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Quill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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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브라드 리트리버로 하는게 좋겠어. 강아지키우기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던 사람이라면 이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마음의 확신이 들었을까. 맹도견으로 유명한 종을 티비에서 간혹 보았지만 그 품종은 몰랐다. 골든 리트리버라는 품종은 어데선가 들어본것 같기는 하다. 맹도견의 안내로  무대위의 그랜드 피아노 앞으로 나아가던 소녀, 어느 대기업의 광고 한장면. 마치 공익광고처럼 보였던 그 광고는  대기업의 이미지쇄신에 일익한 사회환원을 역설한 기업광고였다. 건그렇고, 맹인안내견 또는 청각장애자들의 안내견들은 인내와 절제를 겸비해야하는 어려운 훈련과정을 거쳐야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장애우들을 도우는 그들을 보면 왠만한 사람보다 낫다는 생각을 하곤한다. 일본영화에 하치이야기란 게 있었다. 주인을 마중나가 역전에서 주인이 퇴근하기를 기다리던 충성스런 개 하치, 주인이 죽은 뒤에도 그 행동을 계속해 하염없이 주인이 오기를 기다리던 하치의 모습을 기억한다. 참 앙증맞고 귀엽다. 영화포스터의 저 작은 강아지 퀼, 다섯형제중 유일하게 왼쪽 몸통에 하늘을 나는 새 모양의 검정 털이 있는 라브라도 리트리버. 이 영화도 어떻게 보면 영리하고 충직스런 개들의 희생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공익영화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인간과 동물이 나누는 따뜻한 교감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퀼이라는 이름을 얻은 한 강아지의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어떤 삶을 보여주는 감동적인 드라마다. 자신이 도움을 주게 된 한 아저씨가 지병이 악화되어 다시 훈련소에서 생활을 하던 퀼은 마지막으로 자신과 걸음을 걸어보고 싶어한 주인 아저씨가 훈련소에 직접 찾아오자 이리저리 뛰면서 기뻐 어쩔 줄 모른다. 아저씨와 걸었던 30미터는 너무 짧은 거리였지만 퀼에게도 감동적인 순간이었으리라. 아저씨가 하늘나라로 간 뒤 그 후 7년간 훈련소에서 지내던 퀼이 자기를 태어나 1년간 맡아 길러준 부부의 집으로 돌아가 마지막 생의 시간을 보낸다. 10여년을 인간을 위해 봉사해준 그 개들에게 인간이 해주는 보상은 그리 커 보이지 않지만 퀼은 그래도 행복한 마음으로 잠들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라브라도 리트리버가 좋겠어. 그래 아무래도 라브라도 리트리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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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먼 웰스 : 붐비는 지구를 위한 경제학
제프리 삭스 지음, 이무열 옮김 / 21세기북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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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열심히 직장에서 일하고 가정을 잘 꾸려가고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하고 창조하고 발명하고 등등 우리 인간이 일상에서 하는 일들은 일차적으로 개인적 수준에서 잘 먹고 잘살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조금만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좀더 타당하고 숭고한 목적이 있다. 그게 무언가하면 바로 다 함께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인간 세상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않을 것같은 예술창작 같은 분야 역시 다 같이 잘 살기 위함이란 큰 키치아래 활동하는 것이어야 오래 살아남는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제목 커먼 웰스가 뜻하는 바가 이 다함께 잘살기이다. 그런데 왜 당연한 듯한 커먼 웰스가 새삼스레 등장하느냐하면 지구환경이 이제 한계에 다다랐음을 경고하고 그 보존과 지속가능성을 위해 현명한 대처가 필요함을 말하기 위해서다. 환경문제를 언급한 책들이 많이 출간되었고 전직 미국 부통령까지 환경문제 홍보대사가 될 정도로 세인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지구온난화와 온실가스, 대기중 이산화탄소의 양, 빙하가 녹아 세계기후변화를 초래할 것이라는 등 그간의 매스컴의 보도 덕에 이젠 평범한 시민들도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지각한다. 그런데 여태 문제를 부각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확실한 처방을 내려 구체적 묘안을 다루고 있는 안내서는 드물었던 것같다. 저자는 다양한 유엔기구의 실무경험과 연구소의 학자들과의 교류, 아울러 후원단체및 실제 정부책임자들의 친분을 토대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지구환경 정책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이 책에는 상세한 통계자료를 첨부하여 사태의 심각성을 잘 설명하고 있으며 문제해결을 위한 현명한 처방을 제시한다. 그가운데 특히 이 시점에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점들도 드러난다. 이를테면 인간이 지배해버린 지구의 모습을 설명하는 과정에 지구광합성능력의 50프로가 인간의 용도에 맞추어져 전유되고 있다든가,대기중 이산화탄소의 양중 약 4분의 1이 근래 인간활동의 결과물이라는 사실, 또 이용가능한 강물의 60프로가 댐과 관개시스템 등 물돌리기 사업을 통해 인간의 용도에 맞춰졌다는 것이다. 한편 중국의 경제발전이 향후 미국을 앞지를 것이라는 얘기가 있듯이 중국은 연간 이산화탄소 배출량에서 이미 미국을 앞질렀고 앞으로 인간이 일으키는 기후변화의 최대 원인제공자은 중국일 거라는 추정이다. 중국자동차보유율을 추정예산하면 2050년이면 5억 6천만대의 자동차가 중국의 도로에 등장하게 된다니 석유사용과 탄소배출량은 미국에 뒤지지 않는 수준이다.

 

저자는 발전도상국들이 선진국보다 더많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할 것이라고보고  1인당 온실가스배출량이 여전히 많을 선진국들이 발전도상국들을 지원해야한다고 강조한다. 미국의 서점가에 등장한 중국과의 전쟁이라는 주제의 책들을 통해 미국인들이 느끼는 중국의 힘에 대한 위협을 언급하면서 그는 미국의 대외정책의 방향전환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사실 이 책의 목적은 큰 테두리에서 부시정권의 실패한 대외정책을 경고하는 의미가 크다 할 것이다. 그것은 다시말해 지구상에서 공동의 운명과 공동의 부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타인에 대한 지배가 아닌 자신의 번영과 안전에 도움이 되는 커먼웰스라는 궁극적 생존방법을 받아들여야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세계인구의 5퍼센트밖에 안되는 미국이 온실가스의 4분의 1을 배출하고 있는데도 기아, 가무, 말라리아확산 등 온실가스의 영향을 그대로 받는 빈국들에게 발전도상국도 똑타은 의무를 지지 않는한 미국도 배출억제에 착수조차 않겠다고 분개하며 말한 나라가 미국이었다.

 

저비용 탄소관리사례로 저자는 하이브리드 자동차와 탄소포집격리기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전자의 경우는 최근 국내업체에서도 생산을 시작했다는 뉴스를 접했지만 후자는 어떤 식으로 대처하고 있는지 우리역시 국가 차원에서 연구 관리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생물 다양성보존이라는 현안에서 에드워드 윌슨이 제안한 웹을 기반으로 생명백과사전을 만들자는 아이디어는 탁월해보인다. 위키피디아를 만들어가듯 생물종 백과사전을 웹에서 만들어간다면 전 세계의 멸종, 희귀종 생물에 대한 관심이 더욱 확대될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한편, 빈곤의 덫 걷어내기란 장에서 저자는 빈국에 대한 지원을 언급하는데 과거사례로서 한국, 대만에 대한 지원이 성공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1960년대 한국과 대만의 경제적 도약은 1950년대 말과 1960년대초에 미국의 원조뿐 아니라 식민지 시대 일본의 투자도 기여한바 있다고 했다. 일본이 기간시설에 약간의 투자를 했을지는 몰라도 그것은 그들이 더크게 수탈하기 위한 얄팍한 도구에 불구했는데 어떻게 이런 해석이 나올 수 있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아시아 산업화성공에 대한 경제분석가 로버트 웨이드의 견해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이는데 앞으로 우리 경제학자의 철저한 해명과 국제 학계에서 잘못된 인지 부분을 수정하는 노력이 요구되겠다.

 

아울러 저자는 미국의 자유시장적 정부정책이 북유럽의 사회복지국가와 비교할 때 적나라한 문제점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물론 현단계 미국의 사회보장 시스템은 강국 미국의 또다른 어글리 페이스이고 오바마정부도 이 문제의 해결에 고심중일 것이다. 그런데 북유럽 역시 그간의 지나친 사회주의적 사회보장시스템으로 인한 불만이 고조되었고 100년 가까이 시행된 시스템에 이탈과 허용의 범위를 부여하기 시작했다는 소식도 있다. 그리고 실제로 목격한 북유럽은 행복과 온유함이 넘치는 그런 복지국가는 결코 아니었던 것 같다. 인간에게는 거창한 윤리도, 용기있는 행위도, 조율의 미덕도 필요치 않으며 단지 제각각의 자기이익만 필요할 지 모른다.  그러나 극빈층이 시장에 참여할 수 없을때 보다 복잡한 형태의 협력이 필요하고, 공공부문과 비영리부문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제도가 요구된다고 제프리 삭스는 말한다.

 

그는 책의 말미에 평화와 지속가능한 발전의 세계건설이라는 세대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우리 각자가 취할 수 있는 여덟가지 행동을 제시하였다. 그가운데는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만큼까지 여행하라라는 항목도 있다. 다른 곳을 돌아보는 것만큼 이해의 첩경은 없을 것이다. 다른 일곱가지들은 우리가 하고 있는 것 주변에서 누누히 강조되는 것들이기도 하지만 나머지 실천강령이 궁금한 분들은 이 책을 꼭 읽어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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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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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는 소설속에서도 신기하다

 

여태까지 읽은 외국 소설과 약간 다른 데가 있었다. 문체로 말하자면 이건 전혀 장식을 배제한 글쓰기같다. 번역투라서 그런지 아니면 오리지날 문장이 워낙 씩씩한 스타일인지 잘 알지 못하겠다. 하지만 리드믹하다든가 읽기에 수월하여 감칠맛이 난다거나 하는 것과는 완전히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할말만 하는 스타일인데도 책 중반에 가서는 익숙해지면서 내용에 빠져드는 것 무엇때문일까.

이야기는 다소 의외의 소재였다. 연속된 출산으로 마지막 한 아이가 태어나지만 이 아이는 주위의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다. 심지어 부모들조차도 싫은 내색을 감출 수 없게 만드는 아이다. 묘사는 심할 정도로 객관화되어서 아이는 전형적인 괴물처럼 비친다. 유전자의 돌연변이로 태어난 자식이라하더라도 한국소설이라면 장애가 있는 한 아이 때문에 나머지 온 가족이 희생되는 것을 당연하게 감수하는 것이 상식으로 통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그 정과 한때문에 철저히 파괴되는 가정속에 숭고한 희생의 꽃이 피는 것으로 그려질 것이다. 그런데 여기 이소설에서 주변의 반응은 심히 다르다. 할머니와, 재혼한 그녀의 남편은  적극적으로 요양시설에 아이를 보내도록 권유한다. 아버지마저 어머니가 다시 데려온 아이를 외면하고 가정보다는 일에 집중하여 일상을 회피하려 한다.

아이는 자라면서 자신의 부류라고 생각되는 사람에게 친숙함을 느낀다. 아이가 데려온 이상한 눈빛의 친구들, 그리고 그들이 한동안 사라진 뒤에 티비뉴스의 범죄현장에서 보이는 얼굴들. 자신의 아들이 지금 이순간 어딘가 범죄의 현장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부모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 다섯째 아이때문에 나머지 네 아이들도 뿔뿔히 흩어져 부모의 따뜻한 보살핌과 관심을 받으며 자랄 수 없다. 그들은 각기 조부모의 집이나 기숙학교에 살기를 원한다. 

단지 모자라는 괴물같은 한 아이의 출현이 주변 가족들을 비참하게 만든다는 설정은 어찌보면 유치해보일 수 있다. 그런데 이 설정이 소설속이란 언제나 드라마틱하고 멋지거나 아니면 너무나 상상력이 지나친 판타지라는 선입관에 기초해서 볼 때 비정상적이라는 것이다. 현실적이라면 이런 주제가 더욱 현실적일 수 있는 게 아닌가. 의도되지 않은 우연의 사건에 의해 우리의 삶은 기괴한 방향으로 흘러가곤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합리적으로 대처하고 싶어도 우리 힘으로 되돌릴 수 없는 어떤 것에 의해 휘둘릴 수 밖에 없는 경우도 허다한 것이다. 주인공 두 남녀는 멋진 집을 사서 많은 아이들을 낳아 행복하게 사는 것이 꿈이었다. 그들은 세계적인 무언가를 만들겠다거나 대단한 어떤 사람이 되고싶어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꿈이었는데도 그들의 삶은 운명의 고약한 수레바퀴아래에 깔리고 만 것이다.

그렇다면 이 괴물아이는 도대체 무얼까. 이 대상은 무한히 동정을 표명해야하는 장애아동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이 아이는 인간의 유전자속에 잠재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충동적인 원시적 본성이 두드러진 기형의 모습을 나타낸다. 범죄형 인간은 다른 범주의 족속이라고 말하자는게 아니라, 우리가 도덕적 해이와 폭력의 예찬을 경주하다가 급기야 미래사회에 직면하게 될지도 모르는 우리자신의 한 모습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또한 우리가 수면위로 떠올리지는 않았지만 우리 자신의 내부에 감춰져있는 어두움의 요소는 아니었을까. 작가는 등장인물 그 누구의 편도 아니고 그 누구에게도 우위성을 두지 않는다. 그저 부모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자연스런 대사와 의지를 표현할 뿐이며 나머지 네 아이들도 그들 나름대로 입장에서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대로 나타내지고 있다. 그것이 괴물아이에게 일말의 동정표도 던지지 않는 작가의 입장을 설명한다. 처절할 정도로 거리를 유지하면서 독자가 혼자 판단하고 느끼기를 요구한다. 

작가는 두가지 사건에 연유하여 이 소설을 착안하였다고 한다. 하나는 빙하기의 유전자가 우리에게 전해져온다는 한 인류학자의 말이었고 다른 하나는 세아이르 낳고 네번째 낳은 아이때문에 다른 아이들을 망쳤다고 한 한 어머니의 하소연을 실은 신문기사였다. 동기는 단순했고 시작은 부산스럽지 않았으나 다된 소설은 왠지 착잡하면서 섬뜩한 기분을 자아낸다. 독자의 몫이 큰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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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본성에 대하여 사이언스 클래식 23
에드워드 윌슨 지음, 이한음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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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계의 새로운 조짐을 엿보기 시작한게 몇년되었다. 이타적 유전자를 필두로 해서 도킨스의 책들, 그리고 진화생물학쪽의 책들까지 획기적인 시각을 제시해준 서적들이 조금씩 쌓여갔다. 모두 우연한 기회에 구매하거나 선물받거나하여 읽게된 것들인데 세상보기의 폭을 훨씬 넓혀준 계기가 되었다. 윌슨의 책은 통섭에서 처음 접했고 그의 초기 저작들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다.

 

사회생물학이 75년에 이 책이 78년에 쓰여졌으니 무려 30여년 전 책이다. 그런데 그간에 읽었던 책들이 다루고 있던 내용이 여기에 오롯이 원전으로 들어가 있을 줄 미처 몰랐다. 그가 분석한 인간행동의 기본 네가지 범주(공격성,성, 이타주의, 종교)는 그 후의 많은 저작들이 다루는 주제가 되었던 것이다. 이 책의 제목에 등장하는  인간본성이란 윤리, 철학의 문제이지 어찌하여 생물학의 연구대상일 수 있나 의심할 수 있다. 자연과학자인 저자가 어떻게 철학자나 사회학자들이 언급할만한 주제로 책을 낼 수 있을까 궁금해질 수 있다. 개미연구의 대학자로서 윌슨은 사회적 곤충의 연구를 통해 생물학과 사회과학의 통합을 통해 새로운 통찰을 제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인간에 대한 보다 참딘 정의는 생물학적 진화라는 창을 통해 가능하고 또한 그런 정의에 바탕을 둔 윤리를 탐구하여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무한한 반감과 반대의견을 낳을 수 있었기에 그는 이런 기준하의 인간본성연구가 지닌 딜레마를 언급한다. 우선 인간을 포함한 어떤 종도 자신의 유전적 역사가 부과한 의무를 초월하는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한다는 것이다. 심미적 판단과 종교신앙의 선택도 인간조상들이 진화를 거치면서 당시 환경에 적응한 산물이란 것이다. 뇌는 유전자의 생존과 번식을 위해 존재하며 인간의 정신은 생존과 번식을 위한 장치이며 이성은 그 다양한 기능을 가진 장치의 하나라는 주장은 기존의 학계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을 것이다. 하지만 21세기초의 인간연구는 더이상 철학의 업무만이 아니게 되었고 우리는 생물학을 비롯한 자연과학의 전 영역을 토대로 하지 않고서는 우리 자신을 온전히 헤아려낼 수 없음을 잘 알게 되었다.

 

이어서 저자는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에 내재하는 윤리적 전제들을 선택해야하는 딜렘마를 이야기한다. 우리의 뇌에는 우리의 윤리적 전제들에 심층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주는 타고난 센서와 모티베이터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근원에서 본능으로 진화해 윤리의 모습을 갖추어갔다는 것이다. 기존의 철학자들은 이 윤리체계를 결과된 모습만으로 다루었으나 이제 기원의 관점에서 연구되어야 한다. 즉 윤리적 실천행위들은 수천세대동안 자연선택을 거치면서 상당 수준까지 프로그램되었고 과학의 과제는 정신의 진화사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나아가 "그 프로그램속에 짜여진 속박의 치밀함을 측정하여 뇌에서 그 것의 원시 프로그램을 찾아내고 그 속박의 중요성을 해석하는 것이다. "

 

말하자면 인간본성을 이루는 지침들은 생물학적 본성에 대한 탄탄한 경험적 지식을 통해서 시작되어야한다는 것이다. 개인은 문화적 환경과, 사회적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된다. 유전적으로 결정된 사회적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윌슨은 그 설명 대상이 되는 행동은 인간의 행동 중 가장 보편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덜 합리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문화라는 껍질로 위장하기 가장 어려운 타고나 생물학적 현상들을 함축하는 것들이다. 근친상간 금기, 상승혼, 여아살해등이 그 예들이다. 문화적, 비문화적 지체자에 대한 연구, 유전적 다양성과 그 변이에 대한 연구등은 인간행동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해줄 수 있다. 여기서 그가 제시하는 행동의 인종적 차이라는 질문은 미묘한 감정적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라는 단일 교배체제내의 한 종임을 상기시킴으로써 생물학적 통일성을 강조한다. 유머러스하게도 그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현존 또는 가상의 호모 슈퍼부스라는 우월 종의 출현등을 언급하면서 그 갭에 대한 탁월한 설명을 이루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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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시스터즈 키퍼 - My Sister's Kee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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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동이별이라는 제목으로 나온 소설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보았던지라 책이 준거가 되는 걸 어쩔 수 없다. 사실 책에선 의외의 결말이 생뚱맞다는 느낌도 살짝 있었다. 너무 파격이 아닐까하는 생각이었지만 형제간의 사랑의 의미와 희생이 상징하는 경건한 의미등 작가의 의도를 따져보고 싶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영화에선 이 반전이 거북했을 것이다. 반전없이 난치병에 시달리는 한 소녀의 슬픈 이야기로 그려진다. 동생의 항의는 결국 언니를 위한 것이었고 영화는 맞춤아기에 대한 문제제기로 시작했다가 가족애라는 주제로 끝을 맺는다. 물론 이 부분은 책도 마찬가지이나 영화에선 동생의 이야기는 더욱 축소되어 있다. 유전자조작에 의한 맞춤아기에 대한 논쟁을 맛보고싶어 극장문을 두드린 관객은 실망이 클 것이다.

 

영화는 눈물샘을 심하게 자극한다. 시한부의 삶을 사는 출혈이 일상이 된 소녀의 모습은 잠시도 쉬지않고 흐르는 눈물을 주체못하게 만든다.  영화에는 마지막 사랑을 나누는 두 류케미아 소년과 소녀의 만남은 더욱 간절하게 부각되어진다. 배역은 적절하게 짜였고 호흡도 수준급이다. 반면 변호사의 개인적 이야기는 제외되었는데 -또 배역인 알렉 볼드윈은 상상한 것보다 뚱뚱한 체구여서 과장된 느낌이 들었고- 오히려  변호사 이야기가 다른 줄기로서 이어졌다면 영화역시 더욱 풍부해졌을텐데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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