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마지막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저녁에 서둘러 영화관을 찾았다. 그날 상영작을 너무나 보고 싶어서 개뻥을 치고 업무용 약속도 조기 땡땡이쳤다. 그날 정말 추웠다. 초봄에 접어든 지금 그렇게 추웠던 날이 언제 있었냐 싶지만, 정말 추웠다.

 

초저녁 허기를 달랠 겸 오렌지맛 환타와 살구파이 하나를 덜렁덜렁 들고 극장로비를 배회하던 중 한분과 마주쳤다. 10년전 같은 사무실에서 일했던 분이다. 부서도 다르고, 일도 다르고, 나이 차이도 꽤 있던 터라 가까이 지낸 사이는 아니었다. 다만 항상 훌륭한 성품을 얼굴로 웅변하시던 분이라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다가가 인사를 했고, 다행히 알아보셨다. 상영시간이 임박했기에 짧게 안부만 묻고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곧 영화가 시작했다.

 

영화 상영이 끝나고 그분과 단출한 식사를 했다. 우동과 맥주 한잔씩. 영화 이야기를 조금 나누고 서로 근황을 물었다. 그리 가까운 사이도 아닌데 편하게 응대해주셨다. 그래서인지 이런 말이 툭 튀어나오고 말았다.
“요즘도 글을 쓰세요?”
시인에게 이런 무례한 질문을 하다니! 부끄럽다.

 

겨울의 첫걸음
                         채충석

 

남들은 4년이면 마치는 것을
나는 5학년까지 하게 되었다.
그것도 지방 사립 대학을
증서 없는 졸업식 날 학교 떠나는
친구들이 모아 주는 30만원으로
나머지 1학점의 등록을 마치니
노천 강당의 개나리 넝쿨은
올들어 두 번째 피어났다.
낯선 이름과 언어가 붐비는
수요일의 한 시간을 위해
두시간 거리의 직행 버스로 등교하면
지독하게 피곤하였다. 그 다음 날도
이렇게 한 주간이 쉬 지났다.
대학원에 다니냐는 후배들은
모란이 피자 모두 아스팔트 위로
파도처럼 밀려나고, 나만이
텅 빈 풀밭에 오그리고 앉아
흩어진 과우들에게 엽서를 쓰거나
도시의 변두리가 돼버린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였다.
동네 어른들이 입을 모아 흉년이 들었다고 하는 동안
코스모스 피는 가을은 슬쩍 찾아들고
5학년 1학기도 한달을 더 끌다
끝났다, 자, 가야지 내일은
경제학사 학위를 받으려
성이 최씨로 바뀐 무거운 앨범도 찾고
홀로 교문을 나서는 나를 만나러
서랍만 달린 겨울을 만나러

 

몇 번을 거듭해 읽은 ‘겨울의 첫걸음’은 내 가슴을 아련하게 만든다. 젊은 날의 시인이 있고, 일상이 있고, 세상이 있고, 세월이 담겨있다. 서른 해의 시간을 뚫고 공감할 수 있는 이 시는 시인의 처녀작이다.(시인은 ‘겨울의 첫걸음’으로 81년에 등단하였다.) 그가 이 시를 내놓지 한참이 지난 후 나는 그를 알게 되었다. 그 당시 시인은 시를 쓰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아련한 시로 등단했다는 것도 모른 채 멀어졌다. 다시 세월이 흘렀고, 우연히 만나 그에게 나는 싸가지 없는 질문을 냅다 싸질렀다. “요즘 글을 쓰세요?” 더 한심한 건 내가 무례한 짓을 저질렀다는 걸 며칠이 지나서 깨달았다.(이눔아, 백일간 묵언수행이다!)

 

그런데 시인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요즘 들어 다시 쓰려고 해요.”
그러더니 이런 이야기를 했다. 지난해 일본에서 68살의 할머니가 발표한 시집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할머니가 발표한 첫 시집이었다. 우연히 그 시집을 읽었고 느낀 바가 있었다. 68살의 나이에도 시작을 하는데. 시작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뭐 이런...
그날 시인과 함께 본 영화는 신도 가네토라는 감독의 <오후의 유언장>이라는 영화였다. 감독이 83세에 찍은 이 영화는 늙음과 죽음에 대해 성찰한 작품이다. 시인은 신도 감독의 작품이 무척이나 좋았다고 말했다.(신도 감독은 지금도 살아있고(무려 100살!), 지난해 <한 장의 엽서>라는 작품으로 공식 은퇴선언을 했다. 99세에 찍은 <한 장의 엽서> 역시 삶에 대한 노련한 성찰이 담긴 무시무시한 작품이다.)

 

집에 돌아와 시인의 첫시를 읽고 있자니 쫌 묘했다. 시인의 첫시와 엊그제 모습이 오버랩 됐고, 나의 어제와 오늘이 뒤를 따랐다. 침대 위에서 두터운 이불을 돌돌 감고 나는 어렴풋이 내일도 떠올려 보려고 노력했다.(나에게 내일은 너무나 두려운 것이기에 노력하지 않으면 결코 떠올릴 수 없다.) 그리고 그 끔찍한 몰골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살아있는 시체의 날들이여! 꺄아아악~.

 

한해가 지나간 것처럼 새 계절이 왔다. 곳곳에 낯선 기운이 진동하기 시작한다. 꽁꽁 얼어버린 한강을 보고 혼자 낄낄거리며 흐뭇해하던 겨울은 이제 끝장났다! 떠밀리듯 ‘서랍만 달린 겨울’을 뒤로 하고 첫걸음을 내딛어야할 때가 어김없이 찾아온 것이다. 그래 또 삼월이다. 지금이라도 입 다물고 시작해야 한다, 최소한 자발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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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0 11: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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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1 12: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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