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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물고기
권지예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월
평점 :
품절
작년여름 이 작가의 단편집을 보았다. 날렵한 글쓰기의 맛을 보여주었지만 주인공들이 거의 불륜의 덫에 허덕이는 모습들이어서 뒷맛은 그리 개운치 않았다. 그리고 왜 그리 다 죽음을 친구삼는지 이야기전개에서 최고의 드라마틱 장치가 죽음이고 모든 인간이 피해갈 수 없는 궁극의 목적지이긴하나 등장인물들이 딱해보일 지경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미디어에 새 소설집 광고가 뜰때 그러려니했고 책 내용이 살짝 언급된 신문 기사에선 아직도 이런 얘기들이구나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 책은 인연이 닿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질긴 인연이었다. 또 읽게 되다니.
솔직히 말해 다 읽고 나서도 별로 상쾌한 기분이 들지 않는다. 시간도 약간 아깝다는 생각도 든다. 이야기의 초반부는 얼굴이 화끈거릴정도로 통속 연애소설이었다. 과연 시작을 이야기꾼에 속하는 이 작가가 쓴게 맞나 싶을 정도였다. 왼편 책장들의 두께가 약간 생기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다빈치코드 스타일로 가려고 애쓰고 있었다. 다빈치코드처럼 끝까지 답을 숨기는 기교를 더 부렸다면 추리소설이라고 생각하기에 나았을까.
이야기는 어린 시절 양부의 만행때문에 상처를 안은 다중인격의 주인공이 저지른 일들을 추적하면서 해결되어간다. 러브스토리라고 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그리고 사랑할 운명에 놓일 수 밖에 없는 두 사람의 인연이란 주제도 이야기의 전언이라면 할 말이 없다. 그런데 지금이 21세기인데 왜 1930년대 순애보같은 소설을 읽어야하나 답답하다. 안타까울 뿐이다.
워낙 영화라는 미디어가 파급력과 영향력이 뛰어나다 보니 소설 하나 써서 수지가 안맞다고 생각하는지 소설가들이 써놓은 글이 거의 영화대본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다빈치코드를 읽으면서도 한 장면 한 장면 전개되는 시각적 효과를 느꼈고(다빈치 코드가 쓰인 의도는 그것 만으로도 관심의 중심이 되었고) 조디 피콜트의 소설들을 보면서도 이건 책이 아니라 비쥬얼 스토리를 접한 듯(피콜트가 선정하는주제들은 언제나 사회적 이슈이고 그 이슈를 치우침없이 적절히 묘사한다) 하였다. 원래 미국 작가들은 독자들이 영화적 장면을 소설에서 바란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짐작했었다. 그리고 소설책이 잘 팔리는 조건은 영화화를 전제로 한 것같은 흐름을 보여줄 때일지도 모른다. 이 책이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텔미썸싱같은 영화 한편이 되기는 할 것이다.
그런데 영화 1시간 30분 보는 것보다 소설 1시간 30분 보는 시간은 더 소중해야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보여지는 것을 보는 시간보다 내가 행간을 읽으며 뜻을 찾는 시간은 더 중요하니까. 그래서 소설에는 독자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장치가 더욱 분명히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 내 입장이다. 나는 심심풀이로 소설을 읽지 않는다. 만일 심심풀이 정도로 읽히길 바라고 글을 쓰는 사람이 쓴 소설이라면 나는 결코 읽지 않겠다. 유치하게 감동을 더 주세요하고 부탁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한 군데라도 공감이 되어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는 부분이 있으면 된다. 그렇다면 이 소설 여주인공의 친구인 혜경이 말한 순 3류 연애소설이 되지 않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