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시선>을 읽고 리뷰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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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시선
이승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숫사자는 달랐다. 그의 갈기는 용모의 수려함을 더하는 요소가 아니었다. 단지 사냥능력이 퇴화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목덜미에 수북히 난 털일 뿐이었다. 그의 머리는 크기만해서 늘 먹이사냥에 악조건이 된다. 이에 반해 암사자는 딸들과 무리지워 새끼를 함께 기르고 먹이사냥도 함께한다. 그들은 사냥한 먹이의 일부를 외부의 침입을 견제해주는 조건으로 숫사자에게 바친다. 숫사자는 가끔씩 암사자와 새끼들의 무리옆에 있고 싶어한다. 암사자들은 숫사자의 개입을 경계하지만 어떨땐 방관하기도 한다. 숫사자가 여유있게 암사자무리가 진을 치고있는 숲언저리에 드러누워 낮잠을 즐기자 새끼사자들이 아빠쪽으로 가서 치대고 놀자고 부비고 난리였다. 그러자 숫사자는 참지 못하고 새끼들을 후대끼고 으르렁 포효하기까지했다. 노골적으로 성가심을 표현하는 숫사자를 암사자들은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얼른 새끼들의 앞으로 나서서 숫사자를 응징해 쫓아버렸다. 숫사자는 안정된 한낮 오수시간을 이렇게 해서 스스로 버리고 만 것이다. 연초에 한 공중파 TV가 특집으로 방송한 아프리카 초원의 사자들의 생활을 그린 프로그램에서 본 장면들이다.
수컷들의 생물적 속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숫사자의 모습은 가시고기와 같은 헌신적인 아버지상이 회자되는 요사이 인간종에서는 낯선 행동패턴일까. 글쎄, 가시고기는 새끼들이 부화해 자신을 먹이로 살아가게 해서 망정이지 자란 물고기의 모습으로 자신의 자식을 볼 수 있게 진화했다면 사정은 좀 달라지지 않을까. 수많은 알의 부화를 지극정성으로 돌보던 아빠 황소개구리가 오물조물 뒷다리가 나고 성체의 모습을 갖춰가기 시작하는 자식들을 어느 순간 마치 다른 성격의 소유자로 탈바꿈해 미친듯이 마구 잡아먹어버리는 경우처럼 되지 않으라는 법도 없다. 남자들은 아들이 어릴때 함께 공놀이도 하고 씨름도 하고 잘 놀아준다. 아들에게 아빠는 롤모델이 되고 동료가 되고 친구도 된다. 그런데 소년기를 거쳐 청년기로 접어드는 아들은 대체로 아버지에게 경쟁상대로 의식된다. 이전처럼 말하기도 함부로 안되고 사춘기라 더욱 성질 부리는 자식의 눈치를 볼 때도 있다. 아니면, 어떤 아비는 자식을 무력으로 제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륙년전 햄스터를 기른 적이 있었다. 한쌍이 들어와 무수한 새끼를 거느렸는데 한번은 새끼중 흰색털이 눈부시고 유독 잘먹고 튼튼하던 한 녀석이 새끼무리를 제압해 약자를 괴롭혀서 아비가 있는 우리에 넣어줬다가 이튿날 아비에게 무참히 희생된 것을 목격하였다. 동물적 본성을 사람이라고 거스를 수 있으랴.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고 싶어 고국을 찾는 해외 입양아들, 낯선 곳에서 낯선 무리들속에서 정체성을 찾지 못해 괴로워했을 그들의 고독한 시간들이 살갗을 타고 전해지지 않던가. 어린시절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지워진 부모의 자리는 공간적으로 위치하지 않더라도 한 인간의 마음과 정신에 무의식에 상처와 고통과 무감각으로 자리한다. 특히 남자들에게 있어 아버지의 자리는 그 누구도 채워줄 수 없다. 그저 아버지 그 실체만이 대응할 수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 꿈에서 아버지가 함부로 아무곳에서나 오줌을 누면 안된다고 한 것에 대해 갈등하나 결국 참지 못해 눈 오줌의 웅덩이속에서 아버지의 묘비를 보는 장면은 아버지의 가르침에 복종하지 못한 어리석은 아들의 죄의식을 묘사한 부분이다. 평소에 의식하지 않았다고 여겼지만 그의 마음 저변에는 항상 아버지에 대한 해결되지 못한 불안과 갈망이 끈적거리고 있었다. 은퇴한 노교수가 아버지가 없다라는 말에 아버지의 사망을 연상하듯이 죽지않는 한 아버지는 지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아버지는 아버지와 같이 있는 집에서는 섹스도 자유롭게 할 수 없는 대상이다. 나바호족의 아버지는 고생고생 자신을 찾아온 쌍동이 아들들에게 온갖 시련의 과제를 주고서 마침내 왜 자신을 찾아왔느냐고 질문을 했다. 이세상 아버지들의 본성은 항상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은 아버지의 권리와 의무이다. 어떤 아버지는 이를 사용하지만 어떤 아버지는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아들들은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을 권리나 의무가 없다는 것이다. 아들들은 그저 아버지의 존재를 찾을 뿐이다. 사랑의 유무에 상관없이 그저 아들들은 추구한다. 사랑하다는 아들에게 속한 동사가 아니다. 아들들은 찾도록 운명지워진 자들이다. 바위산, 갈대숲, 선인장밭, 끓는 사막을 통과해......
기독교의 신을 믿는 사람들이 왜 그토록 아버지를 찾을까. 인간에게 있어 신의 위치는 그 어느것도 대신할 수 없다. 그저 아버지인 기독교의 신만이 그 자리를 채울 수 있다. 이 소설을 보다 확대한다면 나는 작가 이승우가 아버지인 절대자 신에게 도달하고픈 마음을 그렸다고 생각한다. 책의 마지막장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요양하던 천내의 숲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내가 꿈속에서 보았던 숲이 천내의 숲이라는 걸 나는 꿈을 꾸는 동안에도 알고 있었다. 나는 그 숲속에 들어가 있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가장 깊은 곳, 하늘을 받치고 선 키큰 나무들과 투명한 햇빛이 큰 품이 되어 껴안는 가장 오래된 시간의 정적속에 들어가 있고 싶었다. 그곳에서라면 아무것도 갈망하지 않고 무엇에도 쫓기는 일 없이 그저 존재할 수 있을 것같았다. 한 그루 나무처럼 햇빛에 휩싸인 채 다만 존재하는 것이 가능할 것같았다. 그 곳에서라면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할 말이 없는' 상태에 도달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같았다."
현실의 아버지는 자신에게 용서를 구하거나 자신을 반겨주지 않는다. 그런 모습은 많은 아버지중 사랑의 권리와 의무를 사용하지 않는 한 아버지로 보인다. 그는 그 아버지가 밉다거나 비도덕적이라고 평가하지 않는다. 그저 그는 아들의 길을 갔던 것이다. 찾는 자의 길을. 하지만 그는 이제 말하고 싶지 않은 어떤 것을 가슴에 담고 있는 사람이 더이상 아니었다. 그는 이제 할 말이 없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처럼 인간은 바위산과 갈대밭과 선인장밭과 끓는 사막을 지나 절대자에게 다가가길 원한다. 이 아버지는 우리를 사랑하기도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는 찾아간다. 뭔가 해야할 말이 가득하므로. 우리가 이 아버지를 만난다면 정녕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 할 말이 더이상 없는 상태가 될 수 있을까. 아니 대체 정말 이 아버질 만날 수는 있을까.
카프카의 성에 나오는 측량기사가 결국 성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얘기, 그리고 독일로 출장을 갔다 좋아하는 작가 카프카의 집을 방문하려고 일부러 프라하까지 가지만 결국 기차시간때문에 황금소로의 카프카 집을 눈 앞에 두고 돌아올 수 밖에 없었던 한 여행기의 주인공 얘기처럼, 우리는 그저 찾는 자의 운명에 순응하면서 살아갈 뿐인지 모른다. 나는 기독교적 유일신을 그 아버지로 해석하고 싶지만은 않다. 불완전한 인간이 도달하고자 하는 대상으로서 아버지를 읽고 싶다. 요즘 유행하는 생각처럼 그런데 그 아버지는 숫사자처럼 황소개구리 아비처럼 본능에 충실한 생물학적 대상일 수도 있으리라. 심지어 우리가 추구할 수 밖에 없는 찾는 자로서의 운명도 진화된 본능인 것을. 이렇게 되면 아버지라는 대상보다 찾고 있는 '나'가 더 핵심이다. 이 소설의 핵심도 바로 아버지로부터 해방된 '나'가 아니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