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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벤저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0-1 ㅣ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0
프레데릭 포사이드 지음, 이창식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세상에! 이렇게 재미있는 책이 무려 1년이 넘도록 책장에서 썩고 있었습니다. 효율적이지 못한 책의 두께와 센스 없는 표지 디자인, 호기심이라곤 1%도 자극하지 못하는 제목, 거기에 상투적인 광고 문구가 이구동성으로 저에게 주문을 걸더군요. ‘다른 책을 먼저 읽는 게 어때~~~’ 그런데 1년만에 펼쳐든 프레데릭 포사이드의 <어벤저>는 흥미만점의 ‘첩보 모험 활극’이었습니다.
이야기는 간단합니다. 90년대 중반 발발한 보스니아 내전에 미국 젊은이 하나가 봉사활동을 떠납니다. 그런데 그만 그 젊은이는 악명 높은 세르비아 민병대 두목에게 비참하게 살해됩니다. 공교롭게도 그 젊은이의 할아버지가 미국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굴지의 기업 총수입니다. 그는 정부의 힘을 빌어 악질 전범을 응징하려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것을 깨닫죠. 결국 ‘어벤저’라는 암호명으로 활동하는 무시무시한 프리랜서 해결사에게 이 일을 맡기고, ‘어벤저’는 대담하고 교묘한 솜씨로 사건을 해결합니다.
이런 이야기라면 할리우드 영화나 테러리즘에 맞서는 주인공이 활약하는 미드, 혹은 장르소설에서 이미 수차례 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새로울 것이 없는 뻔한 이야기가 프레데릭 포사이드라는 노장의 손을 거치자 ‘완전’ 새롭고 흥미로운 이야기로 탈바꿈합니다. 결국 ‘무엇을 이야기하느냐?’보다 ‘어떻게 이야기하느냐!’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작가는 웅변합니다.
<어벤저>가 단순한 재미를 넘어 장르소설 이상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은 작가의 세계관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탁월한 테크닉으로 독자들의 흥미를 사로잡습니다. 노련한 장르소설 작가답게 말이죠. 하지만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작가는 복수극을 둘러싼 복잡한 상황을 꼼꼼하게 추적하며 세상의 지배하고 구성하는 복잡한 힘의 논리에 대해 까발립니다.
복수극이 끝날 때 즈음 독자가 확인하는 것은 탁월한 해결사의 훌륭한 작전 수행이나 악당의 비참한 말로가 아닙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아군’과 ‘선(善)’에 대한 회의입니다. 비록 소설이지만 작가가 제시한 근거가 사실이라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절대악과 절대선의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습니다. 서로 이용해 먹기 위해 발버둥치고, 끊임없이 속고 속이는 아수라장인 셈이죠.
더욱 끔찍한 것은 이런 끔찍한 일들이 과거에도 수없이 일어났고, 앞으로도 반복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어벤저>에서 다룬 미국인 살인사건은 1990년대 중반 코소보에서 시작하여 2001년 9월 10일에 끝을 맺습니다. 바로 이 작품의 시작과 끝이죠. 작품을 위한 ‘작은 비극’은 마무리되었지만 이어서 일어나는 ‘엄청난 비극(2001년 9월 11일 뉴욕에서 일어난 바로 그 사건!)’이 이전투구는 계속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끔찍한 폭력과 증오의 뿌리가 어디에서 처음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폭력과 증오가 만들어낸 순환 고리 속에 무고한 피해자가 끊임없이 생겨날 것이라는 점입니다. 작품의 숨 가쁜 전개와 뛰어난 재미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어벤저’의 활약이 마냥 통쾌하고 시원하지 않았던 것이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