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레슬러 - The Wrestler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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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더 레슬러>는 <록키 발보아>(록키6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 작품 모두 늙는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권투와 레슬링은 육체적 노화를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좋은 소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 때 섹스 심벌이었던 미키 루크가 주인공 ‘랜디 더 램’을 맡은 것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완전히 망가진 미키 루크의 사생활과 주인공 랜디 더 램의 현재가 절묘하게 중첩되어 놀라운 흡입력을 발휘하고 있으니까요.

솔직히 말하면, <더 레슬러>는 늙는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 아닙니다. 한심하고 대책 없는 늙은 수컷에 대한 신랄한 까발림입니다. 그래서 순진한 남성 환타지에 충실한 <록키 발보아>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더 레슬러>의 주인공 랜디 더 램은 한때 잘나가던 프로레슬러였습니다. 하지만 세월은 그를 속절없이 퇴물로 만들어 버리죠. 영화는 전성기를 훌쩍 지난 노쇠한 레슬러 랜디의 초라한 뒷모습에서 시작합니다.
늙은 랜디의 삶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입니다. 초라한 링에 올라 몸을 던져 시합을 하지만 그의 손에 쥐어진 게임머니는 푼돈에 불과합니다. 현재 그의 거처는 낡은 트레일러인데, 그마저 밀린 방세 때문에 쫓겨날 판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심장마저 좋지 않아 더 이상 링에 서지 못하게 되자 램은 사랑하는 딸을 찾아갑니다. 하지만 딸은 아버지를 매몰차게 외면하죠. 이 모든 것은 그가 자초한 일입니다. 그러기에 누굴 탓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더욱 슬픕니다.

랜디의 막장 인생은 그가 최고였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처절합니다. 퇴물 레슬러의 삶을 영화는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죠. 프로레슬러로서 뿐만 아니라, 일상의 삶도 그에게는 혹독하기만 합니다. 결국 늙고 병든 수컷은 자신을 외면하는 세상을 뒤로 하고 다시 링에 오르기로 결심합니다. 링은 그를 기다려주고 알아주는 유일한 곳이죠.

극한 삶에 내몰린 주인공 랜디 더 램을 동정할지언정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는 자기가 선택한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은 전혀 배려하지 않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태도로 일관합니다. 다행히 링의 세계는 일종의 ‘쇼’이기에, 그가 한때 잘나가던 랜디 더 램이기에 그런 태도가 먹힙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더구나 퇴물이 된 지금은 두 말할 것도 없겠죠.

(동정할 가치 없는) 랜디의 삶은 마리사 토메이가 열연한 스트리퍼 캐시디로 인해 더욱 분명해집니다. 캐시디와 랜디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죠. 두 사람은 ‘몸’으로 먹고 삽니다. 캐시디가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무대 위에서 ‘쇼’를 한다는 점도 같죠. 게다가 이들의 상품적 가치는 이제 종착역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랜디의 처진 근육과 캐시디의 탄력 잃은 관능은 똑같이 서글퍼 보입니다. 
이들을 이어주는 또 다른 공통점은 부모라는 것입니다. 랜디는 딸을, 캐시디는 아들이 있죠. 그런데 여기서 랜디와 캐시디 사이에 차이가 있습니다. 랜디는 찰나적 쾌락을 거부하지 못해 딸과의 중요한 약속도 저버린 대책 없는 아버지입니다. 그는 늘 이런 식입니다. 감정적이고 찰나적이죠. 반면 캐시디는 아들을 위해 자신의 감정과 생활을 절제할 줄 아는 헌신적인 어머니죠.

두 사람의 차이는 이름에 관한 태도에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랜디는 실생활에서도 ‘랜디 더 램’이라는 링네임을 고집합니다. 이미 레슬러로서 은퇴한 마당에도 로빈 라몬스키라는 실제 이름을 거부하죠. 반면 캐시디는 ‘팸’으로 불리기를 원합니다. 아들을 돌보기 위해 스트리퍼 캐시디가 될 뿐이지, 그녀는 팸이라는 이름의 어머니임을 한시도 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들은 전혀 다른 동네에서 살고 있네요. 랜디는 링에서 ‘근육’을 과시하기 위해 마트에서 알바를 하지만, 캐시디는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관능’을 팝니다. 그러니까 랜디는 링에 오르기 위해 마지못해 현실을 받아드리지만, 캐시디는 현실을 위해 무대에서 춤을 춥니다. 이건 비단 랜디와 캐시디의 차이가 아니라 아버지와 어머니의 차이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어머니로서 이타적 삶을 사는 캐시디의 모습은 수컷 랜디의 어리석음을 더욱 뼈저리게 보여줍니다.

작품 곳곳에는 감독 대런 아르노프스키의 악취미가 심심치 않게 드러납니다. 여과 없이 보여주는 잔혹한 레슬링 경기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이후 가장 끔찍한 고어 장면이었습니다. 여기에 몸을 사리지 않는 미키 루크의 연기는 차라리 고문에 가까울 만큼 리얼했습니다. 정말이지 두 번 다시 보고 싶은 않은 장면이자 연기였습니다.

하긴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기는 작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랜디처럼 사는 불쌍한 수컷들에 대한 까발림은 이 영화 한 편으로 족합니다. 보는 내내 복잡한 감정이 뒤엉켜 불편했습니다. ‘한심한 놈, 넌 죽어도 싸!’, ‘가여운 인생’이라는 감정이 교차했으니까요. 거기에 끔찍함까지!! 이게 바로 영악한 감독의 노림수였겠지요.
한 가지 덧붙이면,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건스 앤 로지스의 ‘Sweet Child O'Mine’이 이렇게 가슴 아프게 들릴 줄은 몰랐습니다. 이 역시 ‘변태’ 감독의 노림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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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9-03-12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키 루크가 오스카를 못 받은 것이 좀 의외더군요.돌아온 탕아한테 미국 아카데미가 충분히 줄만 했었는데요.

lazydevil 2009-03-13 11:59   좋아요 0 | URL
ㅎㅎ그러게요. 카스피님 말처럼 미키 루크가 돌아온 탕아이긴 한데... 그간 필모가 위원님들의 입맛에 맞는 작품들은 아니었죠. 아카데미는 늘 이전 업적까지 둘러보는 경향이 있는거 같아요~~^^

쥬베이 2009-03-14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제 영화서평까지!! 역시 데블님ㅋㅋ
제가 볼때는 듀나님보다 더 잘쓰세요!!

lazydevil 2009-03-15 19:45   좋아요 0 | URL
푸하~~ 쥬베이님 오랜만에 오셔서 비행기까지용??ㅋㅋ 암튼 다시 뵈서 반갑습니다.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 까치글방 아르센 뤼팽 전집 1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까치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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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글방에서 출간한 아르센 뤼팽 전집은 국내 추리소설 시장에 가히 기념비적인 시리즈입니다. 많은 독자들에게 성실한 번역과 양질의 편집, 좋은 해설이 삼위일체를 이뤘다는 평가를 받았으니까요. 암튼 뒤늦게나마 이 의미 있는 시리즈를 읽게 되어 흐뭇합니다.

뤼팽 시리즈의 첫 작품인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을 읽고 처음 느낀 것은 작가 모리스 르블랑의 입담입니다. 뤼팽의 활약상을 사뿐사뿐 풀어내는 작가의 글솜씨는 그야말로 일품입니다. 주인공 뤼팽처럼 치고 빠지는 날렵한 필치로 사건을 전개시키는데 이야기의 규모가 커지는 장편에서 그 역량이 어떻게 발휘 될지 무척 궁금합니다.

제대로 처음 만난 뤼팽이라는 인물은 흔해빠진 표현 그대로 ‘신출귀몰’했습니다. 또 한 가지, 확실히 독자들의 쾌감과 동경심을 자극하는 인물입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뤼팽은 나쁜 놈이잖아요. 뻔뻔스러운 도둑이자 모사꾼이고, 음흉한 사기꾼입니다. 뭐 일지매나 홍길동처럼 의적도 아닌 주제에 흠모의 대상이 되는 것은 초인적인 재주와 일정한 선을 넘지 않는 품격 있는 직업정신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젠 고전이 되어버린 영화 <영웅본색>의 주인공처럼 어둠의 세계에 살지라도 강호의 도는 저버리지 않는 태도라고나 할까요? 정말이지 낭만적인 영웅상(?)입니다. 이런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뤼팽에 열광하지 않나 싶습니다. 게다가 갖은 거 없는 저로서는 뤼팽의 먹이감이 될 리도 없으니 흐뭇한 미소를 흘리며 뤼팽의 활약을 즐긴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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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베이 2009-03-15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꽤 유명한 작가같은데, 전 모르겠어요-_-
이게 신간 위주 책읽기의 문제점입니다ㅋㅋㅋ
lazydevil님 덕분에 또 하나 알아갑니다.
 
지푸라기 여자 동서 미스터리 북스 56
까뜨리느 아를레이 지음, 이가림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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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푸라기 여자>는 욕망과 음모, 배신, 파멸에 관한 통속소설입니다. 여기에 팜므 파탈도 등장합니다. 그러고 보니 이건 1940년대 할리우드에 등장한 장르물인 필름 누아르의 키워드군요. 필름 누아르라는 장르가 1930,40년대에 유행하던 통속소설에서 비롯된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하드보일드 탐정소설이나 범죄소설이 바로 그것인데, 할리우드 필름 누아르의 효시로 불리는 존 휴스턴의 <몰타의 매>는 그 유명한 대실 해밋의 <몰타의 매>를 충실히 영화로 옮겨놓은 작품입니다.

재미있는 건 <지푸라기 여자>에는 팜므 파탈이 아닌 ‘옴므 파탈(?)’이 등장한다는 겁니다. 주인공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것이 바로 남자라는 거죠.

그런데 <지푸라기 여자>는 보다 더 ‘통속적’인 느낌입니다. 여기서 ‘통속적’이라는 의미는 뭐랄까요... 흔히 말하는 ‘드라마’같다는 의미입니다.

작가인 까뜨리느 아를레이는 음모, 신분상승, 배신, 파멸의 과정을 밟아가는 주인공 히르데갈데의 모습을 하드보일드 소설처럼 비정하게 그리지 않습니다. 완전범죄의 과정을 치밀하게 추적하는 추리소설도 아닙니다. 성공을 손에 넣으려는 순간 나락을 떨어지고 마는 어리석은 여자의 이야기를 다분히 멜로드라마 풍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통속적’으로 느껴지고, 그래서 재미있습니다.

뒤에 실린 작가의 또 다른 작품인 <눈에는 눈>도 무척이나 통속적이고 재미있습니다. 이 작품에는 세 명의 주요 인물이 등장합니다. 악녀인 아가트, 악녀를 사랑한 남자 마르셀, 마르셀의 누이 마르트가 그들입니다. 이들이 각각 살인극, 멜로드라마, 복수극의 주인공입니다.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악녀인 아가트 때문에 마르셀이 죽자 누나인 마르트가 복수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각각의 캐릭터가 극단적으로 충돌하며 의외의 흥미를 자아냅니다. 읽고 있는 작품이 살인극인지, 멜로드라마인지, 복수극인지 헛갈릴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쫓아가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통속적’이니까요. 덕분에 독자들은 전혀 다른 분위기의 상황을 기민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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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범 3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30
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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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꾼으로서 미야베 미유키는 단연 최고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녀가 써낸 작품들이 지닌 엄청난 대중성이 이를 증명해주지요. 그녀의 최고 역작으로 꼽히는 <모방범>도 예외는 아닙니다. <모방범>은 대단한 흡입력으로 독자를 작품에 빠져들게 합니다. 이 작품을 읽는데 엄청난 분량의 페이지 수는 전혀 문제가 되질 않죠. 문제는 책을 읽고 난 다음입니다. 무려 세 권으로 출간된 두툼한 분량의 이 작품이 끝나갈 무렵 마음 한 구석에 스멀거리던 무엇이 고개를 들기 시작합니다...... 그건 다름 아닌 허망함입니다.

장르소설을 읽는데 무얼 더 바랄까요? 재미있으면 그만 아닌가요? 그리고 이만한 작품을 만나기가 어디 쉬운가요? 그런데 <모방범>은 그 어마어마한 분량으로 인해 다른 작품보다 두배의 즐거움을 주지만, 동시에 두 배의 허탈함이 느껴집니다. 중독성 있는 인기 드라마의 최종회를 보고 난 느낌과 비슷한 허탈함 말이에요.

재미와 완성도와는 전혀 별개로, 장르소설을 읽을 때 종종 느껴지는 허탈감은 쏟아 부은 시간과 정력에 비례합니다. 마치 미드 <24>의 잭 바우어같이 삼일 밤 삼일 낮을 고스란히 한 작품을 읽는데 쏟아 붓는 것은 정말이지 어리석은 짓입니다. 냉정하게 말해 장르소설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말초적인 재미가 고작이고 그것을 위해 금쪽같은 시간과 체력을 ‘몰빵’하는 것은 순전히 밑지는 거래입니다. 그래서 인지 이런 ‘대작형’ 장르소설을 읽고 나면 죄책감과 허망함이 동시에 모락모락 피어오릅니다. ‘나는 시간을 낭비했어...... 난 시간을 낭비했어......’ 효율성과 생산성을 최고의 미덕으로 생각하는 현대사회의 낙오자가 된 기분이죠.

때론 재미 이상의 감흥을 주는 경이로운 작품을 만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장르소설에서 재미 이상을 기대하는 것은 순전히 과욕입니다. 그게 목적이라면 미야베 미유키가 아니라 미시마 유키오를 택해야겠지요.

이런 말도 안 되는 개인적인 이유로 장르소설은 자고로 짧아야 한다고 우기는 편입니다. 장르소설이 주는 즐거움은 도무지 포기할 수 없고, 죄책감과 허망함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죠. 뜬금없이 어린 시절 부르던 노래가 생각나네요. ‘...사과는 맛있어, 맛있는 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긴 것은 기차~’

미야베 미유키는 이 작품을 쓰면서 과욕을 부린 것이 분명합니다. 다행히 결과가 좋았기에 큰 흠집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과욕의 결과가 어마어마한 부피가 아닌 촘촘한 밀도로 드러났으면 독자로서 더 행복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일단 책값 지출도 줄일 수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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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9-03-05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야베 미유키의 모방범이 재미있읍니다만 님 말씀처럼 좀 긴것은 사실이에요.그래도 별 무리 쉬이 읽혀셔 다행이지 예를들어 도구라 마구라 같은 책이었으면 아마 읽다가 책을 덮었을 겁니다.ㅎㅎㅎ

lazydevil 2009-03-06 11:45   좋아요 0 | URL
악명 높은 도구라 마구라~~~ 한번 도전해보고 싶네요. 소문의 실체가 무척 궁금하거든요~~~^^.

카스피 2009-03-06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일본의 3대 괴작 흑사관 살인사건도 읽었지만 도구라 마구라 이건 뭐 상상을 불허합니다.ㅜ.ㅜ
 
지하인간 동서 미스터리 북스 148
로스 맥도날드 지음, 강영길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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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미스테리 문고에서 출간된 <지하인간>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한심한 번역본입니다. 그럼에도 성실하기 그지없는 탐정인 루 아처를 좋아하는 독자는 묵묵히 참아내며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가치가 있는 작품이니까요. <지하인간>에는 작가 로스 맥도널드의 알싸한 매력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지하인간>은 전형적인 로스 맥도널드 풍의 작품입니다.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루 아처의 활약은 대단합니다. 의뢰인을 보호하고, 살인사건의 용의자를 추적하고, 사건을 둘러싼 진실을 하나하나 밝혀냅니다. 그리고 베일을 벗은 진실은 언제나 불행이란 녀석과 쌍둥이처럼 나타나고, 그것을 사주하는 것은 늘 그렇듯 인간의 어리석은 욕망입니다.

한심한 번역으로 손해를 본 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로스 맥도널드의 문체입니다. 아시다시피 루 아처 시리즈는 1인칭으로 진행됩니다. 주인공 루 아처의 구시렁거리는 넋두리는 이 시리즈를 읽는 큰 즐거움 중 하나죠. 그런데 ‘찌질한’ 번역은 이런 즐거움을 뻔뻔스럽게도 싹둑 잘라내 버렸습니다.(이런 상황, 그 어떤 푸대접과 몰상식도 이해하고 참아내는 장르소설 팬 나부랭이지만 인내의 한계가 느껴집니다.)

매력적인 문체를 제대로 즐긴 것은 <위철리 여자>입니다. 작가의 위트 넘치는 상황묘사와 루 아처의 적당히 빈정거리는 어투가 잘 드러나더군요. 그런데 <소름>과 <지하인간>에서는 이런 즐거움을 미루어 짐작만 할 뿐입니다. 문체를 즐길 여력은 고사하고 문장의 뜻을 파악하기도 버거울 정도였으니까요. 보아하니 <소름>과 <지하인간> 모두 같은 역자가 번역했더군요. 편집자도 같았을까요? 아무튼 <지하인간>의 번역이 조금 더 끔찍한 걸로 기억합니다.

‘진실’이 주는 충격의 무게감만 놓고 보면 <소름>이 가장 둔중합니다. <위철리 여자>의 경우 그 ‘진실’보다 종잡을 수 없는 사건의 변화추이가 매우 흥미롭습니다. 반면 <지하인간>은 앞의 두 작품과 달리 좀더 정서적으로 독자를 밀어붙이는 힘이 있는 작품입니다. 솔직히 이야기 전개과정은 지루하기 짝이 없습니다. 루 아처가 활약하는 2박3일 동안 너무 많은 인물이 얼굴을 비죽비죽 내미는 통에 중반 이후부터는 누가 누구의 아내이며, 누구의 아버지인지 헛갈릴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야기의 말미에 다다르면 대단한 힘을 발휘하며 독자를 사로잡습니다. 아니 힘을 발휘하는 정도가 아니라 정서의 폭발로 이어집니다. 이야기 말미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불행이거든요.

<지하인간>의 불행은 로스 맥도널드의 단골 소재인 ‘해체된 가정’ 혹은 ‘부모와 자식간의 불화’에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그 어느 때보다 강도가 세게 느껴지는 것은 그 불행이 미치는 영향이 총체적이기 때문입니다. 복잡하게 얽힌 등장인물 중 누구 하나도 불행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모두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피해자들이죠. 루 아처마저도 인물들의 불행을 공감하며 전에 없이 억제할 수 없는 감정을 드러냅니다. 본인도 비슷한 상처가 있다는 암시가 곳곳에 드러나거든요. 이 총체적 불행이 독자까지 짓누르는 통에 책을 읽고 난 후 잿빛 여운이 꽤 오랫동안 지속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작품을 거듭해 읽을수록 로스 맥도널드는 대단한 작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의 작품은 대중소설의 범주에 머물고 있지만 독특한 문학적 향기가 느껴지거든요. 그리고 그가 작품 속에 그려낸 세상은 결코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가 아닙니다. 장르소설의 일회성 유희에만 집착한 허구의 세계는 더욱 아닙니다. 그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생생하게 현실을 그려내고 있기에 놀라울 뿐입니다. 대책 없는 싸구려 소설들이 판치는 대중소설계에서, 마치 늪에서 피어난 연꽃 같다고나 할까요? 로스 맥도널드의 더 많은 작품이 양질의 번역으로 출간되기를 바랍니다.

참고로 원제 ‘The Underground Man’을 번역한 제목 ‘지하인간’은 내용상 ‘땅 속의 남자’가 더 적절하지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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