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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행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정태원 옮김 / 태동출판사 / 200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야행>을 읽는 동안 두 가지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왜 제목을 ‘백야행(白夜行)’으로 했을까?
둘째 권을 읽을 즈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백야행’은 말 그래도 ‘하얀 밤을 거닐다’라는 뜻입니다. 좋은 제목입니다. 그런데 굳이 일본어 원제목을 고집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편집자에게 묻고 싶습니다. 뜻도 풀어 쓴 것이 훨씬 잘 와 닿고 어감도 좋지 않나요?
왜 제목을 ‘백야행’으로 했을까?
마지막 셋째 권을 읽을 즈음 또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이번에 떠오른 의문은 책을 출간한 국내 출판 편집자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작가인 히가시노 게이고에게 묻는 말입니다. 당시은 왜 제목을 ‘백야행’이라고 했는가?
친절하게도 히가시노 게이고는 자기가 이 작품의 제목을 왜 ‘백야행’으로 했는지 서너 차례에 걸쳐 노골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다음에 인용된 글처럼 말입니다.
똑같은 질문에 대한 기리하라의 대답은, 한낮에 걷고 싶어, 라는 것이었다.
초등학생 같아, 라며 히로에는 기리하라의 대답에 웃었다.
"기리하라 씨, 그렇게 불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어요?"
"내 인생은 백야(白夜) 속을 걷는 것 같으니까" - '중'권 141쪽
주인공의 입을 통해 이렇게까지 친절하게고 구체적으로 제목의 의미를 설명하는데 이해하지 못하면 바보죠. 그런데 전 선뜻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제목의 의미는 이해 할 수 있었지만 주인공의 심정을 눈곱만큼도 공감할 수 없었기 때문이죠.
적어도 멋들어진 제목을 생각한다면 이렇게 까지 주인공 료지와 유키호의 심리를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백야행>이라는 제목은 평생 악행을 저지르고 살아온 주인공들의 심정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주인공 료지와 유키호의 심리적 고통이 전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드러나지 않고 있습니다. 앞서 인용한 글처럼 노골적이며 깊이 없는 대화로 제목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전부입니다.
산발적으로 발생하는 사건들의 배후에는 언제나 주인공들이 있습니다. 사건의 실체에서 주인공들이 차지하는 위치는 적절하고 흥미롭습니다. 그런데 작가는 두 주인공의 포지셔닝에만 신경을 씁니다. 용서받지 못할 악인의 길로 들어선 그들의 불운과 고독함, 죄의식을 뜻하는 제목을 사용하고도, 정작 그와 관련된 주인공의 심리 묘사는 전무합니다. 사건의 진상을 뻔히 짐작할 수 있고, 료지와 유키호의 관계가 명백히 드러난 마당에도 작가는 술래잡기 놀이로 독자의 시선을 잡아둘 뿐 제목에 대한 배려는 전혀 하지 않더군요.
한마디로 이 작품은 본 모습에 어울리지 않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감상적인 제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덕분에 읽는 내내 공허하고 속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아예 ‘그림자 살인사건’과 같은 제목을 붙였다면 이렇게까지 허망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백야행>은 가공할 만한 책읽기의 속도를 보장합니다. 그 이유는 사건이 하나둘 벌어질수록 주인공들의 실체가 조금씩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초반 누가 주인공인지조차 헷갈릴 정도로 많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이야기가 전개되는 패턴이 눈에 익으면 그야말로 술술 읽히죠. 이때부터 독자들도 본격적으로 술래잡기 놀이에 동참하게 됩니다. 눈을 가린 독자들을 요리하는 작가의 솜씨는 칭찬할 만 합니다.
하지만 술래잡기 놀이가 끝나고 안대를 풀고 나면 허망하기 그지없습니다. 드러난 주인공의 모습이 알맹이가 없는 껍질뿐이라는 걸 깨닫게 되죠. 류지와 유키호는 실체가 없는 그림자나 다름없습니다. 그들 내면에 자리한 상처와 고뇌는 안대를 한 독자의 상상과 기대 속에만 있었던 겁니다. 작가는 애초에 류지와 유키호의 내면은 안중에 없었기에 만들어놓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뒷맛이 씁쓸합니다. 서둘러 이 작품의 책장을 넘긴 이유가 이야기의 끝이 궁금했던 것이지, 결코 류지와 유키호가 만들어 놓은 ‘하얀 밤’에 전적으로 몰입하고 공감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비로소 깨달은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