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인을 기다리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4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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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인을 기다리며>는 J.M.Coetzee(1940~)가 1980년 발표한 소설로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작품이다. 나는 쿳시의 책을 4권 가지고 있는데 이번에 그의 작품을 처음 읽었다. 

처음 그의 사진을 봤을 때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떠오르면서 깐깐한 이미지가 만만찮은 사람같아 보였는데, 영국, 미국이 아닌 남아프리카 공화국 작가라는 점이 나의 눈길을 끌었다. 그는 부커상을 최초로 두 번 수상했고 2003년에는 "정교한 구성과 풍부한 대화,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서구 문명의 도덕적 위선을 날카롭게 비판했다"는 평과 함께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나는 작가가 남아공 사람이기 때문에 이 책이 당연히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같은 문제를 다룬 소설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소설은 시간과 공간적 배경, 사건의 실상도 불분명하다 . 3000여 명의 주민이 사는 어느 제국의 변방 도시라는 점 외에는 알 수가 없다. 


소설은 치안 판사인 '나'의 자기 고백의 형식으로 전개되는데 줄거리는 간단하다. 

화자인 '나'는 '한가로운 변경에서 은퇴할 날을 기다리며 소일하고 있는, 제국을 위해 봉사하는 책임감 있는 시골 치안판사이자 관리이다.'(p.18) '나'는 복잡한 일에 얽혀들기 싫고 그저 '조용한 시대에 조용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가 관할하는 조용하고 비교적 평화로운 이 도시에 불안함이 싹트기 시작한다. 야만인들이 장사꾼들을 공격하고 가축을 훔치며 국경순찰대와도 충돌을 일으키고, 급기야 국경 너머 야만인들이 연합해서 제국을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주민들 사이에 공포심은 고조되고 이에 수도에서는 보안청의 제3국 경찰들을 변방에 파견하는데, 졸 대령으로 대표되는 이들은 국경 너머 유목민과 어부들을 잡아들여 고문하고 살인까지 자행한다. 


변방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나'는 그들이 위험한 종족이 아님을 안다. 그들은 '고기나 잡아먹으며 살아가는 어부들'(p.33)이고 또는 이곳에 살다 '제국이 확장되면서 평원에서 산으로 쫓겨난 사람들'(p.121)일 뿐이다. 도시에 번지는 소문은 그저 '야만인들에 대한 히스테리' 때문임을 '나'는 안다. 

'나'는 졸 대령을 위시하여 제3국 경찰들이 벌이는 이 말도 안되는 행보에 분개해 "변경의 불안을 제대로 조사할 수 있도록 변경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파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p.37) 라고 제3국에 비판의 편지를 쓰지만 곧 찢어버린다. '나'는 제국의 모순을 알고 있고 그들의 폭력에 반대하지만, 자신 또한 제국의 일원이기에 그저 고문으로 지친 희생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상처에 약을 발라 주는 거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작품해설에서 역자는 쿳시는 '가해자와 피해자, 식민주의자와 피식민주의자, 백과 흑의 이분법에 의존하지 않고, 체제에 순응하기를 거부하는 진보적인 인물을 내세워 체제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안으로부터 폭로함과 동시에 그것에 대한 자신의 공모성을 부각'(p.270)한다고 말한다.


치안판사인 '나'는 제국주의의 폭력에 반대하는 휴머니스트이지만 자신 또한 제국을 위해 일하는 관리이고 무엇보다 자신의 평안한 안위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의 내러티브를 읽다보면 그 또한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에 물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그것이 온화한 얼굴의 제국주의일 뿐이다. 

졸 대령이 아무 죄도 없는 어부들을 잡아왔을 때 '나'는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며 동정심을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이 '편한 삶과 이국적인 음식'을 잊지 못해 다시 이곳으로 찾아오면 어쩌나 걱정하며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나는 비렁뱅이 부족을 떠맡고 싶지는 않다.'(p36)


밧줄로 목과 목이 묶인 죄수들을 보고 '나'는 등을 돌리고 귀를 막는다. 틈만 나면 잠을 자고 나가서 일을 하며 그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나'는 이 모든 걸 알고 있기에 모른 척 할 수가 없어서 괴롭다. '곡물창고 옆 오두막'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싶지 않지만 또 알아야 한다. '나'의 삶에 즐거움이 사라지고 이런 혼란에 빠진 자신이 수치스럽다.


졸 대령이 잠시 떠나고 '나'는 시내에서 동냥을 하는 야만인 여자를 만난다. 이 여자는 졸 대령이 잡아와서 고문한 유목민들 중 한 명으로 아버지는 죽고 혼자 남아 구걸을 하며 살고 있다. 그녀는 졸 대령으로부터 심한 고문을 받아 발목이 부러지고 눈은 거의 먼 상태다. '나'는 그녀에게 묘하게 끌리고 집으로 데려와 먹을 것과 잠자리를 주며 집안일을 거들게 하지만 이것은 명분일 뿐 나는 이상한 의식에 빠진다. 매일 그녀의 몸을 마사지 해주고 씻기는 의식. 

그녀를 어루만지고 씻기다가 '나'는 잠이 드는데 그것은 '일종의 황홀경'과 같다. 발가벗은 그녀를 씻기고 쓰다듬고 오일을 발라주는 행위는 '나'에게 일종의 의식이자 어떤 위안으로 다가오지만 그는 '무엇 때문에 그처럼 낯선 몸에 끌렸는지 이해할 수 없다.' (p.72) 

그녀의 엉덩이, 가슴, 가랑이를 만지고 자신의 얼굴을 배에 비비는 등 이상야릇한 행위를 하면서도 '나'는 그녀에게 성적인 욕망이 없음을 계속 강조한다. 그저 그녀를 이해하고 싶고 알 수 없는 끌림에 저항할 수 없을 뿐이다. 


이런 '나'의 행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나'는 졸 대령과 같은 고문자들과는 다름을 스스로 증명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녀를 씻겨주고 어루만짐으로써 그녀의 몸에 새겨진 폭력의 흔적을 지우고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 싶었던 것일까...

그러나 '나'는 그녀와 하나가 될 수 없다. '나'는 그녀에게 흥분을 느끼지 못하고 그녀는 나에게 좀처럼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다. 


'그녀를 원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나중에 '나'는 깨닫는다.


그녀가 내 침대에서보다 채소의 껍질을 벗기면서 더 행복해했던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녀는 이미 자신을 조여오는 허위의 독기를 느낀 게 틀림없다. 욕망으로 가장한 질투심과 동정심과 잔인성의 허위 말이다. 충동이 아니라 충동을 애써 거부하는 성행위에서도 허위를 느꼈을 것이다! (p.222)



제국주의자들이 '야만인들'에게 가하는 폭력과 고통은 인류 역사 속에서 수없이 되풀이 되어왔기에 소설 속 이런 상황이 낯설지는 않다. 졸 대령은 잔인하고 폭압적인 식민주의자로서 우리가 익히 생각하는 전형적인 제국주의자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관심을 두고 봐야 하는 인물은 '나'인 치안판사이다. 그는 원주민들을 죄인 취급하며 잔인하게 고문하고 죽이는 졸 대령을 이해하지 못하고 비판한다. 그렇지만 그 또한 제국주의의 폭력에 일조하고 있는 제국의 일꾼이고 그의 내면에는 '야만인들'을 향한 제국주의자로서의 무시와 편견을 품고 있다. 눈 먼 원주민 여자에게 보여준 그의 배려는 허위로 가득차 있었고 자기 자신의 속죄를 위한 것이었다. 


나는 편안한 시절에 제국이 스스로에게 얘기하는 거짓말이고, 대령은 거친 바람이 불며 세상이 험악해질 때 제국이 얘기하는 진실이다. 제국의 통치술의 양면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p.223)


쿳시가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위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제국이 존속하기 위해서는 '진실'(폭력)과 '거짓'(온건함) 둘 다 필요하다는 사실. 따라서 '거짓'으로 표현되는 '나'는 제국이 편안한 시절에 필요한 제국주의자이고, 졸 대령은 제국이 위급할 때 필요한 제국주의자라는 말이다. 

제국이 가진 이 양면성, 특히 거짓말로 대변되는 온건한 제국주의자가 어떻게 제국주의에 일조하는지를 치안판사의 고백을 통해 보여준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문장이다. 


 

제국주의는 무엇을 먹고 사는가? 


제국의 속마음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 있을 뿐이다. 어떻게 하면 끝장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죽지 않고, 어떻게 하면 제국의 시대를 연장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 제국은 낮에는 적들을 쫓아다닌다. 제국은 교활하고 무자비하다. 제국은 사냥개들을 이곳저곳에 파견한다. 밤이 되면, 제국은 재앙에 대한 상상을 먹고 산다. (p.219,220)


제국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낸 상상의 존재인 '야만인들'.

그들은 야만인들이 여자를 강간하고 가축을 훔치며 아이들을 죽인다며 '미친 상상'을 하고 사람들을 공포에 빠지게 한다.  이런 상상은 금새 퍼지고 제국을 유지하는 필수적인 요소이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처럼, 제국은 오지않는 '야만인'을 기다린다. 왜냐하면 '야만인'이 없으면 제국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쿳시의 소설을 처음 읽은 소감은 책 뒷면의 워싱턴 포스트의 평처럼 '비범한 소설'이라는 것. 

모호하면서도 시적인 문장에 작가의 고뇌가 느껴졌고, 역자의 말대로 찬찬히 음미하면서 읽으면 좋을 소설이다. 


2019년 영화로도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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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08-12 15:2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J.M.Coetzee, 젊은 날 보다 노년기에 더 클린트 이스트우드 삘이 납니다!


˝온화한 얼굴의 제국주의˝라 하실 때, 어떤 뉘앙스일지 궁금했는데 바로 다음 문장에서 ˝비렁뱅이 부족˝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네요..

코로나 시대 제대로 영화도 못 봤는데, 쿨캣님 권해주신 요 영화 궁금해집니다! 책은 그 이후로^^

coolcat329 2021-08-12 15:52   좋아요 4 | URL
저는 영화는 못봤습니다 😅
소설은 치안판사의 내러티브로 전개되는데 영화는 그 고뇌와 모순을 어떻게 표현했을지 감이 안잡히네요. 쿳시가 각본을 맡았다고 하네요.

잠자냥 2021-08-12 15:2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이 영화로도 개봉했었군요. 저 젊은이는 누구 역할이었을지...;; 가늠이 안 되네요. 기억력 벌써 가물가물...

coolcat329 2021-08-12 15:55   좋아요 5 | URL
조니 뎁이 잔혹한 졸 대령이고 로버트 패틴슨이 졸의 부하 만델 역을 맡았네요. 가운데 늙은 남자가 치안판사구요~

새파랑 2021-08-12 15:3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쿳시 이분 작품 소개가 많이 되던데 저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표지가 ㄷㄷ 그래도 읽어봐야겠죠?

coolcat329 2021-08-12 15:56   좋아요 3 | URL
저도 참 읽고 싶던 작가였는데 이번에 읽게 됐습니다. 저는 이 책 읽고 뭔지 모르지만 조금 제 스타일인거 같아ㅋㅋ 좋았습니다.

페넬로페 2021-08-12 17:0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자신은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들 역시 우리 눈에는 똑같이 보인다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하네요^^
영화에는 조니 뎁의 다른 모습을 볼 수 있겠어요. 전 존 쿳시의 작품을 아직 읽어보지 않았는데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coolcat329 2021-08-12 17:17   좋아요 4 | URL
무거우면서도 시적인 문장 등... 많은 생각을 하게하는 소설입니다.

레삭매냐 2021-08-12 17:0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옷 요거이가 영화로도 있었나
보네요. 미처 몰랐습니다.

책은 두 번인가 읽었으니 이제
는 영화를 볼 차례인가요.

coolcat329 2021-08-12 17:19   좋아요 2 | URL
두 번 읽으셨죠~저도 한 번 더 읽고싶어요. 영화는 ...보고 싶지 않습니다. 조니 뎁이 무서워요...

scott 2021-08-12 17:2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오! 쿳시 이작품을 시작으로 소년시절 -청년시절-서머 타임
그리고 페테르부르크 대가를 끝으로
이후의 작품은 안 읽게(관심이 끊어져 버림 ㅎㅎ)
최근작들은 실망
번역가이자 교수님 왕은철! 존 쿳시 번역은 믿고 읽을 정도로
왕은철 교수님 존 쿳시 전문가!

coolcat329 2021-08-12 17:47   좋아요 5 | URL
왕은철 이 분이 쿳시 전문 번역가더라구요. ㅎ
쿳시 작품 많이 읽으셨군요. 페테르부르크는 저도 갖고 있는데 그건 좀 더 있다 읽고 다음엔<철의 시대>를 읽어보려구요~~

페크pek0501 2021-08-16 17: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번역하신 왕은철 님이 동아일보에 칼럼을 연재하는데 참 잘 쓰시는 분입니다. 책도 내셔서 한 권 가지고 있어요. 제가 광팬이라서요.
읽어 보진 않았지만 이 책도 문장이 좋을 것 같습니다. ^^**

coolcat329 2021-08-18 20:02   좋아요 0 | URL
왕은철님의 광팬이시군요. 이 분 에세이 도서관에서 본 듯 한데 한 번 찾아봐야겠네요.

scott 2021-09-10 15:4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쿨켓님 이달의 당선 추카 합니다
쿳시옹 작품 완독! 이번 기회에 ^^

coolcat329 2021-09-10 17:35   좋아요 3 | URL
늘 젤 먼저 오셔서 정답게 인사하시는 스콧님~감사드립니다.

mini74 2021-09-10 15: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

coolcat329 2021-09-10 17:36   좋아요 2 | URL
미니님 감사해요~^^

새파랑 2021-09-10 16: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야만인과는 전혀 거리가 먼 쿨캣님 축하드려요 ^^

coolcat329 2021-09-10 17:37   좋아요 2 | URL
새파랑님 감사합니다~☺

초딩 2021-09-11 14: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리뷰 당선 축하드립니다~ ^^
좋은 하루 되세요~

coolcat329 2021-09-11 21:30   좋아요 0 | URL
초딩님 감사합니다. 초딩님도 축하드리고, 주말 즐겁게 보내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