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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범 3 ㅣ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30
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야기꾼으로서 미야베 미유키는 단연 최고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녀가 써낸 작품들이 지닌 엄청난 대중성이 이를 증명해주지요. 그녀의 최고 역작으로 꼽히는 <모방범>도 예외는 아닙니다. <모방범>은 대단한 흡입력으로 독자를 작품에 빠져들게 합니다. 이 작품을 읽는데 엄청난 분량의 페이지 수는 전혀 문제가 되질 않죠. 문제는 책을 읽고 난 다음입니다. 무려 세 권으로 출간된 두툼한 분량의 이 작품이 끝나갈 무렵 마음 한 구석에 스멀거리던 무엇이 고개를 들기 시작합니다...... 그건 다름 아닌 허망함입니다.
장르소설을 읽는데 무얼 더 바랄까요? 재미있으면 그만 아닌가요? 그리고 이만한 작품을 만나기가 어디 쉬운가요? 그런데 <모방범>은 그 어마어마한 분량으로 인해 다른 작품보다 두배의 즐거움을 주지만, 동시에 두 배의 허탈함이 느껴집니다. 중독성 있는 인기 드라마의 최종회를 보고 난 느낌과 비슷한 허탈함 말이에요.
재미와 완성도와는 전혀 별개로, 장르소설을 읽을 때 종종 느껴지는 허탈감은 쏟아 부은 시간과 정력에 비례합니다. 마치 미드 <24>의 잭 바우어같이 삼일 밤 삼일 낮을 고스란히 한 작품을 읽는데 쏟아 붓는 것은 정말이지 어리석은 짓입니다. 냉정하게 말해 장르소설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말초적인 재미가 고작이고 그것을 위해 금쪽같은 시간과 체력을 ‘몰빵’하는 것은 순전히 밑지는 거래입니다. 그래서 인지 이런 ‘대작형’ 장르소설을 읽고 나면 죄책감과 허망함이 동시에 모락모락 피어오릅니다. ‘나는 시간을 낭비했어...... 난 시간을 낭비했어......’ 효율성과 생산성을 최고의 미덕으로 생각하는 현대사회의 낙오자가 된 기분이죠.
때론 재미 이상의 감흥을 주는 경이로운 작품을 만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장르소설에서 재미 이상을 기대하는 것은 순전히 과욕입니다. 그게 목적이라면 미야베 미유키가 아니라 미시마 유키오를 택해야겠지요.
이런 말도 안 되는 개인적인 이유로 장르소설은 자고로 짧아야 한다고 우기는 편입니다. 장르소설이 주는 즐거움은 도무지 포기할 수 없고, 죄책감과 허망함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죠. 뜬금없이 어린 시절 부르던 노래가 생각나네요. ‘...사과는 맛있어, 맛있는 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긴 것은 기차~’
미야베 미유키는 이 작품을 쓰면서 과욕을 부린 것이 분명합니다. 다행히 결과가 좋았기에 큰 흠집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과욕의 결과가 어마어마한 부피가 아닌 촘촘한 밀도로 드러났으면 독자로서 더 행복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일단 책값 지출도 줄일 수 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