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를 보았다 - I Saw The Devil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영화에 대한 관심이 예전같지 않은 터라 신작에 대한 정보흡수가 거의 백지상태입니다. 누가 연출했고, 누가 출연했는지 정도만 확인하고 영화를 봅니다. 영화평은 고사하고 종종 어떤 내용인지도 모른 채 상영관에 들어갈 때도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관심을 줄었지만 영화를 보는 행위자체는 여전히 즐거운가 봅니다.
<악마를 보았다>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 김지운이 연출했고, 이병헌과 최민식이 출연한다는 기본정보에, 사이코패스를 소재로 한 복수극이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습니다. 아, 그리고, 작품에 대한 평가가 서로 갈린다고 이야기를 언뜻 들은 정도였습니다. 아무튼 오랜만에 나타난 최민식이 반가웠고, 이병헌이라는 댄디한 배우와 어떻게 조화를 이룰지 궁금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왜 이 영화의 평가가 갈리는지 알겠더군요. 영화평이나 관련 기사 하나 제대로 읽지 않았지만 어떤 말들이 나왔는지 알겠더군요. 정말 분명한 영화였습니다. 모든 면에서요.

김지운 감독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그가 연출한 영화들은 한결같이 가짜 같았어요. 늘 겉으로는 그럴 싸 해보이지만 알맹이가 없었습니다. 데뷔작 <조용한 가족>부터 <장화홍련>도 그렇고, <달콤한 인생>이나 <놈.놈.놈.>까지 모두 그랬습니다. 그나마 <놈.놈.놈.>이 가장 괜찮았습니다. 역시 알맹이는 없지만 솔직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악마를 보았다>는 이전과 달랐습니다. 정말 분명히 속이 찬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를 만약 싫어하거나, 악평을 늘어놓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럴 만도 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이 영화는 몹시 불쾌한 영화거든요. 하지만 이 영화를 욕하는 사람일지라도 이것만은 인정해야할 겁니다. <악마를 보았다>는 지금까지 김지운이 만든 작품 중 최고라는 것. 그러니까 좋은 영화는 아닐 지언정 꽤 괜찮은 작품일 수는 있다는 말입니다.
 

<악마를 보았다>가 불쾌한 이유는 최민식이 주인공이기 때문일 겁니다. 이 영화는 사이코패스인 연쇄살인마의 동선을 따라 이야기 진행됩니다. 그러니까 복수하는 남자 이병헌의 이야기가 아니라 복수를 당하는 살인마 최민식의 이야기입니다. 그 결과 관객들은 살인마의 만행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봐야만 합니다. 피가 튀고, 살점이 찢기고, 뼈가 부서지고, 사지가 절단되는 순간들을 살인마와 함께 동참해야합니다. 정의(?)를 위한 복수는 나중 이야기입니다. 피해자에게 공권력은 언제나 저 너머에 있듯, 이 영화에서 복수의 카타르시스는 멀기만 합니다. 이는 복수하는 남자 이병헌에게도 마찬가지죠.
불쾌하면서도, 흥미로운 것. 이 영화에서 살인마 최민식이 피해여성들을 사냥하는 동안 관객들은 긴장감을 느끼기보다 감당하기 힘든 무력감에 시달린다는 점입니다. 김지운 감독은 관객들이 살인마 최민식의 숨소리 하나, 땀방울 하나 놓치지 말라고 ‘강요’하고 있습니다. 카메라를 향해 쏘아보는 그 섬뜩한 눈빛은 관객들을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상황의 무기력한 방관자 혹은 잠정적 피해자로 만드는 듯합니다.
지금까지 본 한국영화에서 이토록 살인마의 모습을 한계까지 밀어붙인 영화는 보지 못했습니다. 감독의 용기가 가상할 지경입니다. 살인마 최민식의 마지막 질주를 때로는 거칠고 투박하게, 때로는 산뜻한 기교로 동행하고 있습니다. 그와 함께 해야만 하는 2시간 20분은 너무나 힘겹고 불쾌합니다. 그래서 전 이 영화를 좋아할 수 없습니다.

영화는 그야말로 냉혹하고 잔인무도하며 끔찍합니다. 그것이 지금까지 김지운 영화와는 달리 지극히 사실적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장화홍련>이나 <달콤한 인생>, <놈.놈.놈.>같은 환타지의 세계가 아니예요. 그런 의미에서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전원주택 에피소드는 눈에 거슬립니다. 이전 김지운 영화 같은 무대장치와 상황들이 작품의 일관성을 저해합니다. 이 시퀀스는 <호스텔>류의 슬래셔 무비에나 어울리는 이미지와 개그들이더군요.
전혀 다른 개성의 두 남자 이병헌과 최민식의 조화는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그들의 상승효과는 초반보다 중반, 중반보다 후반부에 더욱 힘을 발휘합니다. 어쨌거나 두 남자는 좋은 배우임에 분명합니다. 그럼 두 사람의 대결은? 승리자는 최민식이 될 수밖에 없어요. 영화 속에서나 영화 밖에서나 둘 다 말입니다. 복수극이 아닌 살인마의 이야기이니 그럴 수밖에요.
<악마를 보았다>는 분명히 김지운 감독의 또 다른 모습일 겁니다. <달콤한 인생>의 이병헌처럼 댄디한 스타일리스트이면서 잔혹극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컬트 마니아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이 영화를 보기전 혹시나 하는 생각을 했는데, 틀리지 않았습니다. 김지운 감독이 <악마를 보았다>같은 카드를 들고 나온 것은 아주 뜻밖의 일은 아닙니다. 아주 오래전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회고전에서 김지운 감독을 본적 기억이 있어요. 영화를 보기 위해 며칠을 출몰하더군요. 구로사와 기요시의 초창기 영화와 <악마를 보았다>가 비슷한 동네에 있다는 것은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벌써 칠팔 년전 이야기니까 김지운 감독은 예전부터 하드보일드한 컬트 잔혹극을 꿈꾸고 있었을 겁니다.



김지운 감독의 새로운 시도를 환영합니다. 개인적으로 그간 보여준 댄디한 스타일이 별로였거든요. <악마를 보았다>를 다시 보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지만, 이전 작품들 보다 분명히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못마땅한 것이 있습니다. 이 영화의 제작비는 무려 70억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영화의 이야기 규모는 70억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마더>가 그랬고, <박쥐>가 그랬던 것처럼요. 이 불쾌한 영화를 욕하는 사람의 일부는 어처구니없는 규모의 제작비 때문에 그랬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제경우 <악마를 보았다>를 17억, 아니 27억에 찍었다면, 김지운 감독을 좋아했을 지도, 아니 존경했을 지도 모릅니다. 영화의 때깔이 덜 세련되었을 지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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