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는 소설속에서도 신기하다 여태까지 읽은 외국 소설과 약간 다른 데가 있었다. 문체로 말하자면 이건 전혀 장식을 배제한 글쓰기같다. 번역투라서 그런지 아니면 오리지날 문장이 워낙 씩씩한 스타일인지 잘 알지 못하겠다. 하지만 리드믹하다든가 읽기에 수월하여 감칠맛이 난다거나 하는 것과는 완전히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할말만 하는 스타일인데도 책 중반에 가서는 익숙해지면서 내용에 빠져드는 것 무엇때문일까. 이야기는 다소 의외의 소재였다. 연속된 출산으로 마지막 한 아이가 태어나지만 이 아이는 주위의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다. 심지어 부모들조차도 싫은 내색을 감출 수 없게 만드는 아이다. 묘사는 심할 정도로 객관화되어서 아이는 전형적인 괴물처럼 비친다. 유전자의 돌연변이로 태어난 자식이라하더라도 한국소설이라면 장애가 있는 한 아이 때문에 나머지 온 가족이 희생되는 것을 당연하게 감수하는 것이 상식으로 통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그 정과 한때문에 철저히 파괴되는 가정속에 숭고한 희생의 꽃이 피는 것으로 그려질 것이다. 그런데 여기 이소설에서 주변의 반응은 심히 다르다. 할머니와, 재혼한 그녀의 남편은 적극적으로 요양시설에 아이를 보내도록 권유한다. 아버지마저 어머니가 다시 데려온 아이를 외면하고 가정보다는 일에 집중하여 일상을 회피하려 한다. 아이는 자라면서 자신의 부류라고 생각되는 사람에게 친숙함을 느낀다. 아이가 데려온 이상한 눈빛의 친구들, 그리고 그들이 한동안 사라진 뒤에 티비뉴스의 범죄현장에서 보이는 얼굴들. 자신의 아들이 지금 이순간 어딘가 범죄의 현장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부모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 다섯째 아이때문에 나머지 네 아이들도 뿔뿔히 흩어져 부모의 따뜻한 보살핌과 관심을 받으며 자랄 수 없다. 그들은 각기 조부모의 집이나 기숙학교에 살기를 원한다. 단지 모자라는 괴물같은 한 아이의 출현이 주변 가족들을 비참하게 만든다는 설정은 어찌보면 유치해보일 수 있다. 그런데 이 설정이 소설속이란 언제나 드라마틱하고 멋지거나 아니면 너무나 상상력이 지나친 판타지라는 선입관에 기초해서 볼 때 비정상적이라는 것이다. 현실적이라면 이런 주제가 더욱 현실적일 수 있는 게 아닌가. 의도되지 않은 우연의 사건에 의해 우리의 삶은 기괴한 방향으로 흘러가곤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합리적으로 대처하고 싶어도 우리 힘으로 되돌릴 수 없는 어떤 것에 의해 휘둘릴 수 밖에 없는 경우도 허다한 것이다. 주인공 두 남녀는 멋진 집을 사서 많은 아이들을 낳아 행복하게 사는 것이 꿈이었다. 그들은 세계적인 무언가를 만들겠다거나 대단한 어떤 사람이 되고싶어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꿈이었는데도 그들의 삶은 운명의 고약한 수레바퀴아래에 깔리고 만 것이다. 그렇다면 이 괴물아이는 도대체 무얼까. 이 대상은 무한히 동정을 표명해야하는 장애아동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이 아이는 인간의 유전자속에 잠재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충동적인 원시적 본성이 두드러진 기형의 모습을 나타낸다. 범죄형 인간은 다른 범주의 족속이라고 말하자는게 아니라, 우리가 도덕적 해이와 폭력의 예찬을 경주하다가 급기야 미래사회에 직면하게 될지도 모르는 우리자신의 한 모습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또한 우리가 수면위로 떠올리지는 않았지만 우리 자신의 내부에 감춰져있는 어두움의 요소는 아니었을까. 작가는 등장인물 그 누구의 편도 아니고 그 누구에게도 우위성을 두지 않는다. 그저 부모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자연스런 대사와 의지를 표현할 뿐이며 나머지 네 아이들도 그들 나름대로 입장에서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대로 나타내지고 있다. 그것이 괴물아이에게 일말의 동정표도 던지지 않는 작가의 입장을 설명한다. 처절할 정도로 거리를 유지하면서 독자가 혼자 판단하고 느끼기를 요구한다. 작가는 두가지 사건에 연유하여 이 소설을 착안하였다고 한다. 하나는 빙하기의 유전자가 우리에게 전해져온다는 한 인류학자의 말이었고 다른 하나는 세아이르 낳고 네번째 낳은 아이때문에 다른 아이들을 망쳤다고 한 한 어머니의 하소연을 실은 신문기사였다. 동기는 단순했고 시작은 부산스럽지 않았으나 다된 소설은 왠지 착잡하면서 섬뜩한 기분을 자아낸다. 독자의 몫이 큰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