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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ㅣ 다시 읽고 싶은 명작 2
엔도 슈사쿠 지음, 김윤성 옮김 / 바오로딸(성바오로딸) / 2009년 1월
평점 :
품절
"하느님은 무엇 때문에 이런 형벌을 내리시는 겁니까? 신부님, 저희들은 별로 나쁜 짓을 한 적이 없는데 말씀입니다." (p.93)
1966년 발표된 <침묵>은 17세기 카톨릭에 대한 일본의 탄압이 무자비하게 자행되던 시기에 실제로 있었던 일을 다룬, 작가 엔도 슈사쿠(1923~1996)에게 다니자키상을 안겨준 작품이다.
'1587년 이래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종래의 정책을 바꾸어 그리스도교를 박해하기 시작'(p.10)하면서 일본 각지에서 수많은 신자와 성직자들이 고문받고 처형당하기 시작한다.
도요토미에 이어 막부정권을 세운 도쿠가와 이에야스(1542~1616)도 1614년 '모든 카톨릭 성직자를 해외로 추방' 하지만, 신자들을 차마 버리고 갈 수 없었던 37명의 성직자들은 몰래 일본에 남는데, '페레이라도 이들 잠복 성직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비밀리에 당시의 상황을 편지로 전하는데 이 소설은 페레이라 신부가 1632년 3월 22일 보낸 편지로 시작한다.
"다음날부터 고문이 시작되었습니다. 일곱 명은 한 사람씩 펄펄 끓는 연못가로 가 들끓는 물보라 앞에 서서, 그 무서운 고통을 맛보기 전에 그리스도교를 버리라는 훈계를 들어야 했습니다. 추위 때문에 기온 차가 심한 연못은 무서운 기세로 들끓어, 하느님의 도움이 없다면 보기만 해도 기절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커다란 용기를 얻어, 어서 고문하라, 자신들이 신봉하는 종교를 절대로 버리지 않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관리들은 이 의연한 대답을 듣자 죄수들의 옷을 벗기고 두 손과 두 다리를 밧줄로 묶고 커다란 국자로 뜨거운 물을 퍼서 그들 머리 위에 부었습니다. 그것도 한꺼번에 쏟지 않고 국자 바닥에 구멍을 몇 개 뚫어, 고통이 오래가도록 했습니다."(p.13)
이런 끔찍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성직자들과 신자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끝까지 굽히지 않는데, 이러다 온천물이 말라버리겠다는 보고를 받은 나가사키 수령은 일단 고문을 중단하고 이들을 감금시킨다. 이에 페레이라 신부는 그리스도교의 '성스러운 가르침이 대중에게 추앙을 받'아 이런 결말을 얻었다면서 굽히지 않는 자신의 신념을 편지의 마지막에 드러낸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이런 페레이라 신부의 편지는 끊기고, 급기야 그가 '구덩이 속에 달아매는 고문'을 받고 배교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이에 1635년 바티칸에서는 회의 끝에 페레이라의 배교는 '단순히 한 개인의 좌절이 아니라 유럽 전체의 신앙과 사상의 굴욕적인 패배'(p.15)이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성직자를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또한 1637년 포르투갈에서도 젊은 성직자들이 일본으로 입국하려고 하는데, 이들은 수도원에서 페레이라 신부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그의 제자들로 자신들의 은사가 배교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어 사건의 진상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 1638년 3월 25일 일본으로 출발한다.
7월 25일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10월 9일 인도의 고아에 도착한 세명의 젊은 신부는 같은 해 1월 일본 규슈의 시마바라에서 성주의 가혹한 세금과 기독교인들 탄압으로 '3만 5천 명의 카톨릭 신자들이 궐기'하여 난을 일으켰는데, 치열한 전투 끝에 모두가 학살을 당했다는 절망적인 소식을 듣는다. 무엇보다 이 전쟁의 결과로 일본은 포르투갈과 교역을 단절하고 포르투갈 선박의 입항도 금지, 일본으로 가는 길이 불투명해진 상황에서 세 신부는 1839년 5월 1일 포르투갈의 최선단 무역기지 마카오에 도착한다.
마카오에서 일본으로 들어갈 배를 구하기 위해 수소문하던 세 명의 신부는 기치지로라는 수상쩍은 일본인을 소개받게 되고 열병에 걸려 남게 된 호아테 신부를 제외하고, 가르페 신부와 로드리고 신부는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일본에 상륙하게 된다.
여기까지가 40페이지 남짓한 이야기로, 두 신부가 일본에 잠입하여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 17세기 일본의 카톨릭 탄압의 상황을 정리하다보니 서론이 길어졌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로드리고 신부의 편지로 전개되는데, 더 이상 줄거리를 이야기하지 않아도 대충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짐작하리라 생각한다.
다만 한가지 질문을 나 자신에게 해본다.
바다 속에 기둥을 세워 신자를 며칠 간 묶어놔 낮 동안에는 밤새 소금물에 절여진 몸이 뜨거운 햇빛에 타들어가고 밤 동안에는 들어닥친 밀물이 턱까지 차서 추위에 덜덜 떨다 고통속에서 죽어가는 수책형, 사람을 오물로 가득한 구덩이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그대로 두면 바로 죽기에 귀 뒤에 작은 구멍을 뚫어 피를 조금씩 흘리게 해 역시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게 하는 고문, 거적에 사람을 둘둘 말아 배 위에서 바다로 빠뜨려 죽이는 끔찍한 상황앞에서, 이 모든 것이 나의 말 한마디, "배교하겠다"는 나의 한마디에 달려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신도들은 이미 성화를 밟고 배교하겠다고 한 상황에서 탄압자는 말한다.
"우리가 배교시키고자 하는 것은 저런 송사리들이 아니오. 우리나라에는 여러 곳에 아직도 비밀히 가톨릭을 믿는 백성들이 많이 있소. 그들의 마음을 되돌려 놓기 위해서 신부들이 우선 배교를 해야 하오." (p.231,232)
신자들을 가리지 않고 죽여 없애는 형벌이 아니라 신자들이 의지하고 믿는 그 근본을 잘라내려는 교활한 술책 앞에서 성직자는 갈등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을 위해 죽으려고 이 나라에 왔는데 실상은 이 나라 신자들이 자기를 위해 죽어가는 모습에 로드리고 신부는 끊임없이 고뇌하고, 하느님을 향해 대답없는 질문을 반복한다.
'주님, 당신은 왜 잠자코 계십니까? 당신은 왜 언제나 침묵만 지키고 계십니까?' (p.164)
'이것이 순교라고 하는 것인가? 왜 당신은 잠자코 계십니까? 당신은 지금 저 애꾸눈의 농부가 -당신을 위해서-죽었다는 것을 알고 계실 것이다. 그런데도 왜 이런 고요함만 계속되고 있는가? 이 대낮의 고요함, 파리 소리, 어리석고 무참한 일들과는 전혀 아무 관계도 없는 듯이 당신은 모른 척하신다. 그 점이...견딜 수가 없다.'(p.209,210)
급기야 로드리고 신부는 하느님의 존재를 의심하기에 이르는데, 이런 질문은 평상시 종교로 인해 수많은 생명이 사라지는 걸 보면서 내가 했던 바로 그런 생각이었기에 참으로 인상깊었다.
'하느님은 정말로 존재하는가? 만약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먼 바다를 건너 이 불모의 섬에 한 알의 씨앗을 갖고 온 자기의 반생은 우스꽝스럽다 할 수밖에 없다. 매미가 울고 있는 한낮, 목이 잘린 애꾸눈 사나이의 인생도 우스꽝스럽다. 헤엄치면서 신자들의 배를 쫓은 가르페의 일생도 우스꽝스럽다.'(p.240)
자신이 배교하지 않으면 신자들이 다 죽는 상황에서 성직자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나는 종교가 없기 때문에 당연히 열 번도 넘게 배교를 하겠지만 평생을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세상에 봉사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친 성직자에게는 분명 엄청난 시련일 것이다. 일반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부모를 배반하고 그들의 사진을 밟으라고 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그러나 <침묵>은 신도들을 위해 배교하는 신부의 믿음을 말하는 소설은 아니다. 또한 '하느님이 정말 살아있다면 왜 침묵하는가' 라는 의문을 다루는 것도 아니다.
로드리고 신부는 절망과 고난의 매순간에 예수님을 생각하며 자신을 돌아본다. 그리스도는 고난의 순간에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자신을 은전 30냥에 팔아넘긴 유다에게 "가라, 가서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라고 하신 말씀은 어떤 의미일까, 사랑일까? 증오, 노여움일까?
예수님은 유다가 피 밭에서 목 매달아 죽었을때 그를 위해 기도하셨을까? 등 로드리고 신부는 고난의 순간 예수님을 생각하며 신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노력한다.
이 과정은 매우 묵직하면서도 마음을 흔드는 힘이 있다. 로드리고 내면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수많은 질문과 갈등은 종교와 신앙이라는게 인간에게 어떠해야 하는지, 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보게 한다.
내가 좋아하는 성경 구절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라디아서 5장 1절
예수님은 그 어떤 것에도 노예가 되지 말라고 하셨다. 여기에는 종교도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종교의 교리와 원칙에 노예가 되지 말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삶의 주인이 되라고 하시지 노예가 되라고 하지 않으셨다.
교회만 다니면 다 그리스도인인가...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노력하면 그것도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고 느낀 100자평이다.
<깊은 강>에 이어 두 번째로 읽은 엔도 슈사쿠의 소설, 모두에게 권하고 싶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시는 분들이나 십자가만 봐도 이가 갈리는 분들이나 모두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