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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와 진실의 빛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2
누쿠이 도쿠로 지음, 이기웅 옮김 / 비채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야 여러 가지가 있을 텐데 유독 배우자가 “바람피우는” 것을 “도리(道理, 倫)에 어긋나다”는 의미로 “불륜(不倫)”이라 칭하는 데는 배우자의 정절(貞節)을 강조했던 “유교(儒敎)”적인 이데올로기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렇게 금지(禁止)하는 것이 오히려 상상력을 자극한다고, 불륜은 우리나라 TV 모든 드라마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소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요즘 세태가 달라져서인지 이런 “도리에 어긋난” 불륜을 아름답게 그리고 있는 드라마들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지만 그래도 그동안 드라마 속의 불륜은 가정 파괴의 가장 큰 원인이며 불륜을 저지르는 당시에는 달콤할 지 몰라도 그 끝은 불행하다는 교훈적인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실제로 부모의 불륜 때문에 가정파탄을 경험했던 사람들이 행복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보다 결혼에 대한 혐오감과 두려움이 크다고 하니, 불륜을 저지르는 당사자들에게야 거부할 수 없는 치명적인 유혹이겠지만 남겨진 가족들에게는 영원히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로 남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통곡(慟哭)>, <우행록(愚行錄)>으로 우리나라 추리소설 애독자들에게도 익히 알려진 일본 작가 “누쿠이 도쿠로(貫井德郞)”의 신작 <후회와 진실의 빛(원제 後悔と眞實の色/비채/2012년 6월)>은 아버지의 불륜과 가정 폭력을 경험했던 남자가 불륜을 저지른 젊은 여성들을 “악(惡)”으로 규정하고 끔찍한 연쇄살인을 저지른다는 이야기이다. 어쩌면 흔한 소재이겠지만 누쿠이 도쿠로는 ‘사회파 미스터리 대표작가’라는 명성에 걸맞게 현대 사회에 만연된 각종 부조리와 모순을 그만의 치밀하고 사실감 넘치는 필치로 그려내 우리에게 “특별한” 재미와 생각꺼리를 던져주고 있다.
(이하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하기 바랍니다)
도쿄 한가운데라고는 하지만 어두컴컴한 밤거리로 여성이 혼자 다니기에는 그리 적절한 곳이 아닌 신주쿠구 아카기시타마치에서 온 몸이 칼로 난자당해 피범벅인 젊은 여성의 시체가 발견된다. 시체는 특이하게도 검지손가락이 잘려 나가 있었다. 사안의 엄중함 때문에 합동수사본부가 꾸려지고, 뛰어난 실적으로 “명탐정”이라고까지 불리는 경시청 소속 형사 “사이조” 경위도 수사본부에 합류하게 된다. 경시청, 기동수사대, 지역 경찰까지 합세한 수사는 계속되지만 별다른 단서가 발견되지 않아 갈수록 지지부진해지고 있는 가운데, 두 번째 살인이 일어난다. 역시 젊은 여성에 온 몸이 칼로 난자당하고 손가락이 절단된, 첫 번째 살인과 동일한 형태로 죽임을 당한 것이다. 수사본부에서는 연쇄살인의 가능성이 대두되고, 인터넷 게시판에는 이 살인사건이 최대 이슈로 떠오르며 급기야 살인을 예고하는 게시글까지 올라온다. 수사본부는 인력을 총동원하여 도심 곳곳을 순찰하지만 범인의 예고대로 세 번째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범인은 “손가락 수집가”라는 별칭이 붙는다.
한편 피해자들의 연관 관계를 조사하던 중 주변 인물들이 모 명문 사립대와 연관이 있고, 그중 한 명이 환경대신(大臣; 우리나라의 장관)의 딸임을 알게 되지만 고위층의 압력으로 더 이상의 수사는 중단하게 된다. 그러나 사이조의 파트너이자 첫 번째 살인 사건의 시체를 발견한 지역 파출소 순경인 “오사키”의 부주의 때문에 이런 내용들이 신문에 기사화되고, 사이조는 자택 근신 처분을 받게 된다. 아내와 불편한 사이였던 사이조는 자신의 애인인 “미에이”의 집에 머무르는데, 누군가가 자택근신 중임에도 불륜녀의 집에 머무는 사이조의 사진을 찍어 합동수사본부에 보내고, 급기야 이런 이야기가 다시 신문 기사화되면서 사이조는 결국 사표를 내고 만다. 손가락 수집가의 연쇄살인은 계속되고, 집에서 나와 노숙자 생활을 하던 사이조는 인터넷에서 살인 의뢰를 받은 남자들의 테러에 시달리고, 급기야 딸이 납치되는가 하면 고향으로 내려간 미에미 또한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고야 만다. 과연 이 엽기적인 연쇄살인을 저지른 “손가락 수집가”는 누구일까? 사이조를 경찰에서 내쫓고 그에게 테러를 가하는 의문의 인물은 누구일까? 범인의 정체는 마지막 장을 불과 몇 십 페이지 앞두고 나서야 밝혀진다.
추리소설 마니아를 자처할 정도로 추리소설을 즐겨 읽고 있고, 특히 일본 추리소설을 많이 읽고 있는 데도 이번 신간을 제외하고도 국내에 6권이나 책이 출간된 “누쿠이 도쿠로”를 이제야 만나다니 많이 늦은 셈이다. 그의 전작들에 대한 많은 호평들을 알고 있었고, 나또한 그를 눈여겨보고 있던 터라 드디어 만난다는 반가움과 기대감이 새로운 작가에 대한 낯설음과 경계심보다 한결 컸기에 책을 받자마자 망설임 없이 표지를 열어 읽기 시작한 이 책, 읽는 내내 576 페이지라는 분량의 부담감을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몰입감과 재미를 선사했고, 다 읽고 난 지금 “역시!”라는 감탄과 함께 왜 이 작가를 이렇게 늦게 만났을까 하는 아쉬움을 다시 한번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이 책에 이렇게 열광하게 만든 요인을 꼽아보자면 추리소설 특유의 트릭과 반전의 재미, 사회파 미스터리로서의 묵직한 생각꺼리, 이렇게 두 가지를 꼽을 수 있겠다.
이 소설은 기발하고 엽기적인 살인사건의 연속과 사건들 속에 숨어 있는 쉽게 알아채기 힘든 정교한 트릭과 복선 등 추리소설로서의 재미를 한껏 담고 있다. 특히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밝혀지는 범인의 정체가 가히 충격적이라 할 정도로 인상적인데, 불과 몇 십 페이지 남겨 놓고도 범인이 누군지 도대체 짐작할 수 가 없어 결말이 궁금해 자꾸만 마지막 페이지를 펼쳐보고 싶은 손길을 말리느라 꽤나 애를 먹었고, 마침내 밝혀지는 범인의 정체가 일순 멍해질 정도로 충격적으로 느껴졌다. 많은 추리소설들을 읽어서 어지간한 트릭이나 반전에는 꿈쩍도 안할 것이라고 자부해왔는데, 그런 나를 순간 멍하게 할 정도이니 꽤 강력한 반전이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범인의 정체에 대한 반전은 독자가 책을 읽어가면서 짐작해볼 만한 이렇다 할 단서가 극히 부족해 어떤 면에서는 “반칙”, 즉 “추리소설 공정성” 논란의 여지도 있어 보인다. 물론 범인의 독백 장면들과 사이조와 연관된 사건들 등 몇 몇 단서들이 있긴 하지만 이 단서들만으로 범인을 추리해내기란 가히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기에 그만큼 충격이 더 컸겠지만 한편으로는 속았다는 느낌 또한 지울 수가 없었다.
또한 경찰이 증거 수집과 탐문 수사, 주변 인물들의 연관관계 수사를 통해 진실에 접근해가는 “경찰소설(警察小說)” 로서의 재미와 함께 명탐정이 결국 결말 부문에서 범인의 정체를 밝혀내는 탐정소설의 재미를 함께 맛볼 수 있는 점도 꼽을 수 있겠다. 이 책에서 경찰들은 역시나 수사가 지루하리만치 더디고 범인의 속임수에 우왕좌왕 허둥대기까지 한다. 그러나 작은 단서들을 통해 범인의 실체에 한걸음 한걸음 다가가는 과정은 작가가 치밀한 사전 조사 끝에 이 글을 썼다는 것을 짐작케 할 정도로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고 쏠쏠한 재미를 준다. 물론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런 수사 과정들로 범인의 정체를 짐작하기란 불가능하며 책 속의 경찰들도 그렇게 수고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범인을 밝혀내진 못하지만 말이다. 이 책에서 사건을 해결하는 “명탐정”은 역시 경찰이었지만 경찰의 굴레를 벗어나자 오히려 더 번뜩이는 추리솜씨를 선보인 사이조라 할 수 있겠다. 사이조도 처음에는 피해자의 주변을 수사하는 “감별조”를 맡은 탓 - 특별한 이유 없이 살인 그 자체가 좋아서 행하는 일종의 “쾌락살인”으로 여겨지다 보니 주변을 수사한다고 해서 특별한 연관성을 찾을 수 없기에 사이조는 감별조에 배치 받은 것을 불만스럽게 여긴다 - 도 있겠지만 뛰어난 사건 해결 솜씨로 농담반 진담반 명탐정이라 불리는 그의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이렇다 할 추리솜씨를 보여주지 못하고, 엉뚱한 단서 - 고위 공직자 딸이 연루된 명문 사립대라는 단서 - 에 집착하다가 그만 근신처분을 당하고 결국 경찰에서 쫓겨나기에 이른다. 그런데 오히려 그가 이렇게 이혼을 당하고 노숙자 생활까지 하는 나락에 빠지게 되자 비로소 명탐정으로서의 능력을 본격적으로 발휘한다. 이 대목에서 작가의 현 치안 시스템에 대한 불신(不信)을 엿볼 수 있다고 하면 너무 과장된 해석일 것이다. 노숙자 생활까지 하게 된 사이조는 신문기사들과 동료 경찰에게서 받은 몇 가지 단서들만으로 이 연쇄살인사건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불륜”이라는 것과 함께 자신의 애인까지 살해당하는 연이은 살인 - 애인은 앞서 사건들과 다르게 손가락이 절단되지도 않았고, 칼에 의해 난자당하지도 않아 공통점이 전혀 없지만 - 에서의 이질감을 간파해내 결국 범인의 정체를 추리해내는데 마치 소년 탐정 김전일이 “범인은 너!”라고 지목하는 것 마냥 통쾌함마저 느끼게 한다. 이처럼 경찰 소설과 탐정 소설, 두 가지 장르의 재미는 앞서 말한 결말의 충격적인 반전과 함께 추리소설의 재미를 한껏 느껴볼 수 있게 만드는 요소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에 사회파 미스터리로서의 묵직한 주제의식 또한 빼놓을 수 없겠다. 사실 이 글 첫머리에서 길게 이야기한 불륜은 범인의 살인 행각의 원인이 되긴 하지만 그런 행동에 큰 설득력을 부여하진 않는다. 어릴적 범인처럼 아버지의 불륜과 가정 폭력을 경험했다고 하더라도 현실에서 끔찍한 살인으로까지 이어지는 경우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또한 아내와의 불화 때문에 허울 뿐인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해서 누구나 다 사이조처럼 불륜을 저지르지는 않는다. 이처럼 이 책에서 불륜은 살인의 동기와 주인공의 처지를 설명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일 뿐 주된 주제는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에서 가장 주목해봐야 할 주제는 자신이 겪은 불행을 남에게 전가시켜 그들을 악이라 규정하고 처단하려는 범인의 사이코패스적 사고와 함께 경찰 사회 내부에 만연된 구성원들의 시기와 갈등, 그리고 갈수록 커지고 있는 인터넷 게시판 익명성의 위험 등을 들 수 있겠다. 경찰 사회 내부 갈등과 인터넷 익명성의 위험 등은 많은 분들이 언급해주셨고, 책을 통해서 쉽게 찾아볼 수 있으니 여기선 그릇된 신념의 치명적 위험성만 간단히 언급해보자.
범인은 자신이 신에게서 지상의 악을 처단하려는 사명을 받았다고 생각하고는 자신이 저지르는 살인이 곧 신의 의지라 정당화하며 서슴치 않고 저지른다. 따라서 사이조가 애초 생각했던 것처럼 살인에 대한 쾌감에서 비롯된 쾌락살인이 아니라 그릇된 신념에서 비롯된 일종의 “명예 살인”- 사실 가족의 명예를 위해 저지르는 살인과 의미는 전혀 다르지만 둘 다 잘못된 가치관에서 비롯된 살인이라는 점에서는 같다고 할 수 있다 - 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이처럼 그릇된 신념에 대한 맹신 때문에 범인은 재판 과정에서 정신분열증 환자로 진단받고 교도소가 아닌 정신병원에서 수감생활을 할 것으로 짐작되는데, 문제는 이런 정신분열증 환자에 의한 끔찍한 살인이 현실에서 결코 낯설지 않다는 데 있다고 하겠다. 대표적인 예로 바로 작년에 다문화주의에 대한 혐오로 77명이나 살해한 노르웨이 살인마 “브레이빅”을 들 수 있겠다. 브레이빅도 이 책의 주인공처럼 자신의 행동은 사회와 국가를 지키기 위한 예방적 조치였으며 악의가 아니라 선의로 한 것이라는 발언으로 세상을 경악케 하고 결국 망상성정신분열병 환자로 진단을 받았지 않은가. 작가는 이 책에서 불륜이라는 도덕적 타락이나 종교적 맹신, 또는 인종차별 등과 같은 원인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닐 것이다. 이런 사이코패스적인 살인이 소설적 상상에 그치지 않고 현실에서도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는, 잘못된 가치관이 끔찍한 범죄와 살인으로 이어지는 이 사회의 위험성을 우리들에게 경고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또한 누구에게는 선(善)이 다른 누구에게는 악(惡)일 수 있는, 선과 악의 경계가 불분명해진 가치관의 모순을 우리에게 적나라하게 들려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누쿠이 도쿠로, 이 작품으로 물꼬를 튼 이상 앞으로 자주 만나보게 될 그런 작가 리스트에 이름을 올려놔야겠다. 그나저나 자주 만나보고 싶은 추리소설 작가들이 계속 늘어 독서 편식 면에서나 또한 비용 면 - 왜냐하면 읽을 책들이 갈수록 많아지기 때문에 - 에서나 큰일이라고 걱정(?)하면서도 이 작가의 전작들을 인터넷 서점 위시리스트에 벌써부터 올려놓고는 구매 버튼을 벌써부터 만지작만지작 거리는 것을 보면 역시 난 추리소설 마니아 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