지른 이 끔찍한 사건의 동영상이 TV 고발 프로그램에 소개되고, 그 방송을 시청하던 나의 부부는 비록 인상착의가 들어나지 않았지만 한 눈에 자신의 아들인 “미헬” 임을 알아본다. 동영상은 인터넷에까지 퍼져 사건은 일파만파로 커지고, 두 아이들은 세르게 부부가 입양한 아프리카 출신 아이에게 협박당해 돈을 갈취당하는 사건까지 발생한다. 이런 상황을 논의하기 위해 모인 두 부부, 드디어 입을 연다. 형인 세르게는 모든 사실을 밝히고 정계 은퇴를 하겠다고 선언 - 언제고 자신의 발목을 붙잡을 이 사건을 사전에 털고 가려는 정치적 의도가 다분한- 하지만 세르게의 아내와 내 아내는 그런 형을 극렬하게 말린다. 하잘 것 없는 노숙자 하나 죽인 일로 아이의 장래를 망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과연 무엇이 아이를 위한 최선의 선택일까? 과연 부모의 사랑은 도덕이나 양심보다 우선일까? 두 부부는 절대 해서는 안될 “선택”을 한다.

 

 

이 책, 지루하다.

 

 

1인칭 시점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설정인데다가 주인공이 속 시원히 터놓기 어려운 “사건”이라 말끝을 흐리고 주저주저하게 되는 상황임은 이해하지만 주인공의 이야기를 통해서만 한정된 정보를 얻을 수 있고 레스토랑 상황이나 등장인물의 과거 이야기 등 군더더기의 상황 묘사가 많아 이야기 전개가 영 답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런 지루함에 레스토랑 장면이 길게 이어지는 중반까지는 쉽게 몰입할 수 가 없었는데, 중후반 이후 두 부부가 만나게 된 이유가 비로소 불거지면서 이야기가 점점 흥미로워지고 책 첫머리에서 주인공이 자신보다 현명하고 지적이라고 평가했던 아내가 아들의 죄를 덮으려고 자기합리화 - 결국 그릇된 현명함과 지적임인 셈이다 - 하는 대목에서는 의외의 재미가 느껴지기도 했지만 쉽게 예측 가능한 과정과 결말은 역시 지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불편하다

 

 

열 다섯 살 나이의 아이들이 은행 현금 인출기 부스에서 잠들어 있는 여자 노숙자를 악취나고 더럽다는 이유로 구타하고, 기름까지 끼얹어 불태워 죽인다는 사건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독자들은 없을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는 그보다 더 끔찍하고 잔인한 사건들이 하루에도 열 두 번씩 일어난다고 해도 말이다. 또한 거리를 떠도는 하잘 것 없는 노숙자의 생명보다 유력 정치인의 아들, 그리고 중산층인 자신의 아들의 미래가 더 가치 있고 소중하다며 아들의 죄를 덮어 버리는, 심지어 자신들의 두 아들을 협박한 입양아의 실종을 나몰라라 하는 두 부모의 파렴치한 행동도 영 불편하고 역겹기까지 하다. 이런 주 사건의 불편함 외에도 레스토랑에서 새끼손가락으로 음식을 가리키며 설명해대는 지배인이나 유명 정치인과 사진을 찍기 위해 주변을 맴도는 이웃 테이블 손님들도 불편하기는 매한가지이다. 이처럼 책에는 불편한 사건과 인물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면서도 이 책, 다 읽고 나서도 여운이 쉽게 가시지 않는다.

 

 

 

내가 책속의 두 부부였다면 어떡했을까? 남의 일로만 여긴다면 두 부부를 비난하는 게 당연할 텐데 내 일이라면 하는 생각에 머뭇해진다. 이성적으로야 결코 할 수 없겠지만 나에게 이런 일이 닥친다면 나 또한 두 부부처럼 “선택”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경우는 다르지만 최근 모 드라마에서 뺑소니 사고를 저지른 사람이 자신이 가진 권력과 부를 총동원해서 사건을 무마시키는 장면을 보면서 저게 바로 사회 현실이라고 비난하지만 나라도 그런 위치에 있다면 그런 유혹을 쉽게 떨치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물며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자식의 일에 사회 도덕과 규범을 앞세울 부모가 과연 몇이나 될까? 그런 사랑이 분명 그릇되고 결코 그렇게 행동해서는 안 되는 것임에는 분명하지만 그게 나라면 이라는 질문에는 쉽게 답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두 부부의 가족들은 그 후로 행복했을까? 결말에서 세르게는 선거에서 떨어지긴 했지만 사건은 특별한 문제 - 입양 아들이 모종의 이유로 실종되긴 했지만 그다지 슬퍼하진 않는다 - 없이 마무리된 걸로 그려진다. 사건의 앙금 때문에 당분간은 심적으로 괴로울지 모르지만 어차피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처음의 죄의식과 자책감은 시간은 갈수록 옅어지고 언젠가는 그 흔적조차 사라지고 말테니 말이다.

 

 

하지만 세상일이란 게 늘 그렇듯이 그 사건에 대한 기억도 시간이 지나면 우리한테서 멀어질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우리가 잊어버려야 할 것은 바로 그 비밀이었다. 둘이서만 알고 있는 비밀. 망각은 일찍 시작할수록 효과가 큰 법이다. - P.179

 

 

이렇게 책에서처럼 나중에라도 아무 문제가 발생하지만 않는다는 믿음 또는 보장만 있다면 어떻게든 덮어두려는 마음을 결코 거스르기가 어려울 것이다. 자동차 뺑소니 사고처럼 머리(이성)로는 분명 옳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가슴(심정)으로는 아무도 본 사람이 없으니 이 자리만 모면하면 된다는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는, 참 이율배반적인 상황 말이다. 그러기에 책을 다 읽고 나서도 과연 무엇이 옳은가 하는 생각을 쉽게 떨쳐지지가 않았다. 아마 작가의 의도가 바로 이것이었을 것이다. 논란꺼리, 즉 화제성과 쉽게 가시지 않는 여운 말이다.

 

 

그래서 이 책, 지루하고 불편했지만 꽤나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그런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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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알렉스 형사 베르호벤 추리 시리즈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서준환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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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역시 “추리소설”의 계절일까? 무더워지기 시작한 지난 6월부터 7월 중순인 오늘(7.13.)까지 읽은 17권 중 추리(스릴러 포함) 소설이 12권에 달하니 전체 70%가 넘는다. 원래 추리소설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무더위를 잠시나마 잊게 할 정도로 몰입하는 데는 역시 추리소설만 한 장르가 없어서 여름에 더 찾게 되는 것 같다. 읽어본 소설의 국적들을 살펴보니 다양한데 영미(英美)권 소설 3종 4권, 일본소설 3종 3권, 한국소설 2종 4권과 함께 마지막으로 프랑스 소설 1권이 끼여 있다. 이 프랑스 소설이 바로 지금 소개할 “피에르 트메트르”의 <알렉스(원제 ALEX / 다산책방 / 2012년 5월)>이다. 검은색 바탕에 나신(裸身)의 젊은 여인이 붉은 색 천을 걸치고 매혹적인 뒷 자태를 드러내고 있는 표지 그림부터 인상적인 이 작품, 작가 스스로가 “히치콕이 살아 있다면 영화화하고 싶어 할 작품으로 완성시키는데 주력했다”고 밝히고 있을 정도로 자신 있어 하는 소설인데다가 “여성=희생자의 도식을 완전히 도치했다”는 홍보글, 인터넷 서점 게시판에 올라와 있는 호평 일색의 감상 등등 흥미와 궁금증을 자아내는 요소들이 많아서 읽기 전부터 꽤 기대했던 작품이었다. 그래서였는지 책을 받아들자 마자 읽고 있던 책을 멀찌감치 내팽겨 두고는 이 책부터 바로 읽기 시작했다.

 

 

(이하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시간이 이슥해져 완연히 어둠에 싸여 있는 어느날 밤, 시내에서 쇼핑과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막차 버스를 기다리던 알렉스는 마음을 바꿔 걸어간다. 자신이 사는 동네에 다다를 무렵 그녀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괴한에게 폭행을 당하고는 흰색 소형 화물차에 강제로 실려 어디론가 끌려간다. 그녀는 어두컴컴한 창고에서 다시 한번 심하게 폭행당하고는 발가벗겨진 채로 옴짝달싹할 수 도 없는 작은 새장과 같은 곳에 갇혀 허공에 매달려 버리고. 살려달라는 애원에도 범인은 너를 말려죽이겠다는 말만 남기고는 나가버린다. 시간은 하루, 이틀 지나 일주일이 흘러 버리고, 그녀는 작은 새장에서 갈증과 배고픔, 그리고 자신의 피와 살을 노리고 달려드는 쥐들과 처절한 사투를 벌인 끝에 가까스로 탈출한다. 다행히도 범인은 며칠 동안 하루에 한 번 씩 와보고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4년 전 아내를 납치사건으로 잃고 큰 충격에 빠졌던 강력반 반장 “카미유”는 이후로 치정에 얽힌 범죄나 조폭들 간의 패싸움, 또는 지인들 사이에서 벌어진 참극 따위만 취급할 뿐 납치사건은 강력하게 거부한다. 그런 그를 20년 지기인 “르 구엔” 서장은 담당할 형사가 없다며 한밤중에 벌어진 부녀자 납치 사건을 강제로 떠맡긴다. 주변 탐문 수사와 인근 가게 CCTV 조사 끝에 범인의 정체를 밝혀낸 수사팀은 도시 외곽 버려진 창고에 여인이 새장에 갇혀 있다는 제보를 받고 긴급 출동하고, 범인은 현장에 도착한 경찰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다리에서 뛰어내려 자살해버린다. 창고에 들어선 수사팀은 갇혀 있다는 여인은 이미 사라져 버리고 부서져 있는 새장만을 발견하게 된다. 납치 사건의 범인과 달아난 의문의 여인을 계속 수사하던 수사팀은 가출한 것으로 알려진 범인 아들을 황산으로 식도와 내장이 녹아내린 시신으로 찾아내게 된다. 즉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해 암매장된 것이다. 여기서 카미유 반장은 뭔가 석연찮은 점들을 발견한다. 이렇게 황산액을 마시고 죽은 남자들의 사례가 과거에 몇 건 더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이야기는 급반전된다. 이후 연쇄살인사건은 계속 일어나고, 다시 한번 급반전한 후에 충격적인 비밀이 드러난다.

 

 

 

이 책은 두 번에 걸친 충격적인 반전(反轉)과 알렉스, 카미유 두 주인공의 슬픈 사연이 인상적인 소설이다. 책에서 이야기는 “여성=희생자의 도식을 완전히 도치했다”는 홍보문구처럼 납치사건(1부)의 피해자였던 알렉스가 살인자로 둔갑하는 첫 번째 반전으로 단순한 여성 납치이었던 사건이 연쇄살인사건(2부)으로 흐름이 갑작스레 변해 버리고, 연쇄살인을 저지르던 알렉스가 갑작스레 죽어버리면서 감춰진 살인 동기와 함께 충격적인 과거(3부)가 밝혀지고 이야기는 다시 한번 급변하게 된다. 이처럼 두 번의 반전은 이야기의 흐름을 변화시키는 이야기 흐름을 변하게 하는 일종의 전환점이 됨과 동시에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이야기 흐름에 새롭게 긴장감을 불어 넣고 독자의 시선을 책에 더욱 바짝 끌어당기는 훌륭한 장치 역할을 한다. 또한 연쇄살인을 저지를 수 밖에 없는 알렉스의 숨은 과거와 4년 전 만삭인 아내를 납치 사건으로 잃고 괴로워하는 카미유 반장의 사연 또한 독자들의 동정심과 공감을 이끌어 내고, 이런 공감은 마지막 대목에서 “지금 우리한테 가장 절실한 미덕은 진실이 아니라 바로 정의일 거라는 생각이 드는 데요” 라는 카미유 반장의 말에 통쾌함 -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이유를 세세하게 밝힐 수 는 없지만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문구이기도 하다 - 을 맛보게 한다. 이런 반전과 캐릭터들의 사연에 대한 공감은 530 여 페이지가 넘는 만만치 않은 분량을 읽으면서 갈수록 책 넘김 속도가 빨라지는 몰입감과 스릴을 선사하고 있다.

 

 

이처럼 반전과 공감은 꽤나 흥미롭지만 사실 책에서의 납치 장면과 살인 장면의 묘사는 눈살이 찌푸려 질 정도로 거북스럽다. 1부에서 새장에 갇혀 허공에 매달린 알렉스의 피와 살점을 호시탐탐 노리는 쥐들의 습격 장면은 욕지기가 튀어나올 정도로 거북스러워 - 물론 쥐를 끔찍이 싫어하는 내 취향 탓이기도 하다 - 페이지를 거푸 넘기게 만들었고, 알렉스가 저지르는 연쇄 살인 장면들도 그 잔인함에 눈살을 절로 찌푸리게 만든다. 또한 반전이 이야기의 흐름을 바꿔놓는 훌륭한 장치 역할을 하지만 이야기의 급격한 변화는 그만큼 맥락이 뜬금없을 정도로 갑작스레 튀어 일순 어리둥절하게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그리고 대화보다 설명문이 비중을 많이 차지하고 있는 점, 조금은 불친절한 해설과 상황 설정, 반전과 반전 사이 사건 전개가 다소 지루하다는 점, 그리고 캐릭터들의 사연은 공감이 가지만 동의는 할 수 없고, 또한 작위적이고 억지스럽게 느껴지는 대목 등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런 거북함과 아쉬움 때문인지 다 읽고 나서도 뭔가 산뜻하지 못한 기분을 지울 수 가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이 책에 대한 평가는 스릴과 재미에는 만점을 주고 싶지만 산뜻하지 못한 느낌에 결국 별점 하나를 뺀 점수로 평가하고 이 두서 없는 감상글을 서둘러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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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와 진실의 빛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2
누쿠이 도쿠로 지음, 이기웅 옮김 / 비채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야 여러 가지가 있을 텐데 유독 배우자가 “바람피우는” 것을 “도리(道理, 倫)에 어긋나다”는 의미로 “불륜(不倫)”이라 칭하는 데는 배우자의 정절(貞節)을 강조했던 “유교(儒敎)”적인 이데올로기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렇게 금지(禁止)하는 것이 오히려 상상력을 자극한다고, 불륜은 우리나라 TV 모든 드라마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소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요즘 세태가 달라져서인지 이런 “도리에 어긋난” 불륜을 아름답게 그리고 있는 드라마들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지만 그래도 그동안 드라마 속의 불륜은 가정 파괴의 가장 큰 원인이며 불륜을 저지르는 당시에는 달콤할 지 몰라도 그 끝은 불행하다는 교훈적인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실제로 부모의 불륜 때문에 가정파탄을 경험했던 사람들이 행복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보다 결혼에 대한 혐오감과 두려움이 크다고 하니, 불륜을 저지르는 당사자들에게야 거부할 수 없는 치명적인 유혹이겠지만 남겨진 가족들에게는 영원히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로 남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통곡(慟哭)>, <우행록(愚行錄)>으로 우리나라 추리소설 애독자들에게도 익히 알려진 일본 작가 “누쿠이 도쿠로(貫井德郞)”의 신작 <후회와 진실의 빛(원제 後悔と眞實の色/비채/2012년 6월)>은 아버지의 불륜과 가정 폭력을 경험했던 남자가 불륜을 저지른 젊은 여성들을 “악(惡)”으로 규정하고 끔찍한 연쇄살인을 저지른다는 이야기이다. 어쩌면 흔한 소재이겠지만 누쿠이 도쿠로는 ‘사회파 미스터리 대표작가’라는 명성에 걸맞게 현대 사회에 만연된 각종 부조리와 모순을 그만의 치밀하고 사실감 넘치는 필치로 그려내 우리에게 “특별한” 재미와 생각꺼리를 던져주고 있다.

 

(이하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하기 바랍니다)

 

도쿄 한가운데라고는 하지만 어두컴컴한 밤거리로 여성이 혼자 다니기에는 그리 적절한 곳이 아닌 신주쿠구 아카기시타마치에서 온 몸이 칼로 난자당해 피범벅인 젊은 여성의 시체가 발견된다. 시체는 특이하게도 검지손가락이 잘려 나가 있었다. 사안의 엄중함 때문에 합동수사본부가 꾸려지고, 뛰어난 실적으로 “명탐정”이라고까지 불리는 경시청 소속 형사 “사이조” 경위도 수사본부에 합류하게 된다. 경시청, 기동수사대, 지역 경찰까지 합세한 수사는 계속되지만 별다른 단서가 발견되지 않아 갈수록 지지부진해지고 있는 가운데, 두 번째 살인이 일어난다. 역시 젊은 여성에 온 몸이 칼로 난자당하고 손가락이 절단된, 첫 번째 살인과 동일한 형태로 죽임을 당한 것이다. 수사본부에서는 연쇄살인의 가능성이 대두되고, 인터넷 게시판에는 이 살인사건이 최대 이슈로 떠오르며 급기야 살인을 예고하는 게시글까지 올라온다. 수사본부는 인력을 총동원하여 도심 곳곳을 순찰하지만 범인의 예고대로 세 번째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범인은 “손가락 수집가”라는 별칭이 붙는다.

 

한편 피해자들의 연관 관계를 조사하던 중 주변 인물들이 모 명문 사립대와 연관이 있고, 그중 한 명이 환경대신(大臣; 우리나라의 장관)의 딸임을 알게 되지만 고위층의 압력으로 더 이상의 수사는 중단하게 된다. 그러나 사이조의 파트너이자 첫 번째 살인 사건의 시체를 발견한 지역 파출소 순경인 “오사키”의 부주의 때문에 이런 내용들이 신문에 기사화되고, 사이조는 자택 근신 처분을 받게 된다. 아내와 불편한 사이였던 사이조는 자신의 애인인 “미에이”의 집에 머무르는데, 누군가가 자택근신 중임에도 불륜녀의 집에 머무는 사이조의 사진을 찍어 합동수사본부에 보내고, 급기야 이런 이야기가 다시 신문 기사화되면서 사이조는 결국 사표를 내고 만다. 손가락 수집가의 연쇄살인은 계속되고, 집에서 나와 노숙자 생활을 하던 사이조는 인터넷에서 살인 의뢰를 받은 남자들의 테러에 시달리고, 급기야 딸이 납치되는가 하면 고향으로 내려간 미에미 또한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고야 만다. 과연 이 엽기적인 연쇄살인을 저지른 “손가락 수집가”는 누구일까? 사이조를 경찰에서 내쫓고 그에게 테러를 가하는 의문의 인물은 누구일까? 범인의 정체는 마지막 장을 불과 몇 십 페이지 앞두고 나서야 밝혀진다.

 

추리소설 마니아를 자처할 정도로 추리소설을 즐겨 읽고 있고, 특히 일본 추리소설을 많이 읽고 있는 데도 이번 신간을 제외하고도 국내에 6권이나 책이 출간된 “누쿠이 도쿠로”를 이제야 만나다니 많이 늦은 셈이다. 그의 전작들에 대한 많은 호평들을 알고 있었고, 나또한 그를 눈여겨보고 있던 터라 드디어 만난다는 반가움과 기대감이 새로운 작가에 대한 낯설음과 경계심보다 한결 컸기에 책을 받자마자 망설임 없이 표지를 열어 읽기 시작한 이 책, 읽는 내내 576 페이지라는 분량의 부담감을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몰입감과 재미를 선사했고, 다 읽고 난 지금 “역시!”라는 감탄과 함께 왜 이 작가를 이렇게 늦게 만났을까 하는 아쉬움을 다시 한번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이 책에 이렇게 열광하게 만든 요인을 꼽아보자면 추리소설 특유의 트릭과 반전의 재미, 사회파 미스터리로서의 묵직한 생각꺼리, 이렇게 두 가지를 꼽을 수 있겠다.

 

이 소설은 기발하고 엽기적인 살인사건의 연속과 사건들 속에 숨어 있는 쉽게 알아채기 힘든 정교한 트릭과 복선 등 추리소설로서의 재미를 한껏 담고 있다. 특히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밝혀지는 범인의 정체가 가히 충격적이라 할 정도로 인상적인데, 불과 몇 십 페이지 남겨 놓고도 범인이 누군지 도대체 짐작할 수 가 없어 결말이 궁금해 자꾸만 마지막 페이지를 펼쳐보고 싶은 손길을 말리느라 꽤나 애를 먹었고, 마침내 밝혀지는 범인의 정체가 일순 멍해질 정도로 충격적으로 느껴졌다. 많은 추리소설들을 읽어서 어지간한 트릭이나 반전에는 꿈쩍도 안할 것이라고 자부해왔는데, 그런 나를 순간 멍하게 할 정도이니 꽤 강력한 반전이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범인의 정체에 대한 반전은 독자가 책을 읽어가면서 짐작해볼 만한 이렇다 할 단서가 극히 부족해 어떤 면에서는 “반칙”, 즉 “추리소설 공정성” 논란의 여지도 있어 보인다. 물론 범인의 독백 장면들과 사이조와 연관된 사건들 등 몇 몇 단서들이 있긴 하지만 이 단서들만으로 범인을 추리해내기란 가히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기에 그만큼 충격이 더 컸겠지만 한편으로는 속았다는 느낌 또한 지울 수가 없었다.

 

또한 경찰이 증거 수집과 탐문 수사, 주변 인물들의 연관관계 수사를 통해 진실에 접근해가는 “경찰소설(警察小說)” 로서의 재미와 함께 명탐정이 결국 결말 부문에서 범인의 정체를 밝혀내는 탐정소설의 재미를 함께 맛볼 수 있는 점도 꼽을 수 있겠다. 이 책에서 경찰들은 역시나 수사가 지루하리만치 더디고 범인의 속임수에 우왕좌왕 허둥대기까지 한다. 그러나 작은 단서들을 통해 범인의 실체에 한걸음 한걸음 다가가는 과정은 작가가 치밀한 사전 조사 끝에 이 글을 썼다는 것을 짐작케 할 정도로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고 쏠쏠한 재미를 준다. 물론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런 수사 과정들로 범인의 정체를 짐작하기란 불가능하며 책 속의 경찰들도 그렇게 수고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범인을 밝혀내진 못하지만 말이다. 이 책에서 사건을 해결하는 “명탐정”은 역시 경찰이었지만 경찰의 굴레를 벗어나자 오히려 더 번뜩이는 추리솜씨를 선보인 사이조라 할 수 있겠다. 사이조도 처음에는 피해자의 주변을 수사하는 “감별조”를 맡은 탓 - 특별한 이유 없이 살인 그 자체가 좋아서 행하는 일종의 “쾌락살인”으로 여겨지다 보니 주변을 수사한다고 해서 특별한 연관성을 찾을 수 없기에 사이조는 감별조에 배치 받은 것을 불만스럽게 여긴다 - 도 있겠지만 뛰어난 사건 해결 솜씨로 농담반 진담반 명탐정이라 불리는 그의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이렇다 할 추리솜씨를 보여주지 못하고, 엉뚱한 단서 - 고위 공직자 딸이 연루된 명문 사립대라는 단서 - 에 집착하다가 그만 근신처분을 당하고 결국 경찰에서 쫓겨나기에 이른다. 그런데 오히려 그가 이렇게 이혼을 당하고 노숙자 생활까지 하는 나락에 빠지게 되자 비로소 명탐정으로서의 능력을 본격적으로 발휘한다. 이 대목에서 작가의 현 치안 시스템에 대한 불신(不信)을 엿볼 수 있다고 하면 너무 과장된 해석일 것이다. 노숙자 생활까지 하게 된 사이조는 신문기사들과 동료 경찰에게서 받은 몇 가지 단서들만으로 이 연쇄살인사건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불륜”이라는 것과 함께 자신의 애인까지 살해당하는 연이은 살인 - 애인은 앞서 사건들과 다르게 손가락이 절단되지도 않았고, 칼에 의해 난자당하지도 않아 공통점이 전혀 없지만 - 에서의 이질감을 간파해내 결국 범인의 정체를 추리해내는데 마치 소년 탐정 김전일이 “범인은 너!”라고 지목하는 것 마냥 통쾌함마저 느끼게 한다. 이처럼 경찰 소설과 탐정 소설, 두 가지 장르의 재미는 앞서 말한 결말의 충격적인 반전과 함께 추리소설의 재미를 한껏 느껴볼 수 있게 만드는 요소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에 사회파 미스터리로서의 묵직한 주제의식 또한 빼놓을 수 없겠다. 사실 이 글 첫머리에서 길게 이야기한 불륜은 범인의 살인 행각의 원인이 되긴 하지만 그런 행동에 큰 설득력을 부여하진 않는다. 어릴적 범인처럼 아버지의 불륜과 가정 폭력을 경험했다고 하더라도 현실에서 끔찍한 살인으로까지 이어지는 경우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또한 아내와의 불화 때문에 허울 뿐인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해서 누구나 다 사이조처럼 불륜을 저지르지는 않는다. 이처럼 이 책에서 불륜은 살인의 동기와 주인공의 처지를 설명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일 뿐 주된 주제는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에서 가장 주목해봐야 할 주제는 자신이 겪은 불행을 남에게 전가시켜 그들을 악이라 규정하고 처단하려는 범인의 사이코패스적 사고와 함께 경찰 사회 내부에 만연된 구성원들의 시기와 갈등, 그리고 갈수록 커지고 있는 인터넷 게시판 익명성의 위험 등을 들 수 있겠다. 경찰 사회 내부 갈등과 인터넷 익명성의 위험 등은 많은 분들이 언급해주셨고, 책을 통해서 쉽게 찾아볼 수 있으니 여기선 그릇된 신념의 치명적 위험성만 간단히 언급해보자.

 

범인은 자신이 신에게서 지상의 악을 처단하려는 사명을 받았다고 생각하고는 자신이 저지르는 살인이 곧 신의 의지라 정당화하며 서슴치 않고 저지른다. 따라서 사이조가 애초 생각했던 것처럼 살인에 대한 쾌감에서 비롯된 쾌락살인이 아니라 그릇된 신념에서 비롯된 일종의 “명예 살인”- 사실 가족의 명예를 위해 저지르는 살인과 의미는 전혀 다르지만 둘 다 잘못된 가치관에서 비롯된 살인이라는 점에서는 같다고 할 수 있다 - 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이처럼 그릇된 신념에 대한 맹신 때문에 범인은 재판 과정에서 정신분열증 환자로 진단받고 교도소가 아닌 정신병원에서 수감생활을 할 것으로 짐작되는데, 문제는 이런 정신분열증 환자에 의한 끔찍한 살인이 현실에서 결코 낯설지 않다는 데 있다고 하겠다. 대표적인 예로 바로 작년에 다문화주의에 대한 혐오로 77명이나 살해한 노르웨이 살인마 “브레이빅”을 들 수 있겠다. 브레이빅도 이 책의 주인공처럼 자신의 행동은 사회와 국가를 지키기 위한 예방적 조치였으며 악의가 아니라 선의로 한 것이라는 발언으로 세상을 경악케 하고 결국 망상성정신분열병 환자로 진단을 받았지 않은가. 작가는 이 책에서 불륜이라는 도덕적 타락이나 종교적 맹신, 또는 인종차별 등과 같은 원인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닐 것이다. 이런 사이코패스적인 살인이 소설적 상상에 그치지 않고 현실에서도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는, 잘못된 가치관이 끔찍한 범죄와 살인으로 이어지는 이 사회의 위험성을 우리들에게 경고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또한 누구에게는 선(善)이 다른 누구에게는 악(惡)일 수 있는, 선과 악의 경계가 불분명해진 가치관의 모순을 우리에게 적나라하게 들려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누쿠이 도쿠로, 이 작품으로 물꼬를 튼 이상 앞으로 자주 만나보게 될 그런 작가 리스트에 이름을 올려놔야겠다. 그나저나 자주 만나보고 싶은 추리소설 작가들이 계속 늘어 독서 편식 면에서나 또한 비용 면 - 왜냐하면 읽을 책들이 갈수록 많아지기 때문에 - 에서나 큰일이라고 걱정(?)하면서도 이 작가의 전작들을 인터넷 서점 위시리스트에 벌써부터 올려놓고는 구매 버튼을 벌써부터 만지작만지작 거리는 것을 보면 역시 난 추리소설 마니아 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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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우 화이트 앤 더 헌츠맨
릴리 블레이크 지음, 정윤희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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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가 “그림형제”가 1812년 동화 “백설공주”를 발표한 지 200주년이 되는 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올해 백설 공주를 소재로 한 영화 두 편이 연이어 상영되었는데, “타셈 심” 감독의 <백설 공주(원제 Mirror, Mirror, 2012)>은 극장에서 봤지만 “루퍼스 샌더스” 감독의 <스노우 화이트 앤 더 헌츠맨(Snow White And The Huntsman, 2012)>은 아직 관람을 하지 못했다. <스노우 화이트 앤 더 헌츠맨>은 미국에서 개봉 첫주 박스 오피스 1위를 차지했고 제작사에서 속편 제작을 공식 발표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인기를 끌지 못해서인지 영화 감상평들을 검색해보면 “호평(好評)” 보다는 “혹평(酷評)” - “이 영화는 예고편이 다다” 라는 평가에 공감 댓글이 수십 개가 달려있는 게시글도 있다 - 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영화는 그렇다 치고 원작(原作)인 소설은 어떨까? “릴리 블레이크”의 동명 소설 <스노우 화이트 앤 더 헌츠맨(북폴리오 / 2012년 5월)>이 그 소설이다. 이 작품이 원작 소설인지 아니면 영화가 먼저 제작되고 소설로 나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영상으로 담아내지 못한 스펙터클한 재미를 선사 - 어떤 홍보 기사에서 <반지의 제왕>을 연상시킨다는 문구에 걸맞게 - 하기를 기대하며 영화 포스터를 그대로 옮겨 놓은 책 표지를 열어 읽기 시작했다.

 

 

 성대하게 치러진 결혼식 날 밤 새 왕비인 “라벤나”는 남편인 왕을 칼로 찔러 죽이고는 어둠의 군대를 불러 들여 왕국을 장악하고, 왕의 일곱 살 어린 딸인 “백설공주”는 왕비의 군대에게 붙잡혀 십년 동안 감옥에 갇혀 지내게 된다. 여왕인 라벤나에게도 아픈 상처가 있었으니. 어린시절 백설공주의 아버지인 왕이 일으킨 전쟁 때문에 엄마를 잃고는 엄마가 남겨준 유물인 신비의 거울을 통해 어둠의 힘을 얻어 오빠 “핀”과 함께 마침내 자신의 복수를 이룬 것이다. 라벤나는 자신의 젊음과 마법의 힘을 유지하기 위해 어린 소녀들의 생기(生氣)를 빼앗는데, 감옥에 갇혀 있는 백설공주는 여왕의 영원한 젊음을 위해 언젠가는 목숨을 빼앗길 그런 운명에 처해 있었다. 감옥에 찾아와 자신을 바라보는 여왕의 오빠 핀을 이용해 감옥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백설공주는 한번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다는 죽음의 숲으로 도망치고, 여왕은 핀의 군대와 함께 마법의 숲에서 유일하게 살아 돌아온 사냥꾼 “에릭”에게 공주를 잡아오라고 명령한다. 과연 공주는 어둠의 군대의 추격을 따돌리고 마법의 숲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공주는 무시무시한 여왕의 마법에 맞서 싸울 수 있을까?

 

 

 이 책은 동화 <백설 공주>의 기본 뼈대, 즉 성장한 백설 공주가 결국 자신을 죽이려는 여왕의 음모를 물리치고 나라를 되찾는다는 이야기 골격은 그대로 두는 대신 등장인물들에게 생동감을 불러 넣었다. 즉 백마 탄 왕자님의 도움을 받고서야 겨우 위기를 모면하는, 그동안 수많은 여성 인권론자들의 공분(公憤)을 자아냈던 백설 공주는 검을 들고 군대의 맨 앞에 서서 왕국을 쳐들어가는 여전사(女戰士)로 변신했고, 여왕의 명에 공주를 죽이러 갔지만 차마 죽이지 못하고 대신 동물 내장을 가지고 가서 공주를 죽였다고 속였던 무명(無名)의 사냥꾼은 백설공주를 도와 죽음의 숲을 헤쳐 나가고 공주와 함께 왕국탈환전쟁에 앞장 서는, 또한 공주와 알 듯 모를 듯한 로맨스를 벌이는 사실상의 남자주인공으로 격상해버렸다. 또한 공주를 그렇게 죽이고자 했던 마녀인 여왕은 엄마의 복수를 위해 어둠의 길에 빠진 사연이 있고, 사냥꾼 또한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에 대한 슬픔을 견디지 못해 매일 술독에 빠져 사는 아픔을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이처럼 동화보다 더 풍성하고 생동감 있는 캐릭터 설정이 이 책의 가장 큰 재미이자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결국 캐릭터 설정과 몇 몇 전투 장면들만 추가했을 뿐 그동안 익히 알고 있었던 “백설 공주”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이야기 면에서는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 캐릭터들에게 각각의 사연을 설정하고 전쟁장면들을 끼워 넣었는데도 불구하고 260 여 페이지의 짧은 분량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원작 동화의 기본 구도를 벗어나려 하지 않았기에 그만큼 더 담아낼 만한 이야기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차라리 현대적인 해석을 하고자 했다면 기본 구도를 포기해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로 꾸몄으면 어땠을까? 예를 들어 이야기 무대를 백설공주의 왕국으로 한정하지 말고, <반지의 제왕>처럼 다른 종족들과 여러 왕국 등 새로운 세계관을 구축하여 보다 확장된 공간을 설정하고, 갈등관계도 여왕과 공주라는 이분법적인 구성이 아니라 원작에 없는 새로운 인물들을 창조하여 복합적인 갈등으로 발전시키는 등 말이다. 물론 원작의 기본 구조를 훼손한다는 우려도 있을 수 있겠지만 이 책처럼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이야기보다는 차라리 파격(破格)을 통한 재창조가 더 신선하고 재미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원작 동화를 모르고 읽었더라면 나름 재미있는 판타지 소설로 평가받을 수 있었을 텐데, 너무나도 유명한 원작 때문에 오히려 평가가 깎여 버린 그런 작품이 되고 말았다. 앞서 말한 두 편의 영화를 비교해 본다면 한 편은 영화로 한 편은 소설로 만나 온전한 비교는 아니겠지만 차라리 원작 동화를 가볍게 비틀어 유쾌하고 코믹스럽게 그린 <백설공주> - 인도 영화스러운 마지막 장면이 살짝 당혹스럽긴 하지만 - 에 한 표를 주고 싶다. 물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취향으로 말이다^^ 그러나 실망하기에는 아직 이른 것 같다. 왜냐하면 이야기는 영화사에서 제작을 선언한 2부에서 본격적으로 펼쳐질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때는 소설과 영화, 모두 원작 동화를 완전히 잊게 만드는 센세이션을 일으킬 만한 멋진 작품으로 만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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